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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지린성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吉 | 韓中이 함께 키워낸 사과배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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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장백산맥이 그리는 삼각형 안에 랴오허(遼河)와 쑹화(松花)강이 흐르고 만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만주의 지리적 중심이다. 고대왕국 부여에서 근대 일제의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장악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중심으로 삼았다. 발흥과 몰락이 공존하는 곳, 그러나 민초는 고단하다.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고구려 수도였던 지안(集安) 국내성으로 흐르는 강.


“동북삼성(東北三省)을 왜 여름에 가?”
중국인 친구는 내 여행 계획을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동북은 겨울에 눈과 얼음축제(冰雪節)를 보러 가는 곳이라고. 여름에 가면 재미없어(沒意思).”

나는 생각했다. ‘그래. 너희 한족들에게 동북은 눈 구경을 하러 가는 곳이겠지. 하지만 나는 고구려 사람들이 어떤 땅에서 살면서 말을 타고 질주했는지 보고 싶어. 너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야. 고구려가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지린(吉林)성은 고구려 초기 근거지인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광개토대왕비가 있고,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이 있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려면 추운 겨울보다는 북방의 바람이 상쾌한 여름이 제격 아닌가!

지린성의 약칭은 ‘길할 길(吉)’자. 지린성 한복판에 있는 지린시는 쑹화강이 흐르는 구릉지대다. 만주어로 ‘강가의 마을’을 ‘지린우라’라고 불렀고, 이 말을 한자로 음차한 ‘吉林乌拉’를 줄여 ‘지린’이 됐다. 현지어를 음차해서 중국식 지명을 지었다는 점에서 구이저우(貴州)성과 유사하다. 두 지역 모두 한족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원주민들이 세력을 떨치던 변경이었다.

‘강가의 마을’ 吉林乌拉

랴오닝의 대흥안령, 헤이룽장의 소흥안령, 지린의 장백산맥. 이 세 산맥이 그리는 삼각형 안에 랴오허와 쑹화강이 흐르고 만주 벌판이 펼쳐져 있다. 지린은 만주의 지리적 중심이다. 고대왕국 부여에서 근대 일제의 만주국에 이르기까지, 만주를 장악하려는 이들은 반드시 지린을 중심으로 삼았다.

지린 북쪽의 평야는 점점 높아져 중국과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선을 이루는 장백산맥이 된다. 장백산맥의 최고봉 장백산, 즉 백두산은 2750m 높이에서 만주 벌판을 위풍당당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백두산 천지(天池)는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이 발원하는 삼강지원(三江之源)이다. 하늘에 닿을 듯 위엄 있고, 생명 같은 물을 아낌없이 보내주는 백두산은 한민족뿐 아니라 동북아 여러 민족의 성산이요, 영산(靈山)이다.

부여는 지린 북부 평야지대의 첫 주인공이었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전(三國志 東夷傳)’이 말해주듯 부여는 “동이 지역에서는 가장 평평하고 앞이 탁 트여 있고, 오곡을 심기에 적당”한 2000리 땅에 8만 호(戶) 주민을 거느린 강국이었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 초반에서 3세기 중반까지 500년 동안 동북의 왕자였으며, 494년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을 존속했다.

부여의 전설적인 명성은 한반도까지 흘러들어 고구려와 백제 모두가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특히 백제는 왕의 성씨도 부여씨였다. 예컨대 근초고왕의 이름은 부여구, 의자왕의 이름은 부여의자다. 백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고 사비성을 수도로 삼았다. 사비성은 오늘날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이 되었으니, 부여의 명성은 21세기에도 살아 있는 셈이다.

한편, 부여의 한 무리가 남쪽으로 내려와 현지 토착세력과 함께 세운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고구려는 “산하의 형세가 험하고 견고”한 졸본(랴오닝성 환런현)을 첫 도읍으로 삼았다가,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지린성 지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부여, 고구려, 백제

고구려의 터전은 부여와 크게 달랐다. 진수가 말했듯,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없다. 산과 계곡을 따라 거주하고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농사지어도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하다.”

진수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에 대해 크게 다른 평가를 내렸다. 부여인은 “키가 크고 성격이 강인하고 용맹하지만 조신하고 순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 약탈하는 일이 없”는 반면, 고구려인은 “성격이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이는 양국의 자연환경이 크게 달라 부여는 자체 생산력이 높아 자급자족하기 충분해 안으로 지킬 뿐 밖으로 원정을 나가지 않아도 됐던 반면, 고구려는 주변 지역을 정복해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고구려는 초창기부터 대외정복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도읍을 선정할 때는 “산과 물이 깊고 험”해 방어에 유리한 것이 최우선 고려사항이었고, 도성을 지을 때도 평지성 하나, 산성 하나로 두 개씩 지었다. 고구려인은 평소에는 평지성에서 살다가 전쟁 시에는 산성에서 농성했다. 이처럼 고구려는 철저하게 전쟁을 염두에 둔 국가였다.

그러나 정복전쟁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은 위험성이 매우 컸다. 초창기에 주변의 만만한 소국을 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자 강한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강력한 적은 중국이었다. 위나라의 관구검이 국내성을 함락해 불을 질렀고, 5호16국시대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또 한 번 국내성을 파괴했다. 전연에 참패한 고국원왕은 남부 정벌로 고구려를 중흥시키려다 역풍을 맞았다.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일대 개혁을 수행했다.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 체제를 정비해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때맞춰 광개토대왕이 나타났다. 광개토대왕은 불과 18세에 즉위해서 20여 년간 남으로 백제, 북으로 거란·숙신, 서쪽으로 후연, 동쪽으로 동부여 등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정벌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전성기 다음은 쇠퇴의 내리막길이다. 고구려가 확장되자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정벌의 성과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 왕권은 통제력을 잃고 약화됐다. 이때쯤 중국은 5호16국이 끝나고 남북조 시대가 되어 다소 안정을 찾았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을 막고 역공을 펼쳐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낭만적인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주목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이야기 뒷부분이다. 온달 장군은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비장하게 출전했지만 결국 한강을 되찾지 못하고 전사한다. 사람들이 온달의 시신을 관에 넣고 돌아가려 했으나, 여러 장정이 들려 해도 관은 꼼짝하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쓰다듬으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됐으니 어서 돌아가도록 해요”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이 설화는 고구려의 전성기가 끝났음을, 고구려인들이 한강도 지키지 못하게 된 처지를 원통해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의 기상 청나라의 위력 만주국의 침탈 조선족의 혼돈

국내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유지공원(高句麗遺址公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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