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호

명사 에세이

‘중동’은 내 운명

  • 인남식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장

    입력2017-06-21 10: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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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전 이야기다. 중동정치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귀국 후, 시간강사만 5군데씩 뛰며 하루하루 버겁게 지냈다. 사실 유학을 준비할 때 모교 지도교수님은 내게 중동을 전공하지 말라고 했다. 국내 대학에 자리 잡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자리도 아랍어 전공자들에게 돌아가는 당시 추세로 보아 평생 실업자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보이셨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호기심에 이끌리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았다. 교수님은 세세한 추천서를 써주면서도 “중동 공부하고 돌아오면 싹수가 노란 게 아니라 아예 하얄 텐데 어쩌니?” 하시며 염려를 놓지 않았다. 나를 가장 아껴주시는 교수님의 안타까운 혼잣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펄펄 끓는 호기심

    이 정도 결기로 유학을 갔으면 극적인 반전이 열릴 법도 한데, 현실은 지독히도 ‘현실적’이었다. 학위를 받고 와보니 교수님 말씀 그대로였다. 채용공고가 난 대학에 문의할 때마다 중동 전공자를 뽑는 데 부정적이었다. 아예 지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아이 둘 딸린 가장에겐 막막한 현실이었다.

    호구지책이 필요했다. 닥치는 대로 강의를 맡았다. 참신한 이론으로 무장한 채 학문적 성과물을 쏟아내야 할 젊은 박사가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면서 시간강사로 투신했다. 과목은 전공과 상관없이 온갖 종류의 정치학을 망라했다. 정작 중동학계엔 발 디딜 여지가 없었다. 아랍어과를 졸업하지 않은 상황에서 뜬금없이 나타난 나는 뻘쭘하게 겉돌 수밖에 없었다. 정치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중동정치를 가르칠 기회가 없었다. 연세대와 한국외대 정도를 제외하고 중동정치를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



    이 학교 저 학교를 오가며 전공과 상관없는 시간강사 생활에 지쳐 있던 상황에서 나는 한 재단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됐다. 정규직이었다. 그러나 주로 동아시아 연구를 하는 재단이었다. 여기저기서 전공을 바꾸라고 권유했다. 재단에서 나를 아껴주시던 모 대학 경제학과 원로교수님은 “인 박사, 중동 공부 참 귀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아냐. 그냥 동아시아로 바꿔. 어차피 박사 공부는 이론이나 방법론 훈련한 거니까 상관없어. 한국에선 동아시아 정치를 가르쳐야 자리가 생겨. 아니면 북한 해보는 게 어때?”

    진심을 담아 걱정해준 말씀이었지만, 의지와는 별개로 깜냥 자체가 안 되는 것을 어찌할까. 무엇보다 여전히 중동에 대한 펄펄 끓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팔(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아랍 민족주의, 이슬람 부흥운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뛰는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른 분야를 넘나들란 말인가. 만일 그렇게 해서 자리를 잡고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되면 그건 더 큰 문제였다.

    정규직 직장은 그렇다 치고, 무엇보다 중동을 가르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시간강사로 강의하는 여러 수업에서 살짝 중동 정치를 맛보기로 가르쳤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연세대 학과목 편성 담당자에게 편지를 썼다. 시대가 바뀌고, 9·11테러가 터졌고, 알 카에다가 창궐하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서 학부 교양과정에 중동 수업을 꼭 개설해줬으면 좋겠다는 간언이었다.

    그해엔 답이 없었지만 이듬해 뜻밖의 기회가 왔다. 학부대학에서 다양한 강의를 발굴하려 하는데 제안해보라는 연락이었다. 심혈을 기울인 강의계획서와 목표, 성과 등을 정리해서 냈다. 2003년 2학기에 제안서가 받아들여져 드디어 연세대 학부대학에 ‘중동과 이슬람’이라는 과목이 개설됐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목마름을 갖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학에서, 그것도 모교에서 ‘중동’을 가르칠 수 있게 됐기에 시간강사지만 기쁨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강의했다.



    이뤄진 중동 전문가의 꿈

    이때 만난 제자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남았다. 이 수업을 계기로 연세대에선 ‘엘 네피제(창문)’라는 자생적 중동 연구모임이 만들어졌다. 멤버 중 일부가 중동에 인생을 걸기도 했다. 아랍 전문 외교관, 해외기업 아랍 주재원, 중동 유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 숙명여대에서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정치론’이 개설돼 강의했고, 서울대에서도 ‘중동·아프리카 지역연구’ 수업을 맡았다. 소수이지만 지금도 중동정치를 가르치는 대학이 늘고 있다.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시간강사 생활에 정신없던 2003년,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제3세계 특수지역 정세 연구 용역 공고가 떴다. 별 기대 없이 제안서를 제출, 응모했더니 덜컥 선정됐다. 당시 내게 용역비 250만 원은 큰돈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논문을 써서 냈고, 발표를 마쳤다. 덜덜 떨며 숱한 외교관 앞에서 중동지역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발표를 했더랬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용역비 잔금인 150만 원을 성공적으로 받고 아버지 칠순 선물을 마련할 수 있겠구나 싶어 기뻐하며 귀가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다시 시간강사 생활은 반복됐다.

    그러던 차에 2003년 이라크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2004년 김선일 참수 사건이 일어났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외교부 싱크탱크에 중동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여론이 제기됐다. 결국 2005년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중동 및 국제안보 분야 조교수를 뽑는다는 공채 공고가 떴다. 용역 선정 이후 외교안보연구원 동정에 관심이 있었고, 냉큼 지원했다. 혹독한 네 차례의 면접 끝에 채용됐고, 국립외교원으로 전환된 지금까지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생각지도 못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뿐이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엄위한 외교환경 속에서 중동지역 연구자를 채용하게 된 경로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임용된 후 소위 미·중·일·러, 북한 등 주류 연구 주제는 아니지만, 나 나름대로 중동을 통해 국제정치의 판을 해석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단순한 지역 연구자의 패턴을 벗어나는 경험을 얻었다. 나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학문적인 긴 호흡으로 탁월한 성과물을 내는 순수 학자가 아니다. 대신 전체 구도 속에서 어떤 흐름으로 중동 정세가 돌아가는지, 미국은 어떻게 판단하고 움직이는지를 추적하는 정책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손에 잡히는 국제정치를 연구하려 지금도 즐겁게 그리고 치열하게 일한다.

    국립외교원으로 탈바꿈한 이 직장에서 외교관 후보자 과정, 즉 교육과 훈련에 더 많은 부담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가끔 일에 밀려 힘들 때마다 의식적으로 옛 생각을 떠올린다. 십수 년 전 ‘중동’을 가르치고 싶어 그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 만나고 읍소하던 때 생각을 떠올린다. 지금은 어떠한가. 여기서 뛰어난 외교관 후보자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전 세계 각처에 투입돼 일할 미래 외교관들에게 ‘중동’을 마음껏, 한 학기 내내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중앙부처 고위공무원들과 중견간부들에게 맘껏 ‘중동’을 강의하고 있지 않은가. 우수한 대학의 학생들과 만나 그들과 어울려 한 학기 동안 중동에 함께 푹 빠져 있지 않은가. 호기심을 따라 막무가내로 걸어온 여정,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 지난 15년이다.




    인남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영국 더럼대 중동정치학 박사
    ● 現 국립외교원 미주연구부장(중동정치·테러리즘 전공),
    한국중동학회·이슬람학회 상임이사,
    한국국제정치학회 상임이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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