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

제36회 1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 당선자: 김진분

    입력2006-08-02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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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얕 잡아봤던 한국의 겨울날씨가 오늘따라 내게 반항하기나 하듯 몹시도 춥다. 문밖을 나서 종종걸음으로 버스정류장까지 나갔더니 아직 이른 새벽이어선지 기다리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옹송거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린다. 오늘은 버스가 좀 빨리 오려나. 운전기사 아저씨는 배차간격이 20분이라고 했지만, 시간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눈비가 올 때는 40분에서 한 시간씩 기다려야 겨우 버스를 얻어타곤 했다.

    내가 사는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가는 곳은 서울 천호동이다. 그전에는 일반과 좌석, 두 가지 버스노선이 있었지만, 승객이 줄어 타산이 안 맞는다며 버스회사가 일방적으로 한쪽 노선을 없애버렸다. 그 바람에 천호동 쪽으로 가려면 하는 수 없이 값비싼 좌석버스를 타야 했다.

    천호동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빨라야 한 시간. 그래서 나의 아침은 언제나 숨가쁘다. 다행히 오늘은 좀더 일찍 서두른 덕분에 다른 날보다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버스를 내리기가 무섭게 다시 찬바람을 맞으며 줄달음을 쳤다. 간발의 차이로 순번이 매겨지기 때문에 마음은 늘 이렇게 급하다. 이른 아침이라 차도 행인도 뜸해 천호시장 거리는 한낮과는 달리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다.

    직업안내소 풍경

    그렇게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간 곳은 ○○○직업안내소. 이때부터 나는 또 다른 초조와 불안에 부대낀다. 과연 오늘은 내게 일이 주어질까, 그렇다면 무슨 일이 얻어걸릴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교통편도 좋아야 할 텐데….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전화기를 들고 있던 소장은 눈알만 돌리며 아는 체를 한다.

    “덕소 아줌마! 그 먼 데서 빨리도 왔네.”

    그 새 낯익은 길동 아줌마가 반갑다고 소리친다. 여기서는 누구든지 사는 곳이 호칭으로 불린다. 길동 아줌마는 옛날 같으면 ‘할머니’로 불릴 60대 노인이었다. 화장을 짙게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이를 가려주진 못했다. 자신의 한 평생이 ‘파출부 인생’이었다는 그녀는 목소리가 굵고 수다스러운 편이지만, 친절하고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준 자리에 앉아 하릴없이 일거리를 기다리기로 한다.

    “젊은 사람이 얼굴이 이게 뭐여. 가꿔야지, 화장기가 너무 없으니까 병색이 나잖아….” 길동 아줌마가 식구처럼 핀잔을 준다. 그때서야 얼굴 살갗이 당기듯 죄어옴을 느낀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간 스킨 로션 샘플을 꺼내 뻣뻣한 얼굴에 쓱쓱 문질러 발랐다.

    사람들이 하나둘 직업소개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느새 아침 8시가 됐다. 그새 속속 모인 사람들로 이미 안내소 홀은 만원이다. 앉을 의자가 모자라 다들 꾸부정하게 서 있다. 이때쯤이면 항상 그랬다. 제멋대로 앉거나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순서는 누구랄 것 없이 철저히 잘 지켰다. 서로를 감시하는 눈초리가 사납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4번이다. 그 동안 지켜본 바로는 10번 안에만 도착하면 일자리가 날 희망은 있다.

    “아이구 속 터져. 일거리 준다는 사람은 없는데, 달라는 사람만 난리들이니 낸들 어떡하란 말이야….”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소장이 툴툴거렸다. 그는 회전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우리를 둘러본다. 일자리는 적은데, 일을 달라는 사람은 구름떼처럼 모여드니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심한 모양이다.

    이런 소장도 처음 가입하는 사람들은 아주 살갑게 반긴다. 이들과 전화상담을 할 때는 그렇게 사근사근할 수가 없다.

    “어서오세요. 일자리요? 물론 있지요. 그럼요. 요즘 많이 힘들지요?…”

    그리고는 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소개소 찾아오는 길을 상세히 알려준다.

    사실은 들어온 일거리가 적은데도 일이 많이 있다면서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인다. 나도 그렇게 이 직업소개소에 발을 들여놓았다. 가입비 5만 원을 내던 날 소장은 내게 따끈한 커피 한 잔을 건네줬다. 뒤에 알고 보니 커피는 새로 가입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그날만의 특혜였다.

    “아줌만 일을 너무 골라”

    불황이 이어지다 보니 일자리가 흔치 않아 더 많은 사람들이 소개소로 찾아 들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소장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연세보다 젊고 세련돼 보인다”느니 “젊었을 때 대단한 미인이었겠다”느니 “대학교수 타입인데, 이런 곳에서 아깝게 썩고 있다”느니 아첨을 떨어댔다. 그런 분위기다 보니 비리라면 비리라고 할 만한 일도 없지 않았다. 가령 적당히 ‘뇌물’(담배나 음식)을 건네면 좀더 가까운 곳, 좀더 깨끗한 일, 좀더 쉬운 일이 떨어지곤 했다.

    “잠실! 잠실! 이번엔 누구 차례요? 숯불갈비집 저녁 11시까지….”

    소장이 손짓을 했다. 크진 않지만 다분히 권위적인 목소리다. 나보다 훨씬 늦게 온 아줌마가 일거리를 받아 나갔다. 사람들은 그새 여관, 다방, 단란주점 등 여러 일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거리를 골라서 갔다지만, 지금은 너나없이 살기가 빠듯한데다 일거리도 줄어 다들 닥치는 대로 일하는 형편이다.

    오늘 나는 여느 날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는데도 적당한 일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게 맞는 일은 건물 청소나 식당일 같은 비교적 ‘건전한’ 현장노동인데, 이건 내 원칙이 아닌 남편의 뜻이었다. 남편은 내게 여관이나 다방,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엔 절대로 못 나가게 했다. 식당으로 가더라도 손님들을 접대하는 홀보다는 주방 일을 맡으라고 했다.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게 밤 늦게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일을 마칠 때쯤이면 집으로 가는 버스가 끊기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촛불처럼 타들어가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탄식하듯 긴 한숨을 내쉰다. 벌써 11시가 가까웠다. 꼴찌로 도착한 사람들은 일자리가 돌아올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몇 사람만이 줄곧 버티고 남아 있다. 행여나 늦게라도 일거리가 주어질까 요행을 기다려보는 것이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실제로 뜻밖의 일이 생길 때도 있었다.

    소개소 한쪽 벽에는 ‘25일은 회비 내는 날입니다’는 글이 쓰여 있다. 바로 내일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속이 상한다. 이곳에서 파출부 일을 얻으려면 가입비 5만 원을 내고 나서 매달 회비 3만 원을 내야 한다. 그래서 이미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해서 일자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도 1∼2분 차이로 순서가 정해지기 때문에 누구든지 집을 나섰다 하면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난로 옆으로 자리를 옮긴 소장은 멸치꾸러미를 헤쳐놓고 내장을 발라내면서 문득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아줌만 일을 너무 골라. 가뜩이나 일거리가 적은 요즘에 그러면 일 못해!”

    나는 변명처럼 얼버무리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형편이….”

    소장은 내가 일찍 나왔으면서도 며칠째 허탕을 친 게 좀 안됐다는 눈치다.

    이곳 회원들은 한 사람이 한 달 평균 15일 정도 일하면 일을 많이 얻는 편이었다. 소장은 더 이상 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떤 회원들은 번번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일 얻는 날이 한 달에 열흘도 못 됐는데, 이런 회원들은 일이 적다며 다른 소개소로 옮기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소장으로선 회원관리 차원에서 이런 데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즉 ‘기본 일수’는 채워줘야 하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겐 일찍 나와도 일을 주지 않고 “좀 쉬라”며 사정하기도 한다.

    여인네들의 反中 감정

    새벽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지런을 떨며 식구들 아침 식탁 차려놓고 달려오듯 도착했건만, 오늘도 공칠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에 나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한쪽에선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구수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콩나물국에 밥 한 술 말아 훌훌 마신 게 전부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덕소 아줌만 애가 몇이유?”

    나는 순간 멈칫하다가 “둘이예요”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두렵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어 나는 가능하면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피치 못해 얘기를 나눌 경우에도 아주 짧게 말을 끝낸다. 이곳에선 아직 누구도 내가 중국동포인 것을 모른다.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다. 내가 죄인도 아니고, 내 신분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지만 나에 대해선 철저하게 감추고 싶다. 신분이 드러나 공연히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전에 다른 소개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본의 아니게 중국동포란 사실을 말했다. 이쪽 실정을 너무도 몰랐던 탓이었다. 피부도 같고 생김새도 같았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때부터 단지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워낙 일거리가 적다 보니 사람들의 인심이 사납기도 했지만, 텃세까지 심해지자 나는 늘 ‘왕따’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느날인가는 소장이 일자리가 났다면서 가짜라도 좋으니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소장은 “신분증도 없는 사람한테 일을 찾아줬다가 재수없이 단속에라도 걸리면 문을 닫게 될 판인데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이야?”라며 따지듯 내뱉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입심 센 아줌마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우리 일자리도 모자라서 안달인데 그깟 중국여자들한테까지 줄 일이 어디 있어?”

    “말도 마. 지금 식당이고 어디고 업소마다 교포년들이 한둘씩은 다 들어가 있더라구. 골치야 골치.”

    “아무개네 집에서 중국 며느리를 얻었다는데, 반찬이 죄다 중국식이래. 아무 데나 기름 콸콸 부어다 볶아댄다는 거야. 찌개에다가도 식용유를 얼마나 부었는지 느끼해서 못 먹겠대….”

    “거기는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여기보다 한 30년은 후지다는데.”

    마치 중국사람들로부터 숱한 피해를 본 것처럼 ‘반중감정’이 대단했다.

    불법체류 동포들이 위조한 주민등록증이나 위장결혼으로 취득한 신분증을 지니고 일자리를 찾으러 직업소개소에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곳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동포를 더러 볼 수 있었는데, 그녀들이 나간 등 뒤로는 반드시 무시와 경멸의 말이 뒤따랐다. 머리 모양이 어떻다는 둥 말투가 이상하다는 둥 되놈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면서 드러내놓고 무시하는 한국 아줌마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나는 결국 그곳에서 한 달을 채우지 못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입조심을 하고 있다.

    어느새 오후 2시가 다 돼 간다. 함께 기다리던 두 사람은 30분쯤 전에 돌아갔고 이젠 나만 남았다. 마침내 나도 일어섰다. 이쯤에서 더 기다려본들 일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는데다 소장이 점심 채비를 하고 있어 눈치가 보였다. 무엇보다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아까부터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픈 듯했다. 오늘따라 소장이 끓인 된장찌개가 왜 그리도 맛있어 보이는지, 허둥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데도 찌개냄새가 유혹하듯 뒤쫓아오는 듯했다. 아무리 공친 날이지만 오늘은 뭔가 사 먹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날 같으면 아무리 늦어도 허기를 참았다가 집에 돌아가서야 점심을 차려 먹었다. 일도 얻지 못했는데 밥까지 사 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쩐지 새벽보다 날씨가 추워진 느낌이다. 파카를 입었는데도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시장 노점상들이 파는 음식이 미더워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살펴보니 전에 먹어본 호떡집이 눈에 띄었다. 한 개만 사서 허기만 면할 요량이었는데, 하나는 안 팔고 1000원에 세 개씩 판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1000원짜리를 내주고 호떡봉투를 받아들었다.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먹기가 뭣해 한쪽으로 비켜서서 호떡 하나를 꺼내 물었다. 급한 마음에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입에 채 들어오기도 전에 뜨거운 단물이 턱밑으로 주르르 흘러 덴 듯 따가웠다. 호떡 아줌마한테서 화장지를 얻어 끈적이는 턱을 얼른 닦아냈다.

    날씨도 추운데다 물도 없이 빨리 먹으려니까 자꾸만 목이 메었다. 가까운 슈퍼마켓에 들어가 우유를 한 통 샀다. 구석진 곳으로 찾아들어가 우유를 몇 모금 꿀꺽꿀꺽 마시는데, 그런 내 모습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서 한국남편 만나 늦게나마 호강하며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부러워할 것이다.

    가게를 나오다 보니 마침 입구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잠깐 걸음을 멈추고 비춰 보니 내 피부는 이곳 여인네들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일 만큼 거칠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안색도 엉망이었고, 입성도 어설프고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낯설게 변한 내 모습에 순간 설움이 치솟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만약 그이(전 남편)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 뿐더러 재혼해 이곳에 정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이가 살아 있다면 나는 지금쯤 중국땅 어디엔가 그이가 마련해준 보금자리에서 예나 다름없이 밥짓고 빨래하고 랄랄라 사랑 노래 부르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귀국하는 배표까지 끊어놓고도 왜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한국남자와 결혼하게 됐을까. 그때 중국으로 돌아갔다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들이 내 민족인가

    8년 전, 내 마음속엔 아름다운 섬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한국은 중국보다 부유한 나라이면서도 나와 같은 핏줄의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고, 무엇보다 둘도 없는 고국땅이어서 나는 자나깨나 나의 아름다운 섬, 한국에 나오고 싶어 안달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나는 한 친지의 도움으로 요란스레 출렁거리는 배를 타고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서 그토록 꿈에 그리던 내 마음속의 섬에 닿았다. 1992년 6월2일이었다.

    인천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한 나는 긴긴 뱃길의 피곤함도 잊은 채 아름다운 분위기에 흠뻑 젖어 한참을 감격에 빠져 있었다. 여기저기 눈에 띄는 까마득한 고층건물, 물결처럼 흐르는 자동차 행렬, 활보하는 행인들의 깨끗한 옷차림….

    어렸을 적에 그림에서 봤던, 중간 가리마 양편으로 탐스런 머리칼을 곱게 빗어 넘긴 아리따운 여인네의 모습이나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수줍게 미소를 머금은 실눈의 얼굴들, 코고무신 위로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뿐사뿐 걷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화사하고 대담한 미니스커트에 울긋불긋한 컬러 머리 같은 다양한 차림새와 세련된 모습이 상상외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더욱이 귀에 들어오는 말은 딱딱하고 높낮이가 심해 거북살스러운 중국어가 아니라 하나같이 부드러운 조선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 조선말은 아름답다 못해 신기하게 들렸다.

    그러나 이 모든 감상도 잠깐, 나는 여느 중국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침식이 가능한 일자리부터 구해야 했다. 동서남북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서울에서 비싼 택시를 타고 물어물어 찾아 다닌 끝에 마침내 침식을 제공하는 어느 식당에 주방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내가 생각했던 한국이 아니었다. 겨우 몸을 풀고 일을 시작한 그날부터 나는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임금을 받았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때 주방에선 나말고도 네 사람이 일했는데, 그들은 틈만 나면 홀에 나가 고스톱을 치거나 의자에 걸터앉아 쉬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종일 다리를 쉴 틈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일조차 부담스러워 변비가 생길 정도였다. 그들은 편히 앉아 쉬면서도 혼자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자기네 몫의 일까지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개인적인 바깥 잔심부름까지 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설거지 담당’인 내가 씻어야 할 그릇들은 싱크대에 어지럽게 쌓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주인은 그때마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식당주인은 걸핏하면 내가 중국동포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주제를 알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시시콜콜 일러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밀린 그릇들을 한꺼번에 씻어내느라 혼자 부산을 떨어야 했다.

    특히 주말이나 휴일에 많은 손님들이 일시에 들이닥치면 주방 여기저기서 내게 소리를 질러댔다. 나보다 한참 어린 종업원까지도 강아지 부리듯 ‘아줌마!’ ‘아줌마!’ 하면서 반말투로 일을 시켰다.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고기도 썰다가, 채소도 다듬다가, 국수사리도 삶아내다가, 홀에 나가 빈 그릇도 날라오고, 물컵도 내가는 등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런 날이면 주방 일꾼들이 간혹 인심 쓰듯 설거지를 도와줄 때가 있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제로 닦은 그릇을 내가 일일이 깨끗하게 헹굴라치면 그들은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해서 언제 다 씻어?” 하면서 내 앞에서 그릇 씻는 시범을 보였다. 세제를 많이 붓고 씻은 그릇을 그저 싱크대 개수통에 받아놓은 물에다 덤벙덤벙 담갔다가 건져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헹궈낸 물에도 세제거품이 허옇게 떠 있었다.

    그렇게 씻어 내놓은 그릇은 하나같이 세제가 그대로 묻어 있어 몹시 미끄러웠다. 모르는 사람들 눈엔 깨끗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정을 아는 나로서는 마치 독이 묻은 그릇처럼 여겨져 꺼림칙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 번 헹궈내면 “더러운 똥되놈 나라에서 살다온 것이 어지간히 깨끗한 척한다”면서 대놓고 비웃으며 모욕을 줬다. 그런 말을 듣고도 타향살이 하는 처지라 아무 대꾸도 못하고 치솟는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은 세제를 어지간히도 조심했다. 세제를 만질 때는 피부가 상한다면서 반드시 고무장갑을 꼈고, 자기들이 먹을 음식을 담을 때는 이미 씻어 엎어놓은 그릇들을 손수 다시 헹궈서 사용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민족애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년만 고생하면 갑부?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법적 체류기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귀국일자가 어느새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이었다. 황급히 법무부로 달려가 체류기간을 한 달 더 연장했다. 그러고 나서 또 다시 한 달을 더 연장했지만, 서울 생활은 물 흐르듯 빨리 지나갔다.

    하는 수 없이 체류 마감일에 맞춰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표를 끊었다. 하지만 한국으로 오기 위해 보낸 너무도 길고 힘겨웠던 수속기간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이렇게 일찍 귀국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깝고 억울했다. 그 무렵엔 내가 알기로도 수많은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남아 있었지만, 나는 날마다 안절부절못했다. 그때가 마침 불법체류자 단속기간이기도 해서 운 나쁘게 단속에 걸려 법무부로부터 강제 추방된다면 그것처럼 불명예스러운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고된 식당 일을 하면서도 피곤함조차 느낄 여유가 없는 신경과민증에 시달렸다.

    자정쯤 일이 끝나 모두 돌아가고 식당 현관셔터가 철커덕 내려지면 나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어 외로이 잠자리로 찾아들었다. 식탁 두 개를 맞붙여 놓은 ‘침대’에서 나는 가뜩이나 짧은 밤의 절반을 걱정과 한숨으로 지새웠다. 아직 63빌딩이며 자연농원이며 민속촌도 구경 못했는데, 김동건의 ‘가요무대’도 못 가봤는데, 이렇게 고생만 하다 쫓겨나면 어쩌나 하면서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그때 경기도 일산 신도시 건설현장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잖아도 배표를 쥐고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무작정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만약 그곳까지도 단속의 손길이 미친다면 배를 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나는 일하던 식당을 빠져나와 일산의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황급히 뛰쳐나오다 보니 밀린 월급도 얼마간 떼였다. 현장에 이르자 다행히 어느 함바식당에서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소문대로 그곳은 복잡한 서울과 달리 구석지고 조용해서 얼마 동안은 피신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나처럼 단속을 피해 그곳으로 몰려오는 동포가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한국에 온 지 1∼3년째 되는 동포도 더러 있었는데, 용케도 단속을 피해가며 버텨온 악착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 무렵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신고하자’라는 표어가 유난히 내 눈에 잘 띄었다. 그렇게 단속 걱정을 하는 나에게 한 교포가 픽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오장육부가 그렇게 콩알만해서 어떻게 딸라를 벌어가요? 우리가 무슨 강도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버티는 데까진 버텨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요….”

    그는 이미 상당한 액수의 돈을 저축해 놓았는지 우쭐대는 여유마저 보였다. 그가 부러웠다. 그에 비해 나는 거지나 다름없었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게 또 돈 아닌가. 나는 한껏 용기를 내서 한국에 있는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이곳 함바식당의 월급은 60만 원으로, 서울에서 일하던 식당보다 10만 원이 더 많았다. 1년이면 720만 원, 2년이면 1440만 원, 3년이면 2160만 원이란 얘기다. 중국돈으로 따져보면 가히 천문학적인 거금이었다. 중국돈으로 환전하면 지게로 지고도 남을 액수였다. 돈을 벌기도 전에 산수놀음부터 하기 바빴다. 3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을 머리 속에 떠올리자 잠시나마 갑부가 된 듯한 기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나날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함바식당의 일 역시 끝이 없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면 밤 10시가 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매일같이 식사하는 일꾼이 70명 남짓 됐지만, 주방 일꾼은 주인 아줌마와 나 단 둘뿐이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된 머슴살이 하듯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더욱이 주인 아줌마는 말 그대로 ‘주인’인 몸이라 시장 보러 읍내에 자주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아줌마가 없는 동안은 나 혼자서 정신없이 손발을 놀려대야 했다.

    함바식당의 하루 세 끼 식사시간은 일정했으나 간식시간은 그렇지 못했다. 일꾼들 마음대로 와서 챙겨먹는 것 같았다. 금방 부산하게 아침 먹여 보낸 듯하면 어느새 삼삼오오 무리지어 몰려와서는 또 간식을 달라고 야단들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설거지는 물론 아침밥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특히 현장 간부들은 꼭 뒤늦게 와서 식사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주인 아줌마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직함을 일일이 챙겨 부르며 친절하게 손님맞이를 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현장의 소장님, 과장님, 대리님, 반장님들인데,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팔자걸음으로 들어와서는 식당 안방에 양반처럼 앉아 밥상 들여주기만 기다렸다. 밥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주인 아줌마가 웃음을 날리며 말벗노릇을 해주는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동안 부엌에 있는 나는 미리 주인 아줌마로부터 하달받은 영대로 별식을 장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건 꼭 즉석에서 장만해야 하는 음식이고, 또 그래야만 별미여서 미리 해놓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서둘러 밥상을 차려 올리고, 식사수발을 하고, 잔심부름에 마지막 커피까지 끓여 바치다 보면 설거지 따위는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다. 그 시간쯤이면 밥 먹을 생각조차 없어지고 만다. 일꾼들도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찾으면 쉬울 텐데, 일부러 애먹이려는 듯 너도나도 라면만 외쳐댔다. 그것도 지금 당장 끓여달라고 성화여서 그 와중에 우리는 설거지 마치랴, 간식 챙겨주랴, 점심식사 준비하랴, 머리가 돌고 두 손 두 발이 모자랄 지경이 된다.

    게다가 야식이나 회식까지 있는 날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뒤늦게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잠시 잠들면 어느새 알람시계가 새벽수탉처럼 홰를 쳤다. 정말 그때는 제대로 식사 한 끼 챙겨먹기는커녕 잠 한 숨 푹 자보는 게 간절한 바람이었다.

    고작 네댓 시간 잠드는 짧은 밤에 모기는 왜 그리도 많은지, 잠들기 전에 살충제를 안개처럼 뿌리는데도 한밤이면 모기가 극성이었다. 판자로 된 허름한 창문 틈새로 모기놈들이 떼로 들어와서 앵앵거리며 달려들었다. 시달리다 못해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사정없이 모기를 후려치곤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모기가 죽은 자리엔 내 것인지, 모기 것인지 모를 피가 벌겋게 묻어 있었다.

    여름 더위도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찜통 같은 삼복 더위에 작은 선풍기 하나만 틀어놓고 열기 가득한 주방에서 일하다 보면 땀이 샘물처럼 흘러내렸다. 선풍기조차 하루종일 쉴새없이 고개를 저으며 바람을 불어내느라 힘에 겨워 비실비실 넘어갈 듯했다.

    끈적거리는 날씨 때문에 가뜩이나 짜증스러운데 일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얼음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행여 얼음물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일꾼들은 오후 2∼3시쯤에 한꺼번에 몰려올 때가 많았는데, 확 트인 식대 창구로 얼음물을 달라고 장대 같은 손들을 들이밀면 위협적인 느낌마저 들곤 했다.

    식당에는 냉장고가 두 대 있었지만 용량이 작아서 필요한 만큼 얼음을 준비해 두기엔 모자랐다. 오이냉국이나 미역냉국, 비빔국수 같은 여름 음식에는 얼음이 꼭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정작 홀에 놓아둔 물통에는 얼음을 적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얼음을 넣은 냉수라 해도 금방 미지근해지곤 했다. 문제는 주인 아줌마가 깡패처럼 생긴 몇몇 일꾼에게 얼음물을 몰래 만들어 준다는 데 있었다. 그 바람에 그런 사정을 아는 다른 일꾼들이 툭하면 주방에 들어와 얼음물을 훔쳐 마셨다.

    얼음봉변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비상용 얼음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깡패같이 생긴 아저씨가 헐레벌떡 주방에 뛰어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내게 손을 내밀며 맡겨놓기라도 한 듯 얼음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지만 얼음이 떨어졌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는 두 눈을 부라리며 “뭐야?”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자기가 먹을 얼음을 남겨두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실은 주인 아줌마가 시장에 간 사이 일꾼 몇이 몰래 주방에 들어와 얼음물을 먹는 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 나 자신도 힘들지만 그들 또한 한여름 땡볕 아래서 힘든 일 하는 게 측은해 보여서 그냥 내버려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주눅 든 표정으로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는 거칠게 나를 밀치며 “얼음쪼가리 하나라도 나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냉장고 문을 마구 열어젖혔다. 그 바람에 냉장고에 들어 있던 음식이며 반찬재료들이 주방 바닥에 나뒹굴었다. 보다못한 내가 떨어진 물건들을 집으면서 쏘아붙였다.

    “아저씨. 왜 내 말을 못 믿으세요? 없으니까 없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자 그는 두들겨 패기라도 할 기세로 욕설을 내뱉었다.

    “뭐가 어째? 이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지 마음대로 지껄여. 니 나라 쭝국으로 당장 가버려! 니가 왜 여기 왔어. 니네 때문에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이야. ××년, 당장 꺼져!”

    사천왕 얼굴에 서슬이 시퍼랬다. 한마디라도 더 대꾸했다간 큰 봉변을 당할 듯한 살벌한 분위기였다. 마침 주위에 구경꾼이 모이고 주인 아줌마도 돌아왔다. 그는 주인 아줌마에게 내 ‘죄상’을 말해주고 “당장 잘라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자 주인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가 얼음을 잘 간수했다가 드리라고 했는데, 왜 없앴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순간 정신이 멍해 왔다. 주인 아줌마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럽고 분했다. 그러나 무능하고 힘없는 불법체류자 신세에 찍소리 한 번 못내고 그저 울기만 했다. 웬 눈물이 그렇게도 많이 흐르는지, 두 다리는 떨리고 눈앞은 뿌옇기만 했다.

    뒤늦게야 주인 아줌마가 내게 사과했다. 어차피 나는 돌아갈 몸이고 자기는 장사를 계속해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서운하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했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일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과연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 어찌 보면 한국사람도 중국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조선사람’에 불과했다. 중국땅에서 중국인들과 섞여 살다 보면 조선인들은 잦은 충돌과 마찰을 겪는다. 그럴 때면 항상 우리 조선인들이 먼저 양보해야 했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으로는 물론 물질적으로도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인들은 불편을 느낄 때마다 우리더러 ‘고려××’라고 욕하면서 “너희 나라로 당장 물러가라”고 떠들어댔다. 그럴 때면 우리는 그저 나라 없는 설움에 애꿎은 타향살이 신세를 한탄하며 아픔을 달랬다. 그런데 내 조국인 한국에 와서도 똑같은 말을 듣게 되다니. 그는 그냥 가라는 것도 아니고 “니네 똥되놈의 나라로 기어가라”고 호통치듯 말했다. 비슷한 말을 중국에서 들었을 때는 이토록 서럽진 않았다.

    서두른 결혼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가는 가운데 변비증세가 심해졌다. 변을 정상적으로 보지 못한 것은 서울 식당에 있을 때부터였지만, 그 즈음엔 이틀을 넘기고 사흘에 한 번 보는 변이 염소똥만 했다. 그것 내놓는 것도 아이 낳을 때만큼이나 힘에 겨워 나중엔 화장실 가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늘 일에 쫓기다 보니 제때 화장실에 다녀올 수 없었던데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동화장실이라 마음 편히 화장실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만 해도 건설현장의 화장실 환경은 엉망이었다. 불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칸막이도 베니어 합판으로 대충대충 만들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몰래카메라 없이도 마음만 먹으면 옆칸을 얼마든지 훔쳐볼 수 있을 정도였다. 변비가 심해지자 밥을 먹는 것도 싫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아랫배는 늘 더부룩했고, 왼쪽 배 밑으로는 늘 뭔가 딱딱한 게 만져지곤 했다.

    언제까지 이 고생을 계속해야 하나 하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이런 내 마음을 주인 아줌마가 헤아리기라도 한 듯 어느날 내게 “이렇게 고생할 것 없이 아예 이곳 남자와 결혼해 주저앉아 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피식 웃기만 했다.

    한국에 나오기 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가거든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잘사는 한국에서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라고 했다. 그러나 부모 형제와 자식을 남겨두고 이곳에 와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재혼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주인 아줌마는 함바식당을 철거할 때까지 자신이 책임지고 좋은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주인 아줌마로선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기 곁에 붙잡아 두려는 속셈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호의도 있었다.

    고생은 계속됐지만 아무튼 시간이 흐르면서 손에 들어오는 돈이 조금씩 많아지자 중국으로 일찍 돌아가지 않은 게 백번 잘했다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국은 역시 희망과 꿈의 땅이었다. 부지런히 일만 하면 중국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목돈을 벌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오직 게으름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생을 혼자 고생하며 사느니 함바주인 말대로 이곳에서 결혼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가만히 보면 한국은 참 살기 좋은 나라였다. 집집마다 전화가 있어 편리한 것은 물론이고, 집 안팎 어디라 할 것 없이 중국보다는 너무도 깨끗했다. 중국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다닐 때는 어디에서 가래침이 날아올지 몰라 전전긍긍할 때가 많았다. 거리를 오가다 난데없이 가래침 벼락을 맞고 자전거를 멈춘 채 울상을 짓는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아왔기 때문에 한국의 청결함이 무엇보다 내 마음에 들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력적이었다. 하루 노동의 대가로 똑같은 크기의 달걀을 산다고 가정할 경우 중국에선 15알 정도를 살 수 있지만, 한국에선 200알도 더 살 수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똑같은 노력의 대가가 중국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이처럼 살기 좋은 조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나오고 싶어하며, 나왔던 사람들 또한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무렵 남편이 있는 한 동포여성이 한국을 떠나지 않기 위해 중국에 있는 남편에게 비싼 돈을 지불하고 어렵게 이혼수속을 밟은 후 한국남자와 결혼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중국에선 그녀를 다들 ‘미친년’이라고 욕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미망인이기에 한국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한국에서 결혼할 의향이 생겼고, 그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에 지치고 불법체류에 시달린 몸을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석 달 남짓 불법체류를 하던 무렵 어느 중매쟁이를 통해 모험하는 기분으로 서울남자를 만났다. 나이가 아홉 살이나 차이 났지만, 외모에서 가정적인 조건까지 여러 모로 나보다 나아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의외로 내게 몇 가지만 간단하게 물어보고서 결혼할 의향을 비쳤다. 결혼이 너무 쉽게 이뤄지는 것 같아 의구심도 들었으나 내 처지가 처지인데다, 도적놈도 제 마누라 밥은 먹이고 위한다는 생각에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나는 운명에 몹시 약했다. 나는 과거의 모든 일을 늘상 운명으로 돌렸으며, 그래서 한국에서의 결혼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남편 될 사람의 전처와 나의 전남편이 모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남은 자로서 똑같은 아픔을 겪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와 결혼함으로써 7년간의 과부생활을 마감했다. 피차 재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예식장 같은 데 얼씬거릴 생각은 하지 않았고, 혼인신고 하던 날 동대문시장에서 남편이 골라준 투피스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결혼선물로 받고서 얼씨구나 승용차 타고 남편 따라 집으로 들어간 것이 그대로 결혼식이 됐다.

    그날 저녁, 없는 반찬에 밥 지어 먹었지만 마냥 기쁘고 행복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날아갈 듯한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고, 여자로 태어나 덕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수많은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남고 싶어하지만, 여자는 한국에 시집와서 정착하는 게 가능해도 남자가 이곳에서 장가드는 것은 정책적으로 불허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결혼한 날부터 한동안은 시름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또 다른 걱정이 이어졌다. 다름아닌 그리움과 외로움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는 늘 한국을 생각했으나, 정작 한국에 정착하고 나서부터는 중국 생각뿐이었다. 꿈조차 중국 꿈을 꿨고, 잠에서 깨면 옆에 누운 남편 모습이 낯설어 순간적으로 놀랄 때가 있었다. 모습뿐 아니라 사는 것도 그랬다. 남편과 처음 얼마 동안은 같은 조선말을 써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대화가 어려워졌다. 마치 외국어를 배울 때 기초단계에선 멋모르고 쉽게 배우다가 갈수록 어려워져 난감해하듯 남편과의 사이도 그러했다.

    결혼 초기부터 한국남자를 우러러본 탓인지 나는 남편 앞에서 뭘 하든 늘 조심스러웠다. 남편이 있을 때는 걸음도 살금살금 내디뎠고, 설거지를 할 때도 행여 소리가 날세라 계란을 다루듯 조심조심 닦았다. 양치질 할 때도 소리를 안 내려고 조심하다가 양치물을 삼킨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오죽했으면 안방에 누워 있던 남편이 부엌에 있는 나에게 바깥 날씨를 묻자 “비가 내리네요” 하면 될 것을 “지금 바깥에 비가 내리시네요”라고 했을 정도였겠는가. 그렇듯 남편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하려고 어지간히 애를 썼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남편의 불 같은 성미였다. 남편은 맞선을 볼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남편 스스로 자신이 다혈질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만큼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그래서 남편 옆에 있으면 나는 앉으나 서나 불안했다. 남편은 1분, 아니 단 몇 초의 여유도 없는 사람처럼 매사를 독촉하고 다그쳤기 때문에 나는 늘 초조해하고 허둥대며 살았다. 그런 삶 또한 불법체류자의 그것 못지않게 피곤했다.

    가정은 긴장의 연속

    결혼 초의 일이었다. 남편을 따라 시아버님과 할머님 산소가 모셔져 있는 망우동 공동묘지에 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봉분들을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무섭지 않았고, 묘지라기보다는 뭐랄까, 마치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산책로를 따라 오가거나 묘지 옆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도시락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매장문화가 진작에 사라지고 없어서 생소한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이내 처음 가졌던 긴장감은 없어지고 곧 소풍 온 기분으로 벌초를 끝냈다.

    산소에서 내려오는데 길섶에 많은 사람들이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를 에워싸고 빨간색 열매를 따먹고 있었다. 호기심에 물어보니 벚나무 열매인 버찌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생전 볼 수도 없었고 먹어보지도 못한 것이라 내친 김에 몇 알 따서 입에 넣어보니 색깔만 예쁜 게 아니라 맛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남편이 가자고 재촉하는데도 사람들 틈에 끼여 잠깐 열매를 따먹다가 아차 싶어서 부랴부랴 뛰어 내려가니 잔뜩 화가 난 남편은 벌써 차를 몰고 주차장을 나서고 있었다. 기다려봤자 기껏 5분도 안 되는 시간일 텐데도. 멀어져가는 남편의 자줏빛 승용차가 가물가물 아득히 보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편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는 길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남편의 차를 쫓아가지 못하면 끝장인 줄 알고 죽기 살기로 뒤쫓아 갔다. 그때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버찌를 먹으면 입에 붉은 물이 든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던 나는 입 언저리가 검붉게 퍼져 흉측스럽게 된 것도 모르고 소리를 치며 달렸으니 모르긴 해도 행인들에게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됐을 것이다.

    남편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급한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그 급한 성질만큼이나 결혼도 서둘러 후닥닥 치렀는지 모른다. 그런 남편이니 그와 함께 외출할 때는 한 번도 속 편하게 대문 밖을 나서지 못했다. 남편은 늘 전화 한 통 없이 갑자기 집으로 쳐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떠날 일이 생겼다며 나가자고 했다. 그래도 여자가 집에 있던 행색 그대로 나가기가 뭣해 1∼2분이라도 눈치껏 거울을 마주하고 얼굴에 뭐라도 좀 찍어 바를라치면 “네 얼굴 쳐다볼 사람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으니 빨리 나와!” 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그것도 모자라 빵빵빵 하고 자동차 경적을 울려댔다.

    그러면 나는 윗도리를 걸친 듯 만 듯하고 허둥지둥 가방을 집어들고 신도 아무렇게나 꿰 신고 뛰쳐나갔다. 달리는 차 속에서 가스 밸브는 제대로 잠갔는지, 전등은 끄고 나왔는지, 수도꼭지는 잘 잠갔는지 생각하다 보면 마치 피해망상증에 걸린 듯 걱정이 쌓여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정생활이라는 게 그렇듯 전혀 가정적이질 못하고 군대처럼 무조건 명령하고 복종하는 식이었다. 남편은 내게 오직 충성만을 요구했다. 음식도 당연히 남편 위주로 장만해야 했다. 그래서 찌개며 밑반찬들은 하나같이 짜고 매워야 했다. 남편이 먹는 고추는 여느 고추가 아닌 맵디매운 청양고추였다. 김치와 고추장은 모두 청양고추로 담가야 했다. 또한 남편은 생강 고추냉이 후추 생마늘 같은 아주 자극적인 양념만 좋아했다. 요령껏 가려서 먹는데도 나는 늘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속이 쓰렸다. 도무지 남편의 식성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자영업자인 남편은 직업상 바깥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므로 하루 세 끼 식사를 꼭 집에서 했는데, 식사시간도 아침은 정확히 6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라야 했다. 조금만 늦거나 일러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시간에 칼같이 식탁을 차려놔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만 되면 늘 긴장에 떨었다. 식사준비를 한 시간 전부터 하는 데 비하면 정작 식사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가뜩이나 음식이 맵고 짠데, 이걸 빨리 먹기까지 해야 하니 뜨거운 음식들을 급히 삼키느라 입천장을 데기도 했다. 무얼 하듯 그렇게 항상 대기상태로 준비하고 있어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는 듯싶었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결혼 초부터 남편의 뜻대로 남편이 집안 살림을 주도했고, 나는 남편이 알아서 던져주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두부나 콩나물 같은 값싼 식료품이나 살 수 있었다. 그나마 일일이 가계부에 기록해 남편의 결재를 받아야 했다.

    소시지=수세미, 오뎅=우동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밴 나는 누가 봐도 궁상 떤다고 할 만큼 알뜰하게 살림을 꾸렸다. 동네 미장원에서 머리 커트하는 것도 아까워 나중에는 서툴게나마 거울을 보고 혼자 머리를 잘랐다. 더욱이 남편은 내가 바깥에 혼자 나다니는 걸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어지간히 급한 일이 없으면 온종일 집 안만 맴돌다시피 살았다.

    남편은 행여 내가 마음대로 밖으로 나돌까 봐 걸핏하면 겁을 줬다. 문밖 도처에 강간, 강도, 살인사건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기겁을 한 나는 공포심에 간이 졸아 정말이지 어딜 함부로 다니질 못했다. 그렇게 집에만 붙어 있는데도 남편은 내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화를 내곤 했고, 내가 만드는 음식이 자기 입에 잘 맞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영어 같은 외래어를 못 알아듣는다며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남편이 타인처럼 느껴져 부엌에서 숨죽여 서럽게 울었다.

    미국도 중국도 아닌 내 고국땅 한국에서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어디에서나 조선말만 할 줄 알면 만사형통일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중국말을 못하면 살아가기 어려웠다. 중국말을 잘 못했던 내 부모님은 가는 곳마다 불편함을 겪는 것을 넘어 업신여김을 당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손에 돈을 쥐고도 물건 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벙어리마냥 눈으로 이것저것 확인한 다음 “어, 어…” 하면서 손짓 발짓으로 물건을 사고 돈을 주고 받았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당장 눈에 띄지 않으면 지레 체념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가까운 도시로 가려고 기차역에서 표를 사다가 매표원이 “발음이 똑똑하지 않다”며 돈을 내던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분통이 터진 어머니는 “내 나라 내 땅에 가서 내 말 하고 살았으면 이런 설움은 안 당할 텐데…” 하면서 한탄했다. 이제라도 좋으니 내 나라 땅에 가서 조선말 실컷 하면서 살아보는 게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고국땅에서 겪는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갓 유치원에 들어간 어린이처럼 새로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 한국은 미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일상생활에서 영어가 많이 쓰이고 있었다. 거리의 간판에서부터 상점에 진열된 상품들까지 엄연히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천지가 영어투성이다. 이웃끼리 나누는 대화에서도 심심찮게 영어 단어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벙어리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동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가기도 겁났다. 촌닭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할 뿐 감히 물건을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소시지’(‘소세지’라고 발음하니까)와 ‘수세미’를 혼동했고 ‘오뎅’과 ‘우동’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 날엔 남편이 케첩을 사오라고 했는데 치즈를 사왔고, 카레를 산다는 게 그만 참치를 사와서 남편한테 어린아이처럼 야단을 맞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날 아침 남편이 문밖을 나서다 말고 “아차” 하더니 자동차 키를 갖다 달라고 했다. 알파벳도 잘 모를 때였으니 ‘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와서 허둥대다 하는 수 없이 도로 나가 물으니 남편은 “아직 키도 모른단 말이야?”라며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동네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열쇠!”라고 소리쳤다.

    외래어 모른다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속상했지만, 일상용어가 돼버린 그런 말들을 못 알아들어 다른 사람의 생활에까지 지장을 주는 게 더 마음 아팠다.

    남편에게 딸린 아들도 내 속을 끓였다. 한창 사춘기여서 그런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조차 잘 하지 않았고, 어쩌다 하는 대답도 건성이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행동했고, 제 아빠가 내게 그러듯 어른인 내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명령하듯 굴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그렇듯 매정하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한 시선도 항상 쏘아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뭔가 제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시위하듯 내 면전에서 쾅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아 걸거나 발길질을 했다. ‘엄마’라고는 실수로도 한번 부르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나는 줄곧 불청객 같은 존재였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새엄마를 데리고 온 데 대해 반발심을 보였다. 집에서 뭐든 좀 불편한 게 있으면 무조건 새엄마에게서 원인을 찾았다.

    그보다 더 속상했던 것은 남편이 나와의 결혼생활을 전처와의 그것과 비교해서 만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었다. 아마 아이를 의식했기 때문이기도 한 듯했다. 남편의 태도는 늘 그랬고, 더러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할 때도 있었다. 남편은 자신이 정해놓은 그 기준에 어긋나면 냉정하게 내게서 등을 돌렸다.

    이혼한 사람 후처 되는 것보다 상처한 사람 후처 되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내겐 백번 해당되는 말이었다. 애당초 과거를 꽉 붙들고 살아가는 남편에게 나를 품어줄 가슴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추웠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나 보다.

    집 안 곳곳에 전처의 손때 묻은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깊이 배어든 냄새처럼 고인의 숨결과 취향이 집 안 가득 감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집 안에 정을 붙이고 손때를 묻히려 해도 남편과 아이는 하나같이 ‘이건 안 돼!’ ‘저건 건드리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할 것 없어!’ 하는 식으로 선을 그어댔다. 그러니 밤낮으로 사는 집이 남의 집같이 서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편이 전처와 다정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 액자들이 아직도 여기저기에 놓여 있고, 한때 아이 엄마가 취미 삼아 만들었다는 지점토 공예품들도 곳곳에 장식돼 있었다. 남편과 전처가 오랫동안 사용한 가구며 이부자리, 그릇들은 진작에 낡고 달았지만, 남편은 지금껏 애지중지 써서 애착이 간다며 치우지 못하게 해서 그대로 쓰고 있다. 전처가 쓰던 금붙이며 액세서리들도 안방 화장대 서랍 안에 안방마님의 위세로 늠름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피붙이 하나 없는 한국에서 내겐 남편의 사랑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남편은 “여기는 한국이야. 가부장제도 몰라? 중국과는 비교할 생각도 하지 마” 하고 무 자르듯 대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오기 같은 게 발동했다. 남편의 자식을 낳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처지에 좀 무리가 되겠지만, ‘우리 아이’를 가지면 재혼의 부작용도 다소나마 줄어들고, 남편이며 시집 식구들의 사랑과 믿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외롭지 않아 좋을 것 같았다.

    산부인과를 전전하며

    어렵게 마음을 먹고 남편에게 뜻을 비쳤다. 그러자 남편은 코방귀를 뀌며 “이 나이에 무슨 자식이야, 집어치워!” 하고 잘라 말했다. 나는 사정하듯 매달렸다.

    “늘그막에 딸자식 하나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삶의 활력소가 될 거예요. 나도 더 열심히 살게요.”

    남편은 그제서야 마지못해 “재간 있으면 낳든지” 하고 성의없이 허락했다.

    남편은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으로 알았다. 나이도 많은데다 그 무렵 산부인과 계통에 문제가 있어 약을 자주 먹었기 때문이다. 자궁 안에 들어 있는 루프가 문제였다. 10여 년 전 중국에서 강제로 피임하면서 집어넣은 루프가 한국에 온 후 자주 염증을 일으켜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임신을 하려면 10년 넘게 장기(臟器)처럼 넣고 다녔던 루프부터 빼내야 했다. 이튿날 집 근처의 산부인과를 찾았다. 진찰대에 누워 검사를 받은 후 마취주사를 맞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의사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들었다. 자궁 속의 루프가 빠져 나가고 없어 임신예방 차원에서 다시 새 루프를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

    내가 펄쩍 뛰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의사는 초음파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뒤에 알고 보니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루프 주위에 얇은 막이 형성되어 진찰로는 만져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음파 검사부터 먼저 했다면 새 루프를 끼워넣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쨌든 그날은 하는 수 없이 또 다른 루프 하나를 반지처럼 끼고 돌아와야 했다. 며칠 뒤에야 병원으로 가서 새로 넣은 루프를 빼냈다. 그러나 중국에서 넣은 루프를 꺼내는 데는 실패했다. 종합병원에 가보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의사는 가봤자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루프가 조만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그때는 자궁 전체를 들어내야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임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섭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해서 밤새 울었다.

    그 후 우연히 한 중국동포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자신이 중국에서 넣은 루프를 P산부인과에서 빼냈으니 그리로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루프를 꺼낸 것은 물론 아이까지 낳았다고 했다. 떨리는 손으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병원측에서는 “많은 중국동포들이 우리 병원에서 루프를 빼냈으니 안심하고 오라”고 했다. 내 나이(당시 38세)에 아이를 갖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밤새 잠을 설치다가 이튿날 남편에게 빌다시피 사정한 끝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하고서야 P산부인과를 찾을 수 있었다. 남산만한 배를 자랑스레 내밀고 진찰을 기다리는 예쁜 색시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진찰을 받고 마취주사를 맞자 어느 결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남편의 화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실패했음을 알아차렸다. 순간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루프 때문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 더욱이 몇 번씩이나 진찰대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 검사와 수술을 받는다는 건 또 얼마나 고역인가. 그 무렵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늘 어지러웠고, 그 후유증으로 자궁 염증이 더 자주 생기는 것 같았다. 남편은 두 번 다시 루프 때문에 병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노동력’이 사랑의 척도?

    그러던 어느날 아랫배가 또 아파왔다. 참다못해 버스를 타고 또 다른 산부인과를 찾았다. 의사는 내 설명을 조용히 듣고 나서 진찰을 하더니 “루프가 손에 만져진다”며 가망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어려울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만난 의사들과는 달리 대놓고 중국 의술을 비웃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간의 내 아픔을 헤아린 듯 너무도 친절해서 믿음이 갔다. 그래서 수술을 받겠다고 했다. 나모 모르게 임신에 대한 욕구가 다시 치솟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마취주사도 맞지 않고 수술대에 올랐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의사는 연신 “조금만 참으세요”라는 말을 반복하며 진땀을 흘렸다. 5분, 10분, 15분…. 아랫배와 허리가 동시에 뒤틀리면서 순간순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온몸이 떨렸다. 참는다고 참았지만 잇새로 울음 같은 신음이 새 나갔다.

    잠시 후 금속기구 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의사의 손놀림도 그쳤다. 해냈을까? 지옥 같은 아픔을 참고 천국에 온 듯한 표정으로 결과를 물었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수술실 바닥에는 내 몸에서 빠져나간 선혈이 낭자했다. 갑자기 세상이 노래지면서 현기증이 일고 구토증세까지 생겼다. 간호사는 급히 나를 건너편 침대에 데려가 뉘었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해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진찰비는 물론 초음파 검사비며 시술비도 한 푼 받지 않았다.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날 의사로부터 결정적인 말을 듣게 되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의사 말로는 내가 중국에서 넣은 루프는 한국에는 드문 링 형태인데, 이것은 링을 빼는 기구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중국에는 그런 기구가 있을 테니까 한번 다녀오는 게 좋겠다는 얘기였다.

    뒤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려 애썼지만 한 번 소파에 허물어진 몸을 도저히 일으켜 세울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지을 수 없게 돼 결국 남편에게 들키고 말았다. 눈물이 비오듯 했다. 아파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편은 아픔을 위로해주기는커녕 공연한 짓을 했다며 벌컥 화부터 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자식이 필요해! 지금 제정신이야! 우리 나이가 얼만데. 무식한 여편네 같으니라구….”

    아무리 내가 잘못했지만 그 순간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찬 서리가 내리는 듯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이따금 나는 과연 저 사람 몸 속에 흐르는 피도 뜨거울까 하는 뚱딴지 같은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렇게 냉정한 남편이지만 가끔은 사람좋아 보일 때도 있었다. 전처의 제사상을 차릴 때 남편과 나는 의좋은 부부처럼 함께 있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음식 마련하는 일을 거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남편의 진두지휘 아래 나 혼자 바삐 움직였지만 남편은 제사상에 오를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끝까지 너그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남편은 노동의 양과 강도로 사랑을 측정하는지, 내가 일을 많이 하는 날에만 드물게 미소를 보여줬다. 오죽하면 우리집에 다녀간 고향친구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을까.

    “네 남편, 소문보다 훨씬 잘생겼더라. 널 얻은 것도 네 노동력 때문이 아닐까? 일 잘하는 널 마구 부려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친구 앞이라 웃어 넘겼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았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편은 잠깐 외출할 때도 숙제를 내주듯 여러 가지 일거리를 만들어 시키고 나갔다. 나를 믿을 만한 가정부쯤으로 생각하는 듯싶었다. 미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바닥에 잔금들이 가득한 것을 볼 때면 내 인생항로도 그렇듯 순탄치 못할 것 같아 우울했다.

    “중국산은 못써먹겠어”

    이웃 부인네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었다. 경제권이 있는 그녀들은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만끽하는 듯했다. 먹고 싶은 음식도 탕탕 시켜먹고, 입고 싶은 옷도 보란 듯이 사서 입었다. 동창회니 또 무슨 친목계 모임이니 하면서 밖에서들 만나 외식도 하고,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부르며 신나게 스트레스도 풀고, 쇼핑도 마음대로 즐겼다. 남편에 매이지 않고 가정에 구속되지 않은 독립된 몸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네들의 삶과는 딴판으로,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틈만 나면 남편을 따라 등산을 가야 했다. 말이 등산이지, 산나물과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이니 즐겨 할 일이 못 된다. 남편은 산에 가면 평소의 거칠고 야성적인 성미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높은 산을 평지처럼 마구 휘젓고 다니면서 산나물과 약초를 캤다. 그럴 때면 나도 짧은 안짱다리로 종종걸음을 치며 그 뒤를 따랐다. 취나물, 둥글레, 삽주, 층층잔대, 세신… 무릇 건강에 좋다는 약초는 뭐든지 다 캐야 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남편 뒤를 쫓으며 산행을 하다 보면 기진맥진한 몸을 겨우 추스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무렵이면 걷기조차 힘들었다. 지칠 대로 지쳤어도 산나물을 삶아 말리고 약초뿌리를 다듬는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손톱이 자랄 틈이 없었다. 게다가 남편과 아들이 둥글레차를 유별나게 좋아하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1년 내내 식수로 마실 둥글레차를 미리 장만해야 했다.

    둥글레차를 만드는 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차를 만드는 과정에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갔다. 우선 둥글레 뿌리에 촘촘히 난 잔털을 일일이 뜯어내고 깔끔하게 씻어서 솥에 넣고 쪄야 한다. 쪄낸 둥글레는 다시 꺼내 말린다. 꼬들꼬들해질 정도로 말린 둥글레는 팥알만한 크기로 잘라 다시 하루쯤 더 말린다. 그렇게 알알이 된 둥글레를 솥에 넣고 타기 직전까지 볶아내야 한다.

    캐온 약초는 남편이 ‘동의보감’을 읽어가며 보약을 짓고 이걸 계절에 맞게 내가 직접 집에서 달이는데, 부족한 한약재는 경동시장에 가서 사온다. 더러는 중국산 한약재도 사오는데, 남편은 ‘중국산’ 마누라를 데리고 살면서도 “중국산은 뭐든지 못써먹겠다”며 내게 시비걸 듯 말한다.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몇 년째 똑같은 말을 듣고 사니 지겹다.

    남편은 내가 못나고 보잘것없는 중국동포여서 그런지,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는 거의 혼자 다녔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나와 함께 다니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에 앞서 스스로 부끄러웠기 때문에 별 내색 하지 않았다.

    가끔은 남편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기도 하고 조금씩 권리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못난 것이 못나게만 군다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었다. 남편은 특히 술만 마시면 내 못난 탓을 했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는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켜요. 잘났으면 이 집에 붙어살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하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 몰래 예뻐지려고 애쓰기도 했다. 한동안 식초가 피부미용에 좋다고 해서 설탕 넣은 식초를 음료수 마시듯 하기도 했다.

    남편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소줏잔으로는 성에 안 차 물컵에다 술을 부어 물 마시듯 마셔댔다. 좀 마셨다 하면 소주 두세 병은 ‘기본’이었다. 과음한 날은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리기도 했는데, 그 후유증 또한 감당하기 벅찼다.

    결국 누군가 나의 이런 한국살이를 중국의 친정에다 일러바쳐서 친정에서 장문의 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거지처럼 노예처럼 살 것 없다. 이혼하고 적당히 돈 벌어서 집으로 돌아와라. 자식새끼도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병신도 아니면서 왜 천대받고 사느냐….” 술에 취한 남편이 어느날 고향친구가 보는 앞에서 거친 말을 내뱉으며 소란을 피웠는데, 그런 행동이 바다 건너 친정식구들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남편의 술주정 때문에 나는 많은 날을 실의에 빠져 살았다. 남편이 두려워질 때마다 어디론가 멀리 도망가서 숨고 싶었다. 남편은 술을 마시면 자신의 그림자도 못 밟게 했다. 나의 결점을 꼬투리 잡아 시비를 걸다가 격한 감정으로 완력을 휘둘렀고, 그러다 나를 문밖으로 마구 떠밀어냈다.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미친년” 어쩌고 하면서 욕설을 퍼부으며 내 옷가지와 소지품을 문밖으로 내던지고는 철커덕 문을 잠가버렸다.

    그럴 때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미친 여자였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옷은 자락이 안 맞았으며, 울며불며 내지르는 말은 짐승의 신음소리 같았을 것이다. 가끔씩 오시는 시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같은 여자이면서도 남편과 똑같이 “여자 고집은 매로 다스려야 한다”느니 “자식 내팽겨쳐 두고 혼자 나와 사는 년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며 아픈 데를 꼬집었다. 오히려 내가 두들겨 맞는 게 당연하다고 남편을 부추겼다.

    그렇게 쫓겨날 때면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여겨져 빌어먹을망정 다시는 저 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얼마 견뎌내지 못했다. 고작 골목 구석진 곳에 거지처럼 쭈그리고 앉았다가 어두워지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천대받고 사느니 차라리 홀가분히 혼자 돈 벌며 마음 편히 살아볼 생각도 해봤지만, 텔레비전 같은 데서 중국동포의 위장결혼을 여러 차례 보도하는 것을 보니 차마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나만은 위장결혼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넓은 중국땅에 있을 때보다 좁은 한국땅에 살면서 물질적으로는 더없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 중국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은 한국에 다녀오기가 무섭게 전화도 놓고, 냉장고며 컬러 TV도 들여놓았다. 자가용차는 없었지만 걸핏하면 손짓으로 택시를 불러 탔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어느 천년에 냉장고를 가져보나, 언제 집에다 전화 놓고 살아보나 싶었다. 자가용은 상상도 못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국남편을 만나 한순간에 내 집이라는 것도 생겼고, 전화는 물론, TV 냉장고 비디오 오디오 등 없는 것 없이 갖춰놓고 살게 됐다. 자가용까지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나는 남편이 모는 자가용보다는 바깥에 나가 버스 타는 게 더 편했다. 전화도 집에서 걸기보다는 카드를 사서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걸 때가 많다. 내게 속하는 모든 것이 내게 속하지 않은 것보다 더 불편하고 소용없는 것 같았다. 내 집이란 것도 전에 중국에서 혼자 셋방살이할 때보다 훨씬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웠다. 무엇이든 남편 마음대로인 집이니 내겐 임시거처 노릇을 할 뿐 내 집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소문을 들으니 많은 동포들이 한국남자와 결혼하기 바쁘게 중국 친정으로 돈봉투며 옷 보따리며 귀한 선물을 만들어 보내준다는데, 나는 선물은커녕 남들 다하는 부모님 초청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려지지 않는 뿌리

    내가 이곳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어머니였다. 그러나 지금껏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위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 그래서 늘 빚진 마음이다. 더구나 어머니가 과거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선 자식들한테 나약한 모습을 보여 가슴이 아프다. 가끔 큰맘 먹고 국제전화로 부모님의 안부를 물으면 어머니는 다짜고짜 한국으로 초청해 달라고 매달린다. 처음엔 사정조지만 나중엔 “네가 내딸 맞냐? 남들은 다 부모를 한국으로 초청하고 난리들인데 너는 왜 한 번도 못하냐. 초청만 하면 에미는 네 신세 하나도 안 진다. 내 몸 꼼지락거려 돈 벌어다 네 신세 갚을 테니 제발 초청만 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엄마, 여기엔 노인들 일자리가 없어….”

    “아이도 볼 수 있고 설거지도 얼마든지 한다!”

    “그 연세에 일할 생각은 아예 말아. 형편 나아지면 아버지랑 꼭 한번 모실게. 그때 오셔서 고향산천 실컷 구경하면서 편히 계시다 가셔….”

    “맏딸이라는 게 에미 속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니…이만 끊자!”

    전화가 철커덕 끊긴다. 두고 온 자식의 생일도 못 챙겨 혼자 끙끙거리는 형편에 어떻게 부모님 초청할 엄두를 내겠는가. 솔직히 내 몸 하나 지탱하기도 벅찬 실정이었다. 식물도 자리를 옮겨 심으면 뿌리를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중국 출신인 나는 온전한 씨앗으로 한국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모종으로 한국땅에 옮겨져 새 땅에 새 뿌리를 내리려니 몸살을 앓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곳에서의 차별대우와 인격모독은 생각보다 심했다. 중국이 못사는 나라로 인식돼 있는 한국에서 나는 늘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니네 중국땅이 아니야. 한국이야, 한국! 주제를 알아야지….”

    “중국년들 때문에 한국 홀애비 노총각들 씨가 마르겠다. 다 하나씩 꿰차고 사니….”

    “너른 만주 벌판에서 활개치며 살 일이지, 뭐 얻어먹겠다고 우리 살기도 좁은 한국에 와서 뭉그적거리는지. 중국놈들 때문에 한국이 만원이야, 만원.”

    욕인지 농담인지 얼른 분별이 안 가 그냥 애매하게 웃고 넘겼지만, 돌이켜보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국에서만큼 참을성이 필요했던 시기는 없었다.

    몇 년 전 IMF사태의 영향으로 남편이 하던 장사가 갑자기 곤두박질쳐 모처럼 분양받아 살고 있던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나는 간병인 일을 하기로 했다. 일은 힘들지만 수입이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생활정보지를 뒤적이다 마침 간병인 모집광고가 눈에 띄기에 전화를 걸었더니 먼저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하며, 교육비도 얼마를 내야 한다고 했다.

    집에서 먼 거리였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기로 하고 준비물을 챙겨 어렵사리 찾아갔다. 그런데 담당직원이 나를 보자마자 대뜸 “혹시 중국동포 아니세요?” 하고 물었다. 내 억양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자 “중국동포는 안 됩니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그냥 되돌아 나오려다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수치심을 참고 “중국동포는 왜 안됩니까?” 하고 물었다.

    “하여튼 중국동포는 접수하지 말라고 했어요. 위의 지시에 따른 거니까 이유는 나도 몰라요.”

    “제가 중국동포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한국사람과 다를 게 없잖아요. 한국인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도 있어요.”

    “그래도 안 돼요. 다들 한국인인 양 신분증을 갖고 오지만, 그게 진짠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환자 가족분들도 중국동포들을 원치 않아요….”

    “거기 중국집이죠?”

    나는 결코 한국사람이 될 수 없었다. 애써 노력해도 누구 하나 나를 한국인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내게도 남들처럼 이름 석 자가 있는데도 주위에선 유별나게 중국을 강조하면서 내 별명을 즐겨 부른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화벨이 울려 받으면 대뜸 “거기 중국집이지요?”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아니에요” 하면서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면 똑같은 전화가 다시 걸려온다. “거기 중국집 맞지요?” 하면서 이번에는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대며 확인한다. 그래서 “번호는 맞지만 여긴 자장면집 아니에요. 가정집인데 잘못 거셨어요” 하고 나면 그제서야 상대방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를 찾는 전화인데, 내가 중국 출신이어서 나는 중국사람이고, 우리집은 중국집이라는 얘기였다. 당사자인 나는 몰랐지만 주위에선 다들 나를 중국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부한테 과부라고 하면 괜히 불쾌한 것처럼 나 역시도 처음엔 이런 대우가 낯설고 서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차차 예사로 여겨졌다. 나는 누구든지 나를 ‘중국집’ ‘길림댁’ ‘쭝국아줌마’ 등등으로 불러도 다 응해줬다. 이런 이름들은 어쩌면 평생동안 따라다닐 내 그림자일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이런 게 무슨 대수랴. 중요한 것은 나를 바라보는 주위의 따뜻한 시선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이곳 생활에 애써 적응하는 내게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는 분이 많다. 특히 나의 한국살이를 지켜본 이웃분들이 가끔 나를 불러내 맛있는 음식과 차를 대접하면서 그 동안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기도 한다.

    처음에 그들은 나를 같은 주부로서 동등하게 대하기보다는 중국사람이라는 생각에 은근히 나를 깔보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딴 데로 돌렸고, 슈퍼마켓을 오가다 만나도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야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 정도였다. 반상회나 쓰레기 분리수거 할 때도 자기네끼리 뭔가 속닥거리다가 내가 다가가면 흠칫하며 말을 멈추곤 했다. 어떨 때는 무안할 만큼 내 면전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나마 좀 가까워진 이들에게 내가 겪는 불편을 호소할라치면 한국사람이 되려면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투였다. 요는 중국이 한국보다 한참 못사는 나라인데, 나는 여기에 와서 운 좋게 영주권 얻어 선진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 뭐든 감지덕지해야 마땅하다는 거였다.

    하여튼 과거에야 어떠했든 지금 그네들이 보내는 따뜻한 눈길이며 말 한마디가 중국동포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곳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요즘도 나는 어린 자식을 중국에 남겨두고 홀로 나와 살아야 할 만큼 내 삶이 가치 있는 것인지 종종 반문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죄책감만 더할 뿐이다. 보고 싶은 가족들이 내 가까이에 없다는 사실이 늘 나를 허전하게 한다. 시도때도 없이 불끈불끈 치솟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어느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고 혼자 가슴으로 삭인다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다.

    남편은 물론, 시어머니를 비롯해서 시집 식구들 누구도 중국에 있는 내 아이의 안부를 물어본 적이 없다. 형식적으로라도 한마디 해줬으면 너무나 고마워했을 텐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연휴 때 시댁 큰집에서 만나면 다들 던지는 인사말이 전처 차례상 잘 차려놨느냐는 것이다. 오직 죽은 자의 안부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비행기로 두 시간만 날아가면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지만, 해마다 연말만 다가오면 결국 올해도 못 가고 마는구나 싶어 눈물이 핑 돈다.

    몇 년 전 모처럼 중국 친정엘 다녀온 적이 있다. 몇 년 만에 나선 길이었지만 물질적으로 이렇다 하게 챙긴 게 없어 친정식구들 앞에서 죄를 지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은 날 반갑게 맞아줬고 힘겨운 내 재혼생활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내 딴엔 성의껏 준비한 선물이지만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였는지 섭섭한 표정이 역력했다. 특히 입싼 올케언니가 대놓고 누구는 한국에 시집 가서 친정을 떼부자로 만들어줬다느니, 또 누군가는 부모를 초청해 지금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는 말을 해대는 바람에 가뜩이나 주눅들어 있던 나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요즘 보면 고향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돈을 기준으로 성공과 출세를 논하는 게 당연시됐고, 그러니 화제도 온통 돈 얘기였다. 그런 내 고향 마을에는 지금 ‘한국병’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대도시로 나가거나 필사적인 노력으로 한국에 나온다고 한다. 실제로 중국에 살 때는 그렇게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던 사람들을 한국에선 너무도 쉽게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네끼리 수소문해 내 주소를 알아내곤 잘도 찾아왔다. 가끔은 김포공항으로 인천부두로 그들을 마중 나갈 때도 있었다.

    고향사람들을 만나는 게 무척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너무 자주 만나다 보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남편이 싫어하는 것도 그 이유지만, 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내 삶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보는 순간 반가움에 앞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첫 인사가 “어디 많이 아프냐?”는 것이었다.

    또한 동포들이 찾아오는 날은 하필이면 무슨 일이나 시간에 쫓길 때가 많았다. 그래서 좀 미안한 얘기지만 귀찮을 때도 있었다. 다들 나를 찾아오는 것은 내가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자리를 찾거나 기거할 셋방을 찾는 데 내 도움을 바라서였다.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요령껏 틈을 내 지역정보지 같은 것을 찾아보고 그들이 원하는 일자리나 셋집을 알아봐줬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이면 2∼3일씩은 고향사람들의 부탁이나 심부름 같은 신경 쓸 일이 생겼다. 그들은 마치 내가 무슨 상담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슨 일만 있으면 다들 우리집으로 전화를 걸어댔다. 이를테면 월급을 떼였다든지, 몸 어디가 이상스레 아프다든지….

    나는 중국동포의 119

    어느날 지방에 있는 먼 친척에게서 시외전화가 걸려왔다.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경찰한테 불심검문을 당했는데 주머니에 있는 30만 원을 몽땅 털어주고서야 풀려났다는 것이다. 남들이나 당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자기가 당하고 보니 숨이 탁 막히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사정을 털어놓고 돈이라도 빨리 건네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경찰서로 끌려가서 추방당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30만 원이 아니라 300만 원을 털어가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아직 갚을 빚이 태산인데…” 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들으니 남자 교포들은 불심검문에 대비해서 늘 현금 30만∼50만 원을 비상금으로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또한 건설현장에서 월급을 타는 날엔 꼭 10만 원씩 꿔달라는 한국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돈을 빌려주고 한참이 지나도록 갚지 않아 달라고 하면 “그깟 술 한 잔 값을 갚으란 말이냐, 그 동안 보살펴 준 은혜도 모르느냐”면서 오히려 화를 낸다고 한다. ‘그 동안 보살폈다’는 것은 경찰서나 법무부에 신고를 안 했다는 뜻이다. 극소수이겠지만 정말 이런 저질스런 사람에게 밉보이면 신고를 당해 추방당할 위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내막을 아는 사람이면 무조건 “술 한잔 하쇼” 하면서 5만 원이나 10만 원쯤 쥐어준다고 한다.

    특히 불법체류자 단속기간이 되면 경찰복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이 잠깐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 동포들은 셋집에 도둑이 들어도 신분이 드러날까 봐 피해신고조차 할 수 없고, 몸이 아파도 웬만큼 중병이 아니면 진통제나 사 먹고 그냥 버틴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도 파출소가 보이면 괜히 멀찍이 빙 돌아서 다닌다.

    이태 전만 해도 우리집은 고향사람들의 정거장 구실을 했다. 이것도 가정불화의 한 원인이 됐다. 남편, 자식 눈치 보며 사는 것도 힘겨운데, 내가 무슨 예수님이라고 고향사람들 십자가까지 다 져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해서 찾아오는 만큼 막상 닥치면 일일이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처음엔 일정한 거처 없이 철새마냥 여러 일터를 전전한다. 그래서 가끔은 피난민처럼 올망졸망한 보따리에 소지품을 싸서 내게 맡기는데, 그렇게 황급히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지난날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럴 때면 어려운 고향사람들을 위해 이 정도 수고쯤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나는 119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들과 은행으로, 우체국으로, 병원으로, 불법체류 외국인 수용소까지 불려다니며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우리 고향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 ‘타향살이’와 ‘꿈에 본 내 고향’, 그리고 ‘아리랑’이다. 그런데 저마다 가사를 자기네 심정에 맞게 제멋대로 바꿔 불렀다. 이런 식이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을 필요없어. 고향 떠난 몇 년 만에 청춘이 병들었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바다 건너 가까운 거리. 언제나 외로워라 고국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우리가 넘어간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요, 동포의 가슴엔 설움도 많다…”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

    한국살이도 어언 9년째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한국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남편의 태도가 예전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사실이다. 전에 없이 내 건강에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요즘은 내 입맛을 염려해줄 정도가 됐다. 특히 지난해부터 음주량을 많이 줄여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 나에 대한 배려라고 믿고 싶다. 뒤늦게나마 마음 편히 잠잘 수 있게 된 것도 기쁜 일 중의 하나다.

    세월만큼 좋은 약은 없을 듯 싶다. 수없이 갈등하며 부딪치며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미운 정, 고운 정이 푹 들어버렸다. 남편의 천성적으로 자상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여느 부부처럼 따뜻한 대화를 자주 나누지는 못하지만, 그간 변해온 행동거지를 보면 나에 대한 사랑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희망도 가져본다.

    나는 언제부턴가 집 근처 놀이터에 있는 등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서로 몸을 배배 꼬면서도 의좋게 함께 올라가는 등나무를 보면 왠지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럽다. 우리 부부도 남은 생을 등나무처럼 등을 비비고 의지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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