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지엽말단적 독서의 힘

  • 이선경|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입력2017-05-19 10: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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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방법


    히라노 게이치로,
    김효순 역,
    문학동네, 2010














    Promenade 산책

    이정호,
    상출판사, 2016










    이번엔 한번 지엽말단적으로 읽어보자. 지난달 칼럼에서 시도한 훑어보거나 읽지 않는 독서법은 부담은 없을지라도 일말의 아쉬움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떤 책을 자발적으로 손에 든 독자라면 일단은 한 줄이라도 성실하게 읽고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숲보다는 나무에 매달린 이파리 하나를 통찰하는 독서를 해보자.

    독서도 유행을 따라 느림을 추구한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책을 읽는 방법’에서 제안하는 방법은 ‘슬로 리딩’이다. 슬로 리딩은 시대가 주는 속독(速讀)의 압력을 거부하는 독서법이다.



    #문명 이전의 독서법

    언젠가부터 빡빡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질서 한 편에는 삶의 질과 내면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슬로 라이프나 로하스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삶에는 문명 이전의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존재한다. 독서에서도 문명 이전의 감각은 인간적 깊이를 더해주고 각자의 몸에 꼭 맞는 교양을 제공한다고 저자는 믿고 있다.

    책과 독서에서 문명 이전의 상태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이전을 말한다. 책을 대량으로 보급하고 유통할 시스템이 갖추어지기 이전, 사람들은 모두 슬로 리더였다. 칸트나 헤겔이 평생 읽은 책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의외로 적다. 손으로 쓴 책은 매우 귀했으며, 그 유통과 순환이 지금처럼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수백 년 전 책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재즈 음악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는 어릴 적 음반을 단 석 장만 갖고 있었다고 한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슬로 리더, 슬로 리스너였던 것이다. 그 협소한 범위 안에서 생기는 깊이와 울림이 분명 문명 이전에는 있었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든 일정 수준의 속도와 양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지금의 시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난 호에서 제시한 것처럼 나무보다 숲을 보거나 책 그 자체보다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문명 이전의 방식이 가진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명 이전의 독서법 즉 ‘슬로 리딩’이란, 무리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범위에서 천천히 많은 시간을 들여 읽는 독서법이다. 그래서 여러 번 다시 읽기가 권장되며, 읽다가 지쳤을 때는 당연히 책을 덮어야 한다. 양의 독서보다는 질의 독서, 망라형 독서보다는 선택적 독서로 발상을 전환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슬로 리딩에서는 노이즈의 볼륨을 키워야 하며 오독이 풍요를 만든다. 문명의 독서법은 노이즈보다는 메시지를 중요시한다. 양과 속도와 스펙터클을 강조하면서 문명이 요구하는 것은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골격만 추려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때로는 목차만으로도, 때로는 표지만으로도 골격을 추려내는 속독이나 발췌독의 방법이 권장된다.

    그것은 독자가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거나 아는 것을 토대로 새로운 정보를 연결해 메시지를 찾아나가는 작업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외부의 메시지를 따라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버리고, 우리 안에서 소화할 만큼만의 메시지를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면 꼭 책의 주요 부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중도에서 빠져나와 한 권의 책이 가진 잡다한 부분에 주목하며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천천히 사유할 수 있다.



    #노이즈의 볼륨을 높여라

    독서에서 노이즈의 볼륨을 키운다는 것은 한 권의 책이 가진 복잡계와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확인하고자 책을 읽지 않는다. 두 사람 이상의 인물이 어떤 사정으로 만나 깊은 관계를 맺고 경우에 따라서는 헤어지는 방식의 연애의 정의를 알고자 연애소설을 읽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신선함이나 충격과 만나기 위해 연애소설을 읽는다. 얼핏 보기에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정경 묘사나 주인공의 아주 사소한 몸짓의 노이즈가 가져오는 미묘한 차이.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오로지 이 연애, 오로지 당신에게만 가능한 이 감정을 품게 한다. 노이즈를 따라가는 것은 한 작가가 쓴 배후에 펼쳐진 엄청나게 광대한 세계를 만나는 샛길이기도 하다. 그 작은 소음이나 이물감 하나가 사실은 그 한 권의 책이 태어나게 된 가장 깊은 곳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이유로 슬로 리딩에서는 조사의 사용이나 형용사나 부사가 주는 미묘한 위화감 모두가 중요해진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실제 몇 편의 작품 구절을 슬로 리딩한 예시가 수록돼 있다. 게이치로는 겨우 두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 카프카의 소설 ‘다리’를 천천히 여러 번 다시 읽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첫 문장 “나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나는 다리였다”에 사용된 형용사와 부사 하나 하나가 그에게 준 위화감의 원인을 규명하며 아주 오래도록 그 첫 문장에 머무른다. 나아가 그 위화감의 이유를 인간이 관료제 사회에 가지는 비판으로 규명하고 창조적으로 오독한다. 현대의 은둔형 외톨이 청년에 대해 쓴 그의 소설 ‘최후의 변신’은 다리로 변신한 인간, 다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카프카의 한 문장을 오래도록 읽은 슬로 리딩의 결과다. 결국 한 권의 책에서 만난 독자 나름의 노이즈는 각자의 마음에서 울리는 노이즈와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읽고 난 후 시작되는 독서

    그리고 이러한 노이즈와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 권장되는 것이 묵독이다. 최근 유행하는 낭독이나 필사는 그리 추천되는 방법은 아니다. 낭독이란 잘 읽는 것에 의식을 집중하는 나머지 주의력이 산만해질 수 있으며, 필사는 정확하게 베껴 쓰기 위해 원본을 자주 확인하다 보면 흐름이 끊어져 깊이를 파악할 수 없다. 천천히 반복해 묵독하는 것이 성대의 육성이나 손의 움직임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책의 혼과 비밀이 독자의 보폭을 따라 펼쳐지는 슬로 리딩의 세계다. 그리고 한 사람의 독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묵독의 리듬과 속도는, 각자의 내면이 작동하는 고유의 보폭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진정한 독서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각자의 고유한 보폭과 만난 책의 노이즈를 각자의 생활에서 살려나가는 것이 독서 체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게이치로의 경우처럼 반드시 새로운 소설일 필요는 없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이정호의 그림책 ‘Promenade 산책’은 그런 의미에서 슬로 리딩적 독서법의 좋은 예다. 책을 모티프로 그려진 일러스트에 화두 같은 한 줄의 문장이 추가돼 있다. 처음 비행기의 날개였던 책은, 부드러운 커튼의 실루엣이 돼 새로운 세계로 연결해주며, 집을 이루는 벽의 한쪽 면이 된다. 때로는 책등 모서리가 화산의 분출구로 변하고, 활짝 펼친 책의 양면이 천둥이 내리치는 밤하늘이나 등대가 비치는 밤바다로 확장된다.

    그러면서 가시적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던 말들이 그림과 더불어 애초에 작가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상상하게 한다. 그래서 제목인 ‘산책’은 책 속을 거니는 것일 수도 있으면서,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책이기도 하면서, 독자가 막 계산을 마친 ‘산 책’으로 또다시 독서를 손짓한다.

    자, 이제 독서의 바통은 당신에게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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