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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경제보고서 | LG경제연구원

덜 완벽하지만 더 친숙하니까

‘B급 제품’이 뜬다!

  • 유미연 |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덜 완벽하지만 더 친숙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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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리적인 소비 대안으로 B급 제품이 주목받고 있다.
  • 소비자들은 이른바 ‘가성비’가 높고 다양한 활용 가치를 지닌 B급 제품의 매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 완벽하지만 더 친숙하니까
‘뭘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날까’ 제품을 구매할 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법하다. 그만큼 소비자들은 자신의 구매 경험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관심이 많다. 그 선택으로 남보다 이득을 더 얻었는지 여부를 확인 하고 싶어 한다.

계속되는 불황과 성장 정체로 소비 행태가 바뀌고 있다. 체면이나 외부 시선에 좌우되기보다 실리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즉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다. 싸고 유행이 지난 제품을 쓰면 약간의 창피함을 무릅써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내세워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똑똑한 소비

합리적 소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가성비다. 불황과 저성장이 고착화한 탓에 이젠 상류층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는 게 트렌드가 되고 있다. 가성비 높은 제품들 중엔 흔히 ‘B급 제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있다. 제품의 품질에는 하자가 없지만 정상적인 유통이 불가능한 상품을 말한다. 가전제품은 흠집이 있어 판매하기 어렵거나 반품된 상품, 리퍼(재정비 제품 교환)를 받은 제품, 식료품은 흠집이 났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은 농수산물, 유통기한이 임박해 매장에 진열하기 어려운 제품이 B급으로 취급된다.

최근엔 B급 제품이 온·오프라인 몰에서 정식으로 판매되고 있다. 유통기한 임박 상품 전용 온라인 쇼핑몰(임박몰, 떨이몰 등), 리퍼 가전 가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아웃렛이 생겨났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트렌드모니터가 2014년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B급 제품 이용 관련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8.8%가 ‘향후 B급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지금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비자들의 ‘B급 제품 구매 경험’은 58.5%로, ‘앞으로 국내에 B급 제품을 취급하는 매장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72.3%에 이르렀다. 또한 10명 중 7명 이상이 ‘B급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똑똑한 소비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B급 제품은 싸구려 제품’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5.8%에 불과했다.

B급 제품은 ‘다양한 경험’에 가치를 두는 성향을 충족시키는 데도 유리하다. 우선 다양한 활용 가치부터 살펴보자. B급 제품은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이 있거나 유행이 지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군가가 싫증나서 버린 제품을 다시 주워 쓴다는 생각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B급 제품은 ‘못난이 사과’ ‘웃긴 감자’ ‘실패한 레몬’ 등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제 기능은 한다’는 의미를 담은, 친숙함이 묻어나는 애칭을 가졌다. 소비자들은 이들을 통해 겉치레형 소비에서 오는 피로감을 달래기도 한다. 명품 브랜드 제품을 사서 SNS에 올리는 대신 큰 하자가 없는 제품을 쓰면서 만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B급 제품은 이처럼 소비 자체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소소한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앱스토어와 구글 플레이 게임 차트 3위에 올라 있는 인기 모바일 게임 ‘Color Switch’는 앱 제작 과정과 게임 콘셉트를 고려하면 B급에 든다. 그런데 컬러 볼을 튕겨 다양한 색깔의 컬러 장애물을 통과시키는 단순한 게임인데도 묘한 중독성이 있다.

이 게임의 개발자는 컴퓨터 코딩을 할 줄 모르는 일용직 근로자이자 색약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Buildbox라는 드래그앤드드롭(Drag-and-drop, 프로그램 구성 아이템을 마우스로 끌어서 다른 곳에 옮기는 작업) 방식의 DIY(Do-it-Yourself) 게임 제작 툴로 앱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개발 경험이 전무한 개발자가 초급 수준의 앱 제작 도구로 만들었으니 B급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엔드 게임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적당히 즐길 수 있어서 좋고, 제작 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된 후 사용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더 친숙해졌다.

진격의 ‘모디슈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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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에도 공정무역 바람이 불고 있다. 사용자들이 운영체제나 부품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설계한 페어폰 제품. [페어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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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국민 가방으로 불리는 ‘프라이탁’은 ‘쓰레기를 뜯어 모아 만든 가방’이다. [프라이탁 홈페이지]

B급 제품은 비싸지 않아 부담 없이 손댈 수 있다. 제조사가 제시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제품을 얼마든지 자신의 상황에 맞게 고쳐 쓰거나 보완할 수 있다. 정상적인 유통이 불가능한 B급 제품이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기호나 취향을 살리는 ‘가치 소비’가 가능하다.

합리적인 소비와 개성을 지향하며 가치 소비를 추구하는 소비자를 흔히 ‘모디슈머(modisumer)’라고 한다. ‘modify’와 ‘consumer’의 합성어로 제품을 자기 방식으로 재창조해 사용하는 소비자를 일컫는다. TV 프로그램에서 선보여 인기를 끈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그런 예다. 미용 분야에선 ‘레이어링(layering) 뷰티’, 즉 기존의 화장품 용도가 아닌 색다른 사용법으로 제품을 소비하거나 다른 제품과 섞어 나만의 화장품을 만들어 쓰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저렴하고 간편한 B급 제품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조금 모자라고 흠이 있는 제품이라 사용자가 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gap filler)을 적극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스펙 경쟁을 피해 일탈을 시도하는 제품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평범하다 못해 버려지는 것들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고객이 원하는 형태로 재구성·재설계해 판매하는 것)하기도 한다. 스위스의 국민 가방으로 불리는 ‘프라이탁(Freitag)’은 일명 ‘쓰레기 뜯어 모아 만든 가방’이다. 가방의 천은 트럭 위에 씌우는 방수(防水)천으로, 어깨끈은 폐차에서 뜯어낸 안전벨트로 만들었고, 접합부엔 자전거 바퀴의 고무 튜브를 떼내 붙였다. 가방에서 화학제품 냄새가 꽤 나는데도 가격은 50만 원에 육박한다.

이런 재활용품이 명품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희소성 덕분이다. 같은 소재, 같은 디자인의 방수천이라도 저마다 낡은 정도, 때 묻은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일부분을 떼어내 만드는 가방은 똑같은 디자인이 단 하나도 없다.

‘페어폰(Fair Phone)’은 네덜란드 벤처기업이 개발한 조립식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가 새로운 콘셉트로 생산, 판매하는 제품이다. 페어폰은 비분쟁 지역에서 생산된 광물만을 소재로 사용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이 보장된 공장에서 조립되는 ‘공정 전화기’다. 페어폰이 1대 팔릴 때마다 2.5달러가 기부돼 노동자 복지에 쓰인다. 소비자는 온라인으로 주요 부품을 주문해 배송받은 뒤 직접 조립한다. 가격은 525유로(약 69만 원)로 중저가 스마트폰 수준. 유럽에서만 배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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