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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덕통사고’ 당했다”

30, 40대를 위한 초보 덕질 가이드

  • 장민지 프로덕질러·웹 평론가 mingi.jang@gmail.com

“나는 오늘도 ‘덕통사고’ 당했다”

  •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열성적으로 빠져드는 것을 덕질이라 한다. 덕질은 블랙홀과 같다. 시작(입덕)하고 쉴 수(휴덕) 있어도 그만둘 수(탈덕)는 없다. 문제는 30, 40대 중엔 ‘입덕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 덕업일치(덕질과 직업이 일치하는 삶)를 이룬 장민지(35) 웹 평론가가 30~40대를 위한 초보 덕질 가이드를 보내왔다.
1세대 아이돌 H.O.T.가 2018년 10월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17년 만에 콘서트를 열었다. [뉴스1]

1세대 아이돌 H.O.T.가 2018년 10월 13일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17년 만에 콘서트를 열었다. [뉴스1]

어느 날 텔레비전 전원을 무심코 켜고 회사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던 당신. 늘 그렇듯 상사는 당신을 괴롭히고, 연애는 마음대로 되질 않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따윈 이미 잊은 지 오래.

채널을 무방비하게 돌리던 그 순간이었다. 섬광처럼 꽂혀버린 당신의 X. 초·중·고교 때는커녕 대학 때까지 연예인이라고는 1도 좋아한 적 없던 당신이 숨 쉬듯 ‘덕통사고’(교통사고 당하듯 강렬하게 특정인에 대한 마니아가 되는 것을 뜻함)를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 걸’을 읊조리게 하는 연예인을 좋아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누군가는 말했다. 첫 키스를 하면 귓가에 종이 울리는 기분이 든다고. 나는 텔레비전 속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는 그이, 나를 위해 웃어주는 그이, 날개 달고 날아갈 거 같은 그이에게 덕통사고를 당해버린 것이다.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태어난 연도가 크면 다 오빠 아니에요?’


“최애를 찬양하라”

무릇 덕질은 10대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당신. 걱정하지 말라. 어느 콘서트장, 팬 사인회장에 가도 누나, 이모, 심지어 삼촌부대가 있기 마련이다. 덕질에는 세대, 성별, 인종 간 차별이 없다. 아니 당신은 심지어 콘텐츠 소비에 필요한 경제적 자본까지 두둑이 갖춘 30, 40대가 아닌가.

텔레비전에 나와 당신의 심장을 앗아간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보자. X의 공식 팬클럽이 있다면 당장 가입하자. X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계정이 있다면 팔로우는 필수다. 그와 그녀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덕분에 친밀감 1을 획득했다.



당장 휴대전화 설정을 열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트위터의 알람을 켜놓으라. 오랜 경력을 가진 연예인이라면 과거 사진과 활동을 발굴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요즘 연예인은 유튜브나 인스타 라이브, V 라이브로 팬과의 소통에 열성을 보이니, 반드시 가입하고 알람을 주시할 것. 놓치고 나서 보는 것도 좋지만 실시간으로 팬들의 댓글을 읽어주는 귀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만약 주변에 당신의 덕질을 알리고 싶지 않다면 비공개로 서브 계정을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팁. 메인 계정으로 부끄러운 댓글을 달기가 쉽지 않다면 익명의 아이디로 최애(최고로 애정하는)를 마음껏 찬양해보자. 누가 아는가. 최애가 당신의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주거나 직접 대댓글(댓글의 댓글)을 달아줄지. 이런 짜릿한 리액션을 기대할 수 있다니, 역시 4차 산업혁명은 덕질을 위해 건설된 고속도로임이 틀림없다.

소셜네트워크 소통이 쑥스럽다면 공식 팬클럽이나 팬카페에 먼저 가입하자. 무턱대고 가입 버튼을 누르기보다, 공지를 꼼꼼히 읽고 카페의 철칙을 숙지해야 한다. 멋모르고 글을 쓰거나 카페에서 잘못 행동했다가는 영원히 추방당할 수 있다. 추방자는 공식 팬클럽에만 주어진 다양한 혜택을 받지 못할 수 있으니 반드시 기억하자. 가끔 공식 팬클럽에서는 최애의 공식 행사 이외에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생일파티 겸 팬 미팅을 주최키도 하니 규칙을 잘 알아둬야 한다. 공식 팬클럽에 가입한 최애의 ID를 찾아 알람 설정을 해놓기를. 최애가 포스팅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이제 당신의 스마트폰이 바빠질 차례다.


“이선좌를 맞더라도 클릭을 멈추지 말라”

팬카페나 팬클럽에 올라온 최애의 스케줄을 정리했다면 이제 행동으로 보여줄 차례다. 그에게 덕통사고를 당한 뒤 몇 달간은 예전에 뿌려진 떡밥을 복습하며 행복함을 만끽할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새로운 스케줄에 목말라 계속해서 ‘새로고침’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어느덧 당신은 그가 나온 프로그램이나 공연을 너무 많이 본 나머지 발언까지 외울 정도가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X가 보고 싶은 건 우리의 탓이 아니라, 귀여운 최애의 탓이 틀림없다. 당신은 아침마다 찬물을 떠놓고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영상이나 일정이 올라오길 바랄 뿐이다.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 속 최애가 웃을 때마다 심장 근처가 아픈 걸 보니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싶다.

갑자기 당신의 스마트폰에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최애의 스케줄이 잡힌 모양이다. 당신이 입덕하고 근 몇 주 만에 잡힌 최애의 스케줄이 만약 공연이라면 티케팅(티켓을 예매하는 행위)은 필수. 티케팅은 천운이다. 연습으로만 해결되지 않으니 공연을 가기 위해선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일정을 살펴보자. 최애의 공연은 우리가 가고자 마음먹는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내 자리가 있어야 갈 수 있다. 당신의 최애가 나만의 최애가 아님을 꼭 알아야 한다.

주변에 덕질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친구가 있는지 수소문해보자. 혹시나 당신이 덕후임을 밝히기 꺼려지면 조카, 혹은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을 위한 것이라며 살짝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그들에게 팁을 구하거나 당일 티케팅에 용병(자신을 위해 티케팅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을 의미)으로 참전시킬 수도 있다. 네이버에 ‘티케팅 잘하는 법’을 치면 게시글이 제법 많이 나오니 걱정 마시길.

최애가 그룹이라면 자신이 응원하는 X의 자리를 잘 기억해두자. 좌블(좌측 블록) 우블(우측 블록) 중블(중앙 블록) 중에 원하는 자리를 ‘겟’해야 한다. 뭐니뭐니 해도 중블이 최고다. 최애가 좌블에 있든, 우블에 있든 중블의 시야각은 최상이다. 그만큼 쟁탈전이 치열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차라리 사이드를 노리는 것도 팁이다. 무턱대고 중블 앞쪽을 클릭했다간 ‘이선좌’(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동안 당신의 포도알(빈 좌석. 빈 좌석의 색이 포도색이라 붙여진 용어)은 점점 사라져 ‘그곳에 내 자리 하나 없을’ 수도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포도알을 눌러라. 가끔 결제창까지 갔다가 취소되는 표도 있으니 새로고침도 필수.


“취케팅과 예대가 기다린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표를 구할 수 없었다면 취케팅과 예대(예매대기) 서비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취케팅이란 누군가가 취소한 티켓을 당신이 잡아채는 것이다. 물론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취소할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미친 듯이 사이트를 들락날락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취소된 표를 선점할 수 있는 예매대기 티케팅을 해두면 어떤 사람이 자리를 취소하거나 환불, 혹은 결제하지 못했을 때 당신이 알람을 받을 수 있다. 취케팅보다 예대가 좋은 건 하루에 몇 번씩 사이트를 들락날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면, 당신에게 남은 선택지는 공식 팬카페나 팬클럽에 게시되는 티켓 양도뿐이다. 원가 이하로 티켓을 양도하는 게시판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 공식 팬클럽이나 팬카페는 가입 절차가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덕분에 사기를 당하면 아이디를 신고할 수 있다. 트위터나 인스타로 양도받는 티켓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프리미엄을 붙인 티켓은 보지도 말고 구매하지도 말자(제발).

티켓을 손에 쥐었다면 굿즈(goods, 연예인이나 스포츠팬을 대상으로 기획·제작된 상품) 구매는 인지상정. 공연에 갈 때 두 손에 아무것도 없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덕질 초보 중에 초보. 하늘 아래 같은 공연이 없다지만, 처음부터 제대로 즐기려면 최애의 공연을 유튜브에서 검색해보고 분위기를 먼저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응원봉을 사거나 슬로건을 들고 최애의 노래를 따라 부르자. 응원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최애는 우리의 목소리를 원한다. 수많은 팬이 하나 됨을 최애 앞에서 보여준다면 거기에 감동받아 눈에 별을 박은 X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연장에 미리 도착하는 것도 좋다. 굿즈를 구매하기 위해 일찍 오는 팬들도 있음을 기억하자. 혼자 왔다고 해서 X에게로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덕질로 대동단결’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내 최애가 누군가의 최애라면 그 누군가는 이미 나에게 남이 아니다. 공연장에 가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나에게 이웃이요, 친우다.

그들이 ‘무나’(무료나눔)를 행하는 X의 사진과 슬로건을 잔뜩 받아가자. 특히 당신이 30, 40대라면 공연을 보다가 당이 떨어질지 모른다. 덕질 친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나눠주는 초콜릿과 물, 음료를 거부하지 말자. 공연 도중 당이 떨어져 최애가 흐릿하게 보인다면 그 또한 슬플 것이니. 우리에겐 돈은 있지만 10, 20대에 비해 체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줘야 인지상정. 다음 공연 땐 우리가 먼저 간식을 준비해보자. 마음이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덕질경제다.


“럭키 대잔치”

2018년 10월 9일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스타의 거리에 방탄소년단(BTS)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뉴스1]

2018년 10월 9일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스타의 거리에 방탄소년단(BTS)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뉴스1]

공연장에 같이 갈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솔플(솔로 플레이)도 나쁘지 않다. 옆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최애에게 자신의 가득한 사랑을 보여주자. 최애가 나를 보지 않더라도 하트를 그리거나 손가락으로 입맞춤을 날려보자, 최애가 웃는 것이 나를 보는 것인지 옆 사람을 보는 것인지 따윈 중요치 않다. 팬 무리에게 날리는 꽃미소라도 나를 봤다고 생각하면 나를 본 것이다. 다수에게 퍼붓는 팬 서비스일지라도 X가 팬을 부르는 순간 나는 이미 그에게로 가 덕후가 돼 있을 것이다.

무사히 공연을 다 보고 나왔다면, 당신의 시름은 날로 더해갈 것이다. 최애의 공연을 더 보고 싶어 안달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일드라마처럼 매일같이 공연이 있지는 않다. X를 볼 수 없는 시기를 우리는 ‘휴덕기’라 한다.

운이 좋아 한창 활동 중인 최애에게 덕통사고를 당했다면 그야말로 럭키 대잔치. 그의 공연이나 그가 출연한 방송, 드라마, 영화를 그 시기에 마음껏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행운일 것이나 가끔 신은 우리에게 장난질을 쳐 몇 년에 한 번씩 활동하는 X의 덕후가 되게 하심도 있다. 최애가 공연이나 방송을 쉬는 동안에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고, X를 생각하며 굿즈를 만들고, 가끔 덕메(덕질 메이트)를 만나 X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다. 그래도 무심하시게 팬들에게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아 마음속 애증이 쌓여갈 때쯤, ‘탈덕인가’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덕질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덕통사고는 한 번만 당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매 순간 마주치는 것이 덕통사고일 수도 있다. 덕질이야말로 중독이다. 매번 휴덕기가 주는 괴로움과 허무함을 알면서도 최애를 만나는 그 순간, 그 기쁨, 그 행복함이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덕질은 삶의 기쁨이요, 최고의 카타르시스다. 덕후들이여 덕질을 부끄러워 말라. 내 최애를 자랑스러워하라. 그 누구는 오늘 최애를 위해 노르웨이어를 배우고 웨이보(Weibo)를 시작한다. 덕질에는 국경이 없다. 그대여, 덕후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오라. 새로운 파라다이스가 열릴 것이니.




신동아 2019년 3월호

장민지 프로덕질러·웹 평론가 mingi.j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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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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