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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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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삼국시대(위·촉·오)→진→5호16국으로 이어지던 시기, 고구려는 그들과 때로는 통교하고 때로는 전쟁했다. 선공에 나서기도 하고,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는데…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

동한(東漢) 말 흉노와 선비 등 새외(塞外, 만리장성 바깥)민족의 중원 유입은 한층 더 늘어났다. 선비족은 랴오닝에서 내몽골을 거쳐 칭하이까지 동서로 길게 띠를 두르고 거주했다. 남흉노와 갈족(羯族)은 대체로 선비족보다는 남쪽인 산시(山西, 병주), 산시(陝西, 관중), 간쑤 서부(서량) 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저·강족(氐羌族)은 싼시 서부와 간쑤 동남부(롱)에서 쓰촨(파촉)을 거쳐 윈난(남중)까지 이어지는 서부 벨트에 주로 살았다. 후난, 저장, 푸졘을 비롯한 창장(長江, 양쯔강) 이남 지역에는 산월(山越)과 무릉만(武陵蠻) 등 좡족(壯族)과 투자족(土家族), 먀오족(苗族) 등의 조상이 거주했다.

조조, 유비, 손권과 고구려

이런 상황에서 황건군이 봉기하자 동한 왕족을 비롯한 한족의 지배 체제는 약화됐다.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건국자는 공히 황건군 토벌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위나라 창건자 조조(155~220)는 황건군 토벌을 통해 지위와 명성이 높아졌으며, 촉을 세운 유비(161~223)는 한미(寒微)한 가정 출신인 터라 황건군 토벌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군벌로서의 입지조차 구축할 수 없었다. 오나라 건국자 손권(182~252)의 아버지 손견은 황건군 토벌을 통해 아전(衙前) 신분에서 일약 군벌로 성장했다.

조조는 원소, 여포, 마초, 장로 등 군벌과 오환(烏桓)족, 저(氐)족을 제압하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 같은 조조의 동정서벌(東征西伐)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파촉의 유비와 강남의 손권을 멸망시키지 못했다.

화북과 파촉은 친링(秦嶺)산맥, 화북과 강남은 화이허(淮河)와 창장 등 대하천으로 분리돼 지역 간 왕래가 무척 어려웠으며 사회·문화적 차이도 매우 컸다. 화북인이 밀을 주식으로 한 데 비해 파촉인(巴蜀人)과 강남인(江南人)은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당시 창장 유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 화북의 거의 전부를 장악한 위나라가 절대 강자일 수밖에 없었다. 위, 촉, 오는 국력 측면에서 대강 10:2:3의 비율로 차이가 났다.

위는 촉과 오는 물론이고 선비족, 공손씨(公孫氏)의 연(燕), 그 동쪽의 고구려와도 맞서야 했다. 삼국이 정립하던 3세기 초 몽골고원은 선비족의 땅이었다. 단석괴 사망 이후 분열된 중부선비를 장악한 가비능(軻比能) 선우는 동부선비마저 손아귀에 넣으며, 촉나라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기도 했다. 위협을 느낀 위나라는 산시의 남흉노를 통해 북쪽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234년에는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했다. 구심점을 잃은 선비세력은 사분오열되고 만다.

吳,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손권,조조,유비(왼쪽부터)

공손씨는 황건군 봉기와 뒤이은 삼국 분열 시기 롼허(灤河)-다링허(大凌河) 유역에 나타난 힘의 공백을 이용해 나라를 세운 후 오의 손권 및 촉의 제갈량과 함께 위에 저항하면서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약 50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창건자 공손도는 해군을 파견해 산둥반도 둥라이(東萊) 인근을 확보하는 등 연나라를 해상강국으로 만들었다. 숙부 공손공을 타도하고 집권한 공손연은 232년 위나라를 견제하고자 오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오와 연이 손잡는 것을 우려한 위는 234년 연의 배후에 위치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통교(通交)했다. 공손연은 위가 고구려를 끌어들여 배후를 노릴까 염려해 위에 아부코자 오에서 보낸 사신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다. 오의 사신 일부가 탈출해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이들을 잘 대접해 오로 돌려보냈다. 오는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을 선우(單于)로 책봉했다.

동천왕은 이후 공손씨가 지배하는 랴오허 유역을 빼앗으려고 했다. 고구려는 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손씨와 대립각을 세웠으며,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에 보냈다. 동천왕은 부친인 산상왕 초기 발기(發岐)가 일으킨 고구려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한 공손씨의 연(燕)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삼국지연의’에서 남만(南蠻)으로 소개된 남중(윈난) 정벌을 통해 획득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229년 저·강족이 거주하던 룽시(隴西) 일부를 평정했다. 제갈량은 간쑤-쓰촨-윈난, 즉 롱(隴)-촉(蜀)-전(滇)으로 이어지는 저·강 벨트를 장악해 국력을 증강하고 저·강 군단을 활용해 장안과 낙양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는 위 정벌의 전제조건인 장안을 차지하고자 여러 차례 위에 도전했으나, 사마의와 조진 등 위나라 장수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후 234년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이 위에 가해온 군사 압력이 크게 줄었다. 위는 237년 베이징 일대를 관할하는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으로 하여금 공손씨를 치게 했다. 관구검은 다링허 유역 요수까지 진격했으나, 장마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이듬해인 238년 위나라 군권을 총괄하던 사마의가 직접 공손씨 토벌에 나섰다.

사마의는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후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연나라 수도 양평을 점령했다. 공손씨가 멸망하고 고구려와 위나라가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 고구려-위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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