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장기판의 안, 장기판의 밖

인간의 근원, 학문의 근본

  • 글: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입력2003-01-22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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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사유의 출발점에는 구조주의가 있다. 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사유를 따라잡는 첩경이다. 소쉬르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 분석에 그 단초가 있다.
    장기판의 안, 장기판의 밖

    레비-스트로스

    ‘현대사상’을 어디에서 끊어 이야기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은 문제다. 19세기말, 20세기초, 2차 세계대전 이후, 1968년(노동자 운동과 더불어 학생·여성·반전 운동 등 각종 ‘현대적’ 사회운동이 일어남. 공산주의권과 자유주의권에서 동시 발생한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함) 이후 등, 여러 답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일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된 사상들을 ‘현대사상’이라 부를 것이다.

    현대사상은 맥락에 따라 후기구조주의(구조주의 극복을 위해 등장한 사유라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모던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사유라는 점에서), 프랑스사상(주로 프랑스에서 배출된 사상이라는 점에서), 탈근대사상(근대가 남긴 병폐들과 싸운 사상이라는 점에서), 68사상(1968년 혁명을 기점으로 형성된 사유라는 점에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딱히 일반화하기 힘든 각기 독창적 사유들이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에는 분명 일정한 연계성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구조주의’라는 사유를 통과하고 그것과 대결하면서 형성된 사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사상의 입구에는 구조주의가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철학’이란 대체로 16세기 서구에서 형성돼, 17세기에 본격화했으며, 18세기에 대중화를 거쳐, 19세기에 만개(滿開)한 동시에 변형되기 시작한 철학적 흐름을 말한다. 물론 근대철학은 이미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의 대세(大勢)를 형성하고 있다.

    근대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한 세계관의 변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삶의 변화, 민주주의의 발달로 인한 대중사회의 도래를 비롯, 몇 가지 현상들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현상들 밑에서 작동해온 철학적 원리는 곧 ‘주체의 철학’이다. 과학기술, 자본주의, 민주주의, 주관화한 문화예술…. 모두 ‘주체’라고 하는 인식론적·존재론적 원리를 토대로 한다. 그러므로 근대철학을 간단히 ‘주체철학’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철학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인식, 의미, 역사의 가능근거(可能根據)를 신, 하늘(天), 운명, 섭리 등이 아닌 ‘인간 주체’로 보는 입장이다. ‘가능근거’를 ‘선험적(transcendental) 근거’라 부르기도 하므로 ‘선험적 주체’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서구의 근대철학이란 ‘인간을 주체로 세운 철학’이다.



    현대사상의 돌쩌귀, 구조주의

    칸트는 인간 인식을 ‘신이 영혼에 넣어준 진리의 씨앗’이나 수동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인간 의식의 능동적 구성작용으로 이해했다. 헤겔은 역사를 인간 주체가 만들어나가야 할 하나의 ‘작품’으로 보았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을 세계로부터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를 담보하는 존재라 보았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보았고, 메를로-퐁티는 인간 신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런 철학들에서 우리는 ‘선험적 주체의 철학’이 변화해간 궤적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서구 근대철학은 주체·이성·자유·역사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은 인류 역사를 크게 바꿔놓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주체철학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학적 합리성의 추구는 세계를 탈색(脫色)시켜버리고, 기술의 발달은 모든 사물을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자본주의와 기술의 결합은 환경을 황폐하게 했으며, 사람들의 마음까지 삭막하게 만들었다. 대중사회의 도래는 모든 고급한 가치들을 몰락시키고, 저급한 문화들이 세계를 휩쓸도록 했다. 민주주의는 우중(愚衆)의 변덕에 좌우되는 정치를 탄생시켰다. 탈근대 사유들은 이런 근대라는 시대가 남긴 상처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를 사상적으로 모색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생겨났다.

    구조주의는 주체 중심의 문화가 빚어낸 폐단에 맞서 새롭게 모색된 사유양식이다. 그 발단에는 여러 맥락이 있지만 굵직한 것들로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의 유산, 바슐라르·게루 등의 인식론, 소쉬르에서 연원한 구조주의 언어학 등을 들 수 있다. 마르크스·니체·프로이트는 주체 중심의 근대 사유를 거부하고 인간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했다. 바슐라르와 게루는 19세기 이래 탈합리주의 사조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형태의 합리주의를 마련함으로써 구조주의를 향한 길을 예비했다. 더 직접적으로, 소쉬르에서 연원한 구조주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적 사유의 방법론적 토대가 됐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는 어떤 기본 특징들이 있을까.

    첫째, 구조주의는 인간의 의식, 내면, 주체성, 정신/마음 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장(場)/구조’에서 출발한다. 인간을 바깥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그 장의 구조를 논할 때 관계의 사유를 구사한다. A, B, C 각각에 내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A와 B의 관계, B와 C의 관계에서 의미가 나온다는 시각이다. 토템을 예로 들어보자. 거북·독수리·곰을 토템으로 하는 세 부족이 있을 경우, 그 각각에는 큰 의미가 없다. 거북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거북이라는 동물 사이에 어떤 내재적/필연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다. 의미는 이 세 토템 사이의 관계로부터 성립한다.

    셋째, 이런 식의 법칙성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에 이끌려 사는 심층적 법칙성이다. 이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히 ‘무의식’을 중시하며, 무의식의 층위를 파고 들어가게 된다.

    이런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에 입각해 자기 분야를 연구한 뒤, 그 연구 성과에 사상사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레비-스트로스다. 과학은 사실의 확인, 법칙의 발견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어떤 과학적 성과를 토대 삼아 세계와 인간, 가치에 대해 넓은 사유를 펼치면, 그 과학적 내용은 ‘사상사적 함축’을 띠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일차적으로는 인류학자이지만, 자신의 인류학적 발견에 철학적 내용을 부가함으로써 사상사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은 레비-스트로스를 통해 처음으로 중요한 사상사적 전경(前景)을 차지하게 된다.

    레비-스트로스에 대해 개괄하기 전에 우선 구체적 예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토테미즘이라는 현상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한 기존의 이론들과 구조주의 이론의 차이를 살펴봄으로써 구조주의적 사유양식이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이해해보자.

    먼저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을 혼동하면 안 된다. 애니미즘(物活論)은 세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 신성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일반적 믿음을 말한다. 그와 비교해 토테미즘이란 특정한 한 씨족/부족이 특정한 어떤 존재(특히 동물)와 자신들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는 현상이다.

    토테미즘은 처음에는 그저 미개인들의 괴상한 면모라고 가볍게 치부했으나 인류학(anthropology), 민족학(ethnology)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그 의미가 다각도로 파헤쳐졌다. 각 씨족들은 자신들의 토템을 먹거나 해치지 않는다. 이것을 ‘금기(taboo)’라 한다. 그러나 일정한 시점에서는(예를 들어 제의 때) 오히려 그것을 죽여서 먹는다.

    프로이트의 실수 혹은 오만

    기존의 이론들 중 몇 가지를 보자. 우선 토테미즘을 즉물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있다. 거북을 토템으로 하는 씨족은 진짜 거북과 비슷하고, 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은 진짜 늑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후자의 부족은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는 황당한 해석까지 있다. 이런 해석은 토테미즘을 너무 즉물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거기에는 미개인을 동물과 유사한 존재로 보는 편견이 깃들어 있다.

    이보다 좀 나은 것으로 토템을 일종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OB 베어스’ ‘한화 이글스’ ‘삼성 라이온스’ 같은 표현들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앞의 해석이 즉물적 해석이라면 이 해석은 반대로 너무 현대적이다. 미개인들이 상징이나 문장(紋章)을 사용했다는 것은 현대인의 생각을 미개인들에게 투영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1925)에서 토템 현상을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는 토템과 씨족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애증, 즉 ‘오이디프스 컴플렉스’로 해석했다. 토템은 ‘신(神)=아버지’에 대한 상징이며, 미개인의 토테미즘이란 유아의 신경증과 유사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현대인의 정신상태를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신병리적 개념을 미개인들에게 투사한 전형적인 환원주의 시각이다.

    인간과 사회를 모두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회생물학’이나 지성사까지도 사회적 맥락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사회학적 환원주의’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이론을 다른 분야로 무반성적으로 투사할 때 이런 무리가 발생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미개인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 독립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자신의 이론을 다른 영역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그의 미학도 마찬가지다).

    장기판의 안, 장기판의 밖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 밀림에서의 원주민 연구로 구조주의 인류학의 기초를 쌓았다

    인류학에서 독보적 경지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는 클라우드 레비-브륄(베르그송과 밀접히 관련됨)은 미개인을 동물과 인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존재로 보았다. 다만 그는 미개인도 나름의 독특한 논리, 즉 ‘전논리(前論理·prelogic)’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말과 사물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의 모형을 만들어놓고서 그것을 송곳으로 찌르면 그 사람의 그 부위가 아프다고 믿는 것이다. 또 만일 누군가가 어떤 악어를 죽였다면, 그 동족 악어들이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 한다고 믿는 것이다.

    레비-브륄은 이런 식의 전논리를 ‘신비적 융합설’이라 불렀다. 구분해야 할 것을 기묘하게 융합해서 본다는 뜻이다. 미개인과 어린아이를 유비(類比)시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물론 19세기의 진화론적 생각이 깔려 있다. 콩트의 지식 3단계설(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과학적 단계)을 확장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진화론적 구도,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선형적 발전 구도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 또한 역시, 미개인을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는 현대인, 특히 서구인(그 중에서도 근대적 서구인)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구조주의 사유는 바로 이 ‘진화론’이라는 사유 모델을 논박한다. 시간적·역사적·진화론적 사유가 19세기 이래 전형적인 사유 패러다임이었다면, 구조주의는 바로 이런 패러다임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벗어나는, 그것과 대립하는 패러다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중요한 담론사적 맥락들 중 하나다.

    그러나 레비-브륄의 설명 자체는 흥미로운 데가 있다. 레비-브륄의 패러다임이 진화론적, 더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적 색깔을 짙게 풍긴다 해도, 레비-브륄이 지적한 현상 자체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구조주의의 윤리적 동기에 공감한다 해도, 윤리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문제는 미개인들에게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미개인이냐 현대인이냐에 관계없이 그런 사유 양태는 늘 있어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후궁들은 별실에 중전의 초상을 걸어놓고 활시위를 당겼다. 첨단 과학기술 시대라는 오늘도 사람들은 ‘컴퓨터 점’을 보고 부적을 산다. TV 드라마 ‘왕건’을 보면 최지몽의 전투 결과 예측이 어김없이 맞는다(작가가 그렇게 각본을 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시인들은 자주 ‘미개인처럼’ 시를 쓴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논리가 사라지고 논리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늘 논리와 전논리가 함께 있어온 것이 아닐까. 다만 개인에 따라,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담론의 종류에 따라 전논리와 논리가 번갈아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미개인이 진화해서 현대인이 되었다지만, 우리 시대는 오히려 전논리가 논리를 압도하는 시대는 아닐까.

    이런 점에서 레비-브륄의 설명은 그 자체로 한계를 드러내지만, 그가 말한 전논리 개념은 다른 맥락에서 볼 때 여전히 흥미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 오성의 범주를 극히 합리주의적으로 그려냈지만, 과학이라는 좁은 맥락을 떠나 인간 자체를 볼 때 전논리는 논리 옆에 늘 같이 있어온 것은 아닌지, 앞으로 이런 관점을 가지고 문명사 전체를 새롭게 조망하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토테미즘에 대한, 나아가 미개사회 일반에 대한 설명 중 구조주의와 쌍벽을 이루는, 구조주의가 논박했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유가 ‘기능주의’ 입장이다. 위에 설명한 다른 이론들은 대개 현장작업/현지조사(field work)가 결여된 채 어떤 편견을 투영한 면이 강하다. 그러나 기능주의는 인류학/민족학이 본격화하고 자료가 쌓이면서 등장한 이론으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기능주의는 말 그대로 토템이 그 씨족에 어떤 실질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씨족의 삶에 도움을 주고 그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소박한 이론이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이런 생각에는 대체로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생리학적 기능주의다. 어떤 씨족이 특정 동식물을 토템으로 삼는 것은 그것이 그 씨족의 중요한 먹을거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 토템을 숭배하고 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그 토템이 그들의 생존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좀 묘한 데가 있다. 평소 먹지 않다가 일년에 한두 번 제의 때만 그것을 잡아먹는다면, 그것이 실질적인 먹을거리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마치 너무 비싸 1년에 한두 번만 입는 옷을 연상시킨다. 그런 ‘사치품’이 주요 먹을거리일 수 있을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오히려 먹으면 안 되는 것, 먹으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금기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나, 그럴 경우 굳이 그것을 숭배하기까지 해야 하는 이유나 때로 먹는 경우는 이해가 안 된다. 이렇게 생리학적 기능주의는 토템을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먹고 사는 것’과 관련시켰다는 점에서 언뜻 기본적인 설명 같지만, 토템의 경우에는 이렇듯 간단하지 않다.

    다음은 심리학적 기능주의다. 생리학적 기능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해결책을 찾을 때 등장하는 생각 중 하나가 심리학적 기능주의다. 즉 토템이란 실질적이고 생리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토템은 원초적 형태의 신이라 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의 토템이고, ‘알라 하나님’은 이슬람 민족의 토템이라는 식이다.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는 해석이다.

    미국 대통령의 관저에 콘도르가 독일의 경우 독수리가, 한국의 경우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이 경우 심리적 도움이란 어떤 개인의 심리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보다 그 씨족 전체의 심리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설명은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학적이다. 그래서 기능주의의 가장 세련된 형태인 사회학적 기능주의가 등장했다.

    사회학적 기능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토템이란 한 사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단순한 문장(紋章)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그 씨족의 조상을 뜻하며, 때문에 그것에 예배드리고, 의미 있는 날이 되면 (동족의 연속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 잡아먹음으로써 피를 나누는 것이다. 다시 말해 토템은 씨족의 신체적 생존이 아니라 집단적 정체성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베버와 더불어 20세기초를 대표하는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제기한 것이다(‘종교생활의 기본 형태’ 1912).

    그러나 이럴 경우 왜 파리나 모기처럼 열등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동물까지 토템이 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가치론적 배경이 있을 수 있다).

    기능주의는 가장 상식적이고 당연한 가정(토템이 그 씨족에게 뭔가 역할을 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라는 가정)에 입각해 있으며, 그런만큼 매우 자명해 보인다. 이 기능주의에 도전해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토템을 해석한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이다.

    구조주의는 기능주의가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데 비해 ‘구조’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기능주의가 사물 자체의 실질적 행위·기능·목적·실천 등의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면, 구조주의는 사물 하나가 아니라 그 사물이 속해 있는 장, 즉 관계들의 장을 보며 그 장 안에서 그 사물의 위치를 본다.

    기능주의적 설명 중 세번째의 사회학적 기능주의는 이미 이런 사고의 씨앗을 품고 있다. 토템을 ‘상징’으로 본다는 것은 그 토템을 존재/사물 자체의 관점에서가 아닌 의미의 관점에서 본다는 뜻이다. 나폴레옹을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왜소하고 볼품없는 사내다. 그러나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을 뒤흔든 ‘황제’다. 사물적으로 보면 왜소한 사내일 뿐인 그가, 기호적으로 보면 엄청난 권력을 지닌 ‘황제라는 기호’인 것이다. 기능주의가 사물의 자연적·물질적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면, 구조주의는 사물을 기호로, 의미로, 무엇인가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관계망의 요소로 본다(구조주의가 늘 언어학/기호학과 함께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토템을 상징으로 볼 때 이미 이런 사유의 맹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사유의 본격적 형태는 구조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가능했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 테제들에 속하는 변별성과 자의성을 보자. 하나의 기호가 가진 ‘의미’는 그것에 내재해 있지 않다. 즉 자의적이다. 야옹이를 ‘개’라고, 멍멍이를 ‘고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개’라는 기호가 꼭 멍멍 짖는 동물을 가리켜야 할 이유가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즉 기호와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arbitrary)’이다.

    그래서 기호의 의미는 변별성을 통해 결정된다. 만일 개와 고양이라는 기호에 어떤 필연성도 없다면, 중요한 것은 ‘개’가 반드시 무엇을, ‘고양이’가 반드시 무엇을 지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우리는 이미 그런 지시 관계가 확립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개와 고양이가 구분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중위’라는 기호에는 내재적 의미가 없다. 그것은 소위와 대위 사이에 존재하는 기호인 것이며, 이 기호들과의 ‘변별적인(differential)’,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중위인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학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라고 말한다. 의미는 현상학이 말하듯 인간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해석학이 말하듯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요, 실증주의가 말하듯이 말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차이들의 놀이’를 통해 성립한다.

    토템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토템은 하나의 기호다. 그것은 기능적 의미가 아니라 구조적 의미를 가진다. 즉 자의적이고 변별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토템과 씨족 사이에는 어떤 자연적 인과, 실질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또 각 토템의 의미는 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토템들과의 구조적 관계를 통해 성립한다는 것이다. 북미 오대호 지방의 세 인디언 씨족들은 각각 독수리·곰·거북을 토템으로 갖고 있다.

    더 선명한 예는 백곰 토템과 흑곰 토템이다. 이렇게 나뉜다고 해서 한 씨족은 검고 한 씨족은 희지 않다. 사실 백/흑으로 하든, 물/불로 하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변별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별은 두 씨족이 본래 한 씨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함축한다.

    기능주의가 비교적 눈에 보이는 기능의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구조주의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측면, 어떤 장의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점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뜨거운 사회, 차가운 사회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의 영향을 받아 미개사회를 ‘교환( change)’의 관점에서 보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미개사회를 ‘평형(equilibrium)’의 관점에서 보았음을 말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문명사회를 ‘뜨거운 사회’로 보고 미개사회를 ‘차가운 사회’로 본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런 관점은 오늘날 여러 면에서 극복되었다. 클라스트르의 인류학이 보여주듯, 미개인들의 교환은 그 안에 욕망과 권력의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비-스트로스가 미개사회의 결혼제도를 연구한 성과는 여전히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미개인들의 교환을 ‘포트라취’라 부른다. 그리고 교환의 가장 핵심적인 대상은 여자·재물·언어다. 이 세 항목을 교환함으로써 미개사회는 평형을 유지한다. 즉 정체되지도 않고 와해되지도 않는다.

    우선 기본 개념들을 짚어보자. 족외혼과 족내혼의 구분이 있다. 말 그대로 다른 족 사이에서의 결혼과 같은 족 내에서의 결혼을 말한다. 같은 족 내에서만 결혼하면 사회가 정체되고 하락하기 때문에 족외혼이 일반적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제한적 교환과 일반적 교환이 있다. 제한적 교환은 일정한 테두리(대개 두 집단) 내에서의 교환을 말하고, 일반적 교환은 여러 집단들 사이에서의 복잡한 교환을 말한다.

    결혼제도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핵심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근친혼의 금지’다. 즉 근친상간(近親相姦)의 금지다.

    근친혼의 금지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넘어가는 ‘돌쩌귀’에 놓여 있다. 왜 그런가? 레비-스트로스는 자연은 연속적이고 일반적이지만 문화는 불연속적이고 특수하다고 본다. 근친혼 금지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지만, 사회의 한 규칙인 한에서 문화적 현상이다. 이 점에서 근친혼 금지는 정확히 인간이 자연에서 문화로 넘어가는 문턱에 위치한 현상이라 하겠다.

    기존의 설명들은 다소 모호하고 단순하다. 우생학적 설명, 본래적 성향에 입각한 설명 등이 그렇다. 뒤르켐은 족외혼의 파생물이라 보았다. 그러나 족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

    레비-스트로스는 ‘관여적 변별’이라는 구조주의적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관여적 변별’이란 두 항(또는 그 이상의 항)의 차이가 성립하는 한 방식이다. 예컨대 ‘billard’와 ‘pillard’는 ‘b’와 ‘p’를 통해 변별되고, 이 점에서 관여적 변별을 이룬다. 이 관여적 변별(동북아의 음양사상도 한 형태다)이 문화의 기본 구조이고, 이 구조에 따라 대칭과 평형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교호(交互)사촌(외사촌)의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경우 평행사촌(친사촌)끼리의 결혼은 금지하나 교호사촌의 경우는 허용한다. 왜인가? ‘남-남’ ‘여-여’의 경우 관여적 변별이 허용되지 않으나 ‘남-여’ ‘여-남’의 경우는 허용되기 때문이다.

    장기판의 안, 장기판의 밖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데리다, 라캉, 들뢰즈(왼쪽)와 가타리

    신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전생애에 걸쳐 몰두한 주제다. 기존의 신화 이해는 ① 한 사회의 근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② 자연현상에 대한 전(前)논리적 해석 방식으로 ③ 사회관계의 반영으로 ④ 억압된 감정의 유출로(정신분석학) 제시되었으나, 레비-스트로스는 이 문제 역시 구조적으로 접근한다.

    신화란 일종의 ‘메타언어’다. 즉 각 민족의 사유구조가 투영된 것이다. 따라서 신화의 ‘내용’ 자체에 어떤 심각한 의미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각 민족이 세계를 바라보는 사유구조의 형상화인 것이다. 이 점에서 전세계 곳곳의 신화들이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모든 신화들이 특수한 경험이나 내용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인류의 어떤 보편적인 사유구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신화를 “보편적이고 무인격적이고 무시간적인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신화 연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휴머니즘(인간중심주의) 비판을 공고히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인간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세련된 인간주의는 자기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인간주의는 인생보다 세계를, 인간보다 생명을, 자존심(자기 사랑)보다 타자에 대한 존중을 먼저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현대사상의 기본 흐름인 ‘바깥의 사유’ ‘타자의 사유’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현대사상의 기본 입장은 반(反)주체주의다. 그것은 곧 궁극적 의미가 주체나 ‘나’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하는 작업의 목적은 “자아를 ‘인류의 우리’ 속에서 해체하는 것”이고 또 “인류를 자연 속에 통합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세계는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 일원의 구도, 즉 ‘대위법적 방법’에 따라 사유한 세계다(대위법은 음악용어다. 두 계열의 소리가 서로 대조되기도 하고 융합되기도 하면서 진행하는 음악기법을 말한다). 그는(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을 거대한 대위법적 구조로 파악했으며, 이 점에서 그 자신의 표현대로 ‘초합리주의(superrationalism)’의 사유를 건설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우주를 거대한 수학적 하모니로 보듯, 레비-스트로스는 문화도 그 근저는 거대한 수학적 구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특권적 자기 이해를 비판함으로써 인간이란 그 거대한 음악의 한 음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단적 야만이 표출된 현대사회, 그리고 타자를 억압함으로써 팽창을 거듭해온 제국주의 사회가 인간 주체에 대해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에 입각해 있음을 폭로하려 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바깥으로부터 온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친족체계를 비롯한 미개사회의 문화가 완벽하게 기호학적인 코드로 돼 있음을 말한다. 이런 생각은 그런 구조가 영원한 전체이자 하나의 순환체계라는 것, 친족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가역적(可逆的) 관계에 놓인다는 것, 근친혼의 금지는 친족체계의 대칭과 평형을 위해서라는 것, 혼인이란 심리적·정치적·경제적 문제이기 이전에 논리적·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생각의 한계는 현대사회에서가 아니라 미개사회 자체에서 발견된다. 마셜 살린스는 피지 섬의 한 신화를 제공한 바 있다.

    “‘최초의 인간’은 다만 한 사람이었으며, 늙은 처와 세 딸을 거느리고 비타레비의 서쪽 해안 근처에 살고 있었다. 주변에는 딸들의 결혼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노인은 처를 죽이고 대신 딸을 처로 맞이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딸들은 파도에 밀려온 젊고 잘생긴 이방인을 발견하고, 그를 간호한 후 그와의 결혼을 진행시켰다. 젊은이는 노인에게 식량이 되는 식물의 재배를 답례로 약속하면서 결혼을 신청했다. 노인은 화가 나서 거절하면서, 딸이 탐나면 구체적으로 예의를 갖추도록 요구했다. 젊은이는 자신과 더불어 파도에 밀려온 고래를 생각해내고, 이 땅의 사람들이 고래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고래의 앞니 네 개를 뽑아 그것을 답례품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고래 이빨’을 뜻하는 ‘타바’라는 이름의 이 젊은이는 신화 중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한 이야기를 꾸며냈다. 숲을 개간해 이 이빨들을 심으면 8일 내에 식량들이 수없이 증산된다는 것이다. 이 말에 넘어가 노인은 떨떠름하게 딸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 대가로 몇 개의 법을 만들어냈다. 첫째, 이후 고래 이빨은 그 영웅(젊은이)의 이름을 따 ‘타바’라고 부른다. 둘째, 결혼시키는 답례로 이 고래 이빨을 주어야 한다. 셋째, 이후 파도에 밀려오는 자들이 있으면 죽여서 먹는다.”

    우리는 이 신화에서 ‘바깥’의 문제를 발견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모든 결혼은 평형의 문제이기 때문에 평형을 이루는 체계 내의 문제이며, 바깥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신화(중요한 것은 이런 유의 신화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에서 젊은이는 외부에서 오며, 따라서 교환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하나 여기에서 권력의 문제를 짚어볼 수 있다.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권력이란 곧 자리의 분포를 말한다. 그러나 피지의 신화는 “권력은 바깥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건국신화에서 권력이란 원칙상 ‘단 한번’ 발생한다. 따라서 불가역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주체의 바깥을 보았지만, 그 바깥의 바깥을 보지는 못했다.

    젊은이와 딸의 결혼은 평화로운 교환과 평형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의 관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혼은 자연의 문제, 자연과 문화의 경계선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비대칭적인 결혼을 ‘실패한 결혼’으로 봄으로써 자신의 이론구조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레비-스트로스의 한계를 통해서 우리는 ‘구조의 바깥’을 생각하게 된다. 구조의 바깥, 코드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거기에는 카오스와 욕망이 있다. 구조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것은 카오스와 욕망이다. 구조/코스모스는 이 욕망/카오스를 길들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과 카오스는 결코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으며 안정된 듯한 구조/코스모스 아래에는 늘 욕망과 카오스가 물결치고 있다.

    1968년에 발생한 대대적인 혁명은 구조주의적 세계관에 큰 타격을 가했다. 이제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한 구조주의는, 마치 자연과학에서 표면적인 안정성과 법칙성 아래에서 분자들의 요동이 발견되었듯, 그리고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이야기되듯, 세계의 어느 한 층위, 한 테두리 내의 이해로 전락했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사유양식’, 그러니까 주체보다 구조를, 실체보다 관계를, 내용보다 구조를 파악하는 방식은 이후 사상들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라캉은 인간 무의식을 구조주의적 방식으로 파헤침으로써 근대 주체철학에 타격을 가했다. 특히 주체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특히 유아기에 형성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이후 현대사상의 전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튀세, 푸코, 부르디외는 사회적 장(social field)을 이해하는 다양한 시각들을 마련했다. 이들을 통해 이제 구조는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형태로 이해되기 시작하며, 주체에

    대해서도 다시 적극적인 탐구가 시작되었다. 이런 구조주의적 사유양식들과의 대결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차이의 존재론 및 유목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등장하게 되며, 이런 사유들이 오늘날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사유의 출발점에는 구조주의가 놓여 있으며, 구조주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유를 따라잡는 첩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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