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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이 내리기 전 2막을 준비하라!

인생 이모작 탐구생활

  •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onga.com

1막이 내리기 전 2막을 준비하라!

  • 직장생활 30년. 가족, 건강도 뒷전으로 하고 금쪽같은 청춘을 바쳤지만 계급장을 반납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하지만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인생의 종착점은 아니기에 우리는 또다시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한다. 돈과 명예를 떠나 다시금 인생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예능국 소속 15년차 방송 PD 한성우. 아침 일찍 편집실에서 성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창민 제작국장이다. 아침부터 국장이? 성우가 전화를 받자, 곧바로 국장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할 얘기가 있으니 내 방으로 와.”

성우가 들어서자 국장은 책상 위 껌통에서 껌 몇 알을 집어 꺼내 입에 넣었다. 줄담배로 유명한 국장이지만 한 달 전 건강검진 결과를 통보받은 뒤 불현듯 금연을 결심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그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국장은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한 PD, 다큐 하나 만들어볼래?”

“다큐요?”



“이번에 본사 미래미디어그룹이 고용노동부랑 공동 주관하는 사업이 있는데, 우리가 퇴직자 재취업 다큐를 기획하게 됐어. 자네가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좋은 기회이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예전부터 다큐 하고 싶다 하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자넬 예능국에 너무 오래둔 것 같기도 해. 언제까지 남들 따라 찍을 순 없잖아? 어쨌든 그렇게 알고 기획안 준비해두라고.”

그동안 육아 관찰 아니면 맛집 탐방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던 내가 다큐를? 그것도 재취업에 도전하는 퇴직자의 일상이라니. 성우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성우는 혹시 이번 다큐 제작이 최근 선배 연출자들의 잇따른 퇴사와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보도국으로 옮겨 확실히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 Episode1 코끼리가 돼가는 사람들

1막이 내리기 전 2막을 준비하라!
편집실로 들어서는데 예능국 PD 강인호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강인호가 성우 소매를 끌었다. 담배나 한 대 태우러 가자는 것이었다. 회사 1층 흡연실에 들어서자 강인호는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한 선배, 그 김중혁 부장 소식 들었어요?”

“지난해 퇴직한 김 선배?”

김중혁 PD는 마흔셋에 최연소 제작국 부장을 지낸 인물이자 채널M 간판 프로그램 ‘도전의 달인’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예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아이템을 선보여 ‘도전의 달인’은 후배 PD들에게 ‘예능의 교과서’로 불린다. 그런 스타 연출가도 5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이 회사를 떠났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조건을 내밀며 모셔가려 했을 테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그는 이 업계를 홀연히 떠나버렸다.

김중혁은 언젠가 후배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코끼리야. 코끼리는 죽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영물이거든”이라며 반농담조의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지금 서서히 그 코끼리가 돼가고 있다던 김중혁은 퇴임 당일 환송회도 뿌리치고 환한 대낮에 회사를 떠났다.

“얼마 전에 제 동기 안재성이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촬영을 했는데, 거기서 교실 건물을 청소하고 있는 김 부장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김 선배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고?”

“그렇다니까요. 안 PD가 잠시 고민하다가 김 부장한테 다가가 인사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그간의 얘기를 좀 하더래요. 청소업체 청소부로 취업해서 현재 서울 시내 초·중·고교를 돌아다니면서 청소한다고요. 김 부장이 안 PD한테 다음에 연락하라면서 밥 사겠다고 했대요.”

“그래? PD씩이나 하던 양반이… 그래도 뭐, 잘된 일이네. 요즘 회사 나가고 다시 취업하기 하늘의 별따기라고들 하니까.”

“그나저나 천하의 김 부장이 어쩌다 청소를 하게 됐을까요? 여기저기서 러브콜 꽤 받았을 텐데.”

“글쎄, 낸들 알겠어? 이봐, 우리가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냐. 김 선배처럼 회사 나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미리 준비 좀 해야 한다고.”

“원, 한 선배도, 누가 그걸 모르나요? 어떻게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 선배들이 거의 다 회사를 나가서, 이제는 누구한테 줄을 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판국이라고요.”

그렇다. 1년 전부터 회사가 인력 재배치라는 명분으로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사내에 인맥, 학연, 지연을 동원한 정보전과 줄서기가 난무하고 있다. 언제라도 발밑의 지각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다. 강인호는 성우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이어나갔다.

“참, 한 선배, 이게 다가 아니에요.”

“또 뭔데?”

“그날 김 부장이 안 PD한테 자신이 활동하는 모임이 있다면서 심심할 때 놀러오라고 했대요.”

“무슨 모임인데?”

“김 부장과 비슷한 연배의 중장년이 모여서 자기계발을 도모하는 커뮤니티 같은 거라고 하던데요.”

“흠, 뻔한 친목 모임이 아닐까?”

“김 부장 말에 의하면, 여기서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던데요? 참여하는 사람들도 이력이 재밌어요. 강사가 된 장교, 영어 학습 앱 개발자가 된 교장, 9급 공무원이 된 외국계 무역회사 CEO…. 괜찮죠?”

강인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우가 불현듯 방법을 찾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김 선배가 활동한다던 그 모임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아이디어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성우는 강인호와 헤어지고 나오며 바로 김중혁한테 전화를 걸었다.


# Episode2 청소부가 된 스타 연출가의 고백

1막이 내리기 전 2막을 준비하라!
“오랜만입니다. 김 선배.”

“한 PD 목소리 들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런데 어쩐 일로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다 했어?”

“요즘 즐겁게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 놀러가도 될까 하고요.”

성우는 말을 약간 돌렸다. 그러나 김중혁은 이미 성우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이 편하게 말을 꺼냈다. 오히려 그는 성우의 전화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었다.

“허허. 벌써 한 PD한테까지 소문난 거야? 일단 만나자고. 여기에 재밌는 게 있어. 내가 소개해주지.”

“그렇다면 점심시간에 맞춰 출발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2월 중순이 넘어가면 추위는 한풀 꺾이고, 한낮에는 볕이 내리쬐는 게 ‘이러다 곧 봄이 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옷자락 밑으로 아직은 썰렁한 늦겨울 바람이 스며들면 한 곳에 머물던 사람들도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며 바람이 부는 대로 마음을 부여잡지 못하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성우 또한 그랬다. 언제까지 연출자로 연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회란 놈이 불쑥 다가왔다. 과연 기회일까. 위기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착한 북한산 입구에는 김중혁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김중혁은 근처 중학교에서 청소를 마치고 나온 참이라고 했다. 1년 넘게 방송국을 떠나 있었음에도 김중혁은 여전히 방송쟁이 냄새를 풍기면서 어딘지 모르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느껴졌다. 성우는 반가운 마음에 격의 없이 농담을 던졌다.

“김 선배. 요새 학위 가운데 제일 높은 게 뭔 줄 아세요?”

“학사, 석사, 박사 그다음에 또 있나? 박사 후 과정?”

“박사 다음에 ‘밥사’ 랍니다.”

“크크. 지금 나한테 밥 사라는 거지?”

“제가 보기에 김 선배가 제일 잘나갑니다. 퇴직하고도 현역에 있는 후배한테 밥 살 수 있는 선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알아, 이 사람아. 오늘은 기분이니까 한잔 걸치자고.”

두 사람은 곧장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은 오래된 한옥 특유의 꿉꿉한 군내조차 정겨웠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마침 자리가 나서 둘은 벽 쪽으로 자릴 잡고 누비 방석을 꺼내 앉았다. 김중혁은 목마른 나그네처럼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퇴직하면 많이 위축된다고 하던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입니다. 열의를 갖고 새로운 일을 해내시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허허. 비행기 띄우기는. 좌우지간 그렇게 봐주니 고맙네.”

“일하는 건 어떠세요?”

“아직 적응 중이야. 처음에는 힘들었지. 기계 만지면서 몸으로 일하는 게 쉽지 않아. 그래도 평생 머리 쓰고 살았으니까 나머지 인생은 몸을 쓰면서 살고 싶더라고. 육체노동은 특별한 즐거움이 있어. 나이 들수록 몸을 써야 건강에도 좋아. 요새는 기계랑 장비가 좋아서 50대, 60대도 충분히 하겠더라고.”

“그런 일이라면 경쟁이 치열하지 않을까요? 요즘은 경비원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던데요.”

“말도 마. 일전에 구청에서 주차단속 요원 모집한다기에 지원했더니, 일반 회사원은 명함도 못 내밀어. 교장, 중령, 연구원까지 경력이 다들 어찌나 화려한지 깜짝 놀랐네. 나는 떨어지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대기업 부장 출신인 이씨가 붙었는데, 간혹 불법 주차 차량을 단속하면 차 주인이 나타나서 욕을 하더래. 자식 같은 놈들이 그래. 속상할 법도 한데 훌훌 털어버리더군. 이씨가 스스로 위안하면서 하는 말이 더 걸작이야. 아무리 욕을 먹어도, ‘퇴직하고 만날 방구석에 있느냐’며 욕하는 마누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허허.”

“웃픈 현실이네요. 그래도 김 선배, 이렇게 빨리 다시 일을 시작하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퇴직하고 한 1년 정도는 실컷 놀면서 여행도 다니고 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 친구,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나이 들어서도 일하면 좋은 점이 아주 많아.”

“그래요?”

“돈 걱정에서 헤어날 수 있는 건 둘째치고 아침에 가족들한테 당당히 일하러 나간다고 말할 수 있잖아. 가족으로부터 존경받는 법? 가장의 권위를 세우는 법? 그거 별거 아냐. 일하러 나가면 돼.”

“역시, 돈이 곧 힘이군요. 허허.”

“돈을 계속 벌어야 나중에 아들딸한테서 손주 좀 봐달라는 얘기를 안 들을 수 있어. 집에서 노는 내 친구 녀석들은 하나같이 손주 보느라 바빠.”

성우와 잔을 부딪친 김중혁은 한 모금 훌쩍 털어넣고는 말을 이었다.

“퇴직했다는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상기시켜주는 게 뭔지 알아?”

“아내의 잔소리? 명함 없이 자기소개해야 한다는 것?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또 다른 게 있나요?”

“나한테는 휴대전화였어.”

“휴대전화라니요?”

“내가 현직에 있을 땐 아침저녁으로 진행 상황 보고받느라 휴대전화가 한시도 쉬지 않고 울렸단 말이야. 퇴직 후에는 하루에 전화가 세 통 오면 끝이야. 아내한테 한 통, 대출해주겠다는 전화 한 통, 휴대전화 바꿔주겠다는 전화 한 통.”

“하하하. 머지않아 제게도 닥칠 현실이군요.”

“또 퇴직하고 나니까, 마누라가 대화 중에 자꾸 내 말을 가로막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는 거지.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계속 심기를 건드리는 거야.”

“그래서요?”

“그래도 28년 조직에서 지내면서 체득한 지혜가 있잖아? ‘순응하면서 살자.’ 퇴직하면서 나는 그 좌우명을 아내한테 적용하기로 했지.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 자고로 아내와 사이가 좋아야 집안이 평화로운 법이니까.”

“역시, 현명한 선택입니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더라도 반드시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죠. 흐흐.”

“내가 퇴직하고 집에서 놀아도 아내는 매일 아침 출근했어. 사회복지사거든. 퇴직하고 보니까 아내의 그릇이 커 보이더라고. 출근하는 아내가 때론 무섭기도 하지만 자랑스럽기도 해. 그래도 내가 자기 공부하게끔 뒷바라지해준 걸 잊지 않아 다행이지. 힘들 때마다 그래. 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팍팍 밀어준다고. 그래서 어떻게 밀어줄 거냐고 물어보니까, 가만히 있는 게 밀어주는 거 아니냐고 하대. 나 원 참.”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내의 힘이 점점 더 세지는 걸 실감합니다. 요즘 아내한테 밉보이지 않으려 무척 애써요. 자칫 잘못했다가 한 달 내내 ‘곰국’만 먹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니까요.”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웃었다.

“김 선배. 퇴직 이후에 다른 데서 오라는 연락 받으셨죠?”

“몇 군데 있었지. 프로덕션 한 곳에선 CEO로 모시겠다고 하대.”

“그래요? 왜 안 가셨어요? 선배라면 충분히 잘하셨을 텐데요.”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하네. CEO로 모시겠다는 자리는 무조건 의심해야 해.”

“왜요?”

“대개 투자 유치를 위해 CEO 감투를 내밀거든. 사실 다른 곳도 비슷한 실정이었어. 나이 쉰 넘은 사람한테 그들이 원하는 게 참신한 아이디어겠어? 영업하라는 거 아니면 투자 받아오라는 거지. 안 그래?”

성우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김중혁은 다시금 말을 멈추고 막걸리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나도 처음엔 마음이 동했어. 그때 우연히 알게 된 형님 한 분이 나한테 진지하게 충고하더군. ‘인디언처럼 비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면 언젠가 비가 내릴 테니, 욕심 부리지 말라’고. 아니나 다를까. 지난해 연말에 그 프로덕션은 다른 회사에 넘어갔어.”

“그분이 김 선배를 구하셨군요.”

“그 일을 계기로 그 형님 소개로 퇴직자 모임에 합류하게 된 거야.”

성우는 김중혁에게 본격적으로 모임에 대해 물었다.

“모임에서 특별히 하는 활동이 있나요?”

“요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 퇴직 이후 재취업 준비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토대로 한 정보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거지. 퇴직을 두려워하지 않게끔 만드는 게 목표야. 프로젝트명은 ‘웰 컴 투 은퇴발전소’.”

“한 선배가 말하신 그분도 참여하시나요?”

“윤재성 형님은 상담 역할을 맡았어. 외국계 무역회사에서 CEO까지 지내고 퇴직한 분이라 우리보다 경험이 많아. 회사 나와서 쉬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9급 공무원 시험 기사를 보고 도전하기로 결심했다나 봐. 두 번 만에 합격했다더군. 경기도에서 3년 근무하고 지난해 정년퇴임했어. 지금은 프리랜서 강사로 분해서 경기공무원연수원에서 리더십, 조직 관리 강의를 해.”

성우는 김중혁의 얘기를 들으며 젊은 사람들 속에서 흰머리가 수북한 머리를 싸매고 앉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을 윤재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성우는 윤재성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김중혁에게서 건네받은 그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김중혁의 소개 덕분인지 불쑥 만나고 싶다는 성우의 청을 윤재성이 흔쾌히 들어주었다. 마침 오늘은 강의가 없어 시간이 된다고 해 차를 한 잔하기로 했다. 성우와 김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을 기약했다.


# Episode3 “당신이 퇴직을 준비한다면” 인생 선배에게 배우다

1막이 내리기 전 2막을 준비하라!
윤재성의 작업실은 북한산에서 멀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윤재성이 곧바로 나왔다. 윤재성이 무척 밝은 표정으로 성우를 맞았다.

“환영합니다. 누추한 이곳까지 찾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채널M 방송PD 한성우입니다.”

작업실 공간은 작지만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구형의 컴퓨터가 놓여 있는 꽤 크다 싶은 책상 위에는 빛바랜 가족사진과 윤재성의 젊은 시절을 찍어놓은 사진이 여러 장 놓여 있었다. 윤재성의 꼼꼼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듯 빈틈없이 정리된 서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공무원 재직 시절 동료들과 찍은 사진과 공로패였다. 윤재성이 콜롬비아산 원두를 갈아서 내린 아메리카노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성우가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말을 꺼냈다.

“공무원 생활이 즐거우셨던 모양입니다.”

“제겐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까? 어떤 점에서요?”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알고 지내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공무원 생활을 하니까 그 리스트에 새 이름을 계속 올릴 수 있더라고요. 또 낯선 분야의 일이다 보니 나 스스로 계속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치매 예방 효과를 톡톡히 봤죠. 허허.”

윤재성은 깐깐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수더분한 스타일이었다. 대화 중간에 그가 던지는 유머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김 선배한테 듣기로는, 줄곧 사기업에서 근무하셨다고요. 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들었습니다.”

“허허. 김 선생이 나를 잔뜩 포장해놓았군. 외국계 무역회사에서 꼬박 30년을 근무했는데, 사장으로 일한 기간은 2년밖에 안 돼요.”

“사장을 지낸 분이 말단 공무원이 되어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과거의 지위나 연봉을 모두 내려놓아야 해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도 하지 말아야 하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역에 있을 땐 실적 비교, 승진 비교, 연봉 비교, 결혼해서는 아이들 성적 비교, 아파트 평수 비교하며 살잖아요. 나이가 들면서는 개개인이 고유의 인격체가 돼야 해요. 비교 대상을 두지 않는 거죠. 나를 완성시키는 것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나 자신을 생각해봐요.”

“공무원이 되고 나서 선생님보다 나이 어린 상사나 선후배들과 잘 지내려고 애를 많이 쓰셨겠군요.”

“아무래도 임원으로 있다 나왔으니, 아랫사람한테 지시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더 겸손하고 유연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젊은 직원들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면 얼른 가서 밥값을 계산하고, 수시로 간식도 사다 날랐죠. 결혼식, 돌잔치 부조도 웬만하면 다 챙기려고 했고요. 자고로 나이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한다지 않습니까. 허허.”

“제2의 직업을 구할 땐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까? 잘하는 일을 해야 합니까?”

“사견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제2의 직업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니까요. 돈을 벌고 나의 존재와 명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소명대로, 나아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 일인지에도 무게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다른 사람의 이목이나 평판에 신경을 쓰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에요. 퇴직한 후 초고속으로 재취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꼭 좋지만은 않아요. ‘내가 생각했던 인생 이모작은 이게 아닌데’ 하고 다시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빨리 취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 취업하면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 해요.”

윤재성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성우의 머리가 트이는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막막했던 다큐 제작방향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들이 뭘 준비해야 할까요?”

“퇴직자들 대부분이 재취업하거나 창업할 때 범하는 큰 잘못이 하나 있어요. 대부분 회사를 나온 뒤에 할 일을 찾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위험한 생각입니다. 지금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밖으로 나오면 세상은 ‘엄동설한’이에요.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도 확 줄어들죠. 회사에 있을 때는 별스럽지 않게 접하던 정보도 나와서는 뭐 하나 얻기가 쉽지 않아요. 그나마 회사라는 안전망이 있을 때 퇴직을 준비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싶다면 퇴근 후에 학원을 다니고, 자격증이 필요하면 공부하고, 학위가 필요하면 야간 대학원을 다니는 식이죠. 중요한 건 근무 시간 이외의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거예요.”

“선생님은 강사로 재취업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셨나요?”

“공무원교육원이나 공무원연금관리공단, 공무원이 모인 커뮤니티 등 강사가 필요한 곳에 제 약력과 강의 원고를 보내서 강사 채용 여부를 타진했어요. 무료 강의도 제안했죠. 처음에는 한 달에 한 건 정도 강의가 들어오더니 이제는 입소문이 나서 주 3회 정도 고정적으로 강의를 나가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알아보셨군요.”

“때로는 부탁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해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일부러 기관에 전화해서 담당자한테 안부도 묻고 다음 학기 강의 일정도 슬쩍 언급하고 했어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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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흠, 계획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인생 이모작을 탐구하는 활동을 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김 선생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와 비슷한 형태가 될 겁니다.”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니, 몸은 다소 피곤했지만 가슴은 오히려 답답함이 사라졌다. 해답을 얻은 듯해, 성우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윤재성이 성우를 문밖까지 배웅해주었다. 두 사람은 의미 있는 미소를 나누며 헤어졌다.

회사로 돌아온 성우는 어떻게 다큐를 만들 것인지 생각했다. 예능의 끝은 다큐멘터리다. 곰곰이 생각하던 성우는 마침내 적당한 콘셉트가 떠올랐는지 얼굴을 펴고는 노트북에서 파일을 열어 기획안을 작성했다. ‘다큐 예능: 웰 컴 투 은퇴발전소! 인생 이모작 탐구생활.’

“참 재밌는 인생이야.”

성우의 혼잣말은 소란스러운 사무실 소음에 묻히고 있었지만, 인생 후반전을 향해 뛰어가는 이들의 일상은 망각에 각인된 채 사라지지 않았다. 성우는 카메라 장비를 챙겨 들고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동아 2019년 3월호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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