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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다방 지고 ‘문화공간’ 뜨고… 커피전문점 춘추전국시대

한국 커피 현대사(1970년대~현재)

  • 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다방 지고 ‘문화공간’ 뜨고… 커피전문점 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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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음악다방 전성기는 퇴폐화 부작용과 ‘커피믹스’의 등장,
  • 원두커피 붐을 거치며 2000년대 들어 ‘커피전문점 춘추전국시대’로 바뀌었다.
  • 커피의 향미로 관능적 행복을 즐기는 ‘문화공간’으로까지 진화한 한국 다방 연대기.
다방 지고 ‘문화공간’ 뜨고… 커피전문점 춘추전국시대

커피 감별사인 큐그레이더가 고객과 소통하며 맞춤형 커피를 제공하는 스페셜티 매장.[동아일보 박영대 기자]

한국 다방 역사에서 1960년대는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다. 6·25전쟁과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혼돈의 터널을 겨우 빠져나와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때다.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다방도 더 이상 지식인만의 전유물일 수 없었다. 대학생에겐 시를 읊고 팝송을 듣는 문화공간으로, 대중예술인에겐 데뷔 무대가 돼주었다. 그들은 다방에서 미니 콘서트를 열며 대중문화의 불씨를 키웠다. 흔히 먹고살기 급급했던 시절로 기억되는 1960년대엔 일면 영화제작도 활발해 국민 1인당 1년에 5~6편을 본 것으로 기록된 시기이기도 하다.

‘얼굴마담’ vs ‘거리의 응접실’

영화 ‘쎄시봉’은 1960년대 말 서울대생 조영남이 서울 무교동의 극장형 다방 ‘세시봉’에서 팝송을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객석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연세대생 윤형주는 진한 원두커피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휘휘 저어 마신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다방을 특정하는 키워드로는 ‘젊은이’ ‘음악’ ‘계란 동동 모닝커피’ 등이 꼽힌다. 명동엔 ‘오비스 캐빈’, 종로2가에선 ‘쉘부르’가 음악다방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다. 이곳을 주 무대로 가수 송창식, 신중현밴드, 어니언스, 김정호에 이어 양희은, 이문세, 최성수, 개그맨 주병진 등이 활동하면서 ‘통기타 문화’를 전파했다.

그러나 다방은 대중화에 뒤따르기 쉬운 퇴폐화의 부작용도 극복해야만 했다. 손님을 끌기 위한 다방들 간의 치열한 경쟁은 마침내 ‘얼굴마담’과 ‘레지’라는 새 직업군을 만들어냈다. 산업화 물결을 따라 큰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몰려든 인파엔 젊은 여성들도 있었다. 1970년 당시 커피 한 잔 값은 50원. 갈 곳 없는 무직자나 한량들은 50원만으로 종일 다방에서 진을 치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한편으로 50원은 근로자에겐 적은 돈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하루 14시간 일하고 받는 일당이 겨우 커피 한 잔 값이라며 절규했다.

경제개발 논리 속에 노동 탄압과 임금 착취가 기승을 부리던 이 시기, 활황을 구가하던 다방에 레지로 취업하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도시로 몰려든 젊은 여성들을 유혹해 성을 상품화한 상술을 부리는 다방이 급속히 늘어난 것이다. 일부 다방은 술도 팔면서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퇴폐적 카페를 흉내 내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이전까지 공무원과 군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실시하던 요정 및 퇴폐다방 출입금지 조치는 전 국민에게 확대된다.

다방을 ‘거리의 응접실’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자료도 있다. 1970년 미국 공보처는 부산지역 다방 554곳을 돌며 마담과 레지, 손님을 인터뷰한 뒤 ‘다방-한국의 사교장(Tea Rooms and Communication in Korea)’이라는 12장짜리 보고서를 냈다. 내용은 1968년의 부산지역 다방을 다뤘지만, 당시 한국 전체 다방의 모습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보고서는 “한국의 다방은 비공식 사교장으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단골손님(Regular cliental)은 사업가, 공무원, 교사, 교수, 예술가, 대학생 등 주로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고학력자들이다. 이들이 다방에서 하는 일이란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며 세상사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을 교류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커피믹스’의 등장

다방은 또한 형편이 어려운 사업가들의 사무실 구실도 톡톡히 해냈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 소상공인들은 다방 전화로 업무를 봤다. 이들에게 전화를 연결해주던 레지는 비서 노릇까지 한 셈이다. 당시 “김 사장님, 전화 왔습니다!”라고 하면 자리에 있던 손님 5~6명이 동시에 뛰쳐나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한편으로, 1972년 시작된 유신정국에서 대중은 타는 목마름으로 시대적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0년대 들어 독재정권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신군부의 쿠데타와 폭거는 더 큰 상처를 남겼다. 이런 사회적 격변 속에서 다방이 불의에 대한 저항과 계몽, 각성 등 고전적 의미에서의 역할을 수행한 흔적을 찾긴 힘들다.

한국 다방 역사는 굴곡과 부침이 잦았다. 자세히 뜯어보면 다방은 불화 속에서 발전해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합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불화를 용인하는 것이 차라리 민주주의의 핵심이다”라는 말은 다방 변천사의 동력을 간파하는 프레임이 될 만하다. 다방의 생명력은 외부 요인에 의해 심하게 요동치기도 했다.

1968년 5월 설립된 동서식품은 1970년 6월부터 ‘맥스웰하우스’라는 상표로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했다. 다방 주인들에겐 희소식이었다. 수입해 사용하는 원두커피는 비싼 데다 사치품이란 눈총을 받던 터였다. 반면 인스턴트커피는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었고 원가도 절감됐다. 원두커피를 확보하지 못한 다방 주인이 미제 커피 찌꺼기에다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질 등을 섞은 가짜 커피를 팔다 적발되기도 했다. 원두커피를 기준보다 조금 넣고 담배꽁초를 섞어 맛을 강하게 만들어 판 이른바 ‘꽁피사건’도 벌어졌다. 인스턴트커피의 대량생산은 다방 주인들에겐 무엇보다도 ‘곤조가 심한 고액 연봉의 주방장’을 쓰지 않고 자신이 손쉽게 커피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동서식품의 등장은 다방에 ‘계륵’이기도 했다. 1976년 12월 동서식품은 세계 최초로 간편하게 물에 타 마시는 ‘커피믹스’를 개발해 시판했다. 커피를 직장에서 손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되자 다방을 찾는 사람이 줄었다. 동서식품 처지에선 인스턴트커피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고객인 다방을 홀대할 순 없었다. 일본 전문가를 초빙해 다방 경영을 위한 세미나를 열면서 민심 추스르기에 나섰다.

‘원두커피의 르네상스’

다방도 자구책 마련에 골몰했는데, 이때부터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젊은 고객이 많은 다방들은 인기 DJ를 스카우트해 전문 음악다방으로 변신하면서 생명을 잇고자 했다. 반면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다방들은 커다란 TV를 설치해 스포츠 중계와 뉴스를 틀어주는 동시에 마담과 레지의 서비스를 강화했다. 진하게 화장하고 야한 차림을 한 레지를 대거 포진해 배달 서비스를 강화한 게 이때다. 1980년대 사회문제로 부상한 ‘티켓다방’의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 김지미·안소영 주연의 영화 ‘티켓’은 성매매로 살아가는 변두리 다방의 마담과 레지의 비루한 삶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폐를 고발했다.

커피믹스의 등장은 직장여성에게도 ‘악재’였다. “커피를 타 오라”는 심부름이 잦아졌으며, 여직원을 뽑는 면접에서 “커피를 잘 타십니까?”라는 질문이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커피 노역’에서 여직원들을 구한 건 커피 자동판매기의 보급이다. 1977년 롯데산업이 일본 샤프사에서 커피자판기 400대를 도입해 국내에 풀었다. 회사 복도, 도서관 휴게실, 대학 캠퍼스 등 커피자판기가 있으면 그 주변이 곧 다방이 됐다. 1978년 커피자판기 1100대가 전국 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됐는데, 하루 평균 총 15만 컵이 판매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1978년 말 전국의 다방은 1만752곳에 달했고, 서울에서만 4000곳에 육박하는 등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도 1979년 ‘워크맨’을 필두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이내 기가 꺾였다. 다방에 변신을 요구하는 압박은 갈수록 더해갔다. 미인계를 구사하던 ‘마담다방’도 고민에 빠져들던 즈음, 숨통을 틔우는 소식이 전해졌다. 1982년 1월 5일, 37년간 밤을 묶어뒀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되면서 마담다방은 심야다방이라는 옵션을 장착하며 ‘빅뱅시대’로 질주한다. 이후 다방 숫자는 14년간 계속 증가세를 보이다 1996년 4만1008개소를 찍은 뒤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이듬해 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 카페의 변신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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