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호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정절은 있으나 孝는 없다 | 법은 멀고 정치는 가깝다

영조의 화순옹주 정려(旌閭) 거부 | 당쟁이 만든 ‘도망자’ 이봉상

  • 곽성연|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이규옥|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입력2017-05-11 17:5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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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한국고전번역원 刊 ‘사필(史筆)’










    정절은 있으나 孝는 없다- 영조의 화순옹주 정려(旌閭) 거부

    곽성연|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자식이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효와 배우자에 대한 정절은 부모와 자식 사이, 부부 사이의 윤리로 개인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이 덕목을 사회와 국가 전체로 확산시켰다. 더 나아가 죽은 남편에 대해 절개를 지킨 여인을 절부(節婦), 죽은 남편을 따라 죽거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인을 열부(烈婦) 또는 열녀(烈女)로 구분하고, 절부보다 열녀를 더 높이 평가했다.

    또 충신, 효자와 함께 절부·열녀도 표창(정려)해 정문(旌門,집이나 마을 앞에 세우는 붉은 문)을 내리고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복호(復戶)의 혜택을 주었다. 이러한 경제적 혜택은 덕목을 적극 장려하는 동시에, 백성을 교화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에 발맞춰 건국 초기부터 불효와 여인의 부정(不貞)한 행실 등에 대한 규제가 마련됐다. 양반 부녀자가 만날 수 있는 친족 범위를 한정하고, 개가한 부인은 봉작을 추탈하며, 행실이 바르지 못하거나 개가한 부녀의 자식은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부인의 정절을 신하의 충성과 같은 관념으로 규정하기 위한 장치였다. 또한 열녀전(烈女傳),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같은 윤리서를 간행하고 보급해 부인의 정절에 대한 교육을 확산하는 데도 적극 노력했다.

    이러한 국가적 노력의 결과인지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사연의 수많은 절부, 열녀가 나왔다. 그런데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고 따라 죽은 부인에게 정려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14일간 식음 전폐한 옹주

    옹주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에게 시집가면서 처음으로 대궐을 떠나게 됐는데, 부녀자의 도리를 깊이 체득하여 정숙하고 유순하였으며, 검약을 숭상하여 의복이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남편 김한신과 서로 권면하며 항상 청렴하고 신중하게 자신을 지키니, 사람들이 ‘어진 부마와 착한 옹주는 훌륭한 배필이다’라고 하였다. 남편이 죽자, 옹주가 따라 죽겠다고 결심하고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주상이 옹주의 집에 친히 거둥하여 미음을 들라고 권하자, 옹주가 명령을 받들어 한 번 마셨다가 바로 토하니, 주상이 그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면서 돌아왔다. 음식을 끊은 지 14일이 된 이날 마침내 목숨이 다하였다. 〈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주인공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和順翁主)다. 죽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었으니,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열녀로 인정하고 정려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관 역시 쉽사리 하기 어려운 행동이라며 옹주의 절개를 칭송하였다.

    열녀가 깊은 상처를 입어 슬픔이 심할 때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옹주처럼 열흘이 넘게 음식을 먹지 않고 반드시 죽겠다는 맹세를 지켜 결국 그 절조를 이룬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때에 엄한 아버지인 주상도 그 마음을 돌릴 수 없었으니, 참으로 순수하고 굳세다. 이는 본디 마을에 사는 평범한 아낙네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왕실의 귀한 옹주에게서 보게 되니 더욱 훌륭하지 않은가. 〈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화순옹주의 상에 참석한 영조에게 예조판서 이익정(李益炡)은 옹주에게 정려를 내리기를 청했다. 그러나 영조는 대답 없이 대궐로 돌아왔다.



    영조 :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고 굶어 죽었으니, 효에는 모자람이 있다. 앉아서 자식이 죽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약을 먹으라고 거듭 타이르자 저가 웃으며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하교하시니 어찌 억지로라도 마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 조금씩 두 차례 마시고는 곧 도로 토하면서 “성상의 하교를 받들었지만 마음이 정해지고 보니 차마 목에서 내려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그 고집을 알지만 본심이 연약하므로 사람들의 강권에 못 이겨 조금씩이라도 마시기를 바랐는데, 끝내 아비의 뜻에 순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운명하였으니, 정절은 있으나 효에는 부족한 점이 있는 듯하다. 그날 바로 죽었다면 내가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그러나 열흘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 내 마음을 너무도 괴롭게 했다. 아까 예조판서가 정려하는 은전을 실시하라고 청하였는데, 그렇게 청한 것은 잘못이다. 아비가 되어 자식을 정려하는 것은 자손에게 올바른 법도를 물려주는 도리에 어긋나며, 또한 훗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김상로 :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오나, 훌륭한 정절을 그대로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영조 : 백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정절에 달려 있지, 정려에 달려 있지 않다.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니 후세에 폐단을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 〈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영조는 정려하지 않아도 정절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임금인 아비가 딸에게 정려를 내리면 폐단이 될 수도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사관은 영조의 태도에 동의하는 의견을 남겼다.

    화순옹주가 보여 준 열녀로서의 행실은 이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또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해질 것이니 어찌 구구히 정려하여 널리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아비가 자식을 정려할 수 없다’라는 하교까지 내리셨으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위대하다, 왕의 말씀이여! 넓고 공정하여 무엇보다도 만세의 모범이 될 만하다. 〈영조실록 34년 1월 17일〉

    만세의 모범 vs 희생 강요

    굳이 정려하지 않아도 옹주의 훌륭한 행실은 후대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정려할 수 없다는 영조의 말을 높이 산 것이다. 영조도 임금이기 전에 아버지이니,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을 따라간 딸의 죽음을 표창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조의 태도는 당시 사회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만일 영조가 화순옹주에게 정려를 내렸다면 그날 이후 남편을 잃은 모든 여인은 목숨을 끊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정조 7년(1783)에 화순옹주에 대한 정려가 내려졌다. 정조는 화순옹주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한 것은 왕명을 따르는 효도보다 남편을 따라 죽는 의리를 중대하게 여긴 것이며, 이는 제왕의 집안에 없던 훌륭한 행실이니 정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영조가 아버지라서 내릴 수 없었던 정려를 정조가 내린 것이다. 이는 열(烈)을 효보다 더 우선하는 덕목으로 평가한 것으로, 개인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열을 완성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은 교육과 관습, 사회적 압박 등 여러 형태로 열녀가 될 것을 강요받았고, 많은 여성이 목숨을 버려가며 이러한 요구에 기꺼이 부응했다. 지금이야 이런 관습이 사라졌다지만, 또 다른 명분을 내세워 우리 사회의 약자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부분은 없는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법은 멀고 정치는 가깝다 - 당쟁이 만든 ‘도망자’ 이봉상


    이규옥|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옳고 그름의 기준은 개인마다 다르고 집단마다 다르다. 그렇다 보니 법의 원칙이 정치 논리에 의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어제의 죄인이 오늘의 영웅이 된다거나,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죄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 경종에서 영조로 이어지는 시대의 격변기, 당파 간의 갈등이 대립을 넘어 생사를 건 싸움으로 번지는 상황에서 가문의 혈통을 잇기 위해 국법을 어긴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있었다. 영조 1년(1725) 5월 9일, 작고한 영중추부사 이이명의 처 김 씨가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대신 죽은 어린 종을 염하고…

    죽은 남편은 아들 이기지 하나를 두었고, 이기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눈이 멀어 이봉상만이 후사를 이을 수가 있었습니다. 임인년의 화란(禍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는데, 이기지가 옥사에 연루되어 죽은 뒤 의금부에서 이기지의 처자를 노비로 만드는 처벌을 적용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찌 엄벌이 두려워 하나밖에 없는 핏줄을 살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마침 어린 종 하나가 이봉상과 나이와 용모가 비슷하기에 대신 죽어 줄 수 있겠느냐고 타이르니, 그 어린 종은 거절하지 않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고 이봉상은 도망쳤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종의 시체를 염하고 관에 넣어 담당 관사의 부검을 거친 다음 무덤과 신주를 만들었습니다. 이봉상이 도망친 뒤 생사를 모르다가 금년 2월에야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찾아서 자수하게 하였습니다.” 〈영조실록 1년 5월 9일〉

    이이명은 경종 2년 목호룡의 고변으로 벌어진 임인옥사 때 죽은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인데, 그의 외아들 이기지도 이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다 죽었다. 남편과 아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대를 이을 손자를 살리기 위해 나이와 용모가 비슷한 어린 종을 대신 죽게 하고 손자를 피신시켰다가, 영조 1년 을사환국으로 정권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자 자수하게 한 것이다. 영조는 노론 4대신이 목숨을 바쳐 자신을 왕위 계승자로 만들어준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니 가슴속 깊이 고마움을 느끼던 은인의 후손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몹시 반가웠을 것이다. 영조는 이봉상을 공릉 참봉에 제수하고, 대궐로 불러 직접 만났다.

    “경자년(1720)에 그대의 조부를 만났었는데, 6년 뒤에 또 그대를 보니 마치 그대의 조부를 만난 것 같다.” 〈영조실록 1년 5월 9일〉

    노론의 세상이 됐으니 전날 국법을 어기고 도망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억울하게 숨어 지낸 것을 동정하고 그를 영웅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 일에 대해 당시 사관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봉상이 도망쳤을 때, 흉악한 무리들은 그가 죽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포도대장 이삼이 영호남의 각 지역을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어린 종이 주인을 대신해 죽은 것은 실로 만고에 없을 우뚝한 절개라 하겠다.〈영조실록 1년 5월 9일〉

    이봉상의 집안에서 국법을 어기고 죄인을 바꿔치기한 것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것을 볼 때, 노론 측 사관의 논평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2년이 지난 영조 3년, 정국이 다시 바뀌었다.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정권에 대한 노론의 처벌 요구가 너무 거세자 영조는 다시 소론 세력으로 정권을 바꾸는 이른바 정미환국을 단행했다. 그러자 정권을 잡은 소론 측에서 다시 이봉상 문제를 들고나왔다.




     노론, 소론 정권 따라 바뀐 신세

    죄인 이봉상은 처벌하라는 명령이 내린 날 제멋대로 도망쳐 숨었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던 사건입니다. 앞으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형벌을 받으면 도망가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선왕 때 처벌을 피해 도망쳤던 죄인 이봉상을 형률에 따라 처단하소서. 〈영조실록 3년 9월 12일〉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죄인이 됐다. 이봉상에 대한 처리는 정국의 향방을 알려주는 풍향계였다. 영조는 이봉상을 죽여야 한다는 소론 측의 끈질긴 요구를 막아내고 결국 외딴섬인 진도에 안치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그 뒤 당파 간의 지나친 갈등을 극복하려는 영조의 의지에 의해 소론과 노론을 함께 등용하는 탕평 정국이 형성됐으나, 이봉상의 처리 문제는 여전히 조정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소론 측은 국법을 무시하고 도망친 그의 죄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하고, 노론 측은 이봉상의 부친인 이기지가 뒤집어쓴 역적죄가 벗겨졌으니 이봉상을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영조는 서두르지 않고 문제에 접근했다. 영조 10년(1734)에 우선 외딴섬에 있던 이봉상을 가까운 육지로 옮겨 줬다. 조정에서는 다시 이 문제를 두고 소론과 노론 간에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영조의 뜻은 전보다 확고했다.

    김일경의 당이 흉악하였기 때문이다. 이봉상은 나라의 법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당쟁으로 인한 재앙을 피해 도망친 것이다.〈영조실록 11년 1월 28일〉

    정상적인 나라의 법을 무시하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역적들이 장악한 조정의 불법적인 명을 피해 달아난 것이라는 논리였다. 당쟁의 피해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 탕평 정치를 실시한 영조였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노론의 시각을 갖고 있었다.

    영조 16년(1740), 인원왕후가 왕비에 오른 지 4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시행한 대사면 때 이봉상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실로 14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이렇게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영조가 탕평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봉상에게 적대적인 소론 세력을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17년이 지난 영조 33년(1757)에 이봉상은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 배경에는 영조 31년(1755) 급진 소론 세력들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 객사에 붙인 것 때문에 촉발된 이른바 을해옥사가 있었다. 이로 인해 소론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노론 중심의 정국이 형성됐다. 이후 노론이 주도하는 정국이 계속되면서 파란만장했던 이봉상의 삶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정치적인 환경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좌지우지된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존재다.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헤쳐오면서 남북의 대립, 동서의 대립, 세대 간의 대립, 정파 간 대립을 겪어온 우리 사회는 지금 또 얼마나 많은 이봉상을 만들어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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