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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불과 모래의 기억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불과 모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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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와의 만남

경북 경주 첨성대. [사진제공 문화재청]

경북 경주 첨성대. [사진제공 문화재청]

모든 재산을 자신이 번 땅에 나눠주고 온 샤아드는 도로 무일푼 신세였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 불의 사람 샤아드는 온몸에 불을 붙이는 묘기로 서라벌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불을 마음대로 다루는 서역 승려에 관한 소문은 돌고 돌아 반월이란 이름의 성에 살던 공주에게까지 흘러들어갔다. 공주의 이름은 덕만(德曼). 두 사람은 늦여름 초승달 뜬 밤에 동궁의 월지(月池)라는 연못가에서 처음 만났다. 놀랍게도 공주가 소그드어로 물었다. 

“나의 외할아버지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께선 소그드 분이셨어요. 덕분에 난 그곳의 말을 할 줄 알지만 이렇게 써보긴 처음이랍니다.” 

별이 맺어준 인연에 숨이 멎은 샤아드는 꽃향기에 취한 나비가 공중을 부유하듯 연못가를 따라 춤추며 공주의 아름다움과 덕성을 찬미했다. 중년에 접어든 공주에겐 남편이 있었지만 둘의 사랑을 방해할 순 없었다. 밀회를 나누던 어느 날 공주가 말했다. 

“불과 모래의 땅에서 온 사랑이시여. 그대를 왕실에 소개해야겠어요.” 

샤아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지혜의 문을 열어주신 은인이시여. 그대 덕분에 제 가슴속에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나이다. 하지만 미천한 저는 왕자가 아닙니다.” 

슬픔에 잠긴 공주는 탄식했고 그녀를 달래려 샤아드는 불붙은 곤봉을 돌렸다. 타오르는 곤봉들이 차례로 하늘로 솟구쳐 원을 이뤘고 불의 고리 사이로 달이 빛났다. 공주는 웃었다. 

“우주에 사랑의 불꽃을 옮기시는 분이시여. 저는 곧 이 나라의 여왕이 되어야 해요.”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불의 사람으로 살겠나이다.” 

“당신을 계속 곁에 둘 방법을 찾아보겠어요.” 

벌꿀처럼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덕만 공주가 여왕이 된 632년 중지됐다. 반란 세력과 투쟁해야 했던 여왕은 635년이 되어서야 당나라로부터 신라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사이 서라벌의 불의 사람으로 살던 샤아드는 지귀(志鬼)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정식 신라왕이 된 여왕은 그를 위해 영묘사(靈妙寺)를 짓게 하고 절이 완공되자 수시로 지귀를 만나 불이 만들어준 인연을 이어갔다. 배화교의 악신 아리만의 암흑물질이 아니라면 세상 그 무엇도 두 사람의 환희의 불꽃을 꺼지게 할 수 없었다. 

독실한 불교도이자 배화교도였던 여왕은 지귀와의 사랑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영묘사와 더불어 반월성 북쪽에 작은 배화교 제단도 짓도록 명했다. 별자리 관측에 뛰어난 페르시아 출신 샤아드가 배화교 명절인 동지의 일출선을 따라 제단 위치를 잡았기 때문에 배화교 제단과 여왕이 기거하던 반월성 그리고 훗날 여왕이 묻힐 무덤은 동지에 떠오르는 태양의 각도에 맞춰 배열되었다. 

“첨성대라 부르겠어요, 이 제단의 이름.” 

완성된 제단을 바라보며 여왕이 속삭였다. 여왕을 시종하던 지귀 샤아드가 대답했다. 

“별들은 하늘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입니다. 이 제단은 지상의 불꽃으로 영원히 하늘을 비추며 저 우주에 있을 누군가를 초대할 겁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지혜로운 영혼을 부르게 될 겁니다.” 

첨성대 위로 빛나던 별들은 평소보다 더 밝게 빛나며 두 연인의 행복을 기원했건만 인간의 병은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조차 어쩌지 못해 여왕은 647년 반월성 침전에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시호는 배화교의 종지인 삼선(三善), 즉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을 의미하는 ‘선덕(善德)’으로 정해졌다. 연인을 잃은 샤아드는 자신이 기거하던 영묘사에서 선덕여왕의 영혼을 위해 마지막 불꽃 공연을 한 뒤 조용히 바실라 왕국을 떠났다. 이 신비로운 페르시아인에 대한 기억은 서라벌 사람들에게 전해져 여왕을 사랑했던 불의 신 지귀 이야기가 되었다. 

샤아드의 말이 여기에서 멈추자 감동한 피루즈 왕자가 물었다. 

“이제 그대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여왕에 대한 추억으로 눈물을 글썽이던 샤아드가 대답했다. 

“고향인 수사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마침 왕자님께서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쫓겨 장안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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