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규칙은 내맘, 그린은 화장실”

캐디 눈에 비친 골퍼 천태만상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siren52@hanmail.net

    입력2005-04-08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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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디는 골퍼에게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유일한 우군(友軍)이다. 플레이어와 일심동체인 캐디는 플레이어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골프 종주국인 영국 세인트 앤드루스(Saint Anderws) 골프클럽이 1775년에 제정한 ‘캐디헌장’의 일부다.

    1만여 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골프장 캐디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도 ‘캐디의 정당한 위상 확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도 ‘짐꾼’ 취급을 받으며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고 보면 ‘골퍼와 동등한 권리’는 요원해 보인다.

    ‘특수 고용직은 근로자가 아니다’는 근로기준법의 벽을 뚫고 최근 사업주와 단체협약을 체결한 전국여성노동조합 88컨트리클럽(경기도 용인시) 캐디 분회는 사측에 안경 착용 허용, 생리·출산휴가 보장, 성희롱 예방 등을 요구했다. 하나같이 상식적인 내용이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요구조건’이 됐는지 의문스럽다. 그중에서도 안경 착용을 허용해 달라는 노조의 요구는 어이없다. 그래서 신윤자(44) 분회장에게 설명을 청했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껴야 하는 사람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단지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안경을 못 끼게 하는 겁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오랜 시간 필드를 돌아야 하는 캐디들이 하루종일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있어 결막염이나 각막 손상 등 각종 안질환에 시달리고 있어요. 터무니없는 편견 때문에 캐디들에게 그런 고생을 시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른바 ‘특수 고용직’이라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없는 전국 150여 개 골프장 캐디의 상당수가 이런 부당한 대우와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골퍼들에게 짐꾼이나 심지어 ‘몸종’ 취급당하기 일쑤인 캐디들은 “골프 못 치는 사람은 용서해도 매너 없는 사람은 용서 못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보조원’으로 불러주세요

    골프 대중화시대에 접어들었다는 2001년 대한민국의 골프문화는 한마디로 ‘수준 이하’이며, “골퍼 10명 중 7명은 매너가 엉망”이라는 게 캐디들의 말이다.

    “골프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20여 년 전만 해도 밖에 나가서 직업이 캐디라고 말 못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날려댄 공이나 주워 담는 밑바닥 인생으로 비쳤으니까요. 접대부쯤으로 여기며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그래서 캐디 경력 22년인 김경숙(41)씨는 일정 부분 편견이 내포된 ‘캐디’라는 이름보다 ‘경기보조원’이나 ‘도우미’쯤으로 불러 주었으면 한다.

    김씨의 일과는 내장객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새벽이 될지 오후가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출근으로부터 시작된다. 회사가 지정한 순번에 따라 부킹시간보다 한 시간 앞서 출근하면 먼저 캐디 대기실에서 서둘러 경기에 필요한 용구를 챙긴다. 팬잔디를 보수할 흙주머니와 잔디 보수기, 볼타월과 볼마크(볼 낙하지점을 표시하는 도구) 등은 경기를 진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무더운 여름날엔 손님을 위해 얼음물통을 준비하는 일도 캐디의 몫이다. 그는 매일 집에서 밤새 냉동실에 넣어둔 얼음물통을 챙겨 온다.

    18홀 골프장에는 라운드를 돌다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하는 그늘막이 서너 군데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김씨는 종종 손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캐디의 식대를 회사가 부담하는 곳도 있지만 김씨의 골프장에선 캐디가 자기 돈으로 밥을 사먹어야 한다. 음식을 싸오는 캐디도 있지만 카트가 무거워 빈손으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밥을 사먹으면 손님들이 종종 밥값을 치러주는데, 괜히 부담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속도 편하지 않다.

    “하루종일 무거운 카트를 끌고 그린을 오르내리다 보면 뱃속에 거지가 들었다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허기집니다. 아무리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픈 게 우리 일이에요. 그런데 손님이 음식값을 내니까 양껏 먹고 싶어도 눈치가 보입니다. 그렇다고 도시락을 싸오자니 손님들 앞에서 궁상 떠는 것 같고….”

    더러는 “캐디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투덜대는 손님도 있다. 그럴 때면 부끄럽다기보다는 서글프다. 캐디들은 그늘막을 지날 때 “배에 잔뜩 기름 낀 사람들이 허기진 우리 속을 어떻게 알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용구 준비가 끝나면 김씨는 캐디를 관리하는 마스터실에 올라가 자신에게 배당된 예약티켓을 받고 고객의 이름표가 붙은 골프가방을 찾아 카트에 옮겨 싣는다. 김씨가 골프채를 닦을 물을 준비하고 볼타월을 적시는 동안 손님이 티오프하는 곳에 인접한 티박스로 내려오면 소지품을 받아 카트에 싣고 그린으로 향한다.

    18홀 한 라운드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개 5∼6시간. 그 사이에 ‘경기보조원’은 쉴새없이 바쁘게 몸을 놀려야 한다. 무거운 카트를 끌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골프채를 챙기랴, 공이 날아갈 방향과 홀의 거리를 측정해주랴, 팬 잔디를 보수하랴 정신없이 뛰고 나면 김씨의 온몸은 금방 땀으로 흠뻑 젖는다.

    라운드를 끝내고 스코어카드를 작성할 때 걸핏하면 쏟아지는 손님들의 불평이나 욕설은 그저 못 들은 척 웃는 얼굴로 넘기는 게 최선이다. 옳으니 그르니 따졌다가 손님이 회사에 항의라도 하는 날이면 그날로 일자리가 날아갈지 모른다.

    반말이라도 “언니, 왜 이렇게 점수가 짜냐. 나 정말 서운해” “인심 좀 써라, 일등상 한번 받아보게” 하며 투정을 부리는 손님은 애교스럽다. 하지만 “내가 언제 더블 보기를 했단 말이야? 계산 똑바로 해!” “스코어도 못 보는 주제에 네가 무슨 캐디야” 하며 막무가내로 목소리를 높이는 손님은 정말 참아내기 어렵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스코어카드를 쓰고 골프채와 소지품을 점검해 관리카드에 서명한 다음 골프가방을 손님의 차량까지 운반하고 나면 김씨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온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냉수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뒤에야 비로소 햇볕에 달아오른 몸과 손님에게서 받은 열이 좀 가라앉는 것 같다. 샤워로 땀투성이 몸을 씻고 골프장을 나서는 시각은 대개 오후 8시경이다.

    초보자 팀을 만나는 날이면 한 라운드를 도는 데 12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끔찍한 일이지만, 회사가 정해준 캐디 순번에 따라 팀이 정해지기 때문에 피해갈 수도 없다. 하지만 대여섯 시간 동안 대기하고도 손님을 못 받아 허탕치는 날에 비하면 이마저 고마운 노릇이다. 평소보다 두 배는 고생하겠지만 손님이 주는 캐디피는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홀까지의 거리를 측정해주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알맞은 클럽을 골라주며, 손님이 긴장을 풀고 편안한 샷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동반자’가 되기 위해 한 달 가량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캐디. 그리고 여전히 캐디를 짐꾼 부리듯 하는 골프장 고객들. 각양각색의 손님을 상대하는 캐디 눈에 비친 골프장 매너 얘기를 들어보면 캐디와 골퍼 간의 인식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캐디들이 싫어하는 ‘꼴불견 골퍼’로는 경기규칙도 점수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황제형 골퍼’, 그린을 재떨이나 화장실로 아는 ‘공중도덕 불감증 골퍼’, 잘하면 내 탓이요 못하면 캐디 탓이라는 ‘책임전가형 골퍼’, 골프보다 연애에 더 열중하는 ‘닭살 커플형 골퍼’, 저속한 음담패설로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성희롱형 골퍼’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거친 욕설을 퍼붓는 것도 모자라 골프채까지 휘두르며 언어·신체적 폭행을 저지르는 부류도 있다.

    성희롱하고도 생트집

    캐디 권미진(35)씨가 최근 그린에서 겪은 장면. 손님이 다짜고짜 “야!” 하고 그를 불러세웠다.

    “야! 저기까지 퍼트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냐?”

    “네, 80m 정도입니다.”

    권씨의 말을 듣고 샷을 날린 고객의 공은 플레이 금지구역인 OB지역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손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씨×, 뭐 80메다? 야, 너 똑바로 해. 개×도 모르는 게 캐디 한다고 설치고 있어.”

    “손님, 좋은 말로 하세요.”

    “뭐? 너 잘 만났다. 오늘 내가 너 죽여버린다. 나 오늘 골프 안 칠거니까 사장 나오라고 해!”

    욕설을 퍼붓고도 분을 삭이지 못해 골프채를 휘두르는 바람에 캐디가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한 캐디는 “현역 국회의원 중에도 몇 년 전 홧김에 골프채를 휘둘러 캐디를 다치게 한 사람이 있다”고 귀띔하면서 “그래도 밥줄 끊길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손님에게 항의해 문제를 일으키긴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고객의 폭행으로 다쳤는데 자기 돈으로 치료비를 감당한 캐디들도 있다. 해고당하지는 않겠지만 일단 고객과 문제를 빚은 캐디는 책임소재와 상관없이 회사측으로부터 ‘벌땅’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벌땅’은 ‘백 대기’, 즉 새벽 4∼5시경에 출근해 수백 개의 골프가방을 주차장부터 마스터실까지 운반해 분류하는 일을 말한다. 그런 중노동을 하고도 보수는 한푼도 받지 못한다. 캐디의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고객 중에는 캐디를 성희롱해서 말썽을 일으키고는 엉뚱한 트집을 잡아 “캐디가 불친절하다”고 항의하는 철면피도 있다.

    캐디가 당하는 성희롱 사례는 여러 가지다. 우스개 수준의 야한 농담을 즐기고 골프채를 건네줄 때 손을 지그시 잡는 정도는 그래도 점잖은 축에 속한다. 슬쩍슬쩍 엉덩이를 건드리며 노골적으로 추근대거나 지난 밤에 술집 접대부와 질펀하게 놀아난 얘기를 일부러 들으란 듯 떠들어대는 이들은 캐디들을 모멸감에 젖게 한다.

    그렇다고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골프장에 와서나 이런 얘기를 마음놓고 하지 어디 가서 하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경력 5년의 한 20대 캐디는 “할아버지뻘 되는 손님이 ‘아파트 사줄 테니 사귀자’고 추근댈 때는 정말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너 오늘 생리하냐?”

    캐디 경력 20년째인 김모(40)씨는 신참 시절에 당한 수모를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다리를 모은 채 홀컵의 핀을 잡고 있었는데 퍼팅하려던 손님이 왼쪽 다리를 조금 벌리라고 해요. 영문을 몰라 시키는 대로 하니까 내 다리 사이로 퍼팅을 하더군요. 제 기분이 어땠겠어요?”

    그러나 이런 광경은 요즘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홀컵을 여성의 성기에 빗대 “이 구멍이 나를 거부하네”라느니 “이건 너무 헤프게 잘 준다니까. 할머니 거시기인 모양이야” 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말을 들은 캐디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어이 미스 김, 알아들은 거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 하며 음흉한 눈빛을 보낸다. 심지어 캐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보란 듯이 속옷을 추스르는 사람도 있다.

    규칙을 무시하고 멋대로 점수를 계산하는 ‘황제형 골퍼’, 경기가 안 풀리면 전부 캐디 탓으로 돌리며 화풀이하는 ‘책임전가형 골퍼’는 점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접대골프나 내기골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황제형 골퍼들은 “공이 조금밖에 안 굴렀으니 다시 쳐야 돼” “무슨 더블 보기야? 그냥 보기라니까” “치기 좋게 공 앞에 (벙커)모래 좀 치워”라며 생떼를 써댄다. 책임전가형 골퍼는 캐디를 가장 짜증나게 하는 유형으로 꼽힌다. 생각대로 공이 맞지 않으면 캐디에게 “너 오늘 생리하냐?”면서 화풀이하는 골퍼도 있다.

    인터넷 골프제트(www.golfz.co.kr) 사이트의 캐디광장 게시판에 ‘shredfox’라는 ID로 글을 올린 캐디는 책임전가형 골퍼를 향해 따끔한 충고를 던진다.

    “저는 내기손님들과 늘 트러블을 빚습니다. 어쩌다 볼이 산 속으로 들어가 못 찾으면 ‘캐디가 볼도 못 보고 뭘 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퍼팅라인 못 본다고 잔소리하고, 경기 진행이 늦어서 홀아웃한 손님을 먼저 모시고 다음 홀로 이동하면 남은 손님은 ‘캐디가 손님 볼 치는데 깃대도 안 꽂고 그냥 간다’며 코스가 떠나가라고 고함이죠. 이런 분들에겐 절대로 거리나 퍼팅라인 제대로 안 봐줍니다. 캐디도 인간인데 자기를 무시하고 얕보는 손님에게 잘해줄 리가 없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경기가 잘 안 풀려 내기골프에서 지고 있거나 부부싸움이라도 하고서 골프장을 찾은 손님과 동반하게 됐을 때 캐디는 라운드 내내 긴장을 풀 수 없다. 언제 어디서 고함을 내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캐디는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두 명의 골퍼와 라운드에 들어갔다 벌어진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린에 눈이 잔뜩 쌓인 겨울에는 공이 떨어진 지점에 팬 구멍을 찾아 눈을 헤집고 공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때문에 공이 떨어진 주변에서는 발걸음을 조심해야 공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나이 든 손님 한 사람이 무슨 일로 마음이 불편했는지 골프채로 그린 위에 계속 자국을 냈다. 손님이 친 공을 찾으려고 그린을 둘러봤지만 골프채 때문에 생긴 구멍인지 공이 떨어진 흔적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한참을 헤매던 그는 손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손님, 골프채로 눈을 찍고 다니시면 공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님은 벼락같이 화를 내며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게 어디 어른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부터 내는 손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손님을 대할 땐 그저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보다 하고 적당히 넘어가야지, 억울하다고 하소연해봤자 별수 없어요.”

    골퍼가 별 생각없이 무심코 한 행동이 캐디를 불쾌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공을 닦아달라며 캐디에게 집어던지는 사람, 동전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볼마크를 잔디가 깔린 그린 위에 집어던져 찾기 어렵게 만드는 사람, 라운드당 2∼4명의 골퍼를 책임져야 하는 캐디에게 자기만 완벽하게 보조해 달라고 하는 사람, OB지역이나 워터해저드에 빠진 공을 찾아오라고 부득부득 우기는 사람이 그런 부류다.

    OB지역은 골짜기나 숲이 대부분인데, 손님의 성화에 공을 찾으러 간 캐디들은 이곳에서 황당한 장면과 마주치기도 한다. 경력 6개월째인 한 신참 캐디의 얘기.

    “얼마 전 공을 찾으려고 숲 속을 헤매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어요. 놀라서 돌아보니 나무 뒤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던 남자 손님이 다급하게 바지를 올리고 있었어요. 너무 민망해서 공 찾는 것도 잊어버리고 엉겁결에 그냥 뛰어나왔어요. 고참 언니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모른 척하고 그냥 지나간대요. 캐디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아직 멀었나 봐요.”

    경기 도중에 나무에 대고 무단방뇨를 하거나 그린 위에 가래침을 뱉고 아무 데나 담배꽁초와 휴지를 버리는 등 골프장에서 지켜야 할 기본 예의조차 무시하는 사람도 수두룩하다는 게 캐디들의 전언이다.

    겨울이면 방한복이나 신발 등 따로 챙겨야 할 소지품이 많아 골프가방이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두 명분만 해도 30∼40㎏이나 되는 골프가방을 수동카트에 싣고 눈 덮인 그린을 오르내리면 이만저만 힘에 부치는 게 아니다.

    경력 14년의 신윤자씨는 “7∼8년 이상 일한 캐디 중에 무릎 연골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젊은 여자 무릎이 일흔 살 노인네 무릎 같다’고 의아해한다. 노동강도가 워낙 높아 잦은 하혈로 불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몸을 돌보지 않고 뼈 빠지게 일해 벌어야 월 200만∼300만원의 수입이 생기는데, 그중 상당액이 병원비로 나간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숲 속으로 들어가는 연인들

    캐디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일부 골퍼들은 아예 소풍가방을 꾸려와 카트를 돌처럼 무겁게 만들어 놓는다. 특히 부부나 연인끼리 올수록 ‘소풍가방’을 가져올 확률이 높다고 한다.

    초보 시절, 가방이 너무 무거워 언덕에서 카트와 함께 굴러내린 경험이 있다는 한 캐디는 “처음엔 공을 너무 많이 넣어왔나 했어요. 설마 골프장 오면서 도시락에다 갖가지 음료수, 과일과 군것질거리까지 잔뜩 넣어 왔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죠. 그늘막을 두고도 라운드 도중에 수시로 음식을 꺼내 먹는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어요. 그렇다고 카트가 무겁다고 불평할 수도 없고, 손님 짐 검사를 할 수도 없고…그럴 땐 정말 화가 치밀어요”라며 흥분했다.

    골프장을 데이트 장소로 착각하는 커플도 적지 않다. “캐디를 제치고 공을 줍겠다며 숲 속으로 나란히 들어가는 연인은 십중팔구 함흥차사”라는 게 캐디들의 귀띔이다. 그린에서 마음껏 애정표현을 주고받기에 숲 속만큼 안전한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여성 고객 대신 공을 쳐주는 남성 고객, 발에 물집이 생겼다고 남자 등에 업혀 가는 여성 등 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욱 꼴불견인 골퍼는 ‘과시형’. “한 달 유럽 일주를 하고 왔는데 경비가 만만치 않았어. 아마 너(캐디)는 1년을 벌어도 그 돈 못 모을 걸” “우리 딸이 너만한데 60평 아파트에 살아. 세 식구 살기에 그만하면 딱 좋은 것 같더라” “이 시계, 수천만원이 넘는 거니까 잃어버리면 네가 물어줘야 한다” “내가 누군지 알아? 알아서 잘 모셔” 해가며 자기 과시를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골프가 신사의 스포츠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이런 골퍼들과는 딴판으로, 캐디들이 ‘매너 좋은 손님’ 중에 첫째로 꼽는 유형은 자신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는 양식있는 골퍼다. 캐디 사이에 양식 있는 손님을 가늠하는 기본 척도가 되는 것은 반말 사용 여부. ‘야’라고 부르며 라운드 내내 명령투의 반말을 내뱉는 손님이 캐디에겐 그야말로 ‘밥맛’이다.

    그런가 하면 야한 농담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드물게 점잖은 손님들도 있다. 그린에서 ‘진짜 신사’로 불리는 사람은 팀 동료나 캐디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캐디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골퍼는 어떤 사람들일까. 몇몇 캐디의 경험담이다.

    “해질 무렵이었는데, 손님 한 분이 갑자기 서두르며 일행에게 빨리 플레이를 하자고 했어요. 뒤에 따라오는 팀이 해가 지기 전에 경기를 다 끝내려면 자기들이 그린을 빨리 비워줘야 한다면서요. 사실 자신이 맡은 팀의 경기 진행이 늦어지면 캐디는 몹시 초조해집니다. 내장객이 몰리는 날이면 진행 속도 때문에 손님들의 항의와 불평이 잦거든요. 참다못해 캐디가 ‘조금 빨리 진행하자’고 부탁하면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는 손님이 많은데, 그날 만난 손님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캐디 한 명이 네 명의 손님을 한꺼번에 맡으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정말 정신이 없어요. 라운드 중에 한 손님에게 골프채를 챙겨 드리려고 했더니 ‘혼자서 바쁠 텐데 나는 됐으니 다른 사람들이나 신경 쓰라’며 직접 골프채를 바꿔갔습니다. 캐디야 바쁘건 말건 선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골프채를 갖다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도 많은데, 그분 같은 손님은 정말 만나기 어려워요.”

    “무거운 카트를 밀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경사가 심한 곳이라 팔 다리가 후들거렸어요. 티오프한 지 오래돼서 기운도 떨어졌구요. 안간힘을 쓰며 카트를 잡고 있는데 손님 한 분이 제 옆으로 오시더니 ‘힘들겠다’며 함께 카트를 잡아주시는 거예요.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어요.”

    인터넷 사이트 골프제트에 ‘제트지기’라는 이름으로 글을 올린 캐디는 ‘인격까지 닮고 싶었던 골퍼’를 이렇게 소개했다.

    “1년 전 캐디 일을 막 시작했을 때 만난 그분은 골퍼로서 훌륭한 매너를 보여준 것은 물론, 따뜻한 인간미를 갖고 있었다. 볼을 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코스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나 휴지조각을 보면 그냥 지나친 적이 없고, 그린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자신이 친 공의 낙하지점을 표시하고 여기저기 팬 그린을 보수하는 일이었다.

    1년이 지난 얼마 전 그분을 다시 모시게 됐을 때 여쭤봤다. ‘그린을 보수하는 건 제가 할 일인데 왜 그렇게 하세요?’라고. 그러자 그분은 깍듯한 높임말로 이렇게 답했다. ‘골프는 내가 치는 것이고, 잔디를 패게 한 것도 난데, 그건 당연히 내가 할 일이지요. 그린 보수하는 것도 골프 치는 즐거움 중 하나예요’라고. 라운드를 끝내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캐디피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분의 인격을 정말 닮고 싶었다.”

    한 40대 캐디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감동적인 골퍼 얘기를 털어놓았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동생들을 건사하기 위해 캐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캐디를 대하는 손님들의 태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빴습니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 많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죠. 그런데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연세가 지긋한 손님을 모시게 됐는데, 자상하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왔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편안한 기분이 되어 집안 사정을 털어놓았는데, 라운드가 끝나자 다른 사람들 몰래 그 손님이 제 손에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줬습니다. ‘집에 갈 때 어머니께 과일이라도 사드려라’며. 눈물이 핑 돌더군요.”

    매너 없는 골퍼를 만나 고생하거나 속상한 날이 있으면 간혹 좋은 골퍼를 만나 보람을 느낄 때도 있는 것이 캐디의 직업세계다. 하지만 어떤 손님을 만나느냐에 상관없이 캐디를 괴롭히는 일은 늘 뒤따르는 안전사고와 계절에 따라 발생하는 직업병, 비정규직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우와 해고 위협이다. 가령 뜨거운 여름날에는 어느 캐디에게나 일사병이 가장 두려운 존재다. 가끔은 리프트에서 떨어져 숨지는 사고도 발생한다.

    타구에 맞으면 머리가 깨지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강하게 날아오는 딱딱한 공에 허벅지나 팔을 맞으면 금세 시퍼렇게 멍이 들고, 심하면 공에 맞은 자국이 오목하게 남기도 한다.

    공에 맞는 것은 그린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고이기 때문에 경력이 웬만큼 되는 캐디들은 몸에서 멍자국이 가실 날이 없다. 샷을 날리는 골퍼 주변에 있다 골프채에 맞아 치아나 심지어 뼈가 부러질 때도 있다.

    88컨트리클럽 캐디 분회 김경숙 사무장은 “지난해 스윙연습 장소에서 손님이 휘두른 골프채에 맞아 팔꿈치 뼈에 금이 간 경기보조원이 있었다. 한 달 동안 일도 못하고 치료비에 든 돈이 270만원이나 되는데, 사고를 낸 손님을 고객으로 둔 보험회사에서 찾아와 57만원에 합의를 보자고 했다. 결국 다친 경기보조원만 피해를 봤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가 바라는 건 ‘최소한의 상식’

    큰 사고는 아니지만 골퍼의 잘못으로 캐디가 다쳐 그린에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손님 중에 간혹 “택시비나 하라”며 2만∼3만원을 캐디 손에 쥐어주는 경우가 있다. 이 정도만 돼도 인정 있는 골퍼에 속한다는 것이 캐디들 얘기다. 그럴 땐 고마운 한편으로 비참하고 서글픈 심정에 빠지기도 한다.

    신윤자씨는 “근로자이면서도 근로자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캐디는 설사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린에서 부상을 당해도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골프장측에서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본인이 치료비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건 정말 부당한 일”이라고 말한다.

    겨울철의 미끄럼 사고나 농약으로 인한 각종 피부질환, 피부가 벌겋게 부풀어오르는 풀독 등은 캐디라면 피할 수 없는 직업병이다. 한 캐디는 “골프장에 뿌리는 농약이 37종이고, 비료도 29종에 이른다. 그린 한 곳에서 라운드중인 데도 다른 그린에서 농약을 뿌리기 때문에 농약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기 일쑤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손님 앞에선 내색할 수 없어 속만 태운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장마철에는 습진에 시달리고, 벌이나 벌레에 쏘이는 등 피부가 멀쩡할 날이 없다. 더구나 사계절 자외선에 노출되기 때문에 피부가 많이 상한다. 그래서 캐디들은 “캐디 얼굴은 화장을 지워놓고 보면 전부 썩어 있다”고 말한다.

    웬만큼 골프를 쳐본 상식 있는 사람들은 캐디가 골퍼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안다. 프로골퍼의 경우 캐디와의 호흡, 캐디의 역량에 따라 경기 승패가 좌우된다. 아마추어 골퍼도 마찬가지다. 그린에서 실력을 기르고 진정한 의미에서 골프를 즐기려면 캐디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모든 스포츠에는 규칙이 있다.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은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 특히 골프에는 심판이 따로 없고, 골퍼 자신이 심판이자 선수다. 그래서 골프는 어느 스포츠보다 규칙과 매너를 중시하는 신사 스포츠로 인식된다. ‘신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상식을 갖춘 골퍼’와 함께 그린을 누비는 게 캐디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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