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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새 연재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제국에 비끼는 노을 - '돌아가는 노래'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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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곡(遁走曲) 80년대
그사이 버스는 고속도로에서는 드물게, 길모퉁이를 돌 때의 가벼운 쏠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얕은 오르막으로 올라섰다. 예전 그 어디에선가 예쁘장한 고속버스 안내양이 장갑 낀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관광 안내를 대신해 ‘여기가 경부고속도로에서 가장 커브가 심한 구간입니다’라고 알려주던 곳 같았다. 하지만 그 무렵은 그 휘어진 도로가 어떻게 펴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안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라 생략하기로 했는지, 안내양은 운전대 곁 통로 건너 낮은 곳에 있는 접는 의자에 앞만 바라보며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초기 고속버스의 잦고 상세하던 관광 안내도 언젠가부터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는 게 방금 새로 찾아낸 무슨 특별한 기억처럼 불쑥 떠올랐다.

1970년대 초반 몇 년 산사(山寺)의 객방이나 고향 문중 강당이며 고택 정사(精舍) 같은 곳을 떠돌다가 마침내 모든 걸 접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처음으로 타보게 된 고속버스를 떠올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뒷날 서른을 훌쩍 넘기고야 연좌제의 사슬에서 풀려나 처음 국제항공편 기내로 들어섰을 때 못지않게 고속버스라는 그 새로운 형태의 교통문화는 그에게는 감동을 넘어 거의 감격적이었다.

초등학생은 그냥 오르기가 거북할 정도의 계단 두 개를 올라 덩그렇게까지 느껴지던 버스 바닥, 그 아래로는 사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높이의 화물칸이 있고, 위로는 키 큰 남자의 손바닥도 닿지 않을 높이의 천장에, 어른이 매달려도 끄떡없을 가죽 띠와 플라스틱 링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늘어진 그 실내 공간은 넓고 시원스럽다는 느낌을 넘어 위압적인 데마저 있었다. 거기다가 45도로 젖혀지는 베개 달린 의자 등받이며 다리 긴 사람에게도 넉넉한 그 발 받침대는 그때까지의 교통수단에는 한 번도 기대해본 적 없는 장거리 여행에서의 편의와 안락을 보장해주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고속버스는 그레이하운드 단일 차종이라 버스마다 달려 있던 화장실 또한 처음 타보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문화 경험이었다.

그의 기억이 그렇게 7,8년 전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약간 다급함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봐라, 차장. 차장 어딨노?”

약간 술기운 실린 듯한 그 목소리에 일순 차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면서도 차 안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안내양이 앉은 좌석 쪽으로 잠깐 몰렸다가 다시 소리친 사람 쪽을 향했다. 그에게는 왠지 그런 그들의 눈길에 대책 없는 실수를 한 사람에게 보내는 어떤 낭패스러움 비슷한 동정 또는 엄중한 규칙 위반이나 금기 무시에 대한 우려와 비난 같은 것이 섞여 있는 듯 느껴졌다.

실은 그도 그랬다. 70년대 초의 어느 날인가, 공군 파일럿 같은 넥타이를 맨 셔츠 상의와 줄 세운 나사 바지 제복에, 운전수(手)도 운전원(員)도 운전사(士)도 아닌, 고속기사란 생소한 호칭으로 나타난 운전자들과 영화에서 본 비행기 스튜어디스 같은 복장과 제모에 고운 목깃 스카프까지 맨 안내양들은 오랜만에 도회지로 내려온 그를 까닭 없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때도 우리 공항이 있고 국제선 국내선 모두 국적기가 취항하고 있었지만 기장이건 스튜어디스건 그녀들을 마주보고 말을 주고받을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거기다가 그 뒤 오래잖아 있게 되는 늦은 입대로 3년이나 더 세상에서 격리되고, 제대 뒤에는 다시 지방 도시에 자리 잡아 어렵게 뿌리내리느라 장거리 여행에나 쓰는 고속버스와 거의 무관하게 몇 년을 지내오면서, 그런 교통체제를 대하는 묘한 경원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안내양 쪽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조금 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뒤편에서 앞쪽으로 다가오며 소리를 높였다.

“봐라, 앞에 거다 처자, 니 차장 아이가? 왜 사람이 찾는데 대답이 없노?”

그가 돌아보니 아직 얼굴에 술기운이 불콰하게 남은 성깔 있어 뵈는 중늙은이였다. 그러자 예절 바르지만 악의는 숨기지 않은 뾰족한 목소리로 안내양이 대답했다.

“저 대구발 경부선 7023호 고속버스 안내양인데요. 이 버스에는 차장이 없어요.”

“안내양은 무신 안내양, 앉은 자리 딱 보이 바로 그 차장 자리고, 하는 일 보이 바로 딱 옛날 그 일인데. 차장, 야야, 봐라. 백줴 씰 데 없는 소리 주끼지(중얼거리지) 말고 차나 좀 세와라.”

“시속 100킬로도 넘게 다니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버스를 세우라니요? 아니, 할아버지 왜 그러시는데요?”

“내 이전에 보이 개그린 차에는 변소가 달래(달려) 있었는데, 여기는 왜 그기 안 달맀노?”

그런데 그 ‘개그린’이란 발음이 어디서 들어본 듯은 하면서도 귀에 낯선 게 왠지 우리말 같지 않고 외국어처럼 들렸다. 안내양이 못마땅한 심사를 깐족거림으로 바꾸어 받았다.

“할아버지 ‘개그린’이란 말 그거 영어로 무슨 그런 차종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말로 ‘개 그려진 차’를 말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차 그거 그레이하운드라고 서양 사냥개 몇 마리를 상표로 써서 차체에 그려둔 걸 보고 시골 사람들이 ‘개 그린 차’라고 불렀던 게 그렇게 차 이름으로 굳은 거라고요. 처음부터 미국서 쓰다 버린 중고차 들여왔다가 얼마 안 돼 폐차되어 고속도로에선 없어진 지 벌써 여러 해 되고요. 그리고….”

“시끄럽다. 고마. 촤라(치워라). 그래 아는 성 시리 나댈 거 없다. 여러 말 시러부이(스러우니). 개그린이 우예튼(어쨌든) 간에 문제는 그게 아이라 변소라 카이. 내가 대구서 차 타기 전에 쏘주 한 고뿌(컵) 마싰디랬는데, 칠곡(휴게소)서 암치도 안킬래 그냥 지나쳤뿌랬디, 인제는 더 못 참겠다. 그러이 운전수 양반보고 아무데나 차 쫌 세와달라 캐라. 까딱하믄 오줌 싸겠다.”

“이 할아버지가 증말. 할아버지 증말루 이전에 고물딱지 그레이하운드라도 한번 타보시기는 한 거예요? 그게 벌써 어느 고릿적 일인데. 그러고, 나한테 마구잡이로 차장, 차장 해대더니 이제는 우리 고속기사님한테까지 운전수 양반이래. 나 참, 기가 막혀.”
안내양이 눈길까지 쏘아보듯 할금거리며 그렇게 받아쳤다. 그러자 그 중늙은이도 벌겋게 낯성을 냈다.

“이기 무슨 이 따우 물건이 있노? 뭐시라? 니 지금 니한테 차장, 차장 캤다꼬 이래 누마리 하얗게 치뜨고 덤비는 게라? 하는 꼬라지 보이 고속버스 차장질 하는 기 억시기 대단한 출세나 한 줄 아는 갑네. 어데 뚤팬(뚫린) 입이라꼬 함부로 이래 쳐주끼노? 니 시방 내한테 훈계할라 카나 뭐 하노? 아이, 암만 캐도 이거 안 될따. 장수를 잡을라 카믄 말을 쏘라꼬, 차장 잡을라믄 운전수부터 잡도리 쳐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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