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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만동묘 복원과 중화주의

明황제 숭앙 송시열, 최익현… 중국 향한 사대주의의 부활

  •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만동묘 복원과 중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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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再등장

티무르의 굴기에 앞서 중원에서 축출된 몽골도 명나라에 도전했다. 몽골의 부흥은 신속했으며 명나라의 대응도 빨랐다. 북원군(北元軍)이 명나라 남옥(藍玉)의 군대에 패배한 1388년 부이르호(湖) 전투 이후 칭기즈칸 가문 등 할하족이 주류를 이룬 북원은 약해지고 타타르족(러시아 거주 튀르크 계통 타타르와는 다르다)이 대두했다.
 
티무르 제국의 지원을 받은 타타르족 수장 벤야시리는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도전했다. 1402년 ‘정난의 변’을 감행해 조카 건문제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영락제는 구복(丘福)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벤야시리를 치게 했으나 명나라군은 1409년 케룰렌강 전투에서 타타르군에 전멸당했다. 이듬해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해 오논강에서 타타르군을 격파했다. 

타타르족이 약화되자 몽골 서부를 근거로 하는 오이라트족이 등장했다. 1414년 영락제는 다시 24만 대군을 동원해 몽골로 친정했으나 오이라트 세력을 뿌리 뽑지 못했다. 영락제는 1420년 난징에서 연경(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몽골과 만주, 조선의 정세 변화에 극히 민감할 수밖에 없게 됐다. 

걸승(乞僧)이자 명교(明敎) 신자 출신인 주원장은 나라가 체제를 갖춰가자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부하 위관(魏觀), 이선장(李善長), 호유용(胡惟庸), 육중형(陸仲亨), 부우덕(傅友德), 풍승(馮勝) 등 숱한 공신숙장(功臣宿將)을 살해했다. 주원장은 신하들을 가급적 죽이지 말 것을 호소하던 황태자 주표(朱標)에게 가시가 붙은 탱자가지를 쥐여주면서 “너에게 가시 없는 탱자를 남기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나라 조정의 관리들은 “매일 아침 입궐 시 처자와 이별 인사를 하고 저녁에 무사히 돌아오면 서로 기뻐했다”고 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주원장은 재상 호유용을 처형한 다음 후임 재상을 임명하지 않고 황제가 내각을 직접 통할하는 황제독재국가를 만들었다. 주원장은 황태자 주표가 죽은 후에는 황태손 주윤문의 미래를 위해 공신들을 살육했지만 건문제 주윤문은 4년간의 내전 끝에 숙부인 연왕 주체(朱棣)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세조·영락제 닮은꼴 정권 찬탈

1399년 주체가 연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선도 명나라 내전에 휘말렸다. 여진족 출신 명나라 장수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는 1만 5000여 명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조선 입국을 요청했다. 임팔라실리를 따르는 1만 5000여 명 중에는 최강(崔康)을 포함한 랴오둥(요동) 조선인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주체와 충돌하지 않으려고 임팔라실리 등 주모자들을 주체에게 넘겨줬다. 조선은 주체가 일으킨 내란이 4년이나 지속됐는데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요동 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을 살해하고 집권한 이방원으로서는 정권 안정을 위해 중국 정권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주체든, 주윤문이든 어느 한쪽 편을 들 수가 없었다. 

주체의 쿠데타가 일어난 50년 뒤 조선에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세조(이유)는 주체의 사례를 통해 정권 찬탈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영락제로 등극한 주체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한씨(韓氏)의 조카가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 이혈의 어머니 인수대비다. 

태조 주원장이 농본주의적 한족 민족국가를 목표로 한 데 반해 영락제는 세계제국을 지향했다. 영락제는 몽골 정벌을 시도하면서 환관 정화(1371~1434)를 기용해 남중국해-인도양 항해에 나섰다. 정화의 아버지는 윈난(雲南) 출신 이슬람교도 무함마드다. 그의 가계(家系)는 이란 또는 터키계로 추정된다. 제1차 대항해는 1405년 창장 하구의 류자허(劉家河)에서 출발했다. 난징에서 건조한 300~2000t급 대형선 62척에 2만 7800명의 장병이 승선해 푸젠-베트남 중부(퀴논)-자바(수라바야)-수마트라(팔렘방)-스리랑카(갈레)-인도(캘리컷) 항로를 총 2년간 항해한 끝에 1407년 귀환했다. 

정화의 대항해가 있은 지 60년 후인 1492년 제노아 공화국 출신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 때 승무원 88명이 250t급 산타마리아호 등 3척에 승선해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에 도착한 것과 1497년 포르투갈 출신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항해 때 120t급 선박 3척이 사용된 것에 비춰 볼 때 명나라의 조선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정화의 대항해는 남중국해-인도양 연안 국가에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정난의 변’ 와중에 행방불명된 건문제의 행방을 수색하고 후추와 각종 진귀한 물품을 입수하는 것도 항해 목적 중 하나였다. 당시 수마트라 팔렘방에는 이미 상당수의 화교가 살고 있었다. 명나라에 적개심을 갖고 있는 티무르 제국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항해 목적 중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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