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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불꽃이 하늘을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됐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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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황혼에 물들다

백제 지도부는 신라-당 동맹 구축 등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했다. 백제는 신라를 침공하기 위한 육군력 증강에 치중하느라 해군을 등한시했다. 660년 15만 대군을 실은 당나라 함대가 경기만(京畿灣)까지 남하해 덕물도(덕적도)에 20여 일이나 기항했는데도,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는 줄로만 알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당나라군은 금강(錦江)을 타고 올라가 신라군과 합세해 사비(부여)와 웅진(공주)을 빼앗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고구려를 치는 것처럼 보이게 한강 유역으로 북진하다가 방향을 틀어 남하해 황산벌에서 부여계백(扶餘階伯)의 결사대를 격파하고, 사비와 웅진 공격전에 합세했다.

백제에서는 곧 복국(復國) 운동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이 지원을 요청하자 왜는 당과 부흥군 사이에서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부흥군 지도자 귀실복신(鬼室福信)이 원병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한 때가 660년 10월인데, 왜가 부여풍을 백제로 보낸 것은 거의 1년 뒤인 661년 9월이다. 왜는 결단을 내린 뒤에는 파격적으로 부흥군을 지원했다. 661년 천왕 사이메이(齊明)가 급서한 뒤 나카노오에가 즉위를 미루면서까지 부흥군 지원에 전력을 다할 정도였다. 왜는 662년 1월 화살 10만 개와 곡식 종자 3000석을 원조했으며, 2개월 뒤인 3월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 왜가 백제 복국 지원에 나서기로 한 데는 662년 1월 연개소문이 평양 근교에서 당나라군 10만 명을 전멸시키고, 2월에는 평양 근교에 고립된 당장(唐將) 소정방이 신라군으로부터 군량 지원을 받은 후 간신히 퇴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귀실복신이 지휘한 백제 부흥군은 사비성 주둔 당군을 포위할 만큼 기세를 올렸으나 전권을 장악한 귀실복신과 국왕 부여풍 간 갈등이 격화했으며, 663년 6월 부여풍은 귀실복신을 살해했다. 부여풍은 그해 8월 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왜는 추가 파병했으며 고구려는 신라의 변경을 공략했다.

백제 부흥군 내부에 혼란이 일어났음을 파악한 신라는 서둘러 출병했다. 당은 웅진에 주둔하던 유인원(劉仁願)의 증병 요청에 따라 해군 7000명을 추가 파병했다. 당의 손인사와 유인원, 신라 문무왕이 이끄는 육군 및 당나라 두상과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扶餘隆)이 이끄는 170여 척의 함선에 나눠 탄 해군이 수륙 협공으로 부흥군의 수도 주류성(두루성)으로 진격했다. 육지에서는 부흥군 기병이 신라군과 맞섰으며, 바다에서는 왜에서 건너온 1000여 척의 함선이 백강(白江) 강변에 정박했다. 왜국 선단은 셋으로 나뉘어 당나라 해군을 공격했지만 간조(干潮) 시간차 등으로 인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네 번 모두 대패했다. 백강에 집결한 왜 함선 가운데 400척이 불탔다. 구당서와 신당서, 자치통감, 삼국사기 모두 백강 해전에 대해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묘사한다.

왜국 장수 에치노 다쿠쓰는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豪族)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는 당나라군에 잡혀 8년간 억류됐다가 귀국했다. 부여풍은 몇 사람만 거느린 채 고구려로 달아나고, 살아남은 왜군 함대는 흩어진 병사들과 백제 유민을 태우고 당나라군에 쫓기면서 간신히 귀국했다. 백강 대해전은 중국과 한반도, 일본 세력이 모두 관계된 동북아 최초의 해전이었다.

연개소문家의 상잔

백제 최후의 날, 백강 대해전

연개소문.[위키피디아]

백강 대해전을 끝으로 한반도와 왜(倭)의 관계가 일단락됐다. 백제와 왜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백제를 세운 부여계가 왜의 건국에 관여했다가 웅진 시대를 전후해 왜가 백제보다 더 강대해져 거꾸로 왜가 백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육지에서도 당군이 백제 부흥군을 제압하고 수도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임존성의 지수신(遲受信)을 제외한 부흥군 세력이 궤멸했다. 이때 사택상여와 흑치상지, 왜군, 탐라(耽羅) 사신 모두가 항복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귀족은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다. 황실 방계인 이옹이 출세를 위해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扶餘太妃)와 혼인할 정도였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인 대부분은 당의 정책에 따라 랴오허 유역 건안성으로 이주당해 발해의 서진(西進)을 막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인들은 당나라에 의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단으로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663년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고구려는 랴오허와 한강 유역 2개의 전선에서 적군을 막아야 했다. 고구려는 당이나 신라 등 외적이 아니라 연개소문 아들끼리 벌인 권력투쟁 여파로 몰락했다. 동생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했으며, 당나라 정복군 대장 이적(서세적)은 668년 연남생을 향도로 삼아 신라의 지원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했다.
 
당나라는 국력에 비해 과도하게 팽창했다.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랴오허, 쑹화장(松花江)을 넘어 흑수말갈(黑水靺鞨)의 근거지 헤이룽장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여기에다 몽골고원의 설연타를 제압하고, 키르기즈와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와 길기트를 포함한 파키스탄 동북부로까지 세력을 뻗쳤다.

당나라는 과도하게 팽창하면서 내외 모두의 저항에 부딪혔다. 과도한 전비 지출로 증세(增稅)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경제 중심지인 장화이(江淮)를 비롯한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거란과 발해의 공격에 대비해 설치된 허베이, 산시, 산둥 지역 절도사들의 할거는 당나라의 분열을 재촉했다. 티베트 고원의 토번, 만주의 발해, 윈난의 남조(南詔), 중앙아시아 사라센 압바스 왕조, 몽골 고원의 후돌궐(後突闕)의 저항은 제국의 분열을 가속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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