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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

스톡홀름에서 만난 바이킹의 숨은 얼굴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스톡홀름에서 만난 바이킹의 숨은 얼굴

  •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수도이자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제일 큰 도시다. 14개의 섬을 57개의 다리로 연결한 도시라서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이 있다. 스웨덴은 지구상에서 복지제도가 가장 좋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는 가장 무자비했던 바이킹의 후예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 절로 탄성이 나온다.
바이킹 용선.

바이킹 용선.

이 도시의 경이로움은 지하철역에서 시작된다. 세상에서 가장 긴 미술관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 바로 지하철 역사다. 이곳을 예술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은 1950년 시작됐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공학자, 만화영화 제작자는 물론 일반 시민까지 공동으로 참여했다. 전문가와 일반 시민이 함께 어울려 대형 예술작품을 만드는 협동 작업이야말로 스웨덴 사회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중앙역의 경우를 보자. 처음에는 세 명의 예술가(Per Olof Ultvedt, Signe Persson-Melin, Anders Österlin)가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 다음 많은 예술가와 시민들이 수년간 공동 작업을 벌였다. 그렇게 하여 거대한 청색의 넝쿨 줄기가 백색의 벽을 타고 천장까지 올라가는 그림이 됐다. 초대형 백색 캔버스에 청색의 줄기가 시원스럽게 뻗어가는 모습이 힘차고 평화롭다.

바이킹 시대에도 그들의 위력은 협동에서 비롯됐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용머리가 장식된 배를 타고 죽음의 바다로 나갔다. 위험한 항해였지만, 바이킹의 용선은 당대의 어느 선박보다 빠르고 균형 잡힌 배였다. 그들은 돛대를 마음대로 세웠다 눕힐 수 있었고, 돛의 방향도 마음대로 바꿨다. 그러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북해에서 발굴된 용선의 잔해를 바탕으로 실험고고학자들이 밝힌 것이다.

강의 상류에 이르러 물줄기가 끊어져도 바이킹은 항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름칠한 통나무를 땅바닥에 깔았다. 그 위로 용선을 조금씩 밀었다. 이렇게 수십㎞의 숲길을 헤쳐 나갔다. 또 다른 물줄기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강한 용기와 신념으로 무장돼 있었다. 부하들의 단결심과 복종심도 그에 못지않았다.


역사 문화의 향기 넘치는 스톡홀름

바이킹 공예품.

바이킹 공예품.

스웨덴뿐만 아니라 노르웨이와 덴마크도 바이킹의 후손이다. 이들 세 나라가 도달한 사회복지와 양성평등의 수준은 사상 최고다. 그들은 역사의 새길을 뚫은 것이다. 바이킹의 신념과 용기, 협동의 전통이 아직 맥맥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스톡홀름은 조용하고 한가하다. 이 도시 출신인 내 친구 안더쉬도 고요한 성품이다. 그렇대서 그가 꼭 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스톡홀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특징은 정중동(靜中動)이다. 고요한 스톡홀름에는 역사의 힘찬 맥박을 느끼게 하는 유적이 믾다. 유서 깊은 스톡홀름시청과 세르엘 광장, 스웨덴 왕궁과 유럽 최대 규모인 스칸센(요새) 야외박물관, 바이킹의 유물을 고스란히 전하는 바사박물관, 스톡홀름대성당, 노벨박물관, 스톡홀름국립미술관, 유르고르덴(동물정원)과 스톡홀름도서관에 이르기까지,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곳이 많기도 하다.

고풍 어린 여러 장소를 둘러보면,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금세 헤아릴 수 있다. 바이킹의 시대를 지나 그들은 차츰 중세 유럽의 질서에 적응했다. 바사박물관에는 그 역사를 증명하는 유물이 많다. 중세가 끝나고 16세기가 되자 스웨덴은 이웃한 덴마크의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됐다(1523). 구스타프 1세는 뤼베크(독일)의 도움을 얻어 스톡홀름을 수도로 정했다. 얼마 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스웨덴은 루터파의 신교국가가 됐다.

이후 스웨덴은 강대국의 면모를 갖춰갔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사자왕 구스타프 아돌프다. 왕은 신교와 구교가 정면충돌한 독일의 30년전쟁(1618~1648)에 참전해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스톡홀름이 명성을 얻은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왕립오페라극장을 비롯해 스웨덴 아카데미, 왕립도서관 등이 잇따라 건립됐다.


노벨과 아바, 린드그렌, 이케아까지 이어지는 선

산업혁명은 스웨덴에서도 일어났다. 그때 알프레드 노벨이란 창의적인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 사업으로 거부가 됐는데, 유언장을 작성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노벨은 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했다. 그런 뜻을 받들어 1901년부터 노벨 물리학상, 노벨 화학상, 노벨 생리학·의학상, 노벨 문학상, 노벨 평화상이 제정됐다. 지금도 12월 10일이 되면, 스톡홀름시청에서는 그해의 노벨상 수상자를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연다.

스톡홀름은 문화도시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스웨덴의 아바(ABBA)를 기억할 것이다. 1972년부터 1982년까지 활동한 4인조 남녀 혼성 그룹이다. 아바의 앨범은 무려 3억7000만 장 넘게 팔렸다. 그들이 선보인 북유럽 특유의 독특하고 순수한 대중음악에 전 세계가 감동했다. 문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딸이 병석에 누웠다. 엄마는 즉석에서 이야기를 꾸며 딸을 위로했다. 이때 탄생한 게 바로 ‘말괄량이 삐삐(삐삐 롱 스타킹)’다.

삐삐 이야기는 1945년에 첫 번째 책이 나왔고 이후 1975년까지 10권의 책이 연달아 출간됐다. 삐삐는 린드그렌의 분신이었다. 모험을 일삼는 용감 쾌활하며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아이다. ‘삐삐 롱 스타킹’은 전 세계 어린이의 영원한 벗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도 이 책을 읽었다. 손에 땀을 쥐다가도 금세 요절복통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기억이 난다. 스톡홀름의 듀르가르덴섬, 주니바켄 어린이박물관에서 삐삐를 다시 만나 무척 반가웠다.

스웨덴 사람들은 실용과 단순, 소박함, 거기에 용기와 쾌활한 웃음을 더한 독특한 미학을 추구한다. 이러한 스웨덴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문득 바이킹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웨덴 왕궁의 뜰을 거닐면서 말이다. 그리고 순간 스웨덴의 가구제조업체 ‘이케아(IKEA)’도 뇌리에 떠올랐다. 스톡홀름 지하철 역사들이 그러하듯, 이케아의 가구도 전문가의 디자인을 일반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는 식으로 은연중에 협동을 유도한다. 유서 깊은 문화적 전통은 과연 이런 것인가. 외관은 시대마다 달라질지언정,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도 퇴색하지 않는 한결같음이 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이킹, 무엇을 먹고 마셨나

바이킹 금제 메달.

바이킹 금제 메달.

스톡홀름의 날씨는 춥다. 수년 전, 내가 그 도시를 찾았을 때도 그랬다. 3월인데도 기온은 서울로 치면 12월 중순 같았다. 날씨도 춥고 일조량도 부족하니, 농사가 신통할 리 없다. 그들의 식탁에는 자연환경의 위력이 그대로 투영된다.

바이킹 시대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술이 세다. 추운 날씨에 육체노동을 하려면 높은 열량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안더쉬도 주량이 얼마나 큰지 아무리 마셔도 끄떡없다. 스웨덴 사람들은 처음부터 독한 증류주를 마셨다. 1879년, 스웨덴 사람 라스 올슨 스미스가 앱솔루트 보드카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바이킹은 술이 셀수록 남자답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전통 때문에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 유독 많다. 나라에서는 술값을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높였고, 해외의 주류가 함부로 반입되지 못하게 감시한다. 또 원하는 대로 사서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없게 통제한다. 그래도 워낙 많은 사람이 술을 좋아해서 정부는 술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스웨덴 요리는 단순 소박하다. 건빵인 크네케브뢰드가 특히 유명하다. 바이킹은 용선을 타고 여러 날 동안 굶다시피 했다. 그들은 말린 빵 크네케브뢰드를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연어를 절인 그라블락스도 전통 음식이다. 스웨덴 북부에서는 청어를 소금에 절여 먹는다. 수르스트뢰밍이라고 하는데, 그 맛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정도다.

이 밖에 소시지도 있고, 소금에 양배추를 절인 자우어크라우트도 있다. 자연환경이 척박하고 겨울철이 긴 관계로, 바이킹은 짜디짠 저장식품에 의존했다. 식품은 주로 수렵 채집을 통해 마련했다. 사냥에서 잡은 순록과 사슴, 또는 바다에서 낚은 연어와 청어 등이었다. 여기에 숲에서 채집한 다양한 딸기(베리) 및 버섯류가 추가됐다.

바이킹 시대에도 풍성하게 차린 식탁은 있었다. 누구나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아 마음껏 먹고 마실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머르고스보르드(뷔페)’다. 스웨덴의 음식 문화에도 지역성이 있다. 남부지방은 기온이 온난한 편이어서, 식탁도 더욱 풍성했다. 물론 바이킹 시대가 끝나고 수백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마침 덴마크를 물리치고 스코네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밀도 재배하고 낙농업이 발전한 덕분이다. 북부지방의 식탁은 여전히 바이킹 스타일이었다. 투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로는 변화가 생겼다. 러시아 요리도 전해졌고, 교역로를 통해 오스만제국의 음식도 알려졌다.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감자까지 합류해 식탁은 제법 넉넉해졌다.

그러나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해도, 스웨덴의 식탁은 여전히 바이킹의 것이다. 소박하고 단순한 절임식품으로 그들은 강건한 자녀를 키운다. 스톡홀름에 머무는 동안, 내 입맛에는 모든 것이 너무 짜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접시를 다 비웠다. 바이킹의 후손이라도 된 심정으로 말이다.

바사박물관에서 드디어 바이킹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 본래 그들은 북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스칸디나비아 연안이 삶의 터전이었다. 오늘날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및 스웨덴 사람들이 모두 바이킹의 후예다. 이 세 나라에는 바이킹의 유물을 잘 정리한 박물관이 있다. 바사박물관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곳에서 나는 특히 바이킹의 용선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일단 그 많은 유물을 둘러보고 나자, 바이킹이 개척한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잔혹한 약탈자 바이킹

스톡홀름 바사박물관의 바이킹 주거지 풍경.

스톡홀름 바사박물관의 바이킹 주거지 풍경.

바이킹에게는 농토가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차마 웃지 못할 것이 그린란드라는 이름이었다. 사실 그곳에는 녹색의 초지가 없었다. 그러나 농경의 꿈을 지닌 이주민을 많이 모으려고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속임수라고 비웃기에는 그들의 소망이 너무도 절실했다.

혹독한 자연 조건 때문에 바이킹은 생계가 어려웠다. 그들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 국제교역에 뛰어들었다. 비르카섬을 비롯해 곳곳에 교역소를 설치했다. 북유럽 최초의 도시 하이타부의 교역소에는 멀리 아랍에서도 상인들이 찾아왔다. 아랍인들은 이 도시를 ‘이 세상의 끝’이라며 탄식했다.

바이킹의 가장 큰 특징은 침략 활동이었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해안을 습격해 보물을 약탈했다. 나중에는 이탈리아까지 쳐들어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상당수의 포로는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바이킹은 무슨 일이든 했다. 8세기 후반부터 약 200년 동안, 바이킹은 유럽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침입자였다. 793년 바이킹이 탄 용선이 처음으로 영국 해안에 나타났다. 린디스판 수도원이 침략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다른 유럽인보다 키가 크고, 과감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손에 쥔 무기는 보잘것없었다.

후세는 바이킹의 모습을 상상할 때 사슬로 된 갑옷에 두 개의 뿔이 달린 투구를 쓴 전사를 떠올린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관계가 없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오페라를 창작하면서 멋대로 상상한 것이었다. 뿔 달린 투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바이킹도 드물었다.

잔인한 약탈자로 알려진 바이킹이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평화를 추구했다. 바이킹족 대부분은 어부와 농부였다. 또 바이킹 사회에는 솜씨가 탁월한 금은세공업자도 많았다. 해적질에 종사한 바이킹은 부족장 휘하의 몇몇 용사뿐이었다.

부족장(야를레)은 기다란 집을 지어놓고 식솔을 많이 거느렸다. 그에게는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들이 있어 평화를 구가하며 살았다. 부족장은 대외활동이 편리한 여름철에 전사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약탈을 일삼았다. 또는 다른 국가와의 교역에 종사했다. 이렇게 부족장이 집을 비우면 그의 아내가 통치권을 행사했다. 독특한 사회구조였다.

바이킹은 ‘씽’ 또는 ‘포크무트’라 불리는 회의체를 가지고 있었다. 마을회의 또는 부족회의였다. 중요한 안건은 이런 회의를 통해서 의결했다. 의회주의적인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부족장이 잔치를 열면 스칼드라는 궁정시인이 시를 읊었다. 12세기 이후 그 내용이 문자로 정착됐다. ‘에다’인데, 북유럽 신화를 비롯해 바이킹 영웅들의 일생과 그들의 모험담이 실려 있다.


바이킹의 기독교화

뿔 달린 투구를 쓴 바이킹의 모습.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뿔 달린 투구를 쓴 바이킹의 모습.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바이킹에 관해 내가 아는 이야기를 자세히 하려면 끝이 없겠다. 한 가지만 첨언한다. 10세기경, 다양한 층위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그들의 접촉이 빈번해졌다. 그러자 바이킹은 기독교를 수용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여겼으나, 나중에는 독일 선교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개종했다.

개종은 유럽 각국과 교역을 확대하는 데 도움을 줬다. 또 사후에 바이킹의 파라다이스 발할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천당은 매력적이었다. 바이킹의 권력자들도 기독교의 권위를 빌려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13세기 초, 노르웨이에 최초의 기독교회가 세워졌고 이후 바이킹 사회로 기독교가 번져갔다.

8세기 후반, 침략자로서 유럽의 역사에 홀연히 등장한 바이킹, 그들은 전 유럽을 누비며 동서남북으로 길을 열었다. 그들이 정복한 나라와 여러 도시, 영국, 러시아, 노르망디, 팔레르모, 더블린 등은 유럽사의 주 무대가 됐다. 그사이 바이킹은 점차 기독교에 젖어들었다. 그리하여 우르바노 2세가 일으킨 십자군전쟁(1096~1272)에 참전해, 기독교를 위해 이슬람문명과 대결했다. 이런 역사적 변화의 중심에 스톡홀름이 있었다. 나는 감라스탄을 배회하며 바이킹의 역사를 추억했다.

오늘날 스웨덴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다. 나는 스톡홀름의 지식인들에게 복지국가로 가는 지름길을 물었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평등은 물론 근대 시민사회의 중심 개념이다. 그러나 스톡홀름에서는 다른 톤이 있다. 부족 구성원 회의에서 평등한 권리와 사회적 합의를 존중했던 바이킹, 부족장의 아내가 부족장을 대신하던 그들의 전통 속에도 평등의 실마리가 있으니 말이다.




신동아 2019년 3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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