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음악을 눈으로 듣다보니 곧 식상해지지요”

30년 DJ 외길인생 걸어온 김기덕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3-05-26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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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매체 전성시대라지만 라디오의 위력은 만만치 않다.
    • MBC 라디오 ‘골든 디스크’의 DJ 김기덕씨를 보면 이를확인할 수 있다. 김씨는 지난 1973년 라디오 부스에 앉은 이래 30년 동안 라디오 DJ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김기덕씨가 말하는 한국인의 팝 취향과 흥미진진한 방송가 뒷얘기.
    “음악을 눈으로 듣다보니 곧 식상해지지요”
    MBC PD(국장급 제작위원)이면서 디스크 자키(DJ)로 활약하고 있는 김기덕(55)씨. 그는 지난 4월로 라디오 진행 30년을 맞았다. 1973년 4월1일부터 만 22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불가피한 경우 녹음으로 대치한 적이 있었다지만) ‘2시의 데이트’를 진행한 데 이어 ‘11시 골든 디스크’를 8년째 맡아오면서 30년 방송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

    변화와 속도의 시대에 30년간 쉼 없이 방송을 해왔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청취자 역시 같은 목소리에 때로 식상할 법도 하련만, 오히려 10대 소녀가 40~50대 주부가 되어서도 그의 목소리에 변함없이 가슴이 설렌다고 하니,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분명 그에게 어떤 카리스마가 있으리라. 비 오는 날 그를 만나러가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서울 여의도동 MBC 사옥 7층 방송실에서 김씨는 구수한 입담을 풀어가며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목소리로 만나는 그는 화끈하고 열정 넘치는 사람이지만, 방송을 진행하는 그의 표정은 매우 담담해 보였다.

    부스 안에서 김씨는 아무런 원고도 없이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조정실의 버튼을 작동하고 있는 이종호 기술부차장에게 물었다.

    -원고도 없이 혼자서 진행합니까.



    “네. 작가가 있지만 거의 혼자서 진행하시죠. 이슈나 주제에 따른 자료, 메모만을 가지고 저렇게 혼자 진행합니다.”

    -까다롭거나 깐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나요? 김기덕 국장은 매우 푸근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라디오에서 듣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김국장과 10년 동안 함께 일했지만 한번도 의견충돌을 일으켜본 적이 없어요.”

    -라디오를 통해 보는 DJ 김기덕은 때로 건방지고, 독선적으로 보이는데요.

    “정반대입니다.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같지요.”

    방송이 끝나자 김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필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라디오 방송 진행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MBC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1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당시 라디오 최고 인기 프로그램인 ‘2시의 데이트’ 진행자가 사정이 생겨 진행을 못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타로 나섰는데, 그것이 제 운명을 바꿔버렸죠(웃음).”

    4각봉투, 예쁜 엽서, 팩스, 인터넷…

    김기덕씨는 대학시절부터 방송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용산고를 나와 동국대 연극영상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시절 학교 방송국 실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접 쓴 작품인 ‘파도소리’로 전국 대학방송 드라마 경연대회에서 연출상을 받았고, TBC가 주최한 경연대회에서 ‘계룡산 사이비 종교’를 르포 취재해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졸업 후 MBC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면서 DJ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그에게 DJ 외길 인생 30년은 어떤 의미일까.

    “제가 잘났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죠. 영리한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찾아 떠나지 않습니까. 저의 DJ 경력 30년이 기네스북에도 오른 모양인데, 자랑할 만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소극적이라서 다른 길로 못나갔어요. 안주한 거죠.”

    1970년대 군사문화에 짓눌린 암울한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은 음악으로 울분을 분출해냈다. 톡 쏘는 듯한 그의 진행에서 시원함을 느끼고, 따뜻한 그의 목소리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도 했다. 아마 이것이 당시 10대와 20대 젊은이의 가슴에 파고들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신인인 김기덕씨가 꾸준히 팬을 확보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일까요.

    “젊은이들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가잖아요. 자유롭고 진취적이죠. 저 역시 젊었고 그만큼 기존 방송과 다르게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틀에 박힌 진행은 하지 않았고요.”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우선 사연을 보내는 수단이 무엇인지에 따라 시대를 가를 수 있어요. 1970년대엔 4각 봉투에 사연을 보냈습니다. 80년대 들어서는 엽서의 전성시대가 왔죠. 시대가 암울할수록 엽서는 화려해지고 현란해졌어요. 그 속에 꿈과 낭만, 외로움, 사랑이 담겨 있었죠. 지금도 기억에 선명합니다만, 엽서를 이어서 7~8m로 길게 만들어 예쁜 그림을 그리고 사연을 써넣은 것이 있었어요. 그런 엽서를 만들려면 한두 달은 족히 걸렸을 거예요. 그런 작품들을 모아 예쁜 엽서전을 열기도 했죠. 그런데 80년대 말부터 사실적인 현장의 얘기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노동현장의 아픔, 부박한 현실을 적은 글들이었어요. 그러다가 팩스 시대로 접어들었죠. 팩스는 간단 명료한 언어가 주를 이룹니다. 간명한 문장 하나에 촌철살인의 담론이 담기는가 하면, 배를 쥐고 웃을 콩트도 많았죠. 90년대 중반부터는 인터넷 사연들이 대다수였어요. 팩스보다는 훨씬 감수성이 풍부하고, 개성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시대를 보는 이념적 스펙트럼도 넓어졌고요.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어요. 어릴 때의 추억을 반추하는 사연이 많다는 거죠. 못살았던 얘기, 친구 이야기, 여고시절 사연 등이 그것이에요.”

    -그 중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최근에 40대 주부가 보낸 사연입니다. 반찬이라고는 김치와 간장이 전부이던 어린 시절, 아버지와 밥상을 같이했대요. 자신들의 밥은 간장에 비벼져 언제나 새까만데 아버지의 밥은 비빌수록 노래졌다는 겁니다. 엄마가 아버지 밥에만 몰래 계란을 넣어주셨다는 거죠. 그때는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는 사연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계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며 계란 프라이를 할 때마다 어렵던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진다는 거예요.”

    아내와의 말다툼이 그대로 방송돼

    -생방송으로 진행하다 보면 종종 실수도 했을 것 같은데요.

    그는 한마디로 ‘실수 퍼레이드였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실수할 때 오히려 청취자들이 좋아하기도 해요. 왜 그럴까, 나름대로 분석해보니 교과서적인 진행만 계속되면 청취자들이 답답함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실수를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기억에 남는 실수가 있나요?

    “식당 배달소년이 ‘떡국 왔어요’라고 한 말이 그대로 방송에 나간 일이 있지요. 말없이 방송실에 떡국을 넣어주면 되는데 이 소년은 그렇게 소리 지르고는 책상에 떡국을 펼쳐놓은 겁니다. 부랴부랴 스태프가 들어와서 소년을 데리고 나갔죠. 또 한번은 엔지니어와 사인이 안 맞아 제가 투덜거린 내용이 그대로 나간 적도 있습니다.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무의식중에 ‘빌어먹을 놈의 게 왜 이래’ 하고 투덜거렸나 봐요. 그게 그대로 방송이 돼 한동안 웃음거리가 됐죠.”

    김씨는 아나운서인 아내 이명순(51)씨와 사내 연애를 하던 때의 일화도 들려줬다.

    “초임 사원 시절에는 허덕이게 마련이잖아요. 쓸 것은 많은데 월급은 빈약하고. 그래서 당시 입사 동기인 아내에게 종종 돈을 빌려 썼어요. 그 돈은 주로 아내와의 데이트 비용으로 썼고요. 아내 돈이긴 하지만 데이트 비용으로 쓰다 보니 조금 억울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돈을 갚는 것을 미뤘지요. 몇 달이 지나니 아내가 갚으라고 재촉을 하는 겁니다. 야속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미뤘는데, 어느 날 방송을 하는 중에 아내가 스튜디오로 들어왔어요. 노래가 나가는 시간이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방송에 ‘돈을 내놔라’ ‘아직 못 내놓겠다’ 하는 말다툼이 그대로 나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빚쟁이한테 쫓겨다니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지요.”

    -기계적인 실수도 있었겠어요.

    “물론이지요. 방송중에 살짝 조는 경우가 있어요. 어느 날 음악을 틀어놓고 잠이 들었나 봐요. 음악이 끝나고도 레코드판이 계속 헛바퀴를 돌고 있으니 당연히 난리가 났죠. 방송에서 2~3초는 정말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계속 쉭쉭 판 튀는 소리가 나갔으니 목이 날아가도 모자랄 판이었죠. 그 뒤로 컨디션이 안 좋거나 졸음이 올 때는 긴 음악을 틀어놓았어요(웃음).”

    -그런 실수들은 제어가 안 됩니까.

    “옛날에는 DJ 혼자 마이크를 키우고 줄이고 선곡하고 소개했어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하지만 저는 원 없이 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방송에는 제 인생과 철학이 녹아 있었죠.”

    “음악을 눈으로 듣다보니 곧 식상해지지요”

    지난 4월16일 그의 방송 진행 30주년을 축하하는 음악회가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렸다. 그의 오른쪽은 부인 이명순씨.

    -음악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선곡 기준은 무엇입니까.

    “계절, 날씨, 이슈, 행사에 따라 다르죠. 예를 들어 장마철에는 차분하고 가라앉은 노래를 내보낸다든지, 눈 오는 날엔 낭만적이고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곡들을 내보냅니다. 선곡은 반찬과 같아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방송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나죠.”

    -한국인들은 어떤 팝을 선호하나요?

    “아름다운 멜로디가 있는 팝이죠. 애절하면서도 요란하지 않은 것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요즘에는 컨트리 송과 록 발라드가 인기고요.”

    김씨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아바의 ‘댄싱 퀸’, 퀸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체시아 챈과 케니 비의 ‘사랑의 수산나’, 카렌 카펜더의 ‘탑 오브 더 월드’ 등을 한국인 최고의 애청곡으로 꼽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청취자들의 취향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한국인들은 어떤 가수를 가장 좋아하나요.

    “두말할 필요 없이 비틀스죠. 얼마 전 전국의 네티즌 18만6673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베스트 100곡과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조사를 했어요. 여기에서 비틀스 곡이 ‘예스터데이’ ‘렛 잇 비’ ‘헤이 주드’ ‘아이 윌’ 등 네 곡이나 선정됐죠. 다음으로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비지스, 스콜피온스, 본 조비, 조지 마이클, 존 레논을 좋아하더군요.”

    -왜 비틀스를 아직도 좋아할까요.

    “철학적인 가사, 소박하고 절제된 보컬이 팬들을 붙드는 매력이라고 봅니다. ‘렛 잇 비’를 보십시다. 저는 이 노래를 소개할 때마다 ‘냅 둬’라고 우리말 제목을 부연합니다만,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자’고 하는 노래의 메시지는 우리 폐부를 파고듭니다. ‘예스터데이’를 봅시다. 떠나간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은 이 노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연상하게 하죠. 영국의 BBC 방송은 이 노래를 20세기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30여 년 동안 한번도 정상 자리를 뺏겨본 적이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팝 음악이 전성기를 이뤘던 것은 1970년대인 것 같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1970년대에는 팝이 우리 노래시장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젊은이의 90%는 팝을 들었을 걸요.”

    -왜 팝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어필했다고 보십니까.

    “멜로디 때문이죠. 그전까지 가요는 매우 단조롭잖아요. 젊은이의 욕구를 담는 데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팝의 멜로디에는 좌절, 방황 등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통기타 음악과 포크 가수를 절대적으로 추종했던 거죠. 메시지가 분명했거든요. 존 바에즈나 밥 딜런의 노래는 반전과 반물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어요. 물질에 대한 굴종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거였죠. 당시 체제에 억눌렸던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들의 노래는 충격 그 자체였어요.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가 밥 딜런의 영향을 받았고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이 그 뒤를 이었죠.”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1980년대의 팝은 컬러TV 시대와 함께 새로운 전환기로 접어들었죠?

    “그렇죠. 컬러TV와 함께 영상시대로 접어들었죠. 팝 음악계에 뮤직 비디오가 도입되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변한 거예요. 하지만 노래의 생명력은 단축됐어요. 스테디셀러를 기대하기 어렵고 길어봐야 몇 개월이죠. 전엔 2~3년 가는 노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감각적이고 말초적이잖아요. 그것은 순간일 뿐 생명력과는 거리가 있죠. 음악을 눈으로 듣게 되니 한두 번 보면 싫증이 나고 말아요. 하지만 귀로 들으면 절대로 식상하지 않죠. 오래 기억에 남고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생명력이 있어요. 이는 라디오의 생명력이기도 하고요.”

    -1990년대는 어떻습니까.

    “흑인 감각이 주류로 등장합니다. 마이클 잭슨 이후 랩, 힙합 등 흑인 음악이 전성기를 이루죠. 2000년대에는 아직 특정한 것은 없지만 조용한 음악, 예술성이 가미된 음악이 폭넓게 사랑을 받고 있어요.”

    -시대별로 팝 음악의 성향이 확실히 구분됩니까.

    “음악에도 분명히 주기가 있습니다. 자극적 댄스, 랩이 유행하다가도 서정적 음악이 유행하죠. 누가 의도하는 것은 아닐 테고 팬의 정서적 변화에 순응하는 결과가 아닐까요.”

    김씨는 이런 내용들을 책으로 엮어냈다. ‘김기덕의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베스트 100’ ‘장르로 본 팝의 역사’ ‘팝이 가요에 끼친 영향’ 등이 그것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팝이 외국음악이지만 외국인들이 그에게 자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팝 음악 방송을 30년 이상 진행한 유일한 방송인으로서 그는 팝 음악가들의 자료 창구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도 그는 팝에 관한 원고를 매일 한두 시간씩 쓴다.

    “음악을 눈으로 듣다보니 곧 식상해지지요”

    영등포중 1학년때 형 김종성씨(사진 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오른쪽).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쓸 수 있다는 게 보람이죠. 그럴 때는 신명이 납니다. DJ 외길 30년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인기가 떨어지면 금방 가는 것이 방송 인생 아닙니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노력이 한국음악의 지평을 넓혔다고 자부한다. 특히 1990년대 초 등장해 대중음악계에 혁명을 일으킨 ‘서태지와 아이들’과 더불어 대중음악 진보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서태지는 팝을 우리 가요에 접목시켜 승화시킨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리듬 앤드 부루스, 랩 등의 흑인음악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를 우리것으로 만들어 우리 젊은이들을 빨아들였죠. 단순히 미국을 따라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한국적 음악으로 재탄생시켰던 겁니다. 그래서 이들을 한국 대중음악의 혁명가들로 볼 수 있는 거죠.”

    - 진행하는 프로그램마다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청취자들에게 저는 ‘봉덕이 오빠’로 통해요. 이름이 풍기는 그대로 청취자들은 저를 편안하게 느낍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본명도 김봉남이잖아요. 사람들은 서구적인 앙드레 김도 좋아하지만, 향토적인 김봉남도 좋아합니다. 또 저는 방송에서 정치적 발언이나 제 주관을 가능하면 배제합니다. 음악에 메시지가 다 담겨 있는데 제가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주제 넘는 일 아닙니까. 또 청취자의 상상력과 판단력을 구속할 수도 있고요. 제 역할은 청취자들에게 편안함과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점들이 장수 비결이지 않나 싶네요.”

    스토커 여성 팬 때문에 고생하기도

    -DJ도 엄연히 인기 직업이고 ‘선곡’이라는 ‘권력’도 갖고 있기 때문에 유혹하는 사람도 꽤 많았을 것 같습니다. 스캔들도 좀 있었을 법한데….

    “저는 의외로 보수적입니다. 겉보기에는 대단히 서구적이고 현대적일지 모르지만, 유교적 가풍에서 자란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고리타분하다는 말도 듣지요.”

    -그렇더라도 인기인에게 따라붙는 스캔들은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일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제 프로그램 마니아들 중 병적인 사람도 더러 있어요. 방송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라고 여기는 편집증적인 사람들이지요. 제가 하는 멘트가 모두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믿는 거죠. 한 여자 팬은 밤낮없이 제게 전화를 걸고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한번은 수위아저씨들과 시비가 붙자 그 팬이 품고 있던 칼을 휘둘러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제가 방송에서 청취자들의 아픔과 고독을 위로해주는 말을 하다 보니, 일부 청취자들은 저를 마치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거죠.”

    -한때 PD들이 가수와 매니저들로부터 홍보비 명목으로 거액을 받아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비슷한 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죠?

    “1994년도의 일입니다. 어떤 매니저가 저를 음해하고 모함하고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만, 오해는 말끔히 씻겼습니다. 물론 로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 부분에 관한 한 매우 엄격합니다. 방송만 듣고 사람들이 갖는 선입견과 달리 저는 비사교적이고 비활동적인 사람입니다.”

    - 매일 판에 박힌 일을 하면 단조롭고 지루하지 않습니까.

    “물론 변화가 있어야죠. 안주하면 도태됩니다. 30년간 매일 방송을 했지만 그 내용은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라디오 방송이 많이 생깁니다. 모바일 방송이 나오고 다매체 시대가 오고 있는데, 안주해서는 안 되죠. 저는 그런 면에서 자신이 있습니다. 자료가 풍부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팝 가수가 있습니까.

    “물론 있지요. 올리비아 뉴턴존을 좋아해서 그녀의 곡을 많이 틀어주려고 했죠(웃음). 아라베스크도 좋아해 ‘2시의 데이트’ 3000회 기념 특집 때 초청까지 했어요. 제럴드 졸링 음악은 4시간 동안 방송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토니 페이지, 케니 지, 호세 팰리치아노 등의 곡도 많이 틀었습니다. 케니 지는 흐느끼는 듯한 색소폰 연주가 우리 정서에 잘 맞고, 팰리치아노는 끈끈한 목소리가 매력이죠. 이들의 국내 공연 진행을 제가 직접 맡기도 했어요.”

    -DJ의 취향과 청취자의 취향이 다를 수도 있는데요.

    “당연하죠. 그러나 제가 정보 제공 차원에서 음악과 가수를 소개하면 청취자들도 대부분 동의합니다. 저는 청취자의 대변자이면서 동시에 음악의 길잡이 역할도 하니까요.”

    -젊은이들에게 서구 중심의 사고나 가치관을 키워주는 팝문화를 전수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세계화 시대에 상당히 고리타분한 지적이군요(웃음). 우리것이라고 좋고, 외국것이라고 문제가 있다는 발상은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팝을 좋아하지만 사실은 대금의 명수입니다. 고교시절부터 대금 등 우리 전통악기를 좋아했어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도 이라크전쟁 후 미국의 강대국 논리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특히 미국의 영향력은 음악,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크게 나타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미국의 대중음악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팝은 가장 민족적 자존심이 강하다는 프랑스의 샹송, 기교가 뛰어난 이탈리아의 칸소네까지도 눌렀고, 지금은 세계음악의 99%를 차지한다고 봐야 하니까요. 하지만 미국의 오만과 광기를 고발하는 것도 팝입니다. 밥 딜런의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미국을 표방하고 선호하는 것만이 아닌, 미국의 병적인 요소를 잘 담아내고 있어요.”

    -흔히 미국 음악이 떴다 하면 바로 우리 방송사, 레코드점을 휩쓴다고 하는데요.

    “전혀 모르는 말씀입니다. 미국에서 히트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반드시 히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퀸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는 미국 차트에는 없는 곡입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정서와 어울려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죠. 미국의 상업주의에 오염될 만큼 우리 음악 풍토에 중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

    김씨는 동남아는 물론 중국 일본에서 불고 있는 한류(韓流)를 예로 들었다. ‘팝의 한국화’가 아시아권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 그만큼 우리 문화 콘텐츠가 독립적이고 개성적으로 승화됐다는 설명이다.

    잡담 수준의 방송은 배제

    -다른 이야기를 할까요. 매일매일의 방송 소재는 어떻게 구하십니까.

    “박세리가 우승하면 그것을 주제 삼아 방송을 진행하죠. 그녀의 건강미, 언제나 역전하는 정신력, 우리 민족의 저력과 자신감, 이런 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얘기죠. 이라크전쟁 때는 평화와 반전에 얽힌 팝 이야기를 엮어갔어요. 그러나 메시지를 강요하지는 않아요. 그렇게 얘기하지 않아도 청취자는 다 알거든요. 오히려 저를 리드해갈 정도입니다.”

    김씨는 신문을 많이 읽는다. 독서량도 많은 편. 친구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유익한 내용이 나올 때면 재빨리 메모한다. 교회의 목사 설교 중에서도 참고가 될 만한 것은 그대로 방송에 옮기기도 한다.

    -상투적인 질문입니다만, DJ 생활 30년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까.

    “후회할 겨를이 없었다고 봐야죠.”



    그는 현재 MBC 국장급 제작위원이다. 즉 샐러리맨이다. 그래서 수입도 월급 이외는 없다. 프리랜서로 활동할 경우 수입이 몇 배로 뛸 수 있다. 얼마 전에는 몇몇 기업체에서 1억~2억원을 줄테니 방송 CF에 출연해달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사규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모두 거절했다.

    -프리랜서로 뛰면 수입이 더 많아질텐데, 그럴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프리랜서보다는 이 길이 편합니다.”

    그는 잡담 수준의 방송을 배제한다고 강조했다. 인격과 품위를 유지하며 따뜻하게 청취자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것이 바로 30년간 DJ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방송할 때마다 항상 신인 같은 기분이에요. 지금도 청취자의 의도를 꿰뚫어보지 못하고 동문서답할 때도 많거든요(웃음). ‘방송은 할 때마다 첫 경험’이란 말이 제게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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