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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반정 공신 이귀와 김류의 주도권 다툼

사관은 곧은 붓을 들어야 한다

  • |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반정 공신 이귀와 김류의 주도권 다툼

조선에서는 사관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직필이 가능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려 했다. 이는 당대의 역사를 후대 사람들이 거울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사관들은 당대의 권력자에 대한 평가와 비판도 과감히 기록할 수 있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에 성공한 뒤, 반정 공신 세력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공신 세력은 광해군 때 집권파였던 대북(大北) 세력을 숙청하는 데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한편,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는 일도 함께 해나갔다. 

이때 이러한 일을 공신 세력의 두 축이었던 이귀(李貴·1557~1633)와 김류(金·1571~1648)가 같이 이끌어나갔으나, 이 둘은 정치적 의견이 달라 팽팽하게 대립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인조 앞에서도 거침없이 말해 사관에게 ‘잡군자(雜君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김류와의 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조 7년(1629) 7월 23일, 경덕궁(현재의 경희궁) 자정전(資政殿)에서 낮에 임금과 함께 공부하는 주강(晝講)이 열렸다. 이귀는 지경연사(知經筵事) 자격으로 참석해 좌의정 김류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지난날 윤원형이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청직(淸職)의 후보자를 정하는 일에는 간여하지 못했고, 이이(李珥)같이 현명한 분도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사헌부 지평 후보자 하나도 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당하관인 청직의 후보자 선정을 이조의 낭관이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대신이 관원을 천거하여 임명하는 것이나 이조의 낭관이 청직의 후보자를 정하는 일이 모두 현직 대신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면 권세가 너무 강해져 또 하나의 이이첨(李爾瞻)이 될 것입니다.  


<인조실록 7년 7월 23일>


반정 공신 이귀의 초상이다. 김류와 함께 인조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반정이 성공한 뒤 김류가 권력을 남용한다고 맹비난했다. 사관은 이귀가 ‘순수하지 못한 면은 있지만 선을 좋아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반정 공신 이귀의 초상이다. 김류와 함께 인조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반정이 성공한 뒤 김류가 권력을 남용한다고 맹비난했다. 사관은 이귀가 ‘순수하지 못한 면은 있지만 선을 좋아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인조의 신망을 받은 김류는 그즈음 조정의 인사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이에 이귀는 주강이 열린 자리에서 김류가 임금을 속이고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했다고 논박하면서 김류를 간흉 이이첨에 빗댄 것이다. 김류는 다음 날 바로 사직을 청하는 차자(箚子)를 올려 자신의 뜻을 인조에게 알렸다.


신과 이귀는 결의하던 날부터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사가 실패하면 함께 도륙당하고 성공하면 같이 복을 누릴 처지였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서로를 해칠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겠습니까? 신이 변변치 못하여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두 신이 자초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습니까? 예전에 역사서를 보니, 어떤 사람이 친구와 같이 길을 가다가 금덩어리를 줍게 되자 강에 던지면서“이 금덩어리 때문에 돈독했던 우정이 혹시라도 변할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일도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신은 부끄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인조실록 7년 7월 24일>


반정 공신 김류의 초상. 반정이 성공한 뒤 조정의 인사에 적극 개입하다가 이귀로부터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관은 김류가 ‘고집이 세긴 했지만 명예를 탐내는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평했다.[국립중앙박물관]

반정 공신 김류의 초상. 반정이 성공한 뒤 조정의 인사에 적극 개입하다가 이귀로부터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관은 김류가 ‘고집이 세긴 했지만 명예를 탐내는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평했다.[국립중앙박물관]

김류는 이귀가 자신을 간흉으로 지목한 것을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이귀와 관계가 틀어진 것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했다. 두 공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김류와 이귀는 함께 반정에 참여해 공을 세웠지만 지향하는 바가 달랐다. 김류는 붕당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고 이귀는 한쪽 편만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류 편에서 빠져나온 자들은 모두 김류가 명예를 탐낸다고 하고 이귀 편으로 들어간 자는 모두 이귀가 선(善)을 좋아한다고 하여 시비가 들끓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김류가 이귀를 헐뜯는 일은 적었고 이귀가 김류를 비방한 일은 많았다. 김류가 고집이 세긴 했지만 명예를 탐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이귀가 순수하지 못한 면은 있지만 선을 좋아하는 것이 장점이었으니, 둘 다 군자라 할 만했다. 그러나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했다. 이귀는 명망과 실제가 본래 가벼웠는데, 김류가 마음을 넓게 먹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인조실록 7년 7월 24일>


이 사평에서 보이는 사관의 시각이 꼭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관의 평가를 통해 우리는 당대 권력자인 이귀와 김류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인조반정 후 권력의 정점에 있던 두 인물에 대해 사관이 거리낌 없이 비판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직필을 보장한 조선의 사관 제도와 사관이 지닌 투철한 기록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대의 권력자인 공신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판단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존재가 ‘사관’이었으며,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주장하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감 없이 비판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할 때,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수백 년 전 조선 사회보다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신동아 2018년 10월 호

|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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