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장시성

贛 도연명의 詩, 도자기, 마오쩌둥 신중국

중국 히트 상품 제조기

  • 글 · 사진 김용한|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7-05-19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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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속 장시는 줄곧 변두리다. 오늘날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장시에 관한 뉴스는 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과 조류인플루엔자, 돼지 폐사, 밀감 흉작 등 농업 기사가 많다. 그러나 장시는 세계적 히트 상품을 낳았다. 유럽을 휩쓴 ‘중국 도자기’를 낳았고, 아름다운 장시의 자연은 명시가 되고, 마오쩌둥의 신중국을 품었다.
    장시(江西)성 여산에 갈 때 중국인 친구와 동행했다. 그는 주장(九江)의 대학인 구강학원(九江學院) 뒷산이 여산이니까 구강학원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구강학원에서 그가 세 명의 여학생에게 “여기 뒷산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우리 학교에는 뒷산이 없다”고 답했다. 그가 “여기 뒷산이 여산 아니었느냐”고 묻자 한 여학생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구강학원과 여산은 실제로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중국인 친구에게 “왜 그런 실수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장시성 남부의 중심인 간저우(贛州)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간저우대에는 뒷산이 있으니, 다른 대학에도 뒷산이 있을 것이고, 구강학원은 여산과 매우 가까우므로 구강학원의 뒷산은 곧 여산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참 희한한 논리 전개였다.

    장시의 또 다른 명물은 우위안(婺源)의 유채화다. 산골 가득 만발한 유채화는 숱한 이를 끌어들인다. 우위안의 유채화가 언제 피냐고 묻자, 그는 6월쯤 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만 믿다가 유채화 구경 시기를 놓쳤다. 우위안의 유채화는 3월 중순에 핀다. 그는 미대생이라 사생 실습으로 우위안에 가봤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오늘의 교훈 하나. “현지인이라고 항상 현지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장시성의 약칭은 ‘강 이름 감(贛)’이다. 장시성 젖줄 감강(贛江)에서 따온 글자다. 감강은 산시·후베이의 한수(漢水), 후난의 상강(湘江)과 함께 장강 중류의 3대 지류다. 감강은 장시의 등을 훑고 올라가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파양호(鄱陽湖)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장강에 합류한다. 장시를 ‘감강과 파양호의 땅(贛鄱大地)’이라고 할 만큼, 감강과 파양호는 장시의 상징이다.

    강남은 ‘장강의 남쪽’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강남’이라 할 때 떠올리는 지역은 장쑤성과 저장성의 강동(江東)이다. 강동은 오(吳)와 월(越)의 처절한 사투가 일어났고, 항우는 강동의 8000 자제를 이끌고 중국을 제패했으며, 강동의 호랑이 손견을 필두로 손책·손권·주유 등이 활약한 곳이다.





    오의 머리, 초의 꼬리(吳頭楚尾)

    그에 반해 장시, 즉 강서 지방은 생소하다. 장강의 남쪽에 있으니 강남은 강남이지만 어딘지 강남스럽지 않다. 강남의 요건은 풍요로운 부(富)와 화려한 문화다. 강서는 강동의 풍요로움이 없어 강남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처럼 장시는 쟁쟁한 이웃들 때문에 존재감이 약하다. 장시는 동쪽으로 저장·푸젠성, 남쪽으로 광둥성, 서쪽으로 후난성, 북쪽으로 후베이·안후이성을 접하고 있다. 장시는 다채로운 개성을 자랑하는 이웃들 틈에 끼어 있어서,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뒤섞인다. 그래서 장시는 ‘오의 머리이고 초의 꼬리이며, 월의 집과 민의 뜰(吳頭楚尾,粵戶閩庭)’이다.

    장시성에는 감강과 파양호를 위시해 2400여 줄기의 하천이 흐르고 곳곳에 호수가 있어 생산력도 제법 있다. 그러나 평야지대가 20%에 불과해 산은 많고 밭은 적다(山多田少). 어정쩡한 위치에 애매한 생산력. 그래서 장시는 중국사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었다.

    그래도 장시의 아름다운 산수는 큰 사랑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말한다. “장시성에 여산이 없으면 쓸쓸한 장강과 호수만 남고, 안후이성에 황산이 없으면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올 곳이 없다.”

    소동파는 변화무쌍한 여산을 보고 “여산의 참모습 알기 어렵다(不識廬山眞面目)”고 찬탄했고, 이백은 여산폭포를 과장되게 묘사했다.

    “폭포가 나는 듯 곧바로 떨어져 삼천 척,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무엇보다도 장시의 대시인 도연명이 무릉도원의 전설을 담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남겨 장시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한껏 부풀렸다. 게다가 도연명은 현령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호기롭게 말했다.

    “내 어찌 닷 말의 쌀에 허리를 굽히겠는가?”
    도연명의 말은 ‘쥐꼬리’만 한 월급에 매여 사는 월급쟁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닷 말의 쌀을 버리고 무릉도원을 택한 사람. 이렇게 보면 도연명은 속세에 관심 없는 전원시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어찌 닷 말 쌀에 허리 굽히나”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안 돼 안으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내란)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이민족들이 쳐들어왔다. 진나라는 장강 아래로 내려가 피난 정부를 꾸린다. 이것이 동진(東晉)이다. 장강 너머 이민족의 위협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황제는 허약했고 반란이 잇따랐다. 이때 도연명의 증조부인 도간은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워 한미한 가문 출신이면서도 병권을 장악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미천한 가문이 떠오르는 것을 극력 저지했다. 한 귀족은 도간과 함께 수레를 탄 귀족을 비웃었다.

    “어찌 이런 소인과 함께 수레를 탑니까?”
    도간이 죽은 후 권문세족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 그 후손들은 모함으로 살해당하기도 했다. 도연명이 태어났을 때 도씨 가문은 힘없는 선비 일족에 불과했다. 도연명은 도간의 증손자이며 명사 맹가의 외손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도씨 일족의 중흥에 대한 야망도 은밀히 품고 있었다. 청년 도연명은 “큰 뜻은 사해를 달리고, 날개를 활짝 펴고 멀리 날아오르길 기다렸다.”

    그러나 세월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동진은 환현과 유유 등의 잇따른 반란을 겪으며 가사상태에 이르렀고, 반란이 또 다른 반란에 의해 엎어지는 와중에 반역자의 혐의를 쓰고 처형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출사를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모반자는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명 인사를 초빙했고, 이 초빙을 거절하면 화를 입게 마련이었다. “가을 풀 아직 노랗게 시들지 않았지만, 따뜻한 바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하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런 난세 속에서도 권문세족의 텃세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도연명은 청운의 꿈을 안고 29세에 조정에 나아갔으나, 41세에 현령직에서 물러났다. 도연명의 12년 관직 생활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나며 노래했다.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있다가,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네.”

    도연명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이 자전적 수필은 이렇게 시작한다. 출신과 가문을 중시하던 당대 사회를 한껏 비웃은 말이다.

    “선생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그의 성과 자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도연명은 유유자적한 전원생활과 술을 낙으로 삼았다. “세상에 바라는 바 없고, 오직 좋은 술과 오래 사는 것”만을 바랐다. 훗날 백거이는 도연명을 이렇게 추모했다.

    “술을 사랑하지 명예 사랑하지 않고, 술 깨는 것 걱정하지 가난 걱정 않았다네. 다른 점은 따르지 못하겠지만, 얼큰히 취하는 건 본받으려네.”



    진우량, 장사성, 주원장

    ‘삼국지연의’에서 형주(후베이)의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기 시작할 때, 손권은 이미 시상(장시성 주장)에 군대를 이끌고 와 있었다. 형주를 차지하고 조조의 남진을 막을 생각이었으나, 형주의 유종이 싸우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다.

    이때 조조가 손권에게 항복을 제의하자, 손권 진영은 싸우자는 파와 항복하자는 파로 갈렸다. 손권 역시 막강한 조조의 군세 앞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와 상의하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와 상의하라”는 손책의 유언을 떠올린 손권은 파양에 사람을 보내 주유를 불렀다. 그러나 급박한 정세를 감지한 주유는 이미 손권에게 오고 있었다.

    정리해보자. 손권은 근거지인 회계(장쑤성 쑤저우)를 떠나 시상에 전진배치했다. 주유는 장시성 파양호에서 수군을 훈련시키다가 시상에 와서 조조와 싸우자고 주장했고, 곧바로 후베이성 적벽으로 출격해 조조의 군대를 격파했다. 즉, 장시는 오나라 정치의 중심 장쑤성과 방어의 중심 후베이를 잇는 지역으로 평소 군대를 훈련시키다가 유사시 어디로든 수월하게 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장강의 요지를 잇는 장시성 파양호는 원나라 말에 대격전의 현장이 된다. 원나라의 가혹한 정치에 대기근까지 겹치자, 중국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났다. 그중 장시 주장(九江)의 진우량, 장쑤성 쑤저우(蘇州)의 장사성, 난징(南京)의 주원장이 돋보였다.

    진우량은 후베이·후난·장시에 안후이성 남부 일대를 장악해 최대 세력을 자랑했다. 장사성이 차지한 장쑤성 쑤저우와 저장성 일대는 장강 삼각주의 곡창지대이자 으뜸가는 상업지역이어서 당시 중국 총 조세액의 3분의 1을 내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처럼 엄청난 양대 강적 사이에 포위됐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즉, 진우량은 강했고, 장사성은 부유했으며, 주원장은 투지가 넘쳤다.

    모든 여건은 진우량에게 유리해 보였다. 진우량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호걸이었고, 이미 군웅 최대의 판도를 구축했다. 장시에서 장강의 순류(順流)를 타면 주원장의 난징을 거침없이 공략할 수 있었다. 또한 장사성과 함께 동서에서 협공한다면, 가뜩이나 세력이 약한 주원장을 깰 수 있다.

    진우량은 큰 전함만 100척, 작은 전함 수백 척을 이끌고 주원장을 쳤다. ‘일제히 창을 던지면 강물을 끊고, 배는 꼬리를 물고 천리를 잇는’ 위세 앞에 주원장 군대도 크게 겁을 먹었다. 투항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몰래 달아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주원장의 장자방인 유기는 의연했다. 장사성은 큰 야심이 없고 사치향락에 젖어 있어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재빨리 진우량을 격파한 뒤 장사성을 평정하고 북으로 중원을 취해 왕업을 이룬다는 전략이었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군대를 거짓 항복으로 꾀어낸 다음 매복 공격으로 전군을 섬멸하고 2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진우량은 의심이 많고 도량이 작아 재주 있는 사람을 꺼리고 못난 사람을 감쌌기 때문에 내부에 불화가 잦았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불만세력을 흡수해가며 세를 불리니, 주원장의 세력은 날로 강해졌고 진우량의 세력은 날로 약해졌다.


    파양호 최후의 결전

    화가 난 진우량은 큰 전함을 수백 척 만들었다. 큰 배는 3000명, 작은 배는 2000명을 태울 수 있는 거대 전함이었다. 진우량과 주원장은 파양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진우량이 자칭 60만 대군을 이끌고 오자, 주원장은 20만 군대로 36일간 싸웠다. 주원장 군의 배는 작지만 기동성이 좋아 화포 무기를 십분 활용해 화공(火攻)과 ‘치고 빠지기’ 전법을 병행했다.

    그러나 주원장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7월 21일 하루 동안 진우량군은 6만 명, 주원장군은 7000명이 죽었다. 주원장이 전투를 독려할 때 몇 차례나 곁에 있던 위사(衛士·경호원)들이 전사했고, 타고 있던 배가 격침되고 좌초되는 등 주원장 스스로도 숱한 위기를 겪었다.

    파양호 대전은 원말 군웅전쟁 중 가장 돋보이는 한판 승부였고, 주원장 일생 최대의 고비였다. 위급한 상황이었던 탓일까. 이때 장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주원장은 흰소리를 했다. “내가 황제 자리에만 오르면 장시 사람 모두를 사촌형제(老表)로 모시겠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시오.”

    훗날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된 후, 장시가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어 장시 촌로들이 탄원하자 장시성의 세금을 3년간 면제했다. 이때부터 ‘장시의 사촌형제(江西老表)’라는 호칭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미담의 끝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다. 1398년 주원장은 장시 사람들이 “사소한 일도 잘 참지 못하고 직접 수도까지 와서 소송장을 제출한다”고 질책했다. 명나라 말 장시성의 한 평론가는 장시성의 성도 난창(南昌) 사람들이 “부지런하지만 베푸는 데에 인색하고, 의무감은 작은데 쟁론을 좋아하며, 교활하게 말을 잘하고 송사와 중상모략을 좋아한다”고 비평했다.



    장시의 사촌형제(江西老表)

    장시인들에 대한 비난은 현대에도 상당히 남아 있다. 왕하이팅은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에서 말했다.

    “장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변명이 많다. 말에는 가시가 있고 각박하며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다. 식당에서 손님이 음식을 주문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종업원에게 사정을 알아보면 그제야 주문한 음식의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대답이 돌아온다…(중략)…변명만 잔뜩 늘어놓을 뿐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왜 장시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이토록 안 좋을까. 장시는 평지가 적고 산이 많아 사람들이 일찍부터 외지로 나가 일했다. 명나라 선비 왕사성은 말했다.

    “장쑤·저장·푸젠 세 성은 인구가 많은 데 비해 토지가 좁아 세 성을 다 합쳐도 중원의 한 성 면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면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고, 기술이 있어도 외지로 나가지 않으면 팔 재간이 없는 형편이다. 특히 장시 지역은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명나라 여행가 서하객은 천하 곳곳에 장시인들이 있음을 알고 상당히 놀랐다. 명말청초 장헌충이 반란을 일으키며 쓰촨인을 대학살하자, 청나라는 쓰촨성 복구를 위해 외지인의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자 “후광인(湖廣人)이 쓰촨을 채우고, 장시인이 다시 후광을 채운다”는 말이 생겼다. 후베이·후난인들이 대거 쓰촨으로 이주하자, 그 빈자리를 장시인이 채웠다는 뜻이다.

    오늘날 허난성 사람들이 외지에서 가난한 농민공(農民工·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노동자)으로 일하면서 외지인들에게 멸시받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래도 허난은 인구부양력이 뛰어난 중원이라 농민공을 배출한 역사는 개혁개방 이후로 매우 짧다. 반면 장시인들은 옛날부터 외지로 나가 일하면서 따가운 멸시의 눈총을 받아왔다. 장시인에 대한 편견에는 이처럼 오랜 역사가 있다.
    산시(山西)성과 안후이성도 상황은 비슷했지만, 이 지역은 상업에 성공해 거대 상인 조직인 진상(晉商)과 휘상(徽商)을 탄생시켰다. 이에 반해 장시는 상업에 그만큼 성공을 거두지도 못해 이미지를 개선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도자기 메카’ 징더전

    그러나 장시의 자연이 결코 가난과 역경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장시의 강산은 풍부하고 우수한 도자기 원료를 선사했다. ‘도자기의 메카’ 징더전(景德鎮) 부근의 마창산은 ‘맑고 투명한 것이 옥과 같은’ 마창토를 주었고, 고령산(高嶺山)은 고령토를 주었다. 영어 카올린(kaolin)은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부드럽고 고운 흰색 점토’를 뜻하는데, 바로 고령의 중국 발음 ‘가오링(高嶺)’에서 나온 말이다. 지명이 ‘도토(陶土)’라는 보통명사가 될 만큼 장시는 탁월한 도자기 생산지였다.

    장시의 잠재력은 풍부했고 일찍부터 개성 있는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중원이 중국의 중심일 때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북방 유목국가인 금나라에 수도 카이펑을 함락당한 뒤, 남송이 저장성 항저우를 수도로 삼으면서 강남은 중국의 중심이 됐다. 특히 남송은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정부와 군대의 재원을 마련하고자 수출 산업을 육성했다. 징더전은 중국 도자기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원나라의 세계 정복은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라, 국경 없는 자유무역 시대를 열었다. 원이 남송을 정복한 후 도자기는 중요 수출품이 됐다. 징더전 도자기는 크기, 모양, 색깔, 장식 등에서 일대 변화를 겪었다. 원나라 특유의 유목문화에 주요 고객인 아라비아·페르시아 문화가 스며들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작고 얇은 개인 그릇을 선호했으나, 몽골족은 왁자지껄한 잔치와 축제에 쓸 크고 튼튼한 그릇을 좋아했다. 송나라는 청자를 좋아했지만, 원나라는 백자를 좋아했다.

    한편 중동의 이슬람교는 사치를 경계하기 위해 금·은 식기를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고, 손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부자들은 금·은 식기 대신 도자기를 썼다. 당시 중동 도자기의 품질은 중국 수준에 미치지 못해, 흰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페르시아산 코발트블루를 써서 멋을 냈다. 흰 바탕에 푸른 문양의 페르시아 양식이 징더전의 도자기 기술과 만나 청화백자를 탄생시켰다.

    ‘옥같이 희고 하늘처럼 푸르며, 거울처럼 투명하고 종이처럼 얇으며, 종과 같이 맑은 소리를 내는’ 징더전의 도자기는 세계적 히트 상품이 됐다.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은 대제국 중국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까지 널리 알려 중국 상품에 대한 수요를 촉발했다. 중동에서 큰 인기를 얻은 도자기는 유럽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중국 열풍’ 시누아즈리(Chinoiserie)

    근대 유럽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17~18세기 유럽 귀족 사이에 일어난 중국풍 취미), 즉 중국 열풍이 불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중국의 비단옷을 입고, 중국의 도자기에 중국의 차를 따라 마셨다. 포르투갈 황제의 여름용 별궁인 리스본 산토스 궁전에는 청화백자방이 있다. 피라미드형 천장의 4면을 청화백자 260점으로 빽빽하게 뒤덮은 방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선장들에게 “중국 자기를 얻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고, 유럽의 범선들은 매년 수백만 점의 도자기를 수입했다.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한 속물은 “중국 접시는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거”라며 자신의 “3펜스짜리 접시”를 자랑했다. 빛을 사랑한 화가 베르메르는 과일을 담은 중국 도자기의 아름다운 형상과 문양을 그리고, 접시 위에 반사된 창문의 형상까지 섬세하게 담아냈다. 정물화가들에게 과일을 담은 중국 도자기는 그림에 우아한 기품을 더해주는 필수요소였다.

    16세기를 전후로 중동과 유럽의 힘이 역전돼, 17세기 이후로는 유럽 시장의 소비가 이슬람권을 앞질렀다. 자연스레 징더전의 자기에도 고객의 요구에 따라 유럽 왕실·귀족 가문의 문장, 라틴어, 종교화 등이 새겨졌다. 징더전은 유럽 수출용 가마를 따로 만들어 유럽 취향의 자기를 대량생산했다. 이 자기들은 “Sapienti Nihil Novum(현자에게 새로운 것이란 없다)” 등의 라틴어 경구, 예수의 탄생·십자가형·부활·승천 등 4대 테마가 그려졌고, 종류도 일반적인 식기부터 맥주잔, 촛대, 겨자 항아리 등 유럽식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을 망라했다. 개중에는 접시 밑바닥에 치마를 걷어 올려 엉덩이를 보여주는 미녀가 그려져 있는 자기도 있었다.


    신중국을 품은 정강산(井岡山)

    고유명사 ‘China’는 ‘중국’을 말하지만, 보통명사 ‘china’는 ‘도자기’를 뜻한다. 어느새 중국과 도자기가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변두리 장시는 역설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상품을 낳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문화의 힘도 결국 국력을 따라간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힘은 중국을 능가했다. 중국은 더 이상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도자기 역시 예전처럼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영국은 동물의 뼛가루를 이용한 본차이나(bone china)를 발명하고 공장제 대량생산을 통해 도자기 최강자로 떠올랐다.

    청나라가 붕괴한 후 중국은 열강에 위협당하고, 안에서 지역 군벌들이 할거하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은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북벌을 단행했다. 쑨원은 정파를 초월해 국공합작(國共合作)을 하며 통일된 중국을 꿈꿨다.

    쑨원의 후계자 장제스는 순조롭게 북벌을 이끌어갔다. 그는 일단 국공합작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쑨원과 달리 공산당을 국민당의 암 덩어리로 여겼다. 1927년 3월, 남중국의 중심지인 난징과 상하이까지 손에 넣자, 북벌의 완성이 코앞에 다가왔다.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공산당과 노동조합을 습격했고, 이후 세력이 닿는 모든 곳에서 공산당 박멸 작전을 벌였다.

    위기에 빠진 공산당은 도박을 벌였다. 중국의 도시와 농촌 전역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국민당 군대는 맨주먹 민중의 산발적 봉기를 간단히 진압했다. 자포자기성 자살행위와도 같은 8~9월 봉기 중에 저우언라이의 난창 봉기와 마오쩌둥의 후난성 추수 봉기가 있었다. 추수 봉기의 실패로 마오쩌둥과 1000명의 동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군사력의 중요성을 절감한 마오는 주장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군사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수호지’ 양산박의 재현

    당 중앙은 마오가 군대에 집착하며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며 비판했지만, 마오는 당이 ‘군사적인 문제를 무시하면서 동시에 대중을 무장화하려는 모순된 정책’을 펼친다고 비판하며 창사 공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마오는 90%의 세력을 잃었고, 국공합작 붕괴로 국민당 직함을 잃었다. 명령 불복종으로 공산당의 직책마저 잃었고, 심지어 한때 공산당원의 당적이 박탈되기도 했다.

    1928년 여름, 마오는 고향 후난을 떠나 후난과 장시의 경계에 있는 정강산으로 도망쳤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바위투성이 산골 오지로 길도 없고 수레도 없었다. 정강산으로 도망쳤다기보다 정강산에 갇힌 셈이었다.그러나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역경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지금껏 쟁쟁한 선배들에게 눌려 있던 풋내기 마오는 정강산에서 진정한 정치가로 거듭났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천두슈 교수는 ‘프티부르주아지’에 불과한 농민들은 혁명의 주역이 될 수 없고, 오직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지도를 따를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오는 중국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야말로 중국 혁명의 주역이라고 보았다. 마오는 소총 120정을 빌리고 정강산 산적 600명과 유랑민을 받아들이며 솜씨 좋게 세력을 불려나갔다.

    대도시 창사의 공산당 대표는 “어떻게 산에 마르크스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일갈했지만, 마오는 오히려 산이 중요한 근거지라고 생각했다. 국민당이 천하를 지배한다고 해도  변두리 산골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공산당이 산에 확고한 근거지를 마련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나갈 수 있다. 바로 ‘수호지’ 양산박의 재현이다. 마오는 말했다.

    “근거지가 자리 잡은 지역과 부대의 관계는 궁둥이와 사람의 관계와 같다.”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쉬지 못하는 사람은 곧 지쳐 쓰러지고, 근거지가 없는 세력은 곧 소멸한다. 공산당·홍군은 물고기와 같고, 인민은 물과 같다.

    마오는 정강산에서 부호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일률적으로 15%의 세금을 받았다. 모든 고난을 함께 똑같이 짊어지는 평등과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열악한 상황을 버텨나갔다.

    무모한 군사적 모험을 하지 않고, 잘 도망치다가 재빨리 규합해서 적보다 병력 숫자가 많아졌을 때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확립했다. 또한 “규율이 거의 없는 1만 명의 오합지졸”에게 정강산의 3대 규율을 불어넣었다.

    “명령에 복종하고, 가난한 농부의 재산은 어떤 것도 빼앗지 말아야 하며, 몰수한 지주의 재산은 즉시 정부에 전달해서 처리한다.”


    ‘마오의 연인’ 허쯔전 vs 장칭

    마오주의의 거의 모든 것이 이때 싹을 틔웠다. 정강산은 마오의 학교이자 양산박이었다. 게다가 정강산은 마오의 결혼 소개소이기도 했다. 여기서 마오는 세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을 만났다. 당시 18세, 활달하면서도 기품 있는 미녀 허쯔전은 곧 마오의 ‘혁명적 연인(愛侶)’이 됐다.

    당시 홍군은 명장 주더(朱德)와 마오가 이끄는 투 톱 체제였다. 홍군 사이에서는 유행가가 떠돌았다.

    “주 군장(軍長)은 참호 사이로 쌀 나르느라 열심이고, 마오 군장은 연애 하느라 열심이네.”

    마오는 허쯔전과의 열렬했던 사이를 이렇게 회고했다.

    “(허쯔전은) 나와 함께 산 10년 동안 연초에 아이를 낳고 연말에 또 임신을 해 모두 6명의 아이를 낳았다.”

    마오는 정강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우언라이·주더 등과 함께 장시성 남부에 장시 소비에트를 마련했지만, 당시 공산당 주류의 오판으로 결국 장시 소비에트도 궤멸됐다. 공산당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훗날 ‘대장정(大長征)’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었지만, 성공했으니 미화된 역사일 뿐이다. 당시 공산당은 그 어떤 ‘약속된 땅’도 희망도 없이 도망칠 뿐이었다.

    허쯔전은 셋째를 임신한 몸으로 장시성에서 산시성까지 2만5000리를 걸으며 몸에 스무 군데가 넘는 부상을 입었다. 조강지처(糟糠之妻)란 쌀겨와 지게미를 함께 먹던 아내, 즉 가난과 고생을 함께 겪은 아내라는 의미다.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더라도 조강지처라면 내칠 수 없었다. 고난을 함께 겪은 동지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쯔전은 마오와 폭격을 함께 맞아가며 사지(死地)를 헤쳐 나왔다. 조강지처도 이런 조강지처가 없다. 후난성 ‘촌놈’ 마오가 공산당 주석이 되고, 신중국을 열 수 있었던 배경에도 허쯔전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마오는 바람기를 자제하는 남자가 아니었고, 허쯔전은 이를 용납할 여자가 아니었다. 허쯔전은 말했다.

    “우리 둘이 싸울 때, 그가 나무 걸상을 들어 올리려고 하면 나도 바로 의자를 들어버리지.” 마오 역시 지지 않았다.

    “허쯔전은 무쇠와 같고 나는 강철과 같아서 둘이 만나면 크게 부딪치기만 할 뿐이다.”

    1938년 상심한 허쯔전은 치료 겸 유학차 모스크바로 떠났고, 마오는 곧 산둥성 출신 여배우인 장칭(江青)을 총애했다. 오랜 혁명 동지들은 허쯔전과 장칭을 비교하며 걱정했다.

    “허쯔전은 동고동락해온 오랜 동지로, 혁명의 정이 깊고 서로가 믿고 소통하는 사이였소. 그러나 장칭은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고 젊기 때문에, 여러 동지와 공통된 경험을 나눌 수 없소. 만약 주석님 곁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일 텐데, 이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훗날의 역사는 그 우려대로 됐다. 1947년 허쯔전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마오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소련의 전쟁 기간에 생활이 많이 힘들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습니다. 장정 때보다 더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다 과거의 일이죠. 저는 자오자오(嬌嬌·딸 리민)와 안칭(岸青·아들 마오안칭)을 데리고 베이징에 올라가 주석님을 뵙고 악수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의 특파요원들은 허쯔전이 베이징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리민과 안칭만을 데려갔다. 마오의 답장은 박정했다.

    “혁명이 최우선이고, 그다음이 건강이고, 남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오. 대국적 관점에서 행동합시다.”



    변두리 장시의 내일

    허쯔전은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59년 여름 장시성의 여산 회의에서 20여 년 만에 재회했다. 마오는 짧은 만남 뒤 줄담배를 피우며 탄식했다. “저 여자는 아주 늙고 병이 깊구나.”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여산 회의가 끝난 후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신랄히 비판한 펑더화이(彭德懷)는 숙청됐고 린뱌오(林彪)가 신임 국방부장이 됐다. 마오는 옛 징강산 혁명 시절을 재현하려는 듯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일생 최대의 오점을 남기고 1976년 세상을 떴다. 허쯔전은 1984년 상하이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중국인들은 후난 남자와 장시 여자가 고집이 세고 다루기 어렵다며 ‘장시의 늙은 처, 후난의 노새(江西老妻,湖南騾子)’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시 여자 허쯔전 역시 겉으로는 씩씩해도 속으로는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였다. 또한 후난 남자 마오쩌둥과 장시 여자 허쯔전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은 ‘장시의 늙은 처, 후난의 노새’란 말과 얄궂게 겹쳐져 쓴웃음을 짓게 한다.

    오랜 역사 동안 장시는 줄곧 변두리였고, 오늘날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장시에 대한 뉴스는 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과 조류인플루엔자, 돼지 폐사, 밀감 흉작 등 농업 관련 기사가 많다. 성도 난창은 장강 중류 개발의 중요 거점이기는 하지만, 후베이의 우한, 후난의 창사에 여러모로 밀린다.

    그러나 장시는 변두리이면서도 중국을 대표하는 도자기를 낳아 세계를 휩쓸었고, 아름다운 자연은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으며, 숱한 불후의 명시를 낳았다. 장시의 예기치 않은 내일을 기대해볼 수 있는 이유다.




    김용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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