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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정동구락부 항일운동, 커피와 함께 사라지다

커피를 사랑한 사람들 한국편

  • 박영순|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정동구락부 항일운동, 커피와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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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에서 커피는 계몽사상을 일깨운 각성제로서, 카페는 민중의 혁명의식을 고취한 아지트로서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냈다.
  • 미국에선 커피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이처럼 시대적 각성, 혁명,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킨 커피와 카페의 위력은 그러나 한반도에선 통하지 못했다.
정동구락부 항일운동, 커피와 함께 사라지다

[사진제공·커피비평가협회]

커피가 재배지가 아니라 소비지로서의 아시아에 퍼진 경로는 19세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 또는 문호개방 압력과 궤를 같이한다. 1854년 개항한 일본에선 34년 뒤인 1888년 ‘가히차칸’이라는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한국에선 1882년 미국, 영국, 독일과 차례로 수교하고 15년이 흐른 1897년 상업적인 커피 판매점이 나타났다.

이렇듯 기록에 근거해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커피 역사는 시대를 함께한다. 하지만 일본의 일부 전문가들은 그들의 커피 역사가 한국보다 200년가량 앞섰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꽤 오랫동안 “개항이 앞선 만큼 그럴 수 있겠지”라며 대체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과 인도의 거대한 커피 시장이 열리면서 커피 음용의 역사와 정통성은 시장에서 한결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브랜드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믹스커피 발명국으로, 일본은 캔커피 원조국으로서 세계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사이인 만큼, 커피의 깊이에 대한 올바른 조명은 더 미뤄둘 일이 아니다.



고종이 처음 마셨다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고종황제가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셨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작금의 상황은 바로잡아야 한다. 누가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욱이 고종황제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참변(을미사변)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이듬해 2월 11일 칼바람 부는 한겨울 새벽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뒤 심적 위로를 받기 위해 커피를 좋아하게 됐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같은 겨레로서 피를 끓게 만드는 엉터리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한국의 커피 역사는 고종황제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고종실록), ‘승정원일기’(1623~1894) 등 어떤 문헌에도 고종황제가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이에 비해 일본은 1700년경 나가사키 앞에 있는 ‘데지마’라는 자그마한 섬에 네덜란드 상인을 거주시키면서부터 커피 문화를 만들어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증은 없다. 데지마를 드나들던 통역관이나 관리, 상인들이 커피를 마셨을 수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

커피에 관한 일본 최초의 기록은 나가사키에서 난(蘭)을 연구하던 시즈키 다다오가 1782년에 쓴 ‘만국관규(万國管窺)’에 한 줄 나온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커피라고 부르는 것은 콩과 비슷하지만 실은 나무 열매다”며 음료로서 커피가 아니라 식물로서 커피를 언급했다.

19세기 들어서야 커피의 맛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에도시대 나가사키에 설치된 막부의 관청에서 일하던 오타 난포는 1804년 어느 날 일지에 “서양인의 배에선 커피라고 부르기를 권한다. 콩을 검게 볶아 가루로 만든 뒤 설탕을 넣은 것으로, 단내가 나고 맛이 없다”고 적었다. 일상의 음료 문화를 적은 게 아니라, 신기한 듯 신문물에 대한 체험을 전하는 수준이다.

1867년이 돼도 지도층에게조차 커피는 여전히 낯선 존재였던 듯하다. 에도시대가 막을 내리기 1년 전인 이때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나폴레옹 3세로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 초대를 받았다. 막부는 기독교 금지를 구실로 쇄국정책을 펴던 차여서 요시노부의 남동생 아키타케가 대신 파리에 갔는데, 항해일지에 “식사 후 ‘카헤(커피의 당시 발음)’라는 콩을 볶은 탕이 나왔다. 설탕, 우유를 넣어 마신다. 가슴이 꽤 상쾌하다”고 썼다.



‘사무라이 커피’

일본에서 커피 대중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후가 아니라 1868년 왕정복고에 따라 메이지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보는 게 타당하다. 특기할 것은, 커피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유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곁들이는 데에서부터 일본 커피 문화가 조성됐다는 점이다. 1870년 우유와 버터를 판매한 우마회사가 자체 제작한 ‘육식의 설’이란 책자엔 “우유는 소젖을 짜서 그 상태로 마신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차, 커피를 끓여 혼합해 마시면 맛이 좋고 향기가 좋다”고 적혀 있다.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수필가 데라다 도라히코(1878~1935)가 1880년의 상황을 전한 ‘커피 철학 서설’엔 “처음 마신 우유는 약과 같았다. 의사는 이를 먹기 쉽게 하기 위해 소량의 커피를 배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비릿한 우유를 마시기 위해 커피를 넣기 시작한 일본의 사연은 커피 애호가들이 보기엔 이채로운 것이다. 19세기말 일본에선 눈깔사탕 크기로 둥글게 굳힌 설탕덩어리 속에 커피가루를 넣어 손쉽게 물에 타 마시게 한 ‘커피당’이 인기를 끌었다.   

일본인 스스로 커피의 유래를 네덜란드와 교역한 18세기 초가 아니라 150년쯤 뒤인 19세기 중반 러시아와 사무라이가 교류한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도상 블라디보스토크 맞은편의 일본 땅이 혼슈의 아오모리 현인데, 그중에서도 히로사키 시는 지금도 ‘사무라이 커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커피의 명인’으로 불리는 나리타 센조(64)는 “1855년쯤 변방인 아오모리와 홋카이도를 지키기 위해 교토에서 파견된 사무라이들이 손발이 붓는 풍토병을 앓고는 러시아 사람들에게서 전해 받은 커피를 마시며 치료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소개했다. 당시 사무라이는 손절구로 커피를 빻아 천주머니에 넣고는 뜨거운 물에 우려 마셨다. 임기를 마치고 교토로 돌아간 사무라이들이 건강관리를 위해 커피를 지속적으로 마시는 과정에서 커피는 점차 대중에게 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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