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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고려-거란-송-서하 4國정립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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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관의 군대는 척준경을 선봉으로 삼아 여진군을 격파하고 함흥평야로부터 두만강 이북 280㎞(700리)의 지린성 옌볜자치주 둔화에 위치한 선춘령에 이르는 점령지역에 아홉 개 성(동북 9성)을 축조했다. 20만 대군을 동원해 함흥평야와 그 부근만을 빼앗았다는 일부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다.
육군보병학교(전남 장성군)에 세워진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尹瓘·1040~1111) 동상.[사진제공·육군보병학교]

육군보병학교(전남 장성군)에 세워진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尹瓘·1040~1111) 동상.[사진제공·육군보병학교]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는 926년 상경(헤이룽장성 닝안)을 수도로 한 발해를 정복한 후 발해 고토(故土)에 ‘동쪽의 거란’이란 뜻의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장남 야율배에게 통치를 맡겼다. 거란 수도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츠펑(赤峯) 인근 빠린좌치로 홍산문화와 관계가 깊다.


압록강 유역서 봉기한 정안국

발해는 고구려와 고려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발해 유민 중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한 일부는 고려로 이주했으며, 남은 일부는 요(遼)나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압록강 유역에서 봉기한 정안국이 대표적이다. 

세종(야율배의 아들)과 목종(태종 야율덕광의 아들), 경종(세종의 아들) 시대 혼란을 극복한 거란은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 시기에 국력을 회복했다. 어머니 술율(소)씨의 보좌를 받은 성종은 내·외몽골을 아우르고, 간쑤-신장의 위구르를 정벌했다. 성종은 정안국을 토멸(討滅)하고, 여러 차례 이기고 진 끝에 고려도 복종시켰다. 

고려를 복종시키는 등 배후를 튼튼히 한 거란 성종은 송나라 정벌을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허베이 방향으로 남진했다. 송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진종은 재상 구준(寇準)의 건의에 따라 30만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북상해 전주(邅州)로 향했다. 몇몇 전투에서 거란군이 승리했으나, 전쟁은 곧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요(遼), 송(宋) 두 나라는 타협했다. 요나라가 송나라를 형으로 부르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요에 바치기로 했다. ‘전연(澶淵)의 맹(盟)’이라 불리는 이 조약을 체결한 후 요·송 관계는 안정됐다. 이후 요나라는 송과 고려, 서하(西夏) 간 세력균형을 이용해 관제와 세제 개편, 법률 정비, 불교 장려 등 내정에 성공해 동아시아 최강국이 됐다. 거란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각기 북면관(北面官)과 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원제에 따라 통치했다. 농경을 장려함에 따라 농지는 늘어난 반면, 초지(草地)는 부족해져 대다수가 유목민인 거란족 주민은 궁핍해졌다.


동여진 해적 울릉도 약탈

10세기 말~11세기 초 고려 서희(徐熙)와 강한찬(姜邯贊)은 요-송 적대관계를 이용해 고려 영토를 압록강 하구까지 넓혔다. 거란-발해 전쟁 시기 두만강 일대 말갈(여진)계 주민은 별도 세력(동여진)을 형성해나갔다.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동여진 세력은 주로 바다를 통해 고려 동해안 지역을 침공했다. 동여진 세력은 1012년 경주, 강한찬의 귀주대첩이 있던 1018년에는 울진을 침공했다. 고려는 동여진 세력을 막고자 동해안에 대규모 축성과 함께 상당 규모의 해군을 배치했다. 그러자 동여진 세력은 공격목표를 일본과 울릉도(우산국)로 바꿨다. 

1019년 3월 3000여 명이 탑승한 동여진 해적선 50여 척이 쓰시마를 공략했다. 일본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도이의 적’이라 했다. ‘도이’란 일본어로 오랑캐를 뜻한다. 동여진 해적선단은 쓰시마를 약탈한 뒤 퇴각했다. 쓰시마를 떠난 동여진 해적은 이키 섬에 상륙했다. 동여진 해적은 쓰시마와 이키 섬에서 잡은 포로를 태운 채 4월 초 후쿠오카 인근을 약탈하는가 하면, 하카다만 노코 섬도 공격해 주민 다수를 포로로 잡았다. 

일본의 지원 요청을 받은 고려 함대는 귀환하는 동여진 해적선단을 포착·격파하고, 일본인 포로 400여 명을 구출했다. 동여진 해적은 일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울릉도마저 약탈했다. 해적 침공으로 울릉도는 황무지가 됐고, 그때부터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됐다. 

북만주는 고구려-발해 시대에도 변경에 속해 있었다. 금나라 발상지인 하얼빈 인근 야청(阿城)은 흑수말갈(黑水靺鞨) 등 퉁구스족의 땅으로 12세기에 이르러서도 야성을 유지했다. 흑수말갈 계통 15만 완안부족(完顔部族)이 거주하는 삼림·호수 지역은 여름철에는 몹시 덮고 겨울철에는 몹시 추운(酷暑酷寒) 땅이었다. 완안부를 포함한 여진족은 사냥을 생업으로 했으며 뛰어난 전투기술을 갖고 있었다. ‘여진족 1만 명이 차면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용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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