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세계의 눈

수출 대만 이끈 ‘값싼 에너지’ 포기 “목표 시점 빠르다” 우려도

2025년 ‘아시아 첫 원전 제로’ 국가 대만

  • 최창근|대만 전문 저술가, 한국외국어대 박사과정 caesare21@hanmail.net

    입력2017-05-18 17: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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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 대통령은 ‘원전 제로 시대로의 이행’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고 설계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을 중단하겠다는 것. 이보다 앞서 대만은 ‘2025년 아시아 첫 원전 제로’ 국가를 선언하고 11조 원을 투입한 사실상 완공 상태의 원전을 폐쇄했다. 하지만 대만 내 여론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전력 불안정’ ‘경제·산업 발전 저하’라는 악순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대만(臺灣)을 들여다보면 동요 ‘똑같아요’를 흥얼거리게 된다. 대만이 처한 현실을, 당면한 과제를 보면 볼수록 ‘어떻게 한국이랑 이렇게 비슷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대만은 50년간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다. 오랜 권위주의 체제도 경험했다. 1949년 양안(兩岸) 분단 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경쟁의 최전선에 섰다. ‘대만의 기적’으로 불리는 개발도상국 경제개발의 성공사례가 됐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로 이행해 아시아의 모범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헌팅턴 테스트’로 일컬어지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주의 공고화(鞏固化)를 위해 거쳐야 하는 ‘두 차례 정권교체 테스트(two turnover test)’도 통과했다. 정치·사회 발전 수준, 경제·무역 구조도 한국과 유사하다. 비교정치학자들은 ‘지구상의 가장 유사한 두 나라’로 한국과 대만을 꼽는다.



    완공 직전 원전도 폐쇄

    환경도 닮았다. 휴전선에 가로막혀 ‘사실상 섬나라’인 한국처럼 대만은 섬나라다. 산지(山地)가 전체 국토의 64%를 차지해 경지(耕地) 면적은 24%에 불과하다. 부존자원도 전무하다시피 하다. 인구는 많아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밀도가 높다.

    ‘한국과 정말 유사한 나라’, 대만을 뜨겁게 달군 이슈가 원자력발전이다. 수출 위주 경제구조를 가진 대만에서 에너지 문제는 산업경쟁력과 직결된다. 에너지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에서 원자력발전은 ‘필요악(惡)’이다. 이 또한 한국인에게 기시감이 있다. 한국에서도 원전 안전, 노후 원전 수명 연장, 원자력 폐기물 처리 문제가 논란이 돼왔다.



    2017년 1월 대만 입법원은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골자는 2025년 원전 가동 중지와 완전 ‘탈핵(脫核)’이다. 완전 탈핵은 2016년 집권한 차이잉원(蔡英文) 총통과 민진당의 선거공약이었다. 법안 가결로 공약은 구체화됐다. 아시아 첫 ‘원전 제로(Zero)’ 국가로의 이행이라는 기록도 썼다.

    대만 사회에서 원자력발전은 뜨거운 감자다. 그중 제4기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20년 넘게 대만 사회를 달궈온 이슈다. 2014년 공정률 98%로 완공, 시험운용을 앞둔 제4기 원전 잠정 폐쇄 결정이 났다. 20년 넘는 공기(工期), 3300억 뉴타이완달러(11조 3000억 원)의 공사비용, 사회 갈등으로 인한 손실을 감안하면 천문학적 함몰비용이 발생했다. 이를 무릅쓰고 사실상 완공 상태의 원전 폐쇄를 결정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0년대 대만은 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1949년 발포(發布)된 ‘대만지구 계엄령’하에서 국민당 일당독재가 지속됐다. 권위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낀 국민의 민주화 요구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만 섬 밖 정세도 나빴다. 1971년 유엔(UN) 퇴출을 시작으로 외교적 고립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제1·2차 석유위기는 대외 의존 경제구조를 가진 대만에 직격탄이었다.


    경제 논리에 맞선 반핵시위

    두 차례 석유위기 이후 대만 정부는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를 대체할 대안으로 원자력을 택했다. 1971년 신베이(新北)시 스먼(石門)구에 제1기 원자력발전소 진산(金山)을 착공해 1978년 12월 상업운영을 시작했다. 1974년 신베이시 완리(萬里)구에 제2기 원자력발전소 궈성(國聖) 2기를 기공해 8년 후인 1982년 전력 생산을 시작했다. 1981년 최남단 핑둥(屏東)현 헝춘(恆春)진(鎮)에 제3기 원자력발전소 공사를 시작해 1984년 완공했다.

    고도성장기에 진입한 대만은 원전 건설로도 전력 수요 폭증을 감당할 수 없었다. ‘값싼 에너지’는 ‘수출 대만’ 시대 산업·수출경쟁력과 직결된 문제였다. 1980년 행정원 원자능위원회(原子能委員會)는 제4기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안을 입안했다. 부지는 수도 타이베이(臺北)를 둘러싸고 있는 신베이시 궁랴오(貢寮)구로 결정했다.

    대만 정부는 초기 사업비 110억 뉴타이완달러(NTD) 중 31억 뉴타이완달러를 집행해 1982년부터 제4기 원전 부지 매입 작업을 시작했다. 비밀리에 추진한 사업은 사업계획이 새어나가면서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대만 정부는 1985년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지시로 ‘부지 매입 일시 중단’을 발표했다.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해 원자력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다. 원전 건설 부지 주민들의 반대 시위 수위도 높아졌다. 국내 정치 변화도 작용했다. ‘국민당 밖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당외(黨外)’라 불리던 재야 정치인들은 1986년 9월 첫 야당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민진당) 창당을 선언했다. 민진당은 그해 12월 입법원 선거에서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이로써 국민당 일당 독재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시민사회도 역량을 키워갔다. 1987년 11월 대만환경보호연맹(臺灣環境保護聯盟)은 재야 시민단체, 민진당과 더불어 ‘원전반대연합’을 구성했다. 1987년 12월 입법원은 제4기 원전 초기 예산 중 미집행분 79억 뉴타이완달러의 집행 정지를 결정했다.

    1990년대 들어서도 제4기 원전 건설을 둘러싼 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정부는 ‘효율성’ ‘경제개발’ 논리를 앞세워 건설을 재개하려 했다. 주민들의 반대 시위 또한 지속됐다. 1991년 10월 3일 궁랴오 주민들은 입법원 청사 앞에서 농성했다. 한 주민이 분신(焚身)해 숨졌다. 첫 인명 사고였다. 이는 대만환경연맹을 구심점으로 삼은 대규모 반핵시위의 촉매가 됐다.



    행정부 입법부 극한 대립

    결국 공사 재개 여부 결정은 입법원으로 넘어갔다. 1996년 5월 민진당 입법위원 장쥔슝(張俊宏)이 대표발의한 ‘원자력발전소건설계획폐지안(廢止所有核能電廠興建計畫案)’이 입법원 1독회(讀會·법안, 결의안 심사 첫 과정)를 통과했다. 집권당이자 원내 다수당이던 국민당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원전건설폐지안’은 6월 재의결에 부쳐졌으나 2년여 여야 간 공방전 끝에 부결됐다. 그 결과 1999년 3월 17일, 제4기 원자력발전소 기공식이 열렸다.

    2000년 3월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陳水扁)이 당선됐다. 첫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민진당은 창당 14년 만에 집권당이 됐으나 입법원 과반 의석은 차지하지 못해 ‘소수(少數)정부’ 처지였다.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泛藍, pan-blue)계 정당들이 의회 다수당 지위를 유지했다. 민진당 정부는 거국(擧國) 내각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첫 행정원장(한국 국무총리에 해당)으로 국민당 정부 국방부장을 지낸 보수파 탕페이(唐飛)를 지명했다. 탕페이는 국민당 정부 정책을 계승·추진하려 했다. 이는 그의 정치 성향과 더불어 민진당의 반발을 샀다. 갈등을 폭발시킨 것이 제4기 원자력발전소 건설이었다. 탕페이 내각은 원전 건설을 강행하려 했다. 천수이볜 총통은 ‘원전 건설 재검토’를 주무부처인 행정원 경제부에 지시했다. 2000년 9월 30일 재평가위원회는 ‘건설 중지’ 요지의 보고서를 행정원에 제출했다. 총통과의 갈등 끝에 탕페이는 2000년 10월 행정원장에서 물러났다. 취임 5개월여 만이었다. 



    日원전 사고 경각심 일으켜

    장쥔슝이 후임 행정원장이 됐다. 입법위원이던 1996년 ‘원자력발전소건설계획폐지안’을 대표발의한 이력을 가진 인사다. 장쥔슝은 취임 직후인 2000년 10월 27일 ‘제4기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 중단’을 전격 발표했다. 공정률 30%의 원전에는 공사대금 480억 뉴타이완달러(1조7000억 원)가 소요됐다. 공사 중단으로 설계·시공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 미쓰비시, 대우건설 등에 위약금으로 1000억 뉴타이완달러(3조5000억 원)도 지급해야 했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도 장쥔슝 내각은 ‘선거공약 준수’를 명분으로 원전 건설 중단을 발표했다. 국민당 등 야권은 공세 수위를 높였다. 공사 중단으로 인한 대외신인도 하락, 전력수급 부족 문제로 인한 산업경쟁력 저하, 외국인 투자 저하로 인한 경제 불황 등이 명분이었다. 급기야 야권은 2000년 12월 22일 ‘총통·부총통 파면안’을 입법원에 제출했다. 제4기 원전 건설을 둘러싸고 행정부와 입법부 간 대립은 극에 달했다.

    행정부와 입법부 간 극한 대립에 대한 최종 판단은 사법부로 넘어갔다. 이듬해 원전 건설을 찬성하는 국민당, 친민당(親民黨), 신당(新黨), 무소속연맹은 ‘제4기 원자력발전소 건설안’과 관련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사법원 헌법법정(憲法法庭)은 이 안건에 대해 “행정원이 일방적으로 제4기 원자력발전소 중지를 결정한 것은 ‘절차상의 미비(未備)’다.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은 국가 중요 정책 변동 과정이다. 따라서 행정원은 입법원에 정책 추진사항을 보고하고, 자문을 받으며, 입법원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헌법 해석을 내렸다.

    2주 후인 2001년 1월 30일 입법원은 135대 70으로 ‘원전 건설 재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입법원 결의 후 분쟁 조기 타결을 희망한 행정원은 2월 5일 타협안을 제시했다. 2월 13일 행정원장 장쥔슝과 입법원장 왕진핑(王金平)은 제4기 원전 건설 재개를 합의했다. 다만 건설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건설 시 안전 기준을 당초보다 강화하는 조건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2008년 5월, 마잉주(馬英九)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국민당은 8년 만에 여당이 됐다. 국민당은 같은 해 1월 입법원 선거에서도 압승해 입법부도 장악했다. 신정부 출범 후에도 제4기 원전을 둘러싼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제1야당 민진당을 위시한 범록(泛綠, pan-green)진영, 대만환경운동연맹 등 환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원전 건설 중단, 나아가 완전 탈핵을 주장했다. 이 같은 논란 속에서도 제4기 원전 건설은 속도를 내 2011년 공정률 90%를 달성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세계 최고 기술력’ ‘안전 제일’을 내세우던 일본 원전 신화(神話)가 쓰나미 앞에 무너져 내렸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이후의 파장을 지켜본 대만 사람들이 받은 충격도 컸다. 옛 식민 모국(母國) 일본은 대만에 ‘롤모델’이었다. 대만인 다수는 일본에 절대적 신뢰감을 갖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대만 내 원자력 안전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환기시켰으며 반핵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4기 원전 ‘봉인’

    2011년 3월 20일 ‘3·20반핵시위행진’에는 시민 2000명이 참여했다. 4월 30일에는 1만 명이 참가한 ‘4·30반핵행진(反核遊行)’이 이어졌다. ‘반핵·탈핵’은 2012년 1월 총통·입법원 선거의 핵심 이슈로도 부상했다. 민진당 총통 후보 차이잉원(蔡英文)은 ‘신규 원전 건설 중단, 상업 가동 원전 운영 중단, 완전 탈핵’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2012년 1월 선거에서 민진당은 집권에 실패했다. 다만 달아오른 대만 내 반핵 시위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후쿠시마 사고 1주기인 2012년 3월 타이베이, 타이중(臺中), 가오슝(高雄)에서 대규모 반핵 시위가 개최됐다. 이듬해 3월 9~10일 대만녹색공민행동연맹(臺灣綠色公民行動聯盟) 등 150개 시민단체가 공동 주최한 반핵 시위가 있었다. 시위에는 대만 각지에서 22만 명이 참가했다.

    대학교수, 과학기술자, 환경운동가 등 전문가들도 ‘전문성에 입각한’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제4기 원전의 설계상 결함, 일본 후쿠시마 사고와 같은 유사 사고 발생 가능성, 지진, 태풍, 쓰나미의 위험성 등 자연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원전 위험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전문가 집단은 풍력, 조력 등 대만이 가진 자연조건을 활용한 대체 에너지원을 제시하기도 했다. 원전 중단과 궁극적인 완전 탈핵 실현 가능성에도 힘을 실었다.

    그중 고조되는 반핵 시위 열풍을 폭발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4월 린이슝(林義雄)이 무기한 단식 시위를 시작했다. 민진당 창당 멤버이자 1998년, 2000년 두 차례 당 주석을 지낸 재야 원로였다. 린이슝은 천수이볜 집권기에도 당내 반핵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제4기 원전 건설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2006년 민진당을 탈당해 반핵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린이슝의 정치적 위상, 재야운동권에서의 명망 등은 국민당 정부가 무시하지 못할 압력 요소로 작용했다.

    2014년 4월 25일, 마잉주 총통과 쑤전창(蘇貞昌) 민진당 주석은 영수회담을 개최했다. 이 회담에서 제4기 원전 건설을 국민투표에 부칠 것에 합의했다. 4월 28일 행정원은 제4기 원전 건설 잠정 중단 및 폐쇄, 향후 3년간 건설 중단, 추후 국민투표에 의한 건설 재개 3가지 사안을 공식 발표했다. 제4기 원전이 공정률 98%에 달한 상태였다. 공사비용으로는 3300억 뉴타이완달러(11조3000억 원)가 소요됐다. 2015년 7월 제4기 원전은 결국 ‘봉인’됐으며 가동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3년 내 실시하기로 했다.



    태양광·풍력에 투자

    2016년 1월 총통·입법원 동시선거에서 민진당은 집권에 성공했다. 차이잉원 정부는 출범 후 선거 때 핵심 공약 중 하나이던 ‘완전 탈핵’을 구체화했다. 2017년 1월 20일 입법원을 통과한 ‘전기사업법 개정안’ 제95조에 “원자력발전은 2025년까지 전면 중단한다”고 명시했다. 설계수명 만료를 앞둔 제1~3기 원전은 2018년 12월~2025년 5월까지 순차적으로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제4기 원전은 핵연료봉 제거 후 화력발전소 전환 등을 검토 중이다.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도 명시했다. 2016년 기준 전체 전력 생산량의 4.8%에 불과한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25년 20%로 높이기로 했다. 대만 정부가 제시한 로드맵대로라면 2016년 화력 82%(석탄 45.4%, 천연가스 32.4%, 석유 4.2%), 원자력 12%, 신재생에너지 4.8%, 양수발전 1.2%인 대만 전력사업 포트폴리오는 2025년 화력 80%(천연가스 50%, 석탄 30%), 신재생에너지 20%로 재편된다. 신재생에너지는 ‘섬나라’ 대만이 가진 자연조건을 적극 활용해 태양광·풍력 발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2017년 2월 341기인 풍력발전기는 2025년 546기로 늘리는 방안을 수립했다.



    전력 예비율 경고음

    대만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7대 신산업’ ‘5대 미래지향적 인프라스트럭처 구축 분야’의 핵심 사업으로 지정했다. 이와 관련한 기술개발·양산(量産)을 위해 남부 타이난(臺南)에 과학기술부 산하 사륜녹색에너지과학클러스터(沙崙綠能科學城, Shalun Green Energy Science City) 건설을 추진 중이다. 2017~2024년 8년간 총 499억2000만 신타이완달러의 정부 예산, 대만전력공사 등 국영기업 예산 2770억4000만 뉴타이완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문제는 전력 수급 불안정이다. 현재 연간 5144MW에 달하는 제1·2·3기 원전 전면 가동을 중단할 경우 전력 예비율이 위험 수위에 이를 전망이다. 전력 예비율 6% 미만의 ‘전력수급 주의단계’ 발령일수는 2013년 연간 1일, 2014년 9일, 2015년 33일, 2016년 80일로 급증세다. 원자로 점검으로 원전 가동이 중단된 2017년 4월 초에는 전력 예비율 3.56%로 위험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특히 덥고 습한 기후로 냉방기 사용이 잦은 점을 감안하면 전력 예비율은 지속적으로 위험 수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대만 내 여론도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원전 가동 중단, 완전 탈핵’이라는 대명제에 동의하면서도 구체적인 시행 방안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탈원전 정책이 ‘전력 불안정’ ‘민간 투자 의욕 저하’ ‘경제·산업 발전 저하’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8년 후인 2025년 완전 탈핵은 성급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대체 에너지원 개발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목표 시점이 지나치게 이르다는 것이다.

    장기간 지속된 논란 끝에 천문학적 함몰비용을 무릅쓰고 ‘아시아 첫 완전 탈핵국가’ 진입을 선언한 대만의 사례는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한국인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원전 제로 시대로의 이행’을 공약했다.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백지화하고 설계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수명 연장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로 전체 전력량의 20%를 충당하겠다고도 했다. 대만이 걸어온 길고 굴곡진 ‘탈핵여정(脫核旅程)’에서 문재인 정부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최 창 근
    ● 1983년 경남 고성 출생
    ●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대만 국립정치대 석사
    ● 한반도선진화재단 연구원
    ● 現 한국외국어대 행정학 박사과정, 동아시아학통섭 포럼 총무이사
    ● 저서 : ‘ 대만 :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타이베이 : 소박하고 느긋한 행복의 도시’
    ● 논문 : ‘대만의 원자력발전소건설은 어떻게 중단 되었는가 : 정책옹호연합모형의 적용’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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