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글자로 본 중국 |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寧 | 大夏의 영광 꿈꾸는 변방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2/4

흉노가 부활시킨 漢나라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인촨시 중심 상권은 한족이 차지하고 있어 ‘후이족의 고향’다운 느낌은 나지 않는다.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큼지막한 닝샤의 명물 양꼬치.

진무제(晉武帝) 사마염은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열었다. 사마염은 조위(曹魏)가 할아버지 사마의에게 권력을 뺏긴 까닭을 황족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위를 거울 삼은 사마염은 사마씨 일족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에게 강한 권력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조치가 진을 와해시켰다.

사마염 자신은 말년에 사치 향락에 빠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민한 군주였다. 그러나 사마염의 아들 혜제(惠帝) 사마충은 ‘백치 황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것은 유언비어지만, 혜제가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라고 말한 것은 정사인 ‘진서 혜제기’에 버젓이 기록된 사실이다.

황제는 멍청하고 황족들은 제각기 병권을 갖고 있으니 저마다 권력을 갖기 위해 싸움을 벌였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제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황족들의 내란) 중에 장군 왕준이 선비족·오환족과 결탁해 공격하자, 성도왕 사마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때 사마영에게 볼모로 잡혀 있던 흉노 유연(劉淵)은 “동호(東胡)가 아무리 날래다고 해도 5부 흉노는 당해내지 못합니다”라고 호언장담하며 자신을 흉노에 보내주기를 청했다. 흉노로 돌아간 유연은 바다에 들어간 교룡(蛟龍)과 같았다. 유연은 사마영의 숙적 사마등을 격파하고 산시(山西)성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위진(魏晉)에 의해 끊어진 한나라를 부활시키겠다며 ‘한(漢)’의 황제를 자처했다.

한고조 유방이 흉노 묵돌선우에게 패하고 화의를 맺은 후에 한나라와 흉노는 “근심과 안락을 함께” 한 형제의 나라가 됐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뒤를 계승해야” 하며, 유연 자신이 유(劉)씨 성을 갖게 된 이유도 한 황실 유씨 사람들이 흉노와 결혼해 사돈이 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의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오랑캐인 흉노에 의해 중국 정통 왕조인 한나라가 부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긴 서양에서도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이 훗날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을 열었으니, 역사란 원래 얄궂은 것인가. 유연의 한나라는 5호16국 시대를 연 1번 타자였고, 이후 수많은 유목 부족국가가 명멸했다.

그중 하나가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하(夏)나라다. 혁련발발은 유씨였으나 ‘아름답고 빛나는(徽赫) 하늘’이라는 뜻의 흉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국식 성에서 흉노식 성으로 개명한 것을 보면 흉노의 자주의식을 보여주는 듯하나, 왕조 이름은 얄궂게도 중국 최초의 왕국 하나라다.

문헌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사마천은 흉노가 “하(夏)나라의 국운이 쇠하자 벼슬을 잃은 이들이 서융(西戎)에 들어가 살게 된 하후씨(夏後氏)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이는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듯, 세상 사람 모두가 천하의 근원인 중원에서 비롯됐다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말이다. 그러나 흉노 역시 이 전설을 받아들였다. 뼈대 있어 보이는 족보가 좋아서였을까, 중원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어서였을까.

혁련발발은 대단한 야심가이자 잔혹한 완벽주의자였다. ‘천하를 통일해 만방에 군림하겠다(統一天下 君臨萬邦)’는 뜻으로, 내몽골과 산시성(陝西)성이 만나는 오르도스 초원에 수도 통만성(統萬城)을 세웠다. 병기를 만들 때 화살이 갑옷을 못 뚫으면 화살 만드는 사람을 죽였고, 화살이 갑옷을 뚫으면 갑옷 만드는 사람을 죽였다. 통만성을 쌓을 때는 성벽에 송곳이 한 치만 들어가도 그곳을 쌓은 자를 그 자리에서 죽여 성벽 속에 처넣으며 성을 쌓았다. 그 결과 성벽이 어찌나 단단한지, 벽을 숫돌 삼아 칼과 도끼를 갈 수 있었고, 16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목민족이 쌓은 성곽 중 원래의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성곽이다.  

혁련발발은 철옹성을 쌓고 오르도스 일대를 장악하며 북방의 강자 북위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가 45세에 죽자 하나라 후계자들은 내분에 휩싸였고, 북위의 침공을 받고는 25년의 역사를 마감한다. 불꽃같은 창업자처럼 짧고 강렬한 역사였다.

북위는 하, 북연, 북량 등을 정복해 북중국을 통일하고, 통일왕조인 수·당의 모체가 됐다. 당나라 때 칭하이에 살던 탕구트족은 닝샤로 이주해서 살다가 ‘황소의 난(875~884년 일어난 농민 반란)’을 진압하고 장안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탕구트의 지도자 탁발사공(拓跋思恭)은 이 공로로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지고 황실의 이(李)씨 성을 하사받았고, 훗날 송나라가 5대10국을 평정할 때 이덕명은 송에게 칭신해 송나라 황실의 조(趙)씨 성을 하사받았다.

닝샤의 절정, 대하 제국

송 태조 조광윤, 태종 조광 형제는 함께 중원을 통일한 명장이었지만, 끝내 요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베이징을 포함한 연운 16주도 되찾지 못한다. 이후 송나라 군사 활동은 지리멸렬하다. 1004년 요나라가 남하하자,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보내기로 하고 화친을 맺는다(澶淵之盟). 그나마 송나라가 형이 되고, 요나라가 동생이 되기로 해서 중화의 체면만 간신히 살렸다.

의기양양한 요나라는 바로 옆에 있는 소국 닝샤를 찔렀다. 1020년 요 흥종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지만, 닝샤의 조덕명은 이를 격퇴한다. 닝샤는 요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동시에 송나라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달았다.

조덕명의 아들 조원호가 송나라의 신하 노릇을 그만하자고 했을 때 덕명은 말했다.

“우리가 용병한 지 오래돼 피로하고 지쳤다. 우리 부족이 30년 동안 좋은 비단을 입은 것은 송의 은덕인데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자 야심가 원호는 당차게 말했다.

“영웅이 세상에 나왔으면 마땅히 패왕이 돼야 합니다. 비단옷을 입고 어찌 패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뒤를 이은 원호는 1036년 간쑤성 일대를 석권해 하서회랑을 차지했다. 하서회랑은 실크로드 상인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날랜 군사에 풍족한 자금이 더해지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았다. 마침내 1038년 원호는 성(姓)을 이씨로 바꾸고 ‘대하(大夏)’의 건국을 선포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무렵 대하는 인촨을 중심으로 닝샤, 간쑤, 산베이(陝北), 서부 내몽골 오르도스 초원을 아울렀고, 탕구트족을 중심으로 한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거란족 등 300만 백성을 거느린 다민족 제국으로 성장했다. 역사적으로는 대하가 아닌 ‘서하(西夏)’라는 송나라식 명칭으로 불린다.

무력한 송나라 군대는 소국 서하의 군대에도 연전연패했다. 다행히 송나라에 인재가 없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개혁하려다 좌천돼 고향인 산시(陝西)성에 있던 범중엄은 3년이나 서하의 침공을 막았다. 범중엄은 이 공로로 재상이 됐으나 개혁의 뜻은 펼치지 못한 채, 서하와 화친협정이 체결되자 재상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천하의 근심을 미리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나중에 누린다”는 명언을 남긴 범중엄은 나라를위기에서 구했지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포부는 이룰 수 없었다.

2/4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관련기사

목록 닫기

가난과 사막화에 신음하는 마화룡의 기개

댓글 창 닫기

2017/04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