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기로에 선 부시 완승이냐 수렁이냐

  • 김민웅 < 정치평론가, 미국 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

    입력2005-01-04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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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러리즘은 폭력이자 절규다. 테러리즘에 대한 응징과 예방도 중요하지만, 죽음을 무릅쓴 저항의 배경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테러를 근절하는 해결책이다.
    “아예 국가의 존재 자체를 절멸시키겠다”. 2001년 9월11일 테러사건에 대해 보복 공격을 개시하겠다면서 부시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미국에 테러를 가한 자와 관련된 나라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것이다.

    뉴욕과 워싱턴이라는 심장부를 겨냥 당한 거인 미국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숨죽이며 쳐다보던 나라들이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무기체제와 최대최다의 폭탄을 소유한 미국이 격노하면서 토해낸 그 말에서 우리는 21세기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패권체제의 위기에 처한 제국의 대응 여하에 따라 지구촌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는, 그래서 ‘광기의 시대’가 다시 연출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모두에게 엄습해온 것이다. 테러의 야만성은 당연히 철저히 응징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을 요구할 전쟁을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은 반 테러의 깃발을 들고 21세기의 새로운 패권 논리를 전세계가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로써 세계 인류는 지구촌의 운명과 관련해 미국의 총지휘권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기로에 서게 된 셈이다.

    미국의 이러한 군사적 패권논리는 그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조지 부시 정권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의 오랜 대외팽창의 역사에서 되풀이돼 왔던 바며, 전임 클린턴 정권도 공격대상이 된 나라를 절멸시키려 했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99년 6월10일 클린턴 정권의 미국은 NATO 국가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 2만3000톤의 폭격을 가했으며, 이날 단 하루에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민간인 3000명이 죽음의 아비규환을 맞이했다.

    반 테러와 미국의 패권주의



    그 후 몇 달에 걸쳐 미국은 반 테러, 인권, 응징 등의 이유를 내세워 수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유고 등에 연이어 맹폭격을 가했다. 인명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이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스마 빈 라덴을 지목해 수단을 공습했는데, 유럽의 언론인들에 의해 수단이 오스마 빈 라덴을 이미 1996년 국외로 추방했으며, 생화학 무기를 만든다고 알려진 제약회사는 공격 5개월 전 수단의 민간 기업인이 인수해 약을 생산하고 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미 국무부 보고서도 수단의 제약회사 공습이 정당하지 않다고 밝혔으나 어찌된 셈인지 국무부 고위층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습이 필요하다고 일단 결정한 이상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만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인 마이클 패런티(Michael Parenti)는 이와 같은 미국의 공습을 가리켜 ‘국가살해(To Kill A Nation)’라고 불렀다. 미국을 공격한 바 없고, 미국의 보복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이 과정에 무수히 죽어가고 국가 전체가 피폐하는 과정을 소상히 보고한 그는 미국의 이런 행동은 명백한 침략행위라고 질타했다.

    미국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마이클 패런티와 다를 바 없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부시정권의 전쟁선포는 21세기를 폭력의 시대로 만들 것”이라면서 “진정 테러를 근절하는 길은 일부 민족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미국의 부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미국의 지도자는 없었다. 일단 보복과 응징의 이유가 명백해지자, 다른 논리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증거가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혐의가 있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강자의 말이 곧 꺾을 수 없는 논리이자 법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은 일련의 공습과 국지전을 전개하며 승리를 자축했으나, 그 승리가 ‘반미성전(反美聖戰)의 기치’ 아래 목숨을 걸고 보복의 칼을 가는 사람을 양산한 사실을 깊이 주목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경찰의 공격으로 희생당하고 팔레스타인 정착촌이 폐허가 돼가고 있을 때도, 미국은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리고 급기야 지난 9월 초 남아프리카에서 열린 인종차별철폐 유엔회의 도중 팔레스타인 문제가 거론되자 이스라엘과 함께 퇴장, 아랍권 전체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반 세계화 운동의 과정에 미국은 지속적으로 비난의 표적이 돼 있는 상황이었으며, 유럽의 미국 영향권 이탈 가속화와 아랍권의 반감까지 겹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체제는 점차 위기에 몰리고 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정점 2001년 9월11일, 뉴욕과 워싱턴의 참사가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시기 미국에서는 세계적인 반미 연대의 움직임이 국가적 수준과 시민운동 차원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부시정권이 등장한 후 국제적 합의나 협정 또는 국제법을 미국 자신에는 적용할 수 없다는 패권적 고립주의가 미국의 지도력을 도리어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었다.

    미국은 날이 갈수록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과 적대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일깨움이 막 여론의 주목을 받으려던 찰나였다. 테러 사건은 이러한 사태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발생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얼마만큼인지를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표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패권체제가 심각한 도전과 위기를 맞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즈음해 미국은 국제정세 속에 패권체제가 도전에 처한 것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경제적 기반이 급격히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휴가철인 지난 7월의 소비자지수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락세에서 반전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아무래도 투자회피현상이 점증하기 시작했다.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자본이 시장에서 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시의 경우 다우지수가 1만 포인트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 동안 집중 투자대상으로서 신경제의 주력부대 노릇을 했던 첨단기술주가 하락증시를 선도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신경제가 투기성자본과 결합한 결과의 부담을 톡톡히 맛본 셈이었다. 경제라는 것은 성장에 시간이 걸리고 또 장기적인 자본순환과정에 적응해야 하는데, 단기성 수익에 길들여진 투기성 자본시장이 투자수익 회수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진 기술주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미국 경제의 금년도 2·4분기 성장률은 지난 8년간 최저를 기록했다. 부시정권은 세금감면으로 소비자 지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가 그렇지 않은 결과에 직면하자 크게 당황했다. 세금감면으로 가용수입은 다소 늘어났지만, 불안한 경제적 미래 탓에 선뜻 돈을 쓸 만한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 연방중앙은행이 금년에 일곱 차례나 이자율을 내렸지만, 기업들의 자본경색을 풀고 투자를 자극하는 요소가 되지는 못했다는 결론이다.

    지난 2~3년간 합병조처로 덩치를 키운 대기업들이 감원조처를 통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는 것은 불황대비책이나 마찬가지다. 실업률 상승과 소비지수 하락, 그리고 경기침체의 가속화가 이어지고 있다. 실업률의 경우, 지난 8월 이미 5%에 육박해 올 겨울은 유난히 춥지 않겠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 경제가 세계적 불황 또는 공황의 요인이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아시아 경제 위기는 미국의 부메랑

    ‘뉴욕타임즈’에 경제문제를 연속 기고하고 있는 폴 쿠르그만(Paul Krugman)은 투기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미국의 경제가 이제 그 대가를 뼈아프게 치르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미국경제의 침체는 이미 2~3년 전부터 예견됐다. 폴 쿠르그만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선 투기적 금융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커져 시장 자체의 안정성이 상당히 파괴돼 왔다. 즉 장기적 투자에 의존해 경제가 성장해온 것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식의 자본시장의 움직임이 건전한 투자와 장기적 경제성장의 진로를 교란시켜온 것이다.

    또한, 대자본의 지배가 막강해지면서 노동시장에 문제가 생겼다. 임금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매우 어려워졌다. 이들의 수입이 인플레로 대표되는 비용상승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자 자연 소비가 위축됐다. 그러다 보니, 금융시장의 상승세를 타고 투자에 집중했던 기업들이 투자과잉 상태에 직면했다. 더 이상 수익을 보장하기 어려운 위기상태, 즉 과잉생산(overproduction)과 과소비(under consumption)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업을 확장하고 물건을 잔뜩 만들어놓았으나 살 사람들의 여력이 없으니 수익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 침체국면이 전개됐다. 아시아 경제가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미국에 부메랑 식의 타격을 주는 것도 경기침체의 한 요인이다. 이는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아시아 경제를 지나치게 압박한 결과다. 미국 기업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들로 마구 몰려들어가 큰 이익을 취했지만,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미국 경제의 마지막 돌파구는 언제나 전쟁경제의 가동이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대공황에 대한 미국의 위기대응 방식은 뉴딜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경제가 되살아난 것은 뉴딜 정책이 아니라 2차세계대전에 의한 전쟁경제 덕분이었다. 이후 미국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통해 각 시기마다 경제적 침체의 고비에 이르는 위기국면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부시정권의 군사주의 노선도 이러한 전쟁경제의 요구와 깊이 맞물려 있다. 같은 맥락에서 미사일 방어망 추진은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처한 위기를 돌파하는 고리인 셈이다.

    그러니 이러한 때에 일어난 테러, 그것도 미국 본토의 중심부 뉴욕과 워싱턴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쟁의 에너지로 삼아 나가는 일에 미국의 지배층이 주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극적 참사이기는 하지만, 군산복합체를 비롯해 군사주의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호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비극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회생의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테러의 배후로 오스마 빈 라덴을 지목하고 있긴 하지만, 명확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선포하고 이러한 분위기를 정책으로 밀어부치고 있는 것은 일단 전쟁이라는 선택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통해 ‘전쟁경제’를 가동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군수산업문제 전문가 마이클 클래어(Michael T. Klare)는 보잉(Boeing), 록히드(Lockeed), 노스롭(Northrop) 등 군수산업의 움직임과 관련, 세계 분쟁의 배후에는 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번 테러사태는 군수산업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부시에게 군사주의노선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마련해준 셈이다.

    미국의 지배층과 군수산업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파헤쳐 온 리처드 바넷(Richard Barnet)도 전쟁선포는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쟁경제의 강력하고도 현실적인 요구에 의해 결정된다고 갈파하고 있다. 다시 말해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은 겉으로는 보복과 응징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전쟁경제를 적극적으로 가동해 패권체계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시정권이 전쟁을 선포하자 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신중론이 만만찮다. ‘뉴욕 타임즈’도 다소 격렬했던 첫 반응과는 달리, 테러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외정책 수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테러 행위 자체는 용납할 수 없으나, 테러행위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공한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세계 언론의 비판이 사건의 첫 충격이 가신 후 나타났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외정책이 강경 군사주의노선을 추구한 데 따른 역풍이 자국 국민의 생명을 소리 없이 겨냥하고 있었던 것을 인식한 결과라 하겠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도 전쟁 히스테리의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신문은 “지금 중요한 것은 차분하게 사태를 수습하고 희생자들과 부상자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동시에, 이러한 상황이 전쟁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맞대응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으며, 더욱 절실한 것은 후속 테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보능력을 키우고 테러 대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테러리스트들을 찾아내고 이들을 죽이는 일로 사태의 근본원인을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용기 있는 논조를 개진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문은 지난 1950년대 식으로 전쟁 히스테리가 미국을 지배하게 해서는 곤란하다면서, 이때야말로 언론인과 정치인의 소임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조는 이번 사태를 놓고 미국 내 강경 극우 군사주의자들이 전쟁불사의 여론을 업고 강성 군사노선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의 하나다. “이것은 전쟁 그 자체”라고 외치는 소리는 테러에 대한 응징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로 ‘제국의 평화’는 테러에 대한 보복조치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문제의 뿌리는 훨씬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패권체제 순환사에서 무수한 제국이 명멸했던 바, 이제 미국은 드디어 자신의 심장부를 겨냥한 폭력 앞에 제국의 위세를 복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국가의 진로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하는 크나큰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던져진 간단치 않은 질문이다. 그 질문의 요체는 다른 것이 아니다. “ 인류사회는 지구촌 평화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이다. 그 질서를 수립하는 데 실패하는 한, 인간은 어디에 있든지 끊임없는 테러 위협과 전쟁 공포에 떨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그 어디에서도 평안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기 직전 낙화처럼 고층에서 떨어진 사람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결코 먼 거리에 있는 낯선 타자의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의 방식에 무지하게 되면, 문명의 정상에서 자칫 추락할지 모를 인류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처참한 몸짓이다. 여기 저기에서 보복의 목소리는 높지만 그 어디에도 이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샬롬’의 지혜를 내는 이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미 전역이 전쟁 히스테리에 빠지는 상황을 안이하게만 볼 수는 없다. 중동 출신의 이민자들은 몸을 숨기고 있으며, 아랍계 아이들은 학교와 거리에서 모욕과 폭행을 당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인들은 서로 생긴 모습이 비슷해, 생업의 현장에서 잠시 피해 있거나 위축돼 있다. 복수의 열기로 가득 찬 뉴욕과 워싱턴에서 이들이 설 자리는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것은 생명과 평화다.

    테러에 담긴 메시지

    인간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전쟁은 언제나 인명과 평화부터 희생시키며 시작된다. 평화의 뜨거운 외침이 힘을 얻기까지는 평화론자들을 겨냥한 돌팔매질이 적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는 마땅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추모의 열기가 곧바로 보복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으며, 이런 상황에 평화의 논리는 자칫 분노의 대상과 이적행위로 몰리기 쉽다. 그래서 평화는 언제나 전쟁을 일으키는 일보다 훨씬 큰 용기를 요구한다.

    뉴욕주의 별칭은 ‘제국의 주(Empire State)’다. 그리고 뉴욕시 맨해튼은 바로 그 제국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워싱턴은 제국의 운명을 관리하는 대본영(大本營)이고, 펜타곤은 바로 그 대본영의 근육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펜타곤이 납치된 비행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은 것을 제국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태였다.

    아무리 제국의 폭력에 저항할 이유가 있다 해도 무고한 생명을 무수히 희생시킨 테러리즘의 야만성은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태의 뿌리를 보지 못한다면 올바른 해결책을 선택할 수 없다. 도리어 본질적인 원인의 규명은 배제한 채 대(對) 테러 공격에만 치중할 경우 국제사회는 테러의 악순환과 더불어 도처에서 빚어질 무차별적인 인명 살상으로 더더욱 무섭고 불안한 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얼굴 없는 폭력이 이토록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노리는 것은, 어떠한 명분이 있다 해도 모든 인류의 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초국제적 패권주의가 미국을 공격하게 만든 요인이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즉 테러리즘에 대한 대응과 예방도 중요하지만, 누군가가 테러리즘이라는 방식으로 미국과 대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다면 그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테러의 발생원인을 제거하는 길이다.

    이제 인류는 강대한 군사체제가 인간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2001년 9월11일 미국의 경제와 군사를 상징하는 두 기둥을 기습적으로 타격한 테러리즘은 최첨단의 안보장치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 어떤 문명의 이기도 한순간 대량살상의 무기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무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안전을 보장하는 데 실패한 군사력에 의존하지 말고, 새로운 희망을 낳을 수 있는 슬기로운 정치력에 기대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다면서 테러리즘에 마지막 삶을 걸 만한 처절한 이유가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 테러리즘에는 숨겨진, 또는 명백한 메시지가 있다. 공격의 대상이 이렇게 익명의 무작위 다수일지라도 정작 공격 대상은 이들이 아니다. 테러리즘이 야만적인 이유는 그 메시지를 자신의 육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정확히 읽는 데 실패한다면, 테러리즘은 자신의 메시지를 또다시 전하기 위해 새로운 희생자를 찾게 된다. 테러리즘은 폭력이면서 동시에 절규 그 울부짖음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절규가 대량살상의 폭력으로 반복해 나타나는 현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이런 무참한 일을 벌였는가를 아는 일에 못지 않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테러리즘의 메시지를 바로 해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그 메시지에는 오독(誤讀)의 여지가 전혀 없다. 거대한 제국 미국이 제3세계 민족들의 권리와 생명을 함부로 유린해온 폭력과 억압의 체제를 청산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나 아까운 줄 아는 자기 목숨까지 걸고 테러를 자행할 이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 테러를 재미 삼아 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그러나 지금 제국의 오만과 위선은 이러한 메시지를 읽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 전체를 전쟁의 광기로 휘어잡아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받아 전쟁의 신에게 첫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고 무수한 인명이 희생당했을 때, 그래서 맨해튼이 통곡과 아비규환으로 가득 찼을 때, 전쟁의 신은 아마도 미소지었을 것이다.

    보복으로 위장된 전쟁에 지구촌이 끌려 들어갈 때, 뉴욕 맨해튼과 워싱턴의 참극은 또다른 의미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반인륜적 테러리즘으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결코 군사력과 이에 기초한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강대국의 폭력이 세계 도처에서 저질러온 죄를 돌이키는 일에서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제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원하는 폭력의 소모품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쪽에서는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저쪽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는 자들의 죽음을 무릅쓴 저항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폭력의 악순환을 부르는 더욱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저쪽에서 당하고 당한 끝에 결행한 목숨을 건 저항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면,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서는 테러의 중단은 무망하다. 제국이 유지하는 평화를 외쳐온 미국 자신이 바로 그 제국의 중심부에서 아무런 대응 시스템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한 채 안전이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 이상, 이것은 위기이며 제국의 생존 방식을 크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을 통해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인내를 바탕으로 한 평화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강자의 평화는 약자가 폭력과 빈곤의 악순환에 갇혀 지내는 한 결코 확보될 수 없다. 강자들이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동안 울부짖는 약자들이 마침내 테러리즘이라는 마지막 수단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전쟁 위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제 미국은 테러리즘에 대한 보복과 응징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테러리즘이라는 가장 야만적인 폭력으로 미국에 도전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생존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절박한 사정에도 깊이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모두가 모두에게 적이 되는 잔혹한 현실 앞에 서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인류사회가 영원히 전시상태에 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

    모든 제국은 전쟁을 통해 등장했지만, 전쟁을 통해 사라지고 말았다. 칼로 선 자, 칼로 망하는 법이다. 테러리즘의 야만성과 패권주의의 폭력성 모두 인류에게 공적(公敵)이다. 패권주의와 테러리즘의 대결은 인류사회를 공멸의 장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부디 미국은 이번 사태의 교훈을 직시하고 테러리즘에 대한 응징 못지 않게 패권주의의 독선과 오만이 도처에서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또 인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는 일에 역사적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미국은 자칫 전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 평화는 평화의 방식으로 보장되지, 전쟁 시스템을 구축해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폭력의 확대재생산을 가져올 뿐이다. 날이 갈수록 더 많은 무기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믿는 무기경쟁의 현실은 이를 그대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부인하고 전쟁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전쟁을 통해 얻는 다른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익을 얻는 자들은 그 과정에 희생당하는 인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뿐더러, 그 죽음을 이용해 전쟁의 북소리를 더욱 크게 울릴 것이다. 그 북소리는 ‘죽음의 제전’을 알리는 신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생명의 축제’를 여는 북소리 아닌가.

    더 이상의 패권주의의 폭력도, 더 이상의 테러리즘의 야만도 우리는 싫다.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어느 누구도 전쟁의 신을 앞세워 인류를 고통에 몰아넣지 말아다오. 우리에게는 평화롭게 살아야 할 귀중한 삶이 있으며, 뜻 있게 발전시켜야 할 역사가 있다. 그걸 위해 우리는 결단코 인간을 야수의 자리에 몰아넣는 전쟁을 지지할 수 없으며, 무고한 생명이 하나라도 더 희생되는 것을 막는 국제사회의 이성을 회복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바로 이 이성의 대변자가 될 때, 초강대국에 합당한 위신과 권위를 비로소 회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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