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호

화제의 저자 | 국내 완역 ‘인민 3부작’ 저자 프랑크 디쾨터 홍콩대 인문석좌교수

여기 그 혁명이 인민에게 무슨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혁명의 영웅담에 아직도 취해 있는가?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입력2017-06-22 13: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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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오쩌둥 통치기간 중국 인민 5200만 목숨 잃어”
    •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유토피아 환상의 산물”
    •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는 덩샤오핑이 아니라 평범한 인민”
    • “경제성장의 환상 조작은 일당독재국가의 특징”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중국 하면 떠오르는 책은 아마도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과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일 것이다.이들 책은 주로 마오가 이끌던 홍군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기 전 ‘수호지’의 양산박 108호걸을 연상시키는 현대적 영웅재사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하지만 마오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역사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드물다. 있다 해도 다이허우잉(戴厚英)의 ‘사람아, 아 사람아’와 위화(余華)의 ‘인생’ 같은 소설 정도다. 이들 작품에서 마오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주로 1965~1976년의 문화대혁명(이후 문혁)기에 집중돼 있을 뿐이다. 그러고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이후 중국의 눈부신 성공을 다룬 책이 넘쳐난다.

    이는 김명호 씨가 인물평전으로 엮어가고 있는 ‘중국인 이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현대 중국인은 문화대혁명 4인방 정도를 제외하곤 모두 재주가 빼어나거나 인덕이 남다른 사람으로 그려진다. 냉혹한 마오의 본색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를 외면한 채 만년 2인자 자리 지키기에 급급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인간미 넘치는 지도자로만 포착된다. 괴팍함과 음흉함에 있어선 마오를 능가했던 린뱌오(林彪)에 대해선 자신의 위세를 업고 중국 최고의 미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이야기까지 미담으로 포장된다.

    물론 그 대척점에 위치한 책도 있긴 하다. 소설 ‘대륙의 딸’의 저자 장룽(張戎)과 남편이자 역사학자인 존 핼리데이가 함께 집필한 ‘마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방적으로 마오를 폄하하는 내용으로만 가득해 균형감을 상실했다. 마오에게 불리한 내용만 나열하다 보니 객관성에도 의심이 든다.



    혁명의 신화 벗겨낼 기록

    중국 현대사에 대한 이런 갈증을 풀어줄 책이 ‘인민 3부작’이다. 네덜란드 출신 역사학자인 프랑크 디쾨터(56) 홍콩대 인문학 석좌교수가 집필한 이 두툼한 책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 이후 1976년 마오가 숨질 때까지 30년간의 중국 현대사를 철저히 사실에 입각해 기술됐다. 그중 상당수는 2000년대 초반 비밀 해제된 중국 공산당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문서다.

    중국 공산당의 기록물은 중앙 기록보관소와 성(省) 기록보관소, 시(市)·현(縣) 기록보관서로 나뉘어 보관된다. 중앙 기록보관소는 접근이 어렵다. 공산당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도 아킬레스건은 존재했다. 디쾨터 교수는 성 기록보관소가 중앙에서 보내온 문건뿐 아니라 하부에서 보내온 보고서까지 사본을 다 갖추고 있어 자료가 풍성할 뿐 아니라 비밀 해제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허베이(河北),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산둥(山東), 쓰촨(四川), 윈난(雲南) 등 10개 성 기록보관소 문서를 토대로 대약진운동이 펼쳐진 4년간 중국에서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적한 ‘마오의 대기근-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를 집필했다. 대약진운동은 농업과 산업 집산화를 추진한 인민공을 통한 사회주의식 생산량 증대운동으로 마오에 의해 대대적으로 주도됐지만 허위 보고와 이를 토대로 한 계획경제로 인해 수천만 명을 굶어 죽게 만든 대참사를 낳았다.

    디쾨터 교수는 이 비극이 마오의 과대망상과 편집증과 그에 부화뇌동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초래한 역사상 최악의 인재(人災)임을 회의석상의 발언과 구체적 통계로 뒷받침했다. 그는 10개 성의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그 4년간 4000만~4500만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했는데 이는 3000만 명 안팎으로 알려진 과거의 추산을 훌쩍 뛰어넘는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들의 희생이 잘못된 계획경제 때문만이 아니라 중앙에서 제시한 목표치 달성을 위해 당 관료들이 가장 야만적 방식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노동력을 약탈했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점에 있다. 당 관료들은 자신들이 배급하는 식량을 그들의 노동력과 연계함으로써 힘없고 약한 자들을 더욱 사지로 몰아넣었다. 작업에 뒤처진 사람은 한겨울에 벌거벗게 하는가 하면 일이 힘들다고 한 임산부를 인두로 지지는 고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마구잡이 폭력에 내몰려 자살을 택한 사람만 100만~300만에 이른다고 디쾨터 교수는 추산했다. 그러면서 마오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추진한 것은 ‘중국 인민의 현대적 농노화’였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파멸

    책을 읽으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인민을 앞세우는 척하면서 실제론 인민을 실험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인민 3부작’이라는 제목이 반어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겨냥한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목표도 있었다. 인민 3부작을 쓰기 전의 내 궁금증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인민은 어디에 있는가’였다. 정치학자들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고공 정치(high politics)’에 대해선 길게 다뤘지만 그 여파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닥쳤는지에 대해선 거의 다루지 않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중국학자 대다수는 중국 정권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재생산해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정권은 인민을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국가가 활용해야 할 추상, 숫자, 통계, 재료로만 바라봤다. 일당국가에서 모든 것은 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우리는 결코 그 인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중국 공산당의 기만술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서구의 환상이 함께 작용한 결과가 아닐지.
    “무엇보다도 중국 공산당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보관소 자료가 일부 공개됐다 하더라도 대다수는 여전히 감춰져 있다. 중국 정부가 과거를 감시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자체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상실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서구의 환상’이라고 불렀지만 더 정확하게는 ‘오리엔털리스트(동양찬미주의자)의 환상’이 작용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에게 중국은 하나의 대안이다. 1950년대까지 이데올로기에 심취한 전 세계인은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벌어진 일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하게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는 많은 이에게 중국이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신화는 여전히 강고하다.”



    ‘공칠과삼’ 주술에서 깨어나자

    인민 3부작 시대 중국의 지도자는 마오쩌둥이었다. 당신의 책을 읽다 보면 중국 인민에게 마오는 과거의 황제와 큰 차이가 없다. 반역을 통해 권좌를 차지하고 메마른 영혼을 지닌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마오의 끔찍한 범죄행각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숫자놀음 아래 무의식적으로 덮어졌다.
    “공칠과삼이란 표현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에 본격 돌입한 1956년 마오 자신이 스탈린에 대해 적용한 표현이었다.(디쾨터 교수는 책에서 마오가 스탈린에게 꼼짝 못했기 때문에 ‘1953년 스탈린의 죽음은 마오에겐 해방이었다’라고 썼다.) 그런데 반어적이게도 덩샤오핑은 1980년대 같은 표현을 마오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공식 평결에 적용했다. 하지만 인민3부작에서 제가 묘사한 것처럼 실제 현실에서 공산주의는 그런 숫자놀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재앙 그 이상이었다.”

    소련과 비교하면 마오쩌둥은 혁명가로서 레닌과 학살자로서 스탈린의 면모를 다 갖고 있다. 당신이 보기에 그는 레닌에 가까운가, 스탈린에 가까운가.
    “마오쩌둥은 레닌이면서 스탈린이다. 그 둘(레닌과 스탈린)은 인류에 대한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20세기의 다른 많은 독재자도 그렇게 유죄판결을 받았다.(마오에겐 그런 유죄판결이 없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

    어떤 이들은 소련의 레닌-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덩샤오핑을 역전해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당신 책 속의 덩샤오핑 역시 수만 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국민당군의 총알받이로 내몬 냉혈한이다. 1957년 문화대혁명의 전조라 할 반우파투쟁 때 숙청 인원을 50만 명으로 할당한 마오의 지시를 실행에 옮긴 행동대장이었다. 당신은 ‘마오의 싸움개’라는 표현까지 썼다. 대약진운동 기간에도 수천만 명의 농민이 기아에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무자비한 곡물 강출을 옹호하고 다녔다. 덩의 공과 과의 비율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공과 과의 비율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덩이 문혁 기간 비교적 상처를 덜 받고 살아남은 것은 마오의 영악한 정치적 타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덩이 공산당 일당독재를 존속시킬 강경파임을 간파한 것이다. 1976년 마오가 죽고 나서 덩이 착수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덩을 개혁개방의 설계자로 묘사하곤 하는데 인민 3부작의 마지막 권에서 묘파했듯이 개혁개방의 진정한 설계자는 평범한 인민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마오 집권 마지막 5년 기간에 계획경제의 기초를 무너뜨린 주역이자 암시장을 열고, 지하공장을 운영하고, 집단자산을 나눠 가짐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집산화 계획을 조용히 포기하도록 만든 주체다. 그들이 시장을 되살려내 경제성장을 이룩한 사람들이다. 덩은 그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하고 경제성장을 당의 재건에 이용할 정도의 영민함을 갖췄을 뿐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누리고 있는 경제성장은 중국공산당이 없었다면 더 빨리 이뤄지지 않았을까.
    “일당국가에 관한 논지의 핵심은 모든 게 항상 정치와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경제와 연관돼 있지 않다. 중국에선 지금도 수억 명의 사람이 절망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한국 역시 중국에 대한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중국을 움직여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2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의 2차대전 승전기념일에 천안문 위에 올라가 축하한 것도 그런 기대의 산물이었다. 이를 지켜본 당신의 소감이 궁금하다.
    “만일 중국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이는 마오 시대의 중국도 하지 못한 일이지만) 6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할 통일된 한국을 원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중국을 국제정치상의 동등한 동반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매우 이질적 천에서 잘라낸 한 조각처럼 그 정권을 다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은 그 구조나 사고방식에서 여전히 레닌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2030년이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란 관측과 중국식 경제성장이 한계에 달했기에 다시 ‘미국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북핵문제가 악화되면서 한국은 미국이냐 중국이냐는 극단적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중국학자로서 당신의 충고는 무엇인가.
    “나는 정치인이 아니며 국제관계 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역사는 경제적 측면에서 하나의 기본 원칙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경제성장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조작의 대가들이 나치독일과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일당독재국가라는 점이다. 대공황이 들이닥친 1930년대 자본주의보다 더 효율적으로 경제를 통제할 것이란 확고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이 미국에서 소련으로 이주했지만 파국적 결말을 맞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 통제를 강조하는 국가는 경제적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해낼 수 없다. 한국이든 일본, 미국, 독일이든 민주국가라면 비록 그 과정이 불평등하고 무질서해 보일 순 있지만 일당독재국가보다 월등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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