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글로벌 인사이트

시민들 장기 집권 피로감… 아베 꺾고 첫 여성 총리?

고이케 도쿄도지사 일본 정계 태풍 되나

  • 장원재|동아일보 일본특파원

    입력2017-07-21 11: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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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 2일 치러진 도쿄도의원 선거 결과에 일본 정계가 경악했다. 불패가도를 달리던 자민당 아베 정권이 고이케 도쿄도지사가 이끄는 신생 지역정당에 참패했기 때문. 고이케는 자민당 독주를 막고 여성 최초 일본 총리에 오를 수 있을까. 고이케 도쿄도지사는 어떤 인물인가.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4년 반 동안 4번의 중·참의원 선거와 3번의 보궐선거에서 연전연승했다. 이를 바탕으로 전후 총리 역대 3위의 재임기간을 기록했고, 올 3월에는 당규를 고쳐 2021년까지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정계는 이른바 ‘아베 1강(强)’ 구도로 재편됐고,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7월 2일 치러진 도쿄(東京) 도의원 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일본 정계는 경악했다. 지난해 8월 취임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65) 도쿄도지사가 불패가도를 달리던 아베 총리에게 최악의 패배를 안겼기 때문이다.

    이날 선거에서 고이케 지사가 이끄는 도민퍼스트회는 자체 공천자 50명 중 49명을 당선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당선 직후 합류한 무소속 의원을 포함하면 127석 중 55석을 차지했다. 6석의 미니 지역정당이던 도민퍼스트회는 당당히 도의회 제1당이 됐다. 후보 전원이 당선된 공명당(23명) 등을 포함하면 도의회에서 고이케 지지 세력은 79석으로 과반(64석)을 훌쩍 넘어 3분의 2에 육박한다.



    장기 집권 피로

    반면 집권 자민당은 후보 60명을 냈지만 23명만 당선됐다. 기존 의석(57석)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도의회 의장과 자민당 간사장도 낙선했다. 기존 역대 최소 의석이던 38석(1965년, 2009년)을 크게 밑도는 대참패였다.



    이런 결과가 나온 요인은 명확하다. 먼저 온갖 스캔들과 실언에 휘말린 자민당이 국민의 신뢰를 잃으며 자멸했기 때문이다. 고이케 지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민당과의 대척점에 서서 ‘개혁적 이미지’를 선명하게 내세운 것. ‘대안 세력’을 찾은 도민들은 구태가 가득한 자민당을 미련 없이 버리고 변화를 택했다.

    일본 정계에서는 선거 후 ‘THIS is(이것이) 패인’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참패의 원인을 제공한 도요타 마유코(豊田眞由子) 중의원 의원,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일본 관방 부장관,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자민당 간사장 대행의 이름 첫 자 영문 이니셜을 따면 ‘THIS’가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도요타 의원은 아베 총리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아베 키즈’이며, 나머지 세 명은 아베 총리의 최측근이다. 이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신조어까지 생긴 걸까. 하나씩 살펴보면 자민당이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도요타 의원은 선거 열흘 전 비서에게 폭언, 폭행을 일삼은 녹취 파일이 공개돼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도쿄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친 엘리트 여성 의원이 열두 살 많은 남성비서에게 ‘이 대머리야’ ‘너는 살 가치도 없다’며 소리를 지르고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는 상황이 녹음된 것을 들으며 국민은 경악했다. 압권은 마치 랩을 하는 듯 리듬에 맞춰 다음과 같은 끔찍한 말을 한 것이다. “(당신의) 딸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고 뇌수가 튀어나와도, 차에 부딪혀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고 해서 끝날 거라고 생각하면 그런 말을 계속해라.”

    하기우다 부장관은 최근 아베 총리의 가케(加計) 학원 스캔들과 관련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스캔들의 내용은 아베 총리의 40년 지기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에 52년 만에 수의학부를 신설하는 허가를 내줬는데, 이것이 특혜라는 것이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문부성 문서를 통해 하기우다 부장관이 “관저는 반드시 (수의학부를 신설)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총리는 ‘2018년 4월 개학’이라고 못 박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문부성을 압박한 정황이 드러났다.


    흔들리는 아베 정권

    ‘포스트 아베’ ‘여자 아베’로 불리는 이나다 도모미 방위상은 6월 27일 선거 유세를 하면서 “자위대·방위성, 방위상, 자민당으로서도 (성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가 논란이 됐다. 자위대법은 정치 중립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사과하고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도의회 선거를 총지휘한 시모무라 간사장 대행은 문부과학상으로 재직하면서 직무와 직접 관련된 가케 학원으로부터 2013년과 2014년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선거 직전 터졌다.

    매일이라고 할 만큼 연이어 악재가 터진 것은 장기 집권에 취한 자민당이 내부 단속을 느슨하게 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아베 총리가 있었다. 아베 총리는 올 초 부인 아키에(昭惠) 여사가 명예교장을 맡았던 우익 성향의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매각하도록 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이어 가케 학원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내각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했다. 아베 총리의 당내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지방창생상이 선거 결과를 두고 “도민퍼스트회가 이겼다기보다는 자민당이 패배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베의 대항마

    아베 정권이 이례적으로 오랜 기간 정권을 유지한 배경에는 ‘대안부재론’이 있었다. 민주당(현 민진당) 정권 당시의 실망스러운 정치 상황을 기억하는 유권자 상당수가 ‘지지할 정당이나 후보가 없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자민당과 아베 총리를 지지해왔던 것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지난해 7월 도쿄도지사 보궐선거에서 고이케가 당선되면서부터다. 당시 그는 자민당이 공천한 마스다 히로야(增田寬也) 후보가 있음에도 ‘행정 개혁’을 내세우며 독자 출마를 강행했다. ‘제명하겠다’는 자민당 지도부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 인생 최대 승부를 건 것이다.

    부족한 조직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채웠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 ‘녹색을 입고 모이자’는 글을 올려 유세장에 자발적인 ‘녹색 물결’을 만들었고, 100만 표 이상의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됐다. 이후 ‘녹색’과 ‘개혁’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아베의 대항마’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대안 세력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고이케 지사는 취임 직후부터 1년 남은 도의원 선거를 철저히 준비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굳히고, 자민당이 장악한 도의회를 구태로 몰았으며, 선거를 위해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다.

    먼저 취임 직후 도정개혁본부를 설치해 불투명한 도정과 낡은 관행에 거침없이 메스를 들이댔다.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 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총 비용이 3조 엔(약 30조 원)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공개한 후 신축 경기장 3곳의 건설 보류를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극장 정치’로 승부

    자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졌던 쪽지예산도 없앴다. 도쿄도에는 정당이 요구할 경우 사라진 예산을 되살려주는 ‘정당부활예산’ 제도가 있었다. 다른 지자체에는 없는 이 제도에 도쿄도는 매년 200억 엔(약 2000억 원)을 할당했다. 고이케 지사는 “지사의 예산편성권을 침해한다”며 제도를 폐지했다. ‘의회 경시’라며 자민당 도의원들이 들고일어났지만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또 “공약을 지키겠다”면서 자신의 급여를 절반으로 깎았다. 2896만 엔이던 급여를 전국 도도부현 중 최저인 1448만 엔으로 깎는 조례를 도의회에 제출했다. 도의회는 개혁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 통과시켰는데 결과적으로 도의원 급여가 도지사보다 많게 됐고,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들의 급여도 20% 깎아야 했다. 도민들은 열광했고 이때부터 ‘고이케 극장(劇場)’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구태로 비친 도의회가 수세적 입장이 됐을 때, 고이케 지사는 독자 세력 양성에 돌입했다. 지난해 10월 ‘희망의 주쿠(塾)’라는 정치인 양성소를 만든 것이다. 첫 모집에 무려 4800명이 몰렸다. 고이케 지사는 개원식에서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며 도의회 선거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이듬해 초 지역정당인 도민퍼스트회를 만들었다.

    고이케 지사의 행보를 두고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에게서 배운 ‘극장 정치’를 재현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혁적 이미지를 선점한 뒤 선거 구도를 개혁과 반(反)개혁 진영으로 나누고, TV를 이용해 대중에게 호소하며 승부수를 던지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1952년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난 고이케 지사는 중동과 무역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유층 자제들이 주로 다녀 ‘아가씨 학교’라고 불리는 고베(神戶)의 고난(甲南)여중·여고를 졸업하고 지역 명문인 간사이(關西)대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무난한 인생이었다.


    “유학을 떠날 때 버렸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정계에 발을 들이며 집안이 몰락했고, 이후의 삶도 달라졌다. 고민하던 그는 아랍어가 유엔 공용어로 지정된다는 기사를 읽고 대학을 중퇴한 뒤 이집트로 유학을 떠났다. 고이케 지사는 이후 한 인터뷰에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시집가는 그런 인생 계획은 유학을 떠날 때 버렸다”고 밝혔다.

    고이케 지사는 현지에서 제4차 중동전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나름의 철학을 갖게 됐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유학 경험을 통해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세계가 얼마나 기만에 가득 차 있고 현실적인 판단이 필요한지 등을 배웠다”고 돌이켰다. 이런 ‘현실주의’는 이후 고이케 지사의 정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됐다.

    대학 시절 일본인 유학생을 만나 결혼했다가 같이 산 지 1년여 만에 이혼한 경력도 있다. 이후 지금까지 혼자다. 그는 “결혼생활을 미리 경험한 덕분에 나중에 초조해하지 않게 됐다. 다만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후회가 나중에 생겼다”고 돌이켰다. 졸업 기념으로 기모노를 입고 피라미드 위에서 다도(茶道)에 따라 차를 마셨다는 일화도 있다.

    졸업 후 귀국해 통역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8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등의 인터뷰를 연이어 성사시키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방송국 뉴스 앵커를 맡으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정계의 러브콜을 받던 그는 40세에 막 창당한 일본신당에 들어갔고,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신생 정당을 고른 이유에 대해 그는 훗날 “정치를 바꾸려면 큰 중고차를 수리하는 것보다 작은 신차가 좋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후 신진당, 자유당, 보수당, 자민당을 거치며 ‘정치 철새’라는 비판도 받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때는 환경상으로 발탁됐다. 한국에서도 일반화된 ‘쿨 비즈’는 당시 고이케 환경상이 공모를 통해 만든 신조어다. 그는 로고, 네이밍, 포스터 등을 직접 정하며 공을 들였고 대성공해 ‘고이즈미 정권의 광고탑’으로 불렸다. 2006년 발족한 아베 1차 내각에서는 총리보좌관을 거쳐 여성 첫 방위상에 임명됐다. 2008년 총리를 꿈꾸며 여성 최초로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험도 있다.



    기회주의자? 개혁가?

    화려한 경력을 쌓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12년이었다.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선두를 달리던 이시바 시게루 편에 섰는데 1차 투표에서 뒤진 아베 총리가 결선에서 역전 당선된 것이다. 방위상까지 시켜줬는데 라이벌을 지지한 것에 배신감을 느낀 아베 총리에 의해 이후 그는 철저한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아베 총리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도 이 때부터다.

    고이케 지사는 개혁적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정계에는 ‘기회주의자’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당대의 권력자 편에 붙었다가 상황이 바뀌면 재빨리 돌아서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본 정계에서 여성 정치인으로 상황에 맞게 ‘생존의 길’을 찾았을 뿐이란 반론도 있다.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에만 열중하는 ‘포퓰리스트’라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자민당 내부에선 그에 대해 “이미지와 퍼포먼스만 있지 경험과 실행력이 없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도 많다.

    우익 성향도 강하다. 지난해 도지사 취임 직후 “여기는 일본이고 도쿄”라며 전임자가 약속한 한국학교 신설 계획을 백지화했다. 2005년에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고 2007년에는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가 로비를 했다. 2014년에는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에 대해서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고이케 지사는 2009년 소속 자민당이 야당이 되자 “정권 탈환 때까지 머리를 깎지 않겠다”며 1년 9개월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당시 이를 스스로 ‘와신상담 헤어’라고 명명해 화제가 됐다. 올 초에는 “이길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며 ‘와신상담 금주’를 선언하고 도의원 선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알기 쉬운 슬로건

    고이케 지사가 선거 전략으로 가장 강조한 것은 ‘도민의 눈높이’였다. 먼저 ‘낡은 도정을 새로운 도정으로’ ‘도쿄 대(大)개혁’ 등 누구나 듣기만 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구체적이면서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공약을 내세웠다. ‘의회 특권 폐지’를 외치면서 의원 공용차 폐지, 정무활동비 식당 사용 금지, 의사당 금연 실시, 상임위 인터넷 중계 실시 등을 약속하는 식이었다. 보육 서비스 인력 정원 7만 명 확충, 휴일보육 지원 확대, 양변기 보급 확대 등 실생활 밀착 공약도 대거 포함시켰다.

    ‘희망의 주쿠’를 거친 정치 신인도 대거 공천했다. 후보 50명 중 17명을 여성으로 채워 유권자들이 변화를 실감하게 했다. 개중에는 가수 출신도 있었고 임산부도 있었다. 이른바 ‘고이케 걸즈’로 불리는 여성 후보들은 선거에서 전원 당선됐다.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도 대거 발탁했다.

    고이케 지사 특유의 감각적 표현도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도쿄는 빠르다. 도정은 늦다. 도의회는 더 늦다” “지난 25년 동안 의원 제안으로 만들어진 조례가 1건에 불과하다” “보스 정치가 횡행하는 낡은 의회는 필요 없다” “도지사와 함께 자동차의 두 바퀴를 구성하는 도의회를 바꾸자” 등등.

    조직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자민당과 제휴하던 공명당을 파트너로 끌어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인기가 높은 고이케 지사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공명당은 녹색으로 유세차를 감싸며 공동 유세를 벌였다.

    마지막 승부수는 선거를 한 달 남기고 자민당에 탈당계를 제출한 후 도민퍼스트회 대표로 취임한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101번이나 가두연설을 다녔다. 스캔들에 휩싸여 선거기간 내내 가두연설을 기피한 아베 총리와 대조되면서 세간에는 ‘아베 총리가 고이케 지사를 피해 도망다닌다’는 말까지 나왔다.



    애완견 ‘소짱’에 담긴 의지

    도쿄도의회 선거가 정계 개편으로 이어진 사례는 적지 않다. 최근에는 2009년 자민당이 선거에서 민주당(현 민진당)에 참패한 후 한 달 만에 정권을 넘겨준 전례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압승한 고이케 지사가 중장기적으로 총리를 노리고 있다는 관측에는 이견이 적다. 고이케 지사의 강아지 이름은 ‘소짱’이다. 총리를 뜻하는 일본어 ‘소리(總理)’에 애칭을 붙인 것에서도 총리직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고이케 지사는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전국 정당을 만들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다만 “‘도민 퍼스트’를 ‘전국 퍼스트’로 바꿔서 그걸 기본으로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면 국민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여지를 남겼다.

    현실적으로 도민퍼스트회는 지역정당이고 중앙 무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은 여전히 미약하다. 결국 내년 하반기로 예상되는 중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 세력을 최대한 만들어야 이를 발판으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치권에서는 벌써 여러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신당을 만들고 민진당 등 야권 세력을 흡수하며 정계 개편을 시도할 것이란 예상도 있고, 반대로 자민당에 재입당해 총재직을 노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전국 신당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5명의 국회의원을 벌써 모았다는 소문도 있다.

    특히 7월 9일 고이케 지사의 측근인 와카사 마사루(若狹勝) 중의원 의원이 “연내에 전국 신당의 움직임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말한 것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적지 않다. 올해 안에 전국 규모의 신당을 만들고 내년에 정당교부금을 받아 선거를 치른다는 시나리오다. 와카사 의원은 이번 선거 직전 자민당에서 탈당했다.

    고이케 지사가 도정에 전념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은 그가 역시 고이케 우군으로 꼽히는 나가시마 아키히사(長島昭久) 전 민진당 중의원 의원, 와타나베 요시미(渡邊喜美) 전 일본유신회 참의원 의원 등과 손을 잡고 정치 세력 규합에 나설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예상보다 빠른 기회

    고이케 지사의 총리 출마 시점에 대해서는 선거 전까지만 해도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도전한다는 시나리오가 유력했다. 하지만 선거 참패로 타격을 입은 아베 총리가 내년 9월 총재선거에서 3연임에 실패할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아베 총리 스캔들의 향방,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 정권 지지율의 변화, 중의원 해산 시점, 내년 총재선거 등 여러 변수가 있다 보니 지금 당장 고이케 지사의 앞날을 전망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일본 첫 여성 총리’의 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고이케 지사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두고 “축구로 치면 미드필더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 진출해 순식간에 (틈을) 메우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아베 ‘1강 체제’가 무너지는 시점에 정치적 공간이 생길 경우, 고이케 지사는 누구보다 빨리 이를 메우며 총리의 꿈에 다가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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