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코리안 특급’ 박찬호, 왜 이러나

알링턴 구장 제트기류에 맥못춘 강속구

  •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

    입력2004-09-07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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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리안 특급’은 이대로 멈춰 서는가. 시즌 초반만 해도 곧 회복되리라 믿었던 박찬호가 난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최정상급 대우를 받으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그가 흔들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부동의 에이스로 거듭날 수 있을까.
    ”박찬호 왜 그래요?” 필자가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지난 시즌만 해도 궁금해 하던 ‘올해엔 몇 승이나 가능할까요’나 ‘결혼은 언제쯤 할까요’, ‘XX와의 염문설은 사실인가요’ 같은 레퍼토리들은 사라져버리고 부진 원인이 무엇인지, 올해는 왜 부상을 자주 당하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비해 필자는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모범답안 한 문장을 준비해뒀다.

    “허벅지 뒤쪽 부상으로 40여 일 결장한 게 가장 큰 원인이죠, 골프천재 타이거 우즈라도 40일 동안 골프채를 놓았다가 PGA투어에 나가면 우승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말해주면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돌아서다가 또 다시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묻는다.

    “그럼 언제쯤 나아질까요?”



    그에 답하려면 꽤 긴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한다. 이제부터 그토록 많은 팬들이 궁금해 하는 박찬호의 부진 원인을 여러 각도에서 하나하나 조명해 보고, 과연 그가 다시 정상급 투수로 복귀할 수 있을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8월7일 현재(이하 올해 기록은 8월7일까지) 박찬호의 승수는 애리조나의 특급 마무리투수 김병현보다 적다. 5년간 6300만달러의 연봉을 보장받은 팀의 제1선발이 한 차례도 완투승을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방어율이 7점 대를 상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텍사스 팬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비단 박찬호뿐 아니라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도 초반부터 ‘부상병동’의 딱지를 붙이고 추락에 추락을 거듭해,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 포스트시즌 진출 좌절이 기정사실이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박찬호는 8월7일 손가락을 다쳐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이로써 1997년 이후 6년 연속 두자리 승수, 메이저리그 입성 후 단 한차례도 부상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는 기록, 등판 주기를 거르지 않기로 유명했던 모범생 선수 생활, 5년간 190이닝 이상을 던진 강철 어깨 등의 갖가지 자랑스런 기록을 올해는 이어가지 못할 것임이 거의 확실해졌다. 한마디로 박찬호에게 올 한해는 악몽 그 자체다.

    지난해 LA 다저스에서 케빈 브라운에 이은 제2선발 투수로 15승에 방어율 3.50의 성적을 올려 투수 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올해의 부진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박찬호를 부진의 늪으로 빠지게 했을까?

    첫째, 지명타자의 변화. 박찬호가 지난해까지 활약했던 내셔널리그에는 지명타자가 없다. 그러나 텍사스 레인저스가 속해있는 아메리칸리그는 지명타자제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 차이에 박찬호는 적응하지 못했다.

    내셔널리그에서 투수는 대개 9번 타자로 나온다. 내셔널리그 투수의 타율은 대부분 1할대. 아메리칸리그 9번타자는 대체로 이보다 높은 타율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전체 타석의 9분의 1에 불과한 이 ‘9번 타자의 변화’는 앞선 7~8번 타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박찬호는 8번 타자에게 피안타율이 0.324, 9번 타자에게는 0.300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1~3번 타자(0.294, 0.283, 0.214)보다 높은 피안타율. 그가 하위타선에 의해 무너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수치다. 종전에는 비교적 편안하게 넘어갔지만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아닌 8~9번 타자들을 요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둘째, 생활환경의 변화도 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LA 생활에 익숙했던 그에게 교민수가 적은 텍사스로의 이동은 예상외로 큰 부담이었다. 그가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면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쉽게 이겨낼 수 있었겠지만, 부진했던 초반 성적은 그를 더욱 쫓기게 만들었다. 이 무렵 박찬호가 받은 스트레스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LA에 있을 때는 가까운 친지와 언제든지 어울릴 수 있었고, 가볍게 술을 한잔하거나(시즌중에는 거의 입에 대지 않지만), 여느 젊은이들처럼 노래방에라도 가서 실컷 노래도 부르는 등 생활리듬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텍사스. 좁은 한인사회에는 그만큼 활동의 제약도 많아 그로서는 갑갑함을 풀 수 있는 길이 없었을 것이다.

    어떤 종목, 어느 선수건 스트레스를 풀거나 슬럼프를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박찬호는 운동장 밖에서 이를 해결할만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부진이 찾아오면 1년에 한 번 정도 삭발했던 머리를 올해 두 번이나 밀었다. 오죽하면 박찬호의 모친이 현지에 있는 한국 특파원들에게 “갈 곳이 없어 집안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찬호가 안쓰러워 더 못 보겠다”고 이야기했을까.

    셋째 원인은 부상이다. 셋째라고는 했지만 비중으로는 단연 첫째로 꼽아야 할 요인이다. 사실 모든 문제가 그 뜻밖의 부상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플로리다 봄 캠프가 끝날 즈음이었던 지난 3월 하순이었다. 시범경기중 다친 오른쪽 허벅지 뒤쪽 근육부상이 모든 것을 꼬이게 만들었던 것. 여기에 새로 부임한 후 시즌중 해임됐던 오스카 아코스타 투수 코치가 그의 투구 폼을 개조한 것도 결과적으로 혼란만 가중시킨 셈이 됐다. 부상으로 인해 새 투구폼을 몸에 익힐 시간을 갖지 못하면서, 미완성인 투구폼으로 시즌 초반 마운드에 올라 균형감각마저 잃고 말았다.

    넷째, 부상 여파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4월2일 개막전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에서 박찬호는 극히 부진한 투구를 선보였다. 경기가 진행되던 중에는 오른쪽다리뿐 아니라 왼쪽다리에도 근육통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온전치 않은 몸 상태에서 개막전에 등판한 것은 과잉의욕이었다.

    개막전 부진은 단순한 이미지 손상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부상은 더 심화되어 그후 무려 41일간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처음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른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가운데 마음만 급한’ 상태였다. 계속된 무리수는 8월7일 손가락 부상으로 이어져 두번째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는 결과를 불렀다. 메이저리그는 의욕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냉혹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차분하지 못했던 대처, 급할수록 돌아가는 지혜가 부족했던 점은 큰 실책이었다.

    다섯째, 그는 달라진 홈 구장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 알링턴 홈구장과 다저 스타디움의 큰 차이는 정통파 투수이자 뜬공 유도 투수인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그는 홈런 공포증에 시달리게 됐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알링턴 구장의 별명은 ‘타자들의 천국’. 다른 구장에서는 평범한 뜬공으로 처리됐을 타구가 쉽게 담을 넘어가 투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알링턴 구장에서는 외야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홈 플레이트 뒤쪽의 백스탑과 유리벽을 치고 나가면서 우중간 쪽으로 강하게 부는 제트기류가 형성된다. 이 바람을 타고 공이 뻗어 나가는 것. 우투수가 던진 바깥쪽 공에 배트를 툭 갖다 대기만 해도 홈런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박찬호는 알링턴 구장의 제트기류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얼마전 그는 사석에서 “덴버에 있는 콜로라도 록키스의 홈구장 쿠어스 필드보다도 비거리가 길다. 한마디로 장난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구가 조금만 어긋나도 우중간이나 우측으로 쉽게 홈런이 터져 나오는 것. 낮게 깔리는 강속구나 체인지업이라면 모를까, 공이 조금만 높게 들어가면 타구는 어김없이 담장을 넘고 만다.

    투수로서는 범타로 끝났다고 생각했던 타구가 바람을 타고 쭉쭉 뻗어 홈런이 되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투수는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뉴욕 양키즈의 간판투수 중 한 명인 마이크 무시나와 뛰어난 제구력을 보유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존 버켓도 얼마 전 알링턴 구장에서 난타 당했다.

    마이크 무시나는 불과 3이닝 동안 11피안타, 2피홈런, 7실점 7자책점을 기록했고, 존 버켓은 2이닝도 채우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했다. 강속구와 슬러브, 투심 패스트볼 등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박찬호의 투구 스타일은 알링턴 구장에서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부상으로 공의 위력이 떨어진 박찬호에게는 충격이 더욱 컸을 것이다.

    여섯째, 그는 다저 스타디움에서의 습관을 떨치지 못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알링턴의 제트기류와 일맥상통한다.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에도 홈 구장을 떠나면 약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가 지난 겨울 자유계약 선수 중 최고의 선발투수로 거론됐을 때 일부 전문가들은 그를 ‘홈 구장에서만 강한 투수’라고 깎아내리며 “팀을 옮길 경우 다저스에서만큼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 5년간(1997~2001년) 다저 스타디움에서 40승 21패, 방어율 3.04라는 정상급 기록을 남겼지만, 원정경기에서는 35승 28패, 방어율 4.66으로 큰 차이를 보였던 것에 근거한 지적이었다.

    다저 스타디움은 파울지역이 넓고 공기저항도 알링턴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투수에게 유리하다. 이때의 투구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은 그의 부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투수 앞으로 불어오는 제트기류는 속구의 위력을 줄인다. 웬만큼 강한 속구가 아니면 얻어맞기 십상인 것이다.

    일곱째, 강속구 투수였던 그의 어깨는 이미 지쳐 있었다. 풀 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96년 시즌부터 6년간의 과다한 투구로 피로가 쌓인 데다, 지난해에는 허리 부상까지 겹쳐 재충전의 기회가 절실했다. 지난해까지 박찬호는 무려 1183과 3분의 2이닝을 던졌고 최근 5년 간은 시즌 평균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다른 투수라면 벌써 부상이나 체력 저하로 한두 차례 위기를 맞았을 숫자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충분한 훈련으로 이를 극복해가던 그였지만 올해는 지친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투수의 체력과 어깨는 쓴 만큼 표시가 나게 돼 있다. 정통파 강속구 투수들은 피로하면 공을 던질 때 팔의 각도가 내려오기 마련인데, 박찬호도 이미 지난해부터 팔의 각도가 옆으로 처져 나오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럼에도 그가 지난해 허리 부상까지 참으며 이를 악물고 호투한 것은, 지난해가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부여받는 해였기 때문이다. 돈이 모든 것을 말한다는 메이저리그에서 자유계약선수는 높은 연봉과 장기 계약, 갖가지 좋은 조건을 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려는 메이저리거는 없다.

    박찬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결과는 이번 시즌에 나타난 셈이다. 시속 155Km대였던 그의 최정상급 구속은 올해 평균 150Km이하로 떨어졌다. 한 마디로 그의 구위는 떨어질 시점에 와 있었고, 여기에 부상이 겹치면서 컨디션 유지에 실패했으니 최악의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덟째, 그는 제1선발이 주는 심한 압박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지난 겨울 투수가 부실하기로 소문난 텍사스로 팀을 옮겼을 때 현역 최고액 연봉을 자랑하는 슈퍼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그가 온다는 소식에 너무 기뻐 신사복을 입은 채로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톰 힉스 구단주 또한 박찬호가 계약을 마친 후 LA로 돌아갈 때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내줄 정도로 큰 기대감을 표시했다.

    박찬호 본인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팀 내 최고 투수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표현하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격상된 지위를 기대하기도 했다. 부상중에도 개막전 선발을 자청해서 마운드에 오른 것이나, 부상 후 재활 여부를 점검하는 통과의례였던 마이너리그 등판을 “난 괜찮다. 그대로 메이저리그에서 재기 등판하겠다”고 말하며 거치지 않은 것 역시 그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고투수의 지위는 마치 부메랑처럼 도리어 그를 옭아맸다. 성적이 부진하자 엄청난 부담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이반 로드리게스, 라파엘 팔메이도, 후안 곤잘레스 등 팀의 주축인 라틴계 선수들이 어울려 스페인어로 떠드는 것을 보고 그가 ‘혹시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는 에피소드는 박찬호가 라커룸에서도 좌불안석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는 예전부터 유달리 남에게 신세지기를 싫어하고 자신의 일은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다. 이런 그의 성격은 부상과 부진이라는 초유의 황당한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움츠러들고 자책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불필요한 걱정이나 상상까지 하면서 부진의 늪에서 일찍 빠져 나오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는 이번 시즌 체중이 5Kg이나 줄었다. 이 또한 강박관념의 여파가 아닐 수 없다.

    스피드보다는 제구력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박찬호가 맞은 일생일대의 부진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돌파구와 대책은 무엇인가. 지금부터는 그 필요충분조건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기로 하자. 박찬호가 풀어야 할 숙제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기술적인 면, 다른 하나는 정신적·심리적인 면이다.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우선 정교한 제구력을 확보하고 다양한 구종을 개발해야 한다. 우선 제구력 부분을 살펴보자. 그의 구속은 이미 전성기때보다 4~5Km 정도 떨어졌다. 이제는 자신이 던지고자 하는 지점에 공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 타자들을 감당해내기가 어렵다. 알링턴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가 지난 7월 밀워키 올스타전을 중계하러 갔을 때 몇몇 아메리칸리그의 타자들에게 박찬호의 구위에 대해 물어봤다. 많은 선수들은 “소문만큼 빠르거나 위력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이는 잔뜩 긴장했던 아메리칸리그 타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공에 자신감을 갖게 된 반면, 박찬호는 속구에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속구의 위력만으로 상대를 압도했던 다저스 시절과는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제구력 향상에는 강한 체력과 함께 하체와 허리의 유연성이 특히 중요하다. 이런 요소가 바탕이 될 때 투구폼과 자세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올해 그가 다리 부상으로 연습이 부족했고 하체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구력은 점차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다저스 시절보다 더 향상되지 않으면 아메리칸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렵다.

    결국 투수들의 영원한 숙제인 스피드와 컨트롤 중 이제는 컨트롤에 비중을 둘 때다. 장타, 볼넷, 몸에 맞는 볼 등으로 인해 갑작스레 일어나는 난조를 막는 것도 필수적이다. 서른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와 어깨에 누적된 피로를 감안하면 한번 떨어진 구속을 회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올해 최고의 투수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노장 커트 실링의 나이는 35세다. 그가 8월12일까지 26게임에 선발 출전하여 19승4패를 기록하는 동안 볼넷은 19개에 불과했다. 게임 당 0.73개 꼴의 볼넷을 허용한 셈이다. 17게임에 선발로 나간 박찬호가 4승6패 볼넷 49개를 기록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박찬호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다양한 구종을 확보하는 것. 예전처럼 속구로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타자의 히팅 포인트 앞에서 공 끝이 다양하게 변화하는 레퍼토리 추가가 필요하다.

    특히 알링턴 구장에서는 투구가 낮게 형성되어야 한다. 아래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나 가라앉는 싱킹 패스트볼, 옆으로 날카롭게 변하는 컷 패스트볼,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 좌타자의 역방향으로 휘어지며 벗어나는 ‘0’ 체인지업 등 2~3개가 추가돼야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뉴욕 양키즈의 특급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컷 패스트볼로, 커트 실링이 스플리터로 상대타자를 제압하고 있음을 참고해야 한다.

    사실 필자가 언급한 이런 기술적인 문제들은 박찬호 본인과 투수코치인 오렐 허샤이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즌중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당장 시도하는 데는 문제가 있으므로 내년을 기대하는 것이 옳다. 메이저리그는 섣부른 실험이 가능한 무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방적인 주입식 스타일이었던 아코스타 투수코치에 비해 박찬호와 오랜 교감이 있는 사부 중 한명인 허샤이저 코치의 부임은 좋은 결과를 예감하게 한다.

    기술적인 문제는 코치와 선수의 노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겠지만, 현 시점에서 더욱 시급하고도 치유하기 어려운 것은 심리적인 문제의 해결인 듯 하다. 선발투수는 프로야구 선수들 가운데서도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자리다. 5일 간격의 고정적인 등판, 짙은 승패의 명암, 공과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점 등은 투수를 예민하고 섬세하며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만들기 쉽다.

    엄청난 연봉과 부진한 성적의 부조화가 주는 부담은 현지 언론의 부정적인 시각과 함께 박찬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미국사회에서는 마이너리티인 한국인이다. 여기에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악순환이 계속될 가능성도 높으므로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마음을 비운 채 포수 미트만 보고 공을 던질 수 있는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너무 많은 생각이나 계산은 오히려 그를 오랜 부진의 늪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성숙한 대인 관계나 무아의 경지에서 투구를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조절하는 일이 기술적 조절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기술적 문제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혼 시기를 앞당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메이저리그 선수들에 비하면 벌써 적령기를 넘었고, 앞으로 4년간 계속 텍사스에서 생활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정을 갖는 것도 안정감을 위해 좋은 돌파구가 될 것이다. 치열하고 메마른 메이저리그 생활 속에서 평온함과 안정감을 찾는 데 가족과 함께하는 것 만큼 좋은 처방은 없다. 미국처럼 원정이 많고 시즌이 길며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1994년 그가 메이저리그에 첫 발을 내디딜 무렵 사석에서 “미국의 선수 생활은 국내와는 달라 되도록 빨리 결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후 28~30세 사이에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지금이야말로 그때인 셈이다.

    또한 그는 승수 쌓기, 방어율, 피홈런을 걱정하지 않는 배짱을 키워야 한다. 금년에는 이미 두자리 승수나 3점 대 방어율은 물 건너갔다. 하지만 박찬호는 장기 계약까지 해놓은 안정된 상태가 아닌가. 무리하게 에이스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하기보다는 차분하게 내년을 기약하면서 흐름에 따를 필요가 있다.

    두번째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을 때, 그는 감독에게 곧 등판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제리 내런 감독은 달리 15일간 출장할 수 없는 부상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이는 박찬호가 보여준 조급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에이스가 41일간 결장하는 큰 충격을 코칭 스탭, 동료, 구단관계자에게 준 바가 있으므로 당분간은 팀을 위해서도, 본인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등판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 김병현도 “죽어라 던져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며 불만을 터뜨리며 감독과 신경전까지 펼친 일이 있었다. 국내에서 야구를 배운 우리 선수들은 좀 아프거나 불편해도 ‘악으로 깡으로’ 등판을 강행하는 경우가 있다. 팀에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버릇 혹은 다른 선수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려하는 습성이 몸에 밴 탓이다. 그러나 그곳은 미국이다. 본인의 뜻이 아무리 좋다 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뿐인 미국식 결과주의를 간과해선 안된다.

    지금까지 그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박찬호는 과연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시즌과 내년부터 장기 계약이 끝나는 2006년까지 나누어 살펴보자.

    우선 8월23일 경기부터 복귀할 경우 그는 앞으로 여덟 차례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대팀들은 강하다. 보스턴과 1회, 시애틀과 2회, 오클랜드와 2회 등 앞으로의 게임이 지구 우승이나 와일드카드를 노리는 강팀들과의 일전임을 감안하면, 텍사스의 현 전력으로는 아무리 호투하더라도 6승을 추가해 두자리 승수를 채우기는 어렵다. 이 경우 올해 성적표는 6~8승 정도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승수 쌓기도 중요하지만 치욕적인 7점 대의 방어율을 5점 대로 끌어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1999년 5.23의 방어율을 한차례 남긴 것 외에는 1997년 이후 계속해서 두자리 승수와 함께 3점 대의 방어율을 유지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6점 대 이상의 방어율은 자존심 상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승패는 투수의 능력대로 반영되지 않지만(실점 7점을 허용해도 10득점 하면 승리투수가 될 수 있다) 방어율은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다. 물론 올해 6점 대 방어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상황에서 5점 대 방어율 도전은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보름 남짓의 공백기간 동안 감정을 추스르고 타자 요리 방법을 잘 정리한다면 불가능한 목표도 아니다.

    박찬호는 앞으로 남은 4년의 계약기간 동안 팀의 대들보 투수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팀 우승, 올스타전 재진출, 사이영상 수상 등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은 투수에게 불리한 홈 구장 사정을 감안하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알링턴에서 2점 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따라서 박찬호는 매년 15승 이상과 3점 대 초반의 방어율을 거두며 팀 우승의 선봉장 역할을 담당한다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옳다. 아직 그에게는 그럴만한 위력이 남아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난 8월2일 홈구장에서 벌어진 보스턴전에서 5회까지 탈삼진 9개에 1실점이라는 호투를 보여준 것이 좋은 예다.

    내년에는 팀도 그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봄 캠프장도 올해 그가 부상을 당했던 황량한 플로리다 포트 샬렛에서 사막지대인 애리조나로 바뀔 예정. 이를 통해 심기일전과 분위기 쇄신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내년에는 박찬호의 통산 100승 돌파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며, 2006년까지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150승 정도는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고 선수들의 집결지인 메이저리그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올 한해 박찬호 본인과 팬들은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연간 2520만달러를 받는 슈퍼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부터 월 800달러를 받으며 꿈을 키우는 마이너리거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뒤엉켜 생존 경쟁을 펼치는 정글의 법칙은 냉혹하다. 그동안 순항했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도 거센 폭풍우를 만나면 난파선 같은 모습으로 팬들을 실망시킬 수 있고, 다시 순풍을 받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변수가 많고 예측이 쉽지 않은 격전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리의 코리안 특급에게는 여유가 필요하다. 한국에 있는 우리가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더라도 길을 익히고, 풍습에 익숙해지고, 이웃을 파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 미국에서 보금자리를 옮긴 그는 오죽 하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기는 하지만 충분한 적응기간을 거친 내년의 박찬호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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