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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출구? 국회 동의 거치면 美·中이 거부하기 어려워”

一帶一路 특사 박병석 의원

  • 이문기|미래전략연구원 원장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사드 출구? 국회 동의 거치면 美·中이 거부하기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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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習주석, 文대통령 인생 역정에 공감한다고 말해
  • ●한중 관계? 거대한 빙산 수면 윗부분만 녹기 시작
  • ●코리아 패싱 없을 것이라고 양제츠 답변해
  • ●해머(초단기적 강력한 압박)와 스테이크로 北 다루자
“사드 출구? 국회 동의 거치면 美·中이 거부하기 어려워”

[박해윤 기자]

19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지낸 박병석(65·더불어민주당) 의원은 40년 넘게 중국을 탐구해온 정치인이다. 1세대 중국통(中國通). 6월 8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그는 “번갯불에 콩을 구웠는데 콩이 잘 구워져 다행”이라고 했다. 5월 14일부터 이틀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21세기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정상 포럼’에 한국 정부 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스무 살 때 ‘中國’을 진로로

 일대일로 포럼은 시진핑 주석이 핵심 대외전략으로 추진한 행사로 한국 각료만 부르지 않아 논란이 일었으나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시 주석의 통화에서 초청이 이뤄졌다. 한중 갈등 이후 중국에 대표단을 파견한 첫 사례다.

“3박 4일, 70시간 베이징에 체류했는데 체력 소모가 컸습니다. 긴장의 연속이었죠. 한중 관계가 악화한 후 첫 사절단으로서 상황을 뒤틀리게 하면 어떡하나 하는 중압감이 컸습니다. 중국 학도로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최악인 현 상황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도 컸고요. 사람이 왜 기도하는지 절감했습니다.”

실제로 만나보니 시진핑 주석은 어떻던가요.
“일전에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해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고요.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사람이 중후합니다. G2 국가이자 수천 년 역사를 지닌 나라 지도자다운 면모를 갖췄습니다.”

국회에서 중국 관련 경험이 가장 많습니다. 중국어도 능통하고요. 시진핑 주석과도 중국어로 대화했더군요. 중국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닉슨-마오 회담을 TV로 지켜본 게 중국으로 진로를 바꾼 계기입니다. 그때 아버지와 ‘앞으로 중국이 굉장히 중요해질 것’이라는 내용의 대화를 나눴습니다. 성균관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중국어에 갈증을 느껴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2년간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975년 9월 중앙일보 입사 면접 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합격하면 무슨 부로 가고 싶으냐’고 묻더군요. ‘베이징 특파원 하렵니다’라고 답했더니 면접관이 하나같이 놀랐어요. 당시엔 중국이 아니라 중공이었죠. ‘무찌르자 중공 오랑캐’ 외칠 때입니다. 산둥(山東)에서 넘어와 음식점 하는 화교 외엔 중국어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고요.”

1972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과 회담했다. 한해 전 핑퐁 외교를 마중물로 삼은 미중 데탕트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그는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이었다.

대만서 수학한 ‘1세대 中國通’

“사드 출구? 국회 동의 거치면 美·中이 거부하기 어려워”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진입한 탱크부대 앞을 한 남성이 가로막고 서 있다.[텔레그래프]

그는 2000년 16대 총선 때 국회에 들어온 5선 의원이다. 한·중의원외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82~83년 대만 정치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85~90년 중앙일보 홍콩 특파원으로 일했다. 1994~95년에는 워싱턴주립대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국제관계(중국학)를 연구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민주당 정책위의장, 국회 정무위원장을 역임했다.

중국 대륙이 격변할 때 홍콩 특파원으로 일했습니다.
“큰 신문사도 해외 특파원을 3명 정도만 뒀을 때예요. 홍콩에 기자를 보낸 것은 중국을 살피는 게 목적이었죠. 홍콩에 부임했더니 중국어 하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외교관도 1~2명만 중국어를 했어요.

중국통 1세대는 대부분 나처럼 대만에서 공부한 이들입니다. 1982~83년 대만 정치대학 다닐 때 외교부에서도 막 대만으로 외교관을 유학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만 정치대학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 중국어 웅변대회에서 1등 한 적이 있습니다. 홍콩 특파원 시절 총영사관 사람들이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 일이 잦았죠. 총영사관 행사 때 통역을 한 적도 있고요. 신화사(중국 뉴스통신사) 홍콩지사, 런민(人民)일보 인사들과 홍콩에서 교분을 나눴습니다. 한중수교가 이뤄지기 전이었으나 경제 관계가 트이기 시작해 중국도 한국에 관심이 컸거든요.”

1989년 6월 톈안먼 사건 때 특히 분주했겠습니다.
“6·4 톈안먼 사건 직전인 4월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습니다. 후야오방(胡耀邦)이 그때(4월 15일) 죽어요.”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언론자유 확대를 비롯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다 1987년 1월 실각했다. 후야오방의 죽음은 1989년 중국 민주화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옌볜에서도 후야오방을 추념(追念)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옌볜에서 돌아온 후 민주화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베이징에 들어가려고 비자를 신청했는데 안 내주는 거예요. 특파원 신분으로는 비자를 못 받으니 다른 방식으로 우여곡절 끝에 비자를 받아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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