2017년 5월호

정재민의 리·걸·에·세·이

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입력2017-05-11 15: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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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재판에서 재판장이 피고인 신원을 확인하는 ‘인정신문’이 끝나면 검사의 ‘모두(冒頭)진술’이 시작된다. 모두진술은 검사가 공소장을 낭독하는 절차다. 가령 이렇게 말하는 식이다.

    “피고인은 10여 명의 행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음주측정을 요구하는 경찰관 XXX에게, ‘어라, 이 놈 봐라, 원숭이 닮았네. 어이, 원숭이! 원숭이가 왜 사람을 단속하고 XX이야. 원숭이가 경찰이면 나는 대통령이다. 너 엉덩이 빨갛지? 집에 가서 엉덩이에 파란 매니큐어 칠하면서 엄마한테서 바나나 우유나 빨아먹어 이 원숭이 XX야’라고 말하여 공연히 경찰관 XXX를 모욕하였다는 것입니다.”

    공소장은 검사가 피고인의 공소사실, 죄명, 적용 법조를 적은 문서다. 다른 공문서처럼 기관의 장이 날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검사가 자기 이름을 서명한다. 분량은 두서너 장이 대부분이지만 수십, 수백 장에 달할 때도 적지 않다.

    공소장은 검경의 수사를 마감하는 자물쇠이자 형사재판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민사재판이 원고의 소장으로 시작되듯 형사재판은 검사의 공소장으로 시작된다. 형사재판은 결국 공소장의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공소장이 옳으면 유죄이고 그르면 무죄인 것이다.





    공소장의 문학성

    선입관 방지를 위해서 재판 전 판사는 다른 증거는 보지 못하고 오직 공소장만 볼 수 있다. 판사들은 공소장을 시험공부하듯이 꼼꼼히 읽는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거나 별을 그리고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으면 관련 판결례나 논문을 찾아본다. 성실한 재판 준비다. 그러나 나는 되도록이면 공소장을 미리 읽지 않았다.

    공소장을 읽고 나면 아무래도 선입관이 생긴다. 피고인을 처음 만날 때에도 속으로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구나!’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의 생김, 눈빛, 언행을 그 범죄에 국한시켜 바라보게 된다. 반대로 공소장을 읽지 않고 피고인을 만나면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다음 공소장을 읽으면 ‘저런 사람에게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게 된다.

    공소장의 문장은 어느 하나 허투루 실린 것이 없다. 욕설조차 의미심장하다. 피고인이 퍼부은 욕설은 범행 현장의 분위기, 피고인과 피해자의 친밀도, 피고인의 성격 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만 검사가 엄숙한 법정에서 마이크로 또박또박 책을 읽듯이 “어라, 이놈 봐라, 원숭이 닮았네. 원숭이가 왜 사람을 단속하고 XX이야. 너 엉덩이 빨갛지?…”라고 낭독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밀려드는 어색함을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욕설에 적절히 감정을 실어서 실감 나게 낭독하는 검사도 있는데 그 역시 어색하다.)

    공소장의 문장은 투박하고 직설적이다. 피천득 선생은 ‘수필’이라는 글에서 수필을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요,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라 했다. 그에 빗대자면 공소장은 칼이요, 호랑이요, 투박하고 비정한 검투사요, 그 검투사가 칼춤을 추는 원형경기장으로 난 거칠고 험난한 길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공소장(판결문도 마찬가지)에는 만만치 않은 문학적 가치가 있다. 공소장이 문학작품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예술이 아니라고 해서 예술성이 깃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는 문학성을 글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인문학적 개성이라고 믿는다. 잘 내린 커피의 향기처럼 그윽한 에너지로 문학성을 쟁취하는 글이 있는 것처럼 거칠고 강렬한 에너지로 문학성을 품는 글도 있다.
    기소권의 탄생

    공소장은 후자다. 구석구석 힘이 넘친다. 문장 자체가 압축적이고 정제돼 있다. 서사도 강력하다. 무엇보다 허구가 아닌 진실이라는 후광이 압도적인 힘을 싣는다. 그렇기에 단어 하나하나가 차돌처럼 묵직하다. 각각의 단어 밑으로 연꽃 아래 연근(蓮根)처럼 증거와 법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망’ ‘편취’ ‘실행의 착수’ ‘추행’과 같은 단어들은 오랜 세월 국내외 학설과 판례로 다듬어진 전문용어다.

    헤밍웨이는 좋은 작품을 빙산의 일각만 드러내고 그 아래 거대한 빙산을 숨겨놓은 것이라 했는데 숨겨놓은 빙산의 크기는 공소장도 만만치 않다. 문장과 문장 밑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고구마줄기처럼 뒤엉켜 있다.

    공소(公訴)는 공익을 위해 공적으로 제기하는 소송이라는 뜻이다. 이해관계 당사자가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제기하는 사소(私訴)가 아니라는 뜻이다. 공소를 제기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기소권 또는 소추권이라 한다.

    기소는 삼권분립에 따라 행정부의 형벌권과 사법부의 재판권이 분리되면서 비로소 탄생한 개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이 누군가가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처벌하면 그만이었다. 조선시대 원님도 마찬가지였다. 원님은 지금으로 치면 판사, 검사, 경찰서장, 교도소장, 지역구 국회의원, 시장이 한 몸인 셈이었다.

    사법부가 분리되지 않은 시스템에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사상가인 몽테스키외는 1748년 출간한 ‘법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재판권이 입법권에 결합되면 자의적 권력이 탄생하고 재판권이 집행권에 결합되면 압제적 권력이 탄생한다고 지적하면서 입법, 행정, 사법을 분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영향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사법부의 독립도 이루어졌다. 이제 행정부는 범인을 처벌하기 위해 사법부에 형사소송을 제기해야 했는데 바로 여기서 기소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에 따라 기소권을 행사할 사람도 필요해졌다. 마침 14세기부터 왕의 명을 받아 영주나 재력가를 찾아가서 벌금을 징수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일을 하던 ‘왕의 대관(代官)’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공화국이 이들에게 소추권을 주면서 검사(檢事)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검사제도는 독일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유입됐다. 형사소송법(제246조)은 ‘국가소추주의’라는 제목 아래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소권을 오로지 검사에게만 부여했다는 의미로 ‘기소독점주의’라는 말도 쓴다.


    불기소의 위력

    한편 영미법계 국가에서는 기소 여부를 시민들의 대표로 구성된 대배심(Grand Jury)이 결정한다. 얼핏 보면 대배심이 민주주의에 더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래만 따지자면 오히려 왕권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12세기경 영국 왕 헨리2세는 왕의 재판소 관할권을 영주들의 관할 지역까지 확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대배심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치안담당관을 파견했다. 파견된 치안담당관은 대배심으로부터 그사이 발생한 사건들을 보고받고 선별적으로 재판에 회부했다. 이러한 대배심 제도가 13세기 왕권을 제한하기 위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에 규정되면서 영미법계 전통으로 확립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소권의 위력은 불기소권에 있다. 죄 없는 사람을 기소하더라도 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난다. 그러나 죄 있는 사람을 불기소하면 판사가 재판을 할 수 없다. 죄지은 사람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은 본전치기이므로 억울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죄를 지은 다른 사람이 처벌받지 않으면 더 이상 본전치기가 아니라 손해를 본 셈이 된다. 불공평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불의(不義)다. 정의의 본질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천 명을 처벌하더라도 한 명을 불공평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천 명이 억울해진다. 정의가 파괴되는 것이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면서 상시 서로 비교하고 살아가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공평이 쉽게 식별되고 크게 문제가 되며 사람에게 깊은 내상을 입힌다. 그렇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불공평을 초래할 수 있는 권력일수록 위세를 떨친다.

    내 고향의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종합병원에는 류머티즘 ‘명의’가 있었다. 그가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은 비결은 사기였다. 노화로 인한 퇴행성관절염으로 팔다리가 아픈 노인에게 “류머티즘이다, 류머티즘은 암보다 무섭다, (손발이 뒤틀어진 류머티즘 환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나중에 이렇게 된다”라며 거짓 진단을 내린다. 그러곤 겁먹은 노인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다정한 표정과 말투로 “걱정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내가 주는 약만 꾸준히 먹으면 악화되지는 않는다”며 특정 제약회사의 류머티즘 약을 장기간 처방해왔다. 그 대가로 명의는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챙겨 병원으로부터는 동료의사 연봉의 두 배를 받았다.

    나의 부모님도 그 의사로부터 거짓 류머티즘 진단을 받고 7년 동안 항암제와 동일한 성분인 독한 류머티즘 약을 먹었다. 약이 독한 만큼 몸과 정신에 부작용이 심각했다. 이 사건이 지역 방송국에 보도되자 같은 피해를 보았다고 제보한 사람이 하루 만에 80명을 넘었다. 부모님과 내 앞에서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발 신고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던 의사와 병원은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범행을 일체 부인하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법복 안쪽에 새긴 표어

    수사 결과 경찰과 수사검사는 기소의견을 냈다. 법원도 민사판결에서 의사의 사기 진료를 인정했다. 그러나 부장검사는 “피의자가 환자들에게 류머티즘이라고 거짓말을 한 사실은 인정되나 그런 행위는 피의자가 의사로서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한 것이므로 재물죄인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사 생활 동안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결론을 손수 작성해서 무혐의결정을 내렸다. ‘명의’의 처가에 검찰간부가 있었다.

    뜻밖의 무혐의결정을 받고 보니 황망함, 분함, 좌절감, 무력감 등 온갖 악감정이 밀려들어 지옥에라도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따귀라도 맞은 듯한 모멸감도 들었다. 내가 믿고 사랑한 이 나라가 나를 초등학생 상대 불량식품 수준의 조악한 논리로 우롱하려 들었다고 느껴져서다.

    수사기관에 지칠 정도로 장시간 협조한 피해자들은 그 결정에 류머티즘 진단보다 더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의사와 병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업을 계속했고(심지어 지금까지도) 검찰간부는 영전했기에 이 나라에 더 정이 떨어진다고 했다. 판사인 나조차 배신감과 모멸감에 몸서리가 쳐지는데 일반 사람들은 이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큰 불신과 적의를 품을까. 검찰의 힘은 죄 지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기소권보다 죄 있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불기소권에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내 직업에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나 자신이 이처럼 불완전한 사법 시스템의 일원이라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내 부모도 지키지 못하는 놈이 무슨 남의 인권을 지키는 일을 하겠느냐는 자괴감도 들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퇴근하면 바닷가 카페에서 밤바다를 흘깃거리며 글을 썼다. 처음 몇 달은 벙어리가 하소연하려 용쓰듯 글이 써지지 않았다. 한참 후 문장이 제법 쌓일 때 즈음 돼서야 격랑 이는 거친 바다 같던 마음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 소설 ‘보헤미안랩소디’는 바로 그 문장들을 모아 그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고 나니 내가 하던 일이 다시 보였다. 나는 그동안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 당사자를 이런 지옥으로 몰아넣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그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오판의 위험성을 머리로만 가늠하던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었다는 것 외에는. 그 사건 이후 재판을 대하는 자세와 관점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운전하다 가족을 잃어본 사람이 다시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법복 안쪽 가슴에 보이지 않는 세로줄 표어가 새겨졌다. “음식장사는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 되고, 법조인은 정의로 장난치면 안 된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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