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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청마 유치환 50주기

  • 김종길 | 고려대 명예교수·시인

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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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에 이른 운구행렬

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경남 거제시 둔덕면 청마 묘소 인근 청마기념관에 세워진 시비와 전신상. 시비에는 ‘깃발’ ‘행복’ ‘출생기’ 같은 대표작과 연작시 ‘단장(短章)-5’의 육필 원고가 음각돼 있다.[사진제공·거제시]

청마 선생은 경주고를 거쳐 부산에서 경남여고 교장으로 근무했다. 나는 그분이 경주와 부산에서 고등학교 교장 노릇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나, 그분 밑에서 근무한 교사들은 그분의 시인으로서의 권위와 인품을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사고로 작고한 뒤 부산시 인근에 있는 공동묘지로 운구가 이뤄질 때 그 행렬의 길이가 2㎞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의 유해는 그 뒤 고향인 거제도 둔덕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곳을 고 김춘수 씨를 비롯해 몇몇 시인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분의 성품처럼 아늑하고 고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마 선생은 그분의 선장(先丈)이 통영에서 한약국을 운영했기에 통영에서 자랐지만 소년 시절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부잔(豐山)중학을 1년간 다닌 적이 있고, 한동안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 말기에는 북만주에 가 농장을 경영한 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청마 선생은 청년 시기에 해당하는 일제강점 말기를 방랑생활로 일관한 느낌이다. 그 무렵 그분이 북만주 소도시의 네거리에 걸려 있는, 처형된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를 보고 쓴 처절한 작품 ‘수(首)’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 선생이 만주에서 돌아온 것은 광복 이듬해, 즉 1946년에 들어서인데 귀국 후에는 문단 활동과 교편생활을 병행했다. 생각해보면 그분의 고향인 통영은 국내 중소도시로는 예술가를 유난히 많이 배출한 곳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청마 선생을 위시해 시에 김춘수, 시조에 김상옥, 소설에 박경리가 있고, 연극에는 유치진, 미술에선 전혁림, 음악에선 윤이상이 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이 있지만 통영은 풍광뿐 아니라 사람이 아름다운 곳이다. 게다가 그곳은 옛날부터 말총으로 갓을 만들고 조개껍데기로 나전칠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통영은 ‘극동의 나폴리’라는 말을 듣는다. 이탈리아 서남부에 위치한 미항 나폴리에 비견한 표현이다. 그러나 실제 나폴리를 가보면 항구도시로서 특별히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다. 그곳 앞바다의 카프리 섬과 ‘폼페이 최후의 날’로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 유적 같은 관광지로 연결되는 요지인데다 맛난 음식으로 더 유명해진 게 아닐까 한다. 오히려 나폴리는 풍광이면 풍광, 인재면 인재에서 통영을 못 따라가지 않나 싶다.

돌이켜 보면 나는 평생 교편생활을 하면서 과작(寡作)이지만 시작(詩作)을 계속해왔다. 그러는 동안 내가 특히 가까이 지낸 선배 시인들이 연령순으로 청마, 목월(木月·박목월) 그리고 지훈(芝薰·조지훈)이었다. 이 세 시인은 시도 좋지만 인품도 좋았다. 그러나 그분들의 인품은 그들의 시가 그렇듯 서로 확연히 달랐다. 청마가 대범한 데 대해 목월은 자상하고, 지훈은 준엄했다고 할까. 인품만큼이나 그들의 시도 확연히 구별된다.

청마 목월 지훈을 기리며

세 분 중에 내가 제일 처음 사귄 사람은 지훈이다. 1946년 초가을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혜화전문학교(동국대의 전신) 학생이었는데 그해 여름 당시 을유문화사에서 발행하던 ‘주간 소학생’의 동시 현상모집에 내 작품이 당선됐다. 당시 종로에 있던 을유문화사에 상금을 받으러 가서 윤석중 선생과 당시 그곳에서 근무하던 박두진 선생을 알게 돼 이따금 근처를 지나다가 들르곤 했는데 거기서 지훈을 처음 만난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나와 근처 다방에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가 내 나이를 물었다. 그래서 병인생(1926년생)이라고 했더니 ‘말을 놓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북 안동이 고향이고 그의 고향은 경북 영양이어서 서로 세교(世交)가 있는 가문임을 알아채고 하는 말이었다. 그 뒤 우리는 6년이라는 연령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목월은 1916년생으로 나보다는 10년 위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여름, 같은 청록파 시인 지훈을 통해서였다. 우리 둘은 광교 근처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목월이 곧 대구에서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들어선 목월은 여위고 초라해 보였으나 웃는 모습이 앳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것은 6·25전쟁 중 대구에서였다. 나는 그때 영국군 공병부대 통역으로 근무했는데 그 부대 주둔지와 가까운 공평동에 목월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뵙다가 그분이 먼저 서울로 옮겨가셨고 1958년 9월 나도 고려대로 옮겨가면서 다시 서울에서 계속 교유하게 됐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신 세 분과의 교유는 애틋했다. 지훈이 존경하는 친구(외우·畏友)였다면 목월은 다정한 형님과 같았다. 그리고 청마는 외경(畏敬)했던 스승이란 생각이 든다. 청마의 50주기를 맞아 그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목월과 지훈에 관한 회고까지 곁들이게 된 것을 지하의 청마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 종길의 초대로 그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된 것을 흔쾌하게 여기시리라.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세 분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며 붓을 놓는다.  

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김 종 길

●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 수상 : 목월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대상, 인촌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수상
● 저서 : ‘20세기 영시선’ ‘詩에 대하여’ ‘성탄제’ ‘하회에서’ ‘달맞이꽃’ 등

입력 2017-02-28 13: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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