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만화 ‘200만부 베스트셀러’ 시대의 풍속도

  • 하태원·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9-07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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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어른이 지하철 한 귀퉁이에 몸을 맡긴 채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는 장면을 보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다. 청소년들만 보는 것으로 치부되던 만화가 어느새 성인들의 문화생활에도 깊숙이 파고든 탓이다. 이제는 어설프게 쓴 개론서보다 제대로 된 만화책 한 권이 더 유용하고 상세한 지식과 정보를 준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데…. 》
    8월 10일 오후7시 서울 지하철 2호선.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로 만원을 이룬 객차 안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흘러 나온다. ‘무슨 재미난 일이라고 생긴 모양이군…’ 하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잠시 후에는 아예 박장대소(拍掌大笑)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을 따라 가보니 ‘소리’의 주인공은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30대 초반의 ‘신사’다.

    그 ‘신사’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차림새를 봐서는 시사잡지나 경제지 같은 것이 들려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 30대 신사의 손에는 만화 ‘용하다 용해’가 들려있다. ‘무용해’란 이름을 가진 한 대리의 눈높이에서 본 샐러리맨의 애환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는 이 만화를 통해 이 ‘신사’는 이날 회사에서 받았던 온갖 스트레스를 날려보내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안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이 30대 신사와 ‘닮은 꼴’은 이제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만화로 달래는 직장인, 친구나 직장동료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며 ‘색다른’ 재미를 맛보는 어른들, 몸이 좋지 않아 병원신세를 지는 틈을 타 밀린 시리즈 만화를 탐독하는 사람들….

    어디 그뿐이랴. 남편을 출근시킨 뒤 짬을 내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가정주부들도 만화를 사랑하는 어른의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출판된 만화를 모두 모아놓은 만화방이나 도서 대여점에 어른들이 몰린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런 얘깃거리도 아니다.

    넥타이와 만화가 어울리지 않는다구요?



    스포츠 신문에 연재되면서 시작된 만화붐은 어른들이 즐겨보는 비교적 점잖은 일간지에까지 급속히 파급돼 모든 신문에 4컷짜리 시사만화 이외의 고정 만화란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만화는 어느새 우리사회의 ‘어른’들에게도 친근한 벗이 되고 있다.

    성인들이 만화를 가까이 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만화를 보면 실컷 웃을 수 있다는, ‘재미’를 준다는 요소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만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어른들이 봐도 좋을 만큼 풍부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즉 과거에 ▲명랑 ▲순정 ▲무협 ▲스포츠 만화 정도로 간단히 분류할 수 있었던 만화장르가 이제는 100여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화, 세분화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일반화된 기업 만화를 그리더라도 과거 같으면 직장생활을 통해 자신의 꿈과 야망을 달성하는 동시에 사랑을 얻는다는 식으로 지극히 단순하게 스토리가 전개됐지만 최근에는 특정 직종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본격 직장만화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하 역사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던 웅장한 스케일에 도전한 만화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부엌일 정도로 치부했던 요리사의 세계를 다뤄 공전의 히트를 한 만화도 많다.

    그런가 하면 ‘식스 센스’를 능가할 정도로 등골을 오싹하게 할 만큼 치밀한 구성을 지닌 공포물도 수적으로, 양적으로 늘어 만화를 찾는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인들이 “나 만화 읽어요”라고 자랑하면서 만화를 볼 만큼 만화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무시간에 짬을 내 소설을 읽는다면 몰라도 상사가 지켜보는데 만화를 볼 만큼 배짱 좋은 샐러리맨은 없을 것이고,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들과 나란히 앉아 무협만화를 보며 키득거릴 만큼 너그러운 아빠도 드물 것이다.

    만화에 새겨진 ‘주홍글씨’

    물론 모든 만화는 스토리 전개가 거칠고 정서함양에 유해하다는 식의, 만화에 낙인 찍힌 문화적 ‘주홍글씨’의 색이 급속히 바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뇌리에는 여전히 만화 유해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성인만화는 이같은 척박한 환경속에서 잡초처럼 그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화는 어떻게 정의될까? 일단 옥편(玉篇)을 찾아보면 만화의 만(漫)자는 그리 좋지 않은 뜻임을 금세 알게 된다. 첫 번째 뜻은 질펀한 땅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고, 둘째는 흩어지고 난잡하다는 의미다. 이외에 함부로, 멋대로 라는 뜻도 있다. 거기에 그림을 뜻하는 화(畵)를 붙였으니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우습고 재미있는 그림이야기’일 뿐이다.

    이름 탓인지 한국의 만화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예술의 치부이자 문화의 서자(庶子) 쯤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은 만화에 탐닉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왔고 올바른 인격형성과 학업을 위해서는 멀리해야 하는 것쯤으로 간주해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성인만화 시장은 최근까지도 불모지에 가까웠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만화계가 아직까지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기형적 구조에 원인을 두고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아직까지도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 즉 청소년 만화가 시장의 절대다수인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아동만화를 보면서 자란 독자가 청소년만화를 보고, 다시 어른이 되어서 성인만화를 보는 구조가 아니라, 중고생들만 만화를 보는 구조인 것이다.

    도서출판 대원의 오태엽 팀장은 “이런 구조라면 한국에서 만화는 청소년만을 위한 장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 기꺼이 사줄 수 있는 아동만화와 어른이 돼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성인만화가 많아졌을 때 비로소 만화가 하나의 대중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쉽게도 2000년 8월 현재 우리나라에는 성인만화잡지가 하나도 없다. 90년대 중후반기에 한때 4개나 존재했지만 대원의 ‘투엔티세븐’, 세주의 ‘미스터 블루’가 수지타산을 맞추지 못해 97년말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근근이 버티던 서울문화사의 ‘빅점프’도 결국 2000년 8월 1일자를 끝으로 폐간했다.

    성인 만화계가 침체에 빠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97년 일었던 청소년보호법 파동이다. 검찰은 97년 6월 만화가 학원폭력과 청소년 문제에 원인을 제공한다면서 만화계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이어 97년 7월 청소년보호법안이 발효되면서 만화에 대한 단속과 규제가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화 유통의 중요한 거점인 서점에서 성인만화를 비롯한 만화의 취급 자체를 꺼리면서 만화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서점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등 유통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성인만화 잡지들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속속 폐간하기에 이른 것.

    어려움을 겪던 성인만화가 다시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IMF 경제 위기 뒤 만화 대여점과 대본소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부터다. 청소년만화를 주로 취급하던 대여점과 대본소가 성인만화를 취급하면서 단행본을 주로 발행하는 군소 출판사에서 일본의 성인만화를 정식 수입해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인만화의 숫자가 조금 늘어 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형적인 구조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군소 출판사에서 펴낸 일본 성인만화들은 주로 과도한 성애묘사나 폭력묘사가 주를 이루는 작품들이었다. 어른이라는 의미의 성인이 갖는 고민을 진지하게 다루거나 그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진짜 성인만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일본만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 성인만화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최근 서울문화사, 도서출판 대원, 학산문화사 등 대표적인 만화출판사들이 성인만화를 출시하면서 수작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본만화가 그 주류를 이루는 상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오태엽씨는 “진짜 성인만화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어른들을 위한 성인만화잡지에 한국만화가 연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영순의 ‘누들누드’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김동화의 ‘황토빛 이야기’ ▲허영만의 ‘세일즈맨’ ▲윤태호의 ‘연씨별곡’ 등은 95년에서 97년 사이 성인만화잡지를 통해 선보인 한국 성인만화의 대표작들이다. 이 작품들은 대중적인 인기몰이에도 성공을 거두면서 성인만화의 부활을 예고했다.

    서울문화사의 김문환 부장은 90년대 초반 반짝 호황을 누리던 만화시장이 침체를 거듭해 IMF 경제위기직후 시장 규모는 80년대 수준으로까지 곤두박질 쳤다고 주장한다. 김부장은 “만화산업의 침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대여점과 대본소가 만화 유통의 중심이 되면서 만화는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빌려 보는 만화의 전성기였던 80년대 한국 만화는 양적인 팽창과 함께 질적인 하락을 경험했다. 즉 이현세, 허영만, 고행석, 박봉성 등 몇몇 히트 작가의 만화가 대본소에서 사랑을 받게 되면서 시중에 나오는 만화의 70∼80%가 이들 ‘빅4’가 그린 만화라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의 이름이 만화방에서 흥행의 보증수표가 되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문하생이 만화를 그리면서도 이들 빅4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그나마 시장에 나오는 다른 작가들의 만화도 이들 빅4의 아류작일 뿐이어서 한국의 만화시장은 제자리 걸음을 계속했다.

    학산문화사의 박성식 팀장은 “이 시기 만화계는 대본소에 누가 많은 타이틀을 내놓느냐에 모든 경쟁을 집중시켜 만화의 질을 스스로 떨어뜨리면서 모처럼 확보한 만화 애호가들의 만화에 대한 애정을 붙들어 놓을 기회를 상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90년대 초반 만화잡지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잡지 연재를 거친 뒤 발매되는 판매용 단행본이 등장했다. 잡지 연재를 거쳐 작품성, 대중성을 검증받은 뒤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방식은 일본 만화시장이 모델.

    잡지시장이 정착되면서 한 작가의 작품이 한 달에 수십 권씩 나오던 것이 두세 달에 한 권 정도로 바뀌면서 자연 작품의 질의 향상을 꾀할 수 있었다. 또한 잡지가 늘어나면서 만화잡지 등의 신인공모를 통해 새 만화가가 1년에 수십 명씩 등단해 폭넓은 작가군이 형성됐다.

    덕분에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빅히트 작가의 작품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던 베스트 만화 리스트가 80년대에 비해 훨씬 풍성해졌다. 91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공주전문대에 만화학과가 설립된 이래 10년만에 전국 30개 여 대학에 만화 관련학과가 생겨 2000명이 넘는 학생이 만화를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만화의 르네상스는 한국만화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해주었을 뿐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90년대 후반 경제악화와 청소년 보호법 파동 등 만화 외적인 요인으로 만화 유통은 다시 대여점, 대본소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작가의 창의력을 제한하지 말라”

    결국 경제위기를 거친 만화시장은 80년대처럼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는 구조로 전락했고, 한국만화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내적, 외적인 요인이 종합되면서 80년대와 90년대 초반 만화를 보고 자라난 10대들이 20대나 30대가 되면서는 만화를 가까이 하지 않게 돼 결과적으로 성인만화 시장의 확대를 더디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성숙해진 사회분위기 속에 다른 대중예술장르들이 다양한 실험과 도전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데 반해 한국만화는 아직도 검열과 심의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0여 명의 유명 만화가들이 아직도 청소년에게 유해한 만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고, 성인만화출판과 유통의 제약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

    만화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둘리 아빠’ 김수정씨는 “장려는 하지 못할지언정 규제의 올가미를 죄는 행정당국과 사법당국이 못마땅하기만 하다”며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김수정씨가 염두에 둔 것은 지난 7월18일 이현세씨가 그린 ‘천국의 신화’에 대해 서울지법이 내린 청소년보호법 위반판결.

    김씨는 “판사는 국민적 정서에 따라 판단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번 판결은 오히려 국민적 정서를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 판결로 인해 많은 만화작가들이 자유로운 창작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자기검열을 통해 스스로의 창조력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우려했다. 급변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왕성한 창작력으로 새로운 작품을 선보여야 할 만화가들이 과거회귀적인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 후퇴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개탄할 일이라는 것.

    김씨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자칫 작가들이 무엇을 그려야 할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무엇을 그리면 안되는가를 우려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로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청소년의 달인 5월을 만화가들은 사법당국의 단속의 손길을 피해 ‘숨어다니는 달’로 여겼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김씨는 만화정책을 담당하는 문화관광부의 태도에까지 포문을 열었다. 문화관광부 산하 간행물 윤리위원회의 심리에서 주의를 내렸을 뿐 청소년에게 무해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는데 사법부의 상반된 결정에 대해 일언반구 의견표명이 없는 것은 문화부에 일관된 문화정책이 없는 탓 아니냐는 지적.

    출판만화에 대한 지원이 인색한 것도 만화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불만이다. 영상·게임 등 애니메이션 분야에는 연간 수천억원의 예산을 지원하면서 출판만화 부문에는 고작 3억여원을 지원하는 ‘차별’이 존재하는 한 외국만화, 특히 일본만화와 일전을 치러야 할 만화가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다는 것.

    일본시장 등 해외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라는 정부가 만화시나리오에 대한 제재를 가하면서 창의력을 제한하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자국 군인의 무기를 제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대다수 만화인들의 생각이다. 김씨는 “일본만화의 다양성을 부러워하지만 말고 작가들의 창조력을 키워 우리 만화도 다양성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문화부가 해야 할 임무”라고 말했다.

    어른이 볼 만한 만화를 만들어라!

    하지만 문화관광부의 논리는 좀 다르다. 3권 분립이 헌법에 명시된 국가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대해, 그것도 1심 판결만 내려진 상황에 반박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은 자칫 사법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을 낳을 수 있다는 것.

    문화부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은 물론 이미 만화의 소재에 대한 제약은 사라진 지 오래인 상황에 문화부는 최소한의 ‘지도’만 할 뿐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를 방해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작가들이 과거에 얽매여 스스로 피해의식을 갖는 측면이 강하다는 논리. 이 관계자는 “최근의 분위기는 오히려 성인만화란 탈을 쓰고 노골적인 성 표현을 통해 싼 값에 만화를 팔려는 3류 만화가들이 범람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문화관광부는 90년부터 출판만화대상이나 오늘의 우리만화상 등을 제정해 좋은 우리만화를 장려하고 있다. 또한 95년까지 교육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만화에 대해서만 상을 주던 것에서 탈피해 작품성이나 독창성 등이 뛰어난 성인만화에도 수상의 기회를 넓혔다.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한창완 교수는 한국 어른들이 만화를 보지 않는 이유를 관(官)의 지원부족이나 대본소 시장으로 대표되는 만화유통구조의 문제라기보다는 만화 기획력 부재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파악한다.

    만화에 종사하는 사람이 동경해 마지 않는 일본시장의 경우 60년대에 10대의 나이로 만화를 보았던 사람이 현재 5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만화를 즐겨본다. 이는 50대가 되어서도 볼 수 있는 만화가 계속 생산되기 때문이다. 즉 각 세대에 맞는 만화가 생산돼 그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컨텐츠가 공급되기 때문에 한번 만화 팬이 되면 평생을 만화팬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 일본만화산업이다. ‘실버 코믹스 제너레이션’을 타깃으로 한 등산만화, 낚시만화 등 레저만화가 끝없이 성인들로 하여금 만화를 찾게 하는 것.

    물론 이와 같은 만화가 아무런 노력없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만화는 그림 잘 그리고 스토리 전개능력이 뛰어난 한 사람의 만화가가 창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화 표지에는 오직 만화가 한 사람의 이름만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들이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작품이라야 비로소 어른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림을 그리는 작화가, 이야기 만드는 재주가 있는 스토리작가, 출판 및 기획능력이 있는 만화기자 등이 모여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일본은 바로 이런 제작 시스템이 탄탄하다. 한 주제를 놓고 2∼3년간 취재할 수 있는 만화기자와 그 취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획자가 있어야 탄탄한 스토리를 엮어낼 수 있는 것.

    한교수는 “우리만화의 그림은 이미 일본 수준에 이르렀거나 앞서고 있는 반면 스토리는 아직까지 일본을 따라가지 못한다”며 “적어도 한 분야에 대한 만화를 쓰면 자기가 만든 책이 그 분야의 매뉴얼이 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만화제작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200만부 vs 일본 5000만부

    만화평론가 박인하씨도 국내에 성인을 대상으로 한 만화잡지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된 상황에 대해 “만화출판사 편집자들이 성인만화 시장을 개척하려는 공격적인 마케팅이나 시장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게을리 하면서 독자들이 만화를 봐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것은 소아병적인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박씨는 우리나라에는 이미 70년대에 성인만화시장이 엄연히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고우영의 삼국지 수호지 일지매 등의 중국고전을 원작으로 한 서사만화, 박수동의 고인돌, 방학기의 바리데기,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 등은 70년대를 풍미했던 성인만화였다는 것. 하지만 80년대는 물론 90년대를 지나면서도 70년대식 서사구조와 스토리 전개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뿐 ‘성인만화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지 않았다.

    박씨는 대표적인 일본 성인만화인 ‘시마과장’의 작가가 자신이 타깃으로 삼은 독자층의 성향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들이 만화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꼼꼼히 따졌던데 반해 우리의 성인만화는 막연한 독자층을 향해 작품을 무책임하게 내던지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영화나 비디오의 경우 어떤 장르의 어떤 영화를 보고 싶으면 그 영화를 찾을 수 있지만 만화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도서출판 대원의 오태엽 팀장은 자체적으로 선정한 ‘99년 한국만화계 10대 뉴스’에서 무협만화 ‘열혈강호’가 한국 만화로는 처음으로 총발행부수 200만부를 돌파했다는 것을 ‘톱뉴스’로 올렸다. 그는 그동안 만화는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빌려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국내 시장에서 총발행부수 200만부 돌파는 한국만화가 빌려 보는 것이 아니라 사서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고무적인 결과이고, 좋은 만화는 독자들이 사서 본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열혈강호의 200만부는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터치’의 5000만부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다. 그것도 열혈강호가 200만부 판매를 달성한 99년에 비해 12년이나 앞선 87년에 달성된 기록이다.

    오씨는 “결국 한국만화와 일본만화의 거리는 ‘열혈강호’가 세운 200만부와 ‘터치’의 5000만부의 차이 정도, 그리고 그 기록이 세워진 99년과 87년의 시간차 정도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사서 보는 만화시장이 정착돼 만화를 판 수익금이 다시 양질의 만화를 생산하는 밑거름으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85년 4079종 655만9717권이 발행되던 만화는 99년 9134종 3666만5233권이 발행될 만큼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한국의 만화산업, 특히 성인을 대상으로 한 만화의 미래는 결코 장밋빛 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잡지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한때 20만부까지 판매됐던 모 잡지는 이제는 5000부를 찍어내기도 힘든 상황까지 몰렸다.

    하지만 만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 만화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이제는 어른이 돼 만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것. 결국 본인들도 보고 자란 만화를 자녀들이 보는 것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며, 교훈을 주거나 생활정보를 준다거나 스토리가 탄탄한 성인만화가 있으면 기꺼이 만화를 볼 의향이 있는 저변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은 만화가 다시 폭넓은 사랑을 받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서로운 징조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는 “만화시장의 침체, 온 나라를 충격으로 몰고 간 경제위기, 만화에 대한 사회적인 적대감 등을 이겨내고 잡초처럼 생명력을 이어온 한국만화에는 강한 저력이 있다”며 “최고의 만화를 만들어내려는 작가의 노력과 좋은 만화를 아껴주는 독자의 사랑이 합쳐진다면 이웃나라 일본이 부럽지 않은 만화천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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