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윤채근의 古傳幻談 |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

죽은 문사들의 사회

  • 윤채근|단국대 교수

죽은 문사들의 사회

2/4

다정환희여래

18세기 조선 화가 강희언이 그린 인왕산도.[윤채근 제공]

18세기 조선 화가 강희언이 그린 인왕산도.[윤채근 제공]

“다정환희여래는 풍몽룡을 부르는 은어지. 풍씨가 자기 책 서문에 그리 써놨거든. 내가 사숙하는 스승이야.”

이렇게 떠든 밤이면 김려는 이안중 무리의 손에 이끌려 색주가를 향했다. 그들은 반촌의 젊은 여종들을 유혹했고 운종가의 기녀들도 차례로 함락해나갔다. 성에 눈뜬 김려는 거침없었고 이로 인해 분열된 모임을 김낙순이 봉합하고 있었다. 간신히 유지되던 고향옥서사는 마침내 1784년 가을에 붕괴됐다. 김낙순과 김려가 심상규를 상대로 벌인 사소한 장난 때문이었다.

1784년 봄, 김낙순은 김려 무리와 어울리며 홍등가를 누비고 있었다. ‘기쁨을 아는 몸’이 된 김낙순은 어른들이 강요하는 따분한 관료의 삶을 거부할 작정이었다. 사건은 늦봄 어느 날 임금의 어가 행차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붐비던 운종가에서 비롯됐다. 김려 무리와 부근을 배회하고 있던 낙순은 군중 속에서 우연히 심상규를 발견했다. 

순진한 심상규를 달콤한 말로 꼬드긴 낙순은 그를 앞세워 술집으로 향했다. 그때 어린 소녀를 등에 업은 중년의 건장한 계집종이 일행 앞을 앞질러갔다. 어가 거둥을 관람하고 돌아가던 소녀는 비단 포대기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고 바로 뒤를 신발을 쥔 어린 계집종이 따르고 있었다. 포대기 아래로 살짝 나온 버선발에 흥미를 느낀 일행은 그저 소일거리 삼아 뒤를 밟았다. 소광통교에 이르렀을 때 일행은 심상규에게 소녀를 유혹해보라고 부추겼다. 친구들의 짓궂은 놀림에 떠밀린 심상규가 계집종을 추월해 걷던 순간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포대기를 말아 올렸다. 진한 화장을 한 소녀는 잠시 심상규를 노려보다 황급히 포대기를 도로 뒤집어썼다.


금지된 장난

낙순 일행은 소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심상규를 잡아끌어가며 그녀를 끝까지 미행했다. 그녀는 소공주동 홍살문 안쪽의 한 대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일행은 소녀가 호조에서 은퇴한 늙은 계사(計士·회계 사무를 담당한 종8품의 전문직)의 외동딸임을 수소문해 알아냈다. 평생 회계 업무를 보며 큰 재산을 일군 계사의 성은 조씨였고 그때부터 일행은 소녀를 ‘조처자’라 불렀다.

명문가 자제 심상규가 중인 가문의 처자와 혼인은 애초 불가능했지만 일행은 이 재미난 연애놀이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심상규를 충동질했고 소녀의 미색에 눈이 먼 심상규는 벗들과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매일 밤 조처자 집을 찾아갔다. 그는 초여름에 이르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 침방 담벼락에 기대 밤을 지새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처자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진 낙순 일행은 심상규가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수행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심상규는 서사 모임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놀라운 얘기를 털어놓았다.

“자네들이 일러준 대로 밤마다 찾았지. 그리고 어느 날 밤 드디어 선물을 받았네. 그래. 그녀가 방문을 열어줬어. 하지만 곧바로 자기 부모를 데려왔지. 우린 신분이 달라 부부가 될 순 없지 않나? 그래도 그녀 부모 앞에서 부부의 연 비슷한 걸 맺었네. 모두 함께 대성통곡했지. 맞아. 그때부터 우린 부부로 지냈어. 진짜 부부보다 더 질긴 정이 들어버렸지. 저녁에 찾았다가 새벽이면 나와야 했지만 우린 한 몸이었어.”

까맣게 마른 심상규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하던 낙순이 퉁명스레 물었다.

“성공했군. 그런데 뭐가 문젠가?”

낙순을 바라보는 심상규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문제? 모든 게 문제지. 나 말일세. 조처자와 혼인하고 싶었어. 연정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네. 급기야 용기를 내 아버님께 말씀드렸지. 어찌 됐을까? 당장 짐을 싸 산방으로 가라시더군. 내 어쩌다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나인지 말이야? 자네들이 너무 원망스럽군.”


2/4
윤채근|단국대 교수
목록 닫기

죽은 문사들의 사회

댓글 창 닫기

2017/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