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해외이슈

트럼프가 불 지른 30대 사막 왕자들의 자존심 대결

카타르 봉쇄사태 왜 발생했나

  •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입력2017-07-21 11: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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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계 200여 개 국가 중 왕국은 얼마나 될까. 30개국 안팎이다. 대륙별로 봤을 때 아시아가 13개국으로 가장 많은데 그중 부탄 일본 캄보디아 태국 4개국을 제외한 9개국이 이슬람 국가다. 이 중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를 뺀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오만 요르단 카타르 쿠웨이트 7개국이 수니파 아랍 왕국이다. 7개국 중 비산유국인 요르단을 제외한 6개국은 1981년 이후 걸프협력회의(GCC)라는 지역협력체로 한목소리를 내왔다.

    이 GCC 소속 아랍 왕국들 소식이 최근 국제 뉴스에 부쩍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양 축은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와 ‘아랍 왕국의 이단아’ 카타르다. 그 배후에는 30대 사막의 왕자들 간의 라이벌 의식이 숨어 있다. 카타르 국왕인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37)와 사우디의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32)다.

    사우디와 카타르는 덩치만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우디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반면 카타르는 그 동쪽에 비쭉 솟은 작은 반도 국가다. 영토로 봤을 때 사우디(215만㎢)는 카타르(1만1586㎢·경상남도 크기)의 20배가 넘는다. 인구로 봤을 때도 사우디(2800만)가 카타르(225만)의 12배가 넘는다. 아랍국가 중에 카타르보다 작은 나라는 이웃 섬나라인 바레인이 유일하다.

    이런 국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우디는 6월 5일(현지시간) 카타르에 대한 수니파 아랍국의 대대적 단교조치를 선도했다. GCC에 속한 UAE와 바레인이 가담했고 예멘 이집트 리비아 몰디브 모리타니 같은 이슬람공화국도 동참해 참여 국가는 20개국으로 늘어났다. 요르단 등 4개국은 카타르와 외교 단계를 격하했다. 석유부국인 사우디의 영향권 안에 있는 국가들이다.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한 해당국들은 48시간 내 자국 내 카타르 외교관 철수를 명령했고 항공기와 선박 운항을 전면 중단했다. 이는 사실상의 봉쇄정책으로 이어졌다. 카타르는 육로로는 사우디, 해로로는 북쪽의 섬나라 바레인과 남쪽의 UAE로 둘러싸여 있다. 이번 단교 조치로 이들 통로가 다 막혀버렸다. 사우디는 카타르 식량 수입의 40%를 들여오는 남쪽 육로를 봉쇄했다. 바레인과 UAE는 카타르 국적 선박의 입항을 금지했다. 이에 카타르는 이란 영공을 통해 식량을 공수하고, UAE를 우회해 오만의 항구를 통해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출하는 것으로 맞서고 있다.





    카타르는 왜 집단 따돌림 당할까

    카타르와 단교 조치를 취한 국가들의 명분은 카타르가 테러리즘과 극단주의 조직을 지원해 주변국의 안보 불안을 조성한다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카타르가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은 물론이고 하마스와 헤즈볼라 등 시아파 무장단체를 지원하고 있으며 2011년 아랍의 봄 때 이집트에서 집권에 성공했지만 2013년 쿠데타로 축출된 무슬림형제단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 카타르 수도 도하에 본부를 둔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사우디를 비롯한 이웃 이슬람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을 펼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도 컸다.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5월 23일 카타르 국영방송사인 QNA 웹사이트에 실린 카타르 타밈 국왕의 연설이다. 이 영상에서 타밈 국왕은 “카타르는 미국과 긴장 관계이며 이란을 ‘이슬람 강대국’으로 인정한다. 이란에 대한 적대 정책을 정당화할 만한 핑계가 없다”고 말했다. 또 미국은 물론 수니파 국가들이 테러 집단으로 규정한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국민의 적합한 대리인”이라고 밝혔다. QNA는 이를 바로 삭제하고 “해킹으로 인한 가짜뉴스”라고 해명했다. CNN은 미 연방수사국(FBI)도 러시아 해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고 7월 6일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 단교 사태의 핵심인 사우디 UAE 바레인 이집트 4개국의 반응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에 가깝다. 4개국 외교장관은 7월 5일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국교 회복의 전제조건으로 13개 항을 요구했다. 카타르의 이란과 단교, 헤즈볼라·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지원 금지, 알 자지라 방송 폐쇄, 터키와 군사협력 중단 등이다. 카타르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중립적 위치를 지켜온 쿠웨이트가 중재에 나섰지만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태가 한 달 넘게 지속되면서 사우디, 카타르와 모두 동맹 관계를 맺은 미국의 몸이 달았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7월 10일 걸프지역 아랍국 순방에 나서며 직접 조율에 나섰다. 하지만 사우디와 카타르의 불화가 워낙 만성적인 데다가 이번 사태를 초래한 주역 중 한 명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중재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란 관측이 흘러나온다. 틸러슨의 중동 방문 중에 전격 공개된 카타르와 다른 GCC회원국 간 비밀협약문서도 그런 걸림돌의 하나다.


    베일 벗은 ‘리야드 협약’

    사실 이번 사태는 2014년 3월 사우디 바레인 UAE가 카타르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며 벌어진 외교 분쟁의 확대재생산이다. 당시 명분은 카타르가 무슬림형제단에게 은거지를 제공하고 지원 활동을 벌이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이 분쟁은 그해 9월 카타르가 무슬림형제단 관련 인사를 자국에서 추방했다고 발표하고 12월에야 이 3개국이 자국 대사를 복귀시키며 무마됐다가 2년6개월 만에 더 악화된 상태로 재발한 것이다.

    2014년 외교 분쟁과 2017년 봉쇄 사태의 배후에는 2013년 비밀리에 체결된 ‘리야드 협약’이 숨어 있다. 사우디 등은 6월 5일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하면서 “2013년 맺은 리야드 협약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언급했으나 그 구체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사우디 소유 알아라비야 방송이 7월 10일 이를 공개하면서 이 협약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의 지지를 받은 이집트의 모하마드 무르시 정부를 전복하고 2013년 집권한 압델 파타 엘 시시 정부의 안정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카타르의 타밈 국왕이 서명한 이 협약서에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관련 인사들을 카타르에서 추방하겠다는 약속도 들어 있다. 또 ‘GCC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 매체를 지원하거나 언론인을 고용하지 않고, 알 자지라와 알 자지라의 이집트 전문 자회사 무바셰르 미스르가 이집트 군사 정부를 모욕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포함됐다.

    사우디 측에서 틸러슨 국무장관의 방문 시기에 맞춰 카타르의 약속위반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다음 날인 7월 11일 도하를 방문한 틸러슨 장관과 모하메드 빈 압둘라흐만 알 사니 카타르 외무장관은 테러조직에 대한 자금 차단을 약속하는 대테러 협약을 신속하게 체결했다.

    틸러슨 장관은 “이번 협약은 지난 5월 ‘이슬람 아랍·미국 정상회담’에서 테러리즘을 쓸어버리자고 한 결정에 기반을 둔 것”이라며 카타르를 치켜세웠다. 모하마드 장관은 “미국과 테러 자금 지원에 맞서는 협약을 맺은 것은 중동에서는 카타르가 처음”이라며 “카타르를 봉쇄한 나라들도 서둘러 협약 체결에 협조하길 바란다”고 오히려 다른 중동국을 압박했다. 하지만 아랍권 4개국은 카타르가 과거에도 ‘리야드 협약’으로 비슷한 약속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카타르에 대한 경제 제재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모든 것은 1995년 시작됐다

    사실 사우디와 카타르 왕실은 GCC 왕실 중에서도 가장 가깝다. 사우디 왕실인 사우드 가문과 카타르 왕실인 사니 가문은 출신 지역이 같다. 두 가문은 사우디 수도인 리야드 동북쪽에 위치한 네지드 지역에 함께 웅거하던 사막부족이었다. 당시 네지드 지역은 오늘날 와하비즘으로 알려진 엄격한 수니파 종교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두 가문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이 기록된 하디스, 이 2개만을 믿음과 실천의 원천으로 삼는 와하비즘의 독실한 신봉자다.

    그러다 18세기 사니 가문이 지금의 카타르 지역으로 이동했다. 사우드 가문의 영웅인 압둘 아지즈(이븐 사우드·사우디 초대 국왕)가 아라비아통일전쟁을 통해 1934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다. 당시 영국은 석유·액화천연가스(LNG) 매장지 혹은 해군 기지였던 다른 GCC 왕국을 보호령으로 묶어뒀다가 1961년 이후 차례로 독립시켰다. 카타르는 1971년 독립했다. 사우디는 영국을 대신한 후견국을 자처했다. 1981년 한때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바뀐 이란-이라크 간 전쟁이 발생하자 화들짝 놀란 사우디가 인근 아랍 왕국을 규합해 GCC를 결성할 때 카타르도 앞장섰다. 1991년 이라크전에선 사우디군과 이라크군 사이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탱크를 앞세운 카타르군의 협공으로 대승을 거뒀다. 누가 봐도 의좋은 형님·아우 사이였다.

    이 모든 건 1995년 6월을 기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카타르에서 궁정 쿠데타가 발생해 왕세자 하마드가 아버지 칼리파 국왕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카타르의 후견국을 자처하던 사우디가 노발대발했다. 아들이 아비를 치고 왕좌를 차지한 것도 거슬렸지만 당시 그의 나이가 43세에 불과한 것이 더 불쾌했다. 사우디는 압둘 아지즈 사후 그의 수많은 아들이 돌아가며 왕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70대는 돼야 왕좌에 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칙한 하마드의 왕좌를 이리저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카타르의 이방원, 하마드

    그런데 이 하마드가 참으로 맹랑한 군주였다. 부왕인 칼리파가 진주조개잡이와 작은 원전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안분 자족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그는 이후 최대 900㎡로 추산되는 가스전 개발과 경제개혁을 통해 카타르를 중동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 1위에 올려놨다. 카타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6년 현재 12만9700달러(세계 2위)로 석유부국으로 유명한 사우디의 5만4100달러보다 2.4배나 많다. 

    하마드는 이를 바탕으로 활동 무대를 걸프 만에서 세계로 확대하며 세속화와 세계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 일환으로 미국과 독자적 군사동맹을 체결해 1만 명 넘는 미군을 수도 도하에 주둔시켰다. 2001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한 알 우데히드 공군기지다. 여기엔 미 중부통합사령군의 중동 현지 사령부도 들어가 있다. 2006년 아시아경기대회, 2012년 기후변화회담, 2022년 월드컵 개최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1996년엔 왕실 돈으로 ‘중동의 BBC’를 표방한 ‘알 자지라’ 방송을 세우고 성역 없는 보도에 나서게 했다. 이로 인해 베일에 싸여 있던 아랍 왕실의 부패와 스캔들이 뉴스화되기 시작했다. 왕실 식구만 1만5000명에 달하는 사우디가 최대 피해자가 됐다.

    그뿐만 아니다. 하마드는 카타르를 다양한 이슬람 사상의 온실로 만들기로 작정했는지 하마스, 헤즈볼라 심지어 이슬람 왕정 타도를 내건 무슬림형제단까지 포용했다. 시아파인 이란과 경제협력 및 수교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 카타르와 이란은 단일 가스전으로는 세계 최대로 알려진 사우스파스 해상가스전을 공유해 협력이 불가피한 점도 있다. 한마디로 오랜 종주국인 사우디 중심의 중동 판세를 뒤흔들기 위한 포석을 죄다 깔아놓은 셈이다. 카타르 왕실의 비밀자금이 국제 테러조직으로 공인받은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 ‘이슬람국가(IS)’에도 흘러갔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는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절정을 맞았다. 리비아, 튀니지, 이집트의 철권통치자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왕국은 좌불안석의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 아랍의 봄은 실패해 바로 겨울에 자리를 내줬고 아랍 민주화 세력은 사분오열됐다. 여기에 이슬람 극단주의의 막장을 보여주는 IS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카타르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하마드는 이런 상황에서 다시 기막힌 반전 카드를 뽑아 든다. 2013년 61세의 나이에 왕좌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왕세자이던 맏아들을 제치고 33세에 불과하던 둘째 아들 타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리야드 협약’의 서명도 타밈에게 넘겨버렸다. 그러면서 카타르를 명실상부한 입헌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가겠다고 선포했다. 젊은 국왕 타밈은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위해 인프라 사업을 확충하는 데 1000억 달러(113조8000억 원)를 쏟아붓는 한편 “카타르의 미래는 교육에 있다”면서 인재개발과 전자정부 구축에 힘을 쏟으며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여러모로 하마드는 조선의 태종 이방원을 닮았다. 부왕이 살아 있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점, 과감한 선제적 대응으로 주변 정적을 압도한 점, 강력한 추진력으로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점 그리고 세자로 책봉했던 맏아들을 물리치고 왕재(王才)라고 생각한 다른 아들에게 살아생전 왕위를 물려주고 미래지향적 정치를 펼치도록 한 점이 그렇다.



    사우디의 ‘젊은 피’ 무함마드

    카타르가 하마드와 타밈으로 이어지는 ‘젊은 피’로 아라비아 반도의 판세를 뒤흔들자 사우디도 그에 대항할 ‘젊은 피’의 수혈에 나섰다. 카타르에 대한 집단 단교 조치를 단행한 직후인 6월 21일 사우디의 살만 국왕(82)은 제1왕세자를 바꿨다. 자신의 조카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알 사우드(58)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맏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을 앉힌 것이다.

    사우디의 초대 국왕 압둘 아지즈는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뒤 유력가문과 혼인동맹으로 권력을 다졌다. 그러다 보니 22명의 부인을 맞아 45명의 아들(성인까지 자란 아들은 36명)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이 점은 같은 이유로 29명의 부인으로부터 25남9녀를 둔 고려 태조 왕건과 비슷하다). 그래서 2대 사우드(재위 1953~1964)부터 3대 파이잘(1964~1975) 4대 할리드(1975~1982) 5대 파드(1982~2005) 6대 압둘라(2005~2015)를 거쳐 현재의 살만 국왕까지 왕위 계승은 형제상속이었다. 그래서 사우디의 차기 왕위계승자는 왕세자가 아니라 왕세제로 불렸다.

    압둘 아지즈의 25번째 아들인 살만 국왕이 2015년 1월 왕위에 오른 뒤 이복동생인 무크린(72)이 제1 왕위계승자가 됐다. 당시 정보국장을 맡고 있던 무크린은 압둘 아지즈 국왕의 35번째 아들이자 당시까지 생존한 아들 중에서 막내였다.

    살만은 그해 4월 무크린을 밀어내고 자신의 동복형 나예프의 아들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제1 왕위계승권자로 삼았다. 5대 국왕 파드와 나예프, 살만은 사우디 왕실의 실세로 꼽히는 ‘수다이리 7형제’에 속한다. 압둘 아지즈의 제8 왕비인 하사 빈트 아메드 알 수다이리(1900~1969) 소생으로 하나같이 출중하다는 평을 들은 7형제를 말한다. 이 중 파드가 첫째, 나예프가 넷째, 살만이 여섯째다.

    이 때문에 수다이리계의 합의에 의해 제1왕세제 자리에 있다가 2012년 숨지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나예프의 아들(빈 나예프) 무함마드가 사우디 왕가 최초의 3세대 국왕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와 함께 제2왕위계승자로 책봉된 살만의 아들(빈 살만) 무함마드에 더 주목했다. 살만 국왕이 3세대 왕위 계승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우선 조카 무함마드를 제1왕위계승자로 삼은 뒤 자신의 친아들 무함마드를 그 자리에 앉힐 것으로 예상했고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다.




    트럼프가 초래한 카타르 위기

    사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살만 국왕의 즉위 이후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릴 만큼 실세 중의 실세로 꼽혔다. 국방장관이면서 석유 왕국 사우디의 핵심인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회장도 겸직해 군사와 경제 양 날개를 달았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의장을 맡아 사우디를 ‘석유 없이 자립 가능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비전 2030’을 수립하고 추진 중이기도 하다.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 지분의 5%(약 2조 달러·약 2276조 원)를 기업공개(IPO)로 처분하는 등 최대 3조 달러(약 3414조 원)의 국부펀드를 조성해 교육과 보건 부문에 장기 투자하면서 석유 위주의 산업구조를 광업(채굴), 국방, 관광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다. 2015년 사우디가 아랍연합군을 조직해 예멘 내전에 개입해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반군 세력 후티 격퇴전에 나선 것도 무함마드 왕세자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카타르 봉쇄 조치 역시 무함마드 왕세자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는 무함마드와 트럼프 미 대통령의 커넥션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지난 5월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를 택했다. 그 막후 조종자가 무함마드였다. 트럼프는 이 방문 때 성대한 환대를 받았고 1100억 달러 규모의 무기 거래 계약 체결을 비롯해 3500억 달러(약 394조 원) 규모의 ‘선물보따리’를 받았다. 지난해 4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 때 국왕과 왕세자가 공항 영접조차 하지 않으며 푸대접했던 것과 대조를 이뤘다. 그리고 한 달 안에 카타르 봉쇄조치와 무함마드의 제1왕위계승자 책봉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진 것이다.

    이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어이없는 외교적 헛발질로 빈축을 샀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 등의 카타르에 대한 전격 단교 선언이 나온 다음 날(6월 6일) 트위터를 통해 “이것(카타르 단교)은 아마도 테러 공포를 끝내는 일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5월 사우디 방문의 성과로 중동지역 테러 문제 해결의 첫 단추가 채워졌다는 공치사였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동맹국인 카타르의 가치를 무시한 외교적 실수였다. 카타르 도하에 있는 알 우데히드 공군기지의 존재를 망각한 데다 카타르는 미국과 120억 달러(약 13조5000억 원) 규모의 F-15 전투기 구매 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태 수습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틸러슨 국무장관의 몫이 되고 말았다. 매티스 국방장관은 카타르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카타르가 오랜 기간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트럼프도 살만 국왕에게 전화를 걸어 “걸프 국가들의 협력이 테러를 막고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며 자기 말을 주워 담기에 바빴다. 카타르는 6월 14일 F-15 전투기 72대 구매계약에 서명함으로써 아예 트럼프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미국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인남식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이번 사태를 가장 즐기고 있는 것은 이란”이라고 분석했다. 반(反)이란 기치로 똘똘 뭉친 GCC 내에서 반이란 세력은 사우디 바레인 UAE 3개국으로 축소되고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3개국은 중도 내지 친(親)이란으로 기우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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