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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4화), 기나긴 낮과 어둡고 무거운 밤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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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곡(遁走曲) 80년대

[일러스트 박용인]

1.

구름 치솟는 어둑한 하늘 높이 커다란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지혜의 독수리? 또는 요한계시록에 뜨는 묵시의 독수리? 그의 머릿속은 시사실(試寫室)의 불이 꺼지고 영사기에서 쏟아진 흑백의 빛살이 스크린에 영상을 펼쳐내기 시작할 때부터 추론과 예측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이름은 들은 적이 있어도, 그가 연출한 작품 한 편 관람한 적이 없는 외국 감독의 영화를, 우리말로 더빙되지도 않고 한글 자막도 없이, 그것도 고색창연한 흑백으로 보게 되면서부터 예견된 당혹과 긴장이었다. 독일어처럼 읽어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되는 스웨덴 감독과 우리말로 ‘일곱 번째’를 한자식 수사(數詞)로 제목에 앞세운 영화 ‘제칠(第七)의 봉인’.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늙고 지친 기사와 그의 종자(從者)가 나타난다. 입은 갑옷이나 장신구로 미루어 중세의 기사고, 종자 하나만 데리고 지친 모습으로 바닷가를 헤매는 것과 사슬갑옷 가슴 쪽에 붙은 십자가 문장(紋章)으로 미루어 오랜 싸움 끝에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십자군 기사쯤으로 보인다. 거기까지는 대사 한마디 알아들을 수 없어도 해독할 수 있는 화면이었다.

그런데 의인화(擬人化)된 죽음이 나타나 구상과 추상이 뒤섞이면서 화면은 보다 면밀한 관찰과 빠른 판독을 요구했다. 검은 두건과 검고 헐렁한 외투, 하얀 가면이라도 쓴 듯 석고로 뜬 데스마스크 같은 얼굴의 죽음 또는 죽음의 사자가 늙고 지친 기사와 나누는 대화는 얼른 그 내용이 짐작 가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은 체스 판이 그들 간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이내 짐작하게 했다. 그들은 그 체스 판에 무얼 건 것일까? 석고로 뜬 것 같은 하얀 얼굴에 검은 두건과 길게 늘어뜨린 검은 망토. 흑백으로 그려진 체스 판에 얹힌 흰 말과 검은 말의 강렬한 대비 같은 것은 강요와도 같은 상징으로 삶과 죽음, 존재와 허무 같은 대비되는 관념들을 판독해내게 한다.

뒤이어 이렇다 할 영상적인 서술이 없어, 자칫 회상으로 오인되기 쉬운 늙은 기사의 새로운 편력과 순례. 아마도 기사는 죽음의 사자와 두는 체스로 자신의 죽음을 유예시키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때껏 살아온 그리고 어쩌면 이제 곧 떠나게 될, 이 세계의 진상을 살펴보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종말, 그리고 허무로 다시 봉인될 것인지. 구원과 재생 또는 생명의 약속으로 새롭게 피어날 수 있을 것인지.

기사와 종자의 마지막 순례 또는 편력은 숨 가쁘게 이어진다. 창궐한 흑사병과 세상에 널린 죽음. 채찍으로 스스로를 후려치며 그와 같은 신의 징벌을 부른 죄를 참회하는 고행자들과 시체를 뒤져 금품을 거둬가는 참혹한 도둑들. 두건을 쓴 채 죽은 자의 물크러지고 눈알 없는 얼굴, 고행자들의 순례 행렬과 충돌하는 광대들의 잔치. 성직자들에게 내몰린 예술가들이 죽음과 종말의 공포로 삶을 억압하는가 하면, 살아 있는 순간의 쾌락에 탐닉하는 대중은 그들에게 고용된 광대들을 조롱하며 종말도 영생도 아울러 야유했다.   

어둡고 무거운 영화의 배경음악과 이런저런 효과음, 그리고 구형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에 남산 중턱까지 차오르는 대도시의 소음도 간간이 스며들어 시사실은 청각에 부담스러울 만큼의 음량에 짓눌려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터인가 그에게는 영사기 도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것도 다른 모든 소리를 압도하여 귓전을 가득 메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몫만큼의 잔잔하고 차분한 기계음으로서였다. 100평 가까운 시사실에 딱 네 사람만 앉아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는 게 그의 의식 바닥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볼만하지요? 작가 선생. 아마 이렇게 극장 개봉도 안 된 작품을 시사실에서 보는 경우는 처음인 것 같지만.”

그의 의식이 잠시 영화 밖으로 벗어난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유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아,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주제는 대강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유 감독이 말을 돌려 대화를 끊어버렸다.

“그래봤자 러닝 타임 90분 남짓의 영화요. 이제 한 시간도 안 남았을 테니 마저 보고 난 뒤에 얘기합시다.”

그사이에도 영화는 빠르게 진행되어 기사와 그의 종자는 세상과 사람들의 거리를 지나고 거기서 연출되는 갖가지 희비극을 헤치며 유예된 죽음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소녀와의 조우는 속절없는 죽음과 종말의 비극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녀가 악마에게 영혼을 넘긴 탓에 흑사병이 세상을 휩쓸게 되었다고 믿고 마녀재판에 부쳤다.

기사는 악마에게 홀려 화형대 위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된 그 소녀에게 다가가, 거기서 자신이 찾고 있는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싶은 듯했다. 그러나 기사는 그 소녀에게서 신을 찾을 수 없었듯 악마도 찾아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최후에 본 것이 악마라고 믿었지만, 기사는 그녀의 눈 속에서 죽음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절망과 두려움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그럴수록 더 간절하게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줄 신을 찾는다. 신이 존재해야만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상징과 묵시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다분히 의도적인 구도 하나가 화면에 드러난다. 고행을 나선 순례자의 무리가 덮치는 바람에 무대에서 쫓겨난 젊은 광대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전혀 낯선 빛깔과 음색으로 새로운 형태의 세계를 연출한다.

신선한 우유와 야생 딸기로 갈음된 식탁은 소박하고 건강한 삶을 상징하고, 젊고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가 드러내는 밝고 구김 없는 사랑은 곧 태어날 아이와 더불어 성가족(聖家族), 곧 요셉과 마리아와 어린 예수를 은유하는 듯하다. 새로운 생명과 이어갈 세상, 구원과 재생의 약속이 이행되고 그들 성가족의 머리 위에는 머지않아 영생과 불멸의 광배(光背)가 뜰 것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가면 너무나 뻔하고. 그래서 자칫 통속적일 수도 있는 구원의 약속, 부활과 영생의 의식은 그럴 때 흔히 해온 대로 진부한 낙관만으로는 처리되지 않는다. 거장(巨匠)의 특이한 반전으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특이한 이미지의 구원송(救援誦)으로 전화(轉化)된다. 새벽 지평선 위에서 펼쳐지는 섬뜩하면서도 가슴 저린 죽음의 군무, 그러나 그대로 종말이고 사멸은 아닌, 어떤 아득한 유예의 심연으로 옮겨가는 이들의 기이한 춤이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손에 손을 잡고 밝은 등성이 저쪽의 알지 못할 계곡으로 검고 인상적인 실루엣을 그려내며 춤추며 가는 그들. 시간의 모래시계를 차고 긴 자루에 크고 직각으로 휜 날을 가진 서양 낫을 깃발처럼 쳐든 죽음의 사자가 검은 망토를 바람에 휘날리며 앞장을 서고, 그 뒤를 기사와 그의 종자가 그 무렵 죽음의 군무(群舞)에 끼어들게 된 네 명의 동행과 함께 춤을 추며 따라간다. 그 끄트머리는 젊은 광대의 동료였다가 마지막으로 그 죽음의 군무에 끼게 된 또 다른 광대로, 그는 류트를 뜯으며 따라가고 있다.

그 여섯의 춤사위나 악기를 다루는 동작 어디에도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경쾌하고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악기를 뜯으며 오래 살아도 끝내 알 수 없었던 이 세상으로부터, 또한 그곳으로 옮겨 길이 머물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지는 않은 또 다른 어떤 심연으로 행진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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