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 자살로 본 공단 난맥상

무리한 실적경쟁, 원칙 없는 업무처리의 ‘쌍끌이’ 경연장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3-08-22 15:1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8월4일 국민연금관리공단의 한 직원이 스스로 목을 맸다.
    •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언론보도로 알려진 그의 자살은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투신자살 여파에 가려 세인들의 지속적 관심을 끌진 못했다.
    • 그러나 그의 죽음의 이면엔 연금공단의 총체적 부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 자살로 본 공단 난맥상
    8월4일 자살한 국민연금관리공단(이하 연금공단) 직원은 연금공단 남원지사(남원시 향교동) 가입자관리팀 소속 송모(40) 차장. 송차장은 이날 밤 10시30분쯤 남원지사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자신의 책상에서 채 5m도 떨어지지 않은 창가 기둥에 전깃줄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경찰이 전하는 당시 상황부터 보자. “고인(송차장)의 부인 Y씨(37)와 직장동료 K씨(36)가 사체를 발견하고 112와 119에 신고했다. 출동해보니 K씨가 고인의 사체를 사무실 바닥으로 내려놓은 뒤였다. 검안 결과 사체에선 외상이나 반항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고인이 직접 벗어놓은 듯한 신발도 가지런했고, 지갑 등 그의 소지품도 서류봉투 속에 고이 정돈돼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준비된 자살’로 보였다. 발견 당시 유서가 고인의 PC 모니터에 띄워져 있었고, PC 스피커에선 조용한 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남원경찰서 형사계 김종석 순경)

    경찰 조사과정에서의 가족 및 참고인 진술, 연금공단 노사(勞使)가 공동으로 꾸린 진상조사위원단 조사내용을 종합해보면, 숨진 송차장의 이날 행적은 이렇다. 지난 8월3일까지 1주일간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낸 그는 8월4일 다시 출근한 뒤 부인에게 밀린 업무가 많아 늦겠다고 전화했다. 그러나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부인이 남편의 휴대전화로 연락해도 받지 않아 K씨에게 연락을 취해 함께 사무실로 찾아갔으나 실내조명이 꺼져 있어 문을 열어보니 송차장이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자살, 그러나 석연찮은 여운

    정황들을 종합해볼 때 송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개인적 동기는 희박해 보인다. 다소 세심한 성격이긴 했지만, 그것말고는 대인관계도 원만했던 것으로 지인(知人)들은 기억한다. 진상조사위원단에 참여했던 연금공단 노동조합 박성기 지도위원은 “송차장과는 전에 3차례 술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다. 그가 다소 내성적이고 순수한 성격이긴 했지만 술자리에선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모습도 곧잘 보였다”고 말한다.



    자살을 택할 가정사적 동기 또한 뚜렷한 게 없다. 송차장 부인이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송차장의 건강상태도 굳이 자살로 귀결돼야 할 만큼 나빴던 건 아니었다. 지난 6월 건강검진에서 간경화 소견이 나오긴 했지만 그동안 건강에 별 이상이 없었던 데다(송차장은 간염 보균자였지만 간염으로 고생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오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다른 병원에서 재검사를 받아볼 계획이었다는 것. 또 송차장이 지난해 5월 수면제를 잠시 복용한 적은 있으나 이는 자살기도가 아니라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잠을 못 이뤘기 때문이며 이 일로 해서 병원으로 실려간 적도 없다는 것. 단 진상조사위원단에 따르면 지난해 한 번 전신마비가 와서 1주일 가량 입원한 적은 있다고 한다. 병명은 스트레스성 증후군이었다. 송차장은 부인이 3번의 유산 끝에 어렵게 얻은 아들(6세) 하나를 두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유족측은 조만간 산업재해보상을 받기 위한 행정소송을 제기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찰과 연금공단 진상조사위원단은 물론이고 유족 또한 사인(死因)이 자살로 인한 것이라는 데 이의를 표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서는 송차장의 자살동기와 관련해 석연찮은 여운을 남긴다. ‘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이란 제목의 A4용지 3쪽 분량 유서에서 송차장은 ‘국민연금에 온 지도 벌써 4년7개월이 지났지만 슬픔이 훨씬 더 많았고, 보람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오늘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보험료를 조정하겠다는 문서를 만들었다’고 괴로운 심경을 털어놨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지난해에는 납부예외율 축소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는데 산을 하나 넘고 나니 소득조정이라는 더 큰 강이 버티고 있다’며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부실한데 5년, 10년,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정말 두렵다’고 한 부분이다. 그에게 그토록 과도한 자괴심과 중압감을 떠안긴 ‘소득조정’과 ‘납부예외율 축소’는 대체 어떤 업무길래 끝내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한 걸까.

    어찌됐건 유서 내용으로 미뤄볼 때 송차장의 자살이 자신의 담당업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연금공단 내부 사정에 밝지 않은 절대 다수의 국민에겐 송차장의 유서가 주는 의미래봐야 ‘강 건너 불구경’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언론은 국민연금 문제와 관련해 대부분 연금보험료 납부액과 수령액, 연금기금 운용 등에만 관심을 쏟아왔다. 그러나 송차장 자살의 이면을 조금만 들춰보면 현재 연금공단 내부의 부실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총체적 국면에 접어들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숨진 송차장은 이른바 자격업무 담당직원. 통상 연금공단 직원의 업무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자격·징수·급여업무가 그것이다. 이 중 자격업무는 가입자 이력을 관리하며 보험료를 조정하는 게 주된 일.

    1989년 의료보험공단(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송차장은 연금공단이 인력을 증원한 1999년 1월 연금공단으로 옮겼다. 자살하기 전까지 4년7개월간 연금공단에서 일한 그는 서울의 지사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고, 자격업무를 맡은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원지사에선 본래 행정지원팀 소속이었다가 지난해 7월 가입자관리팀으로 발령받았다. 연금공단 직급은 1∼6급으로, 전국의 각 지사장들은 1급 직원이다(2급 지사장도 2명 있음). 4급인 송차장은 대리다. 그러나 대리승진 이후 6년이 지나면 ‘차장대우’가 돼 차장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남원지사의 관할구역은 남원시와 임실군, 순창군, 무주군, 진안군, 장수군 등이다. 이 중 진안군은 송차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원지사의 소속 직원은 모두 28명. 이 가운데 자격업무 담당자는 4명으로, 송차장, 그와 업무대직관계에 있던 동료직원 S씨(35), 여직원 2명이다.

    송차장이 유서에서 언급한 ‘소득조정’과 ‘납부예외율 축소’는 과연 어떤 업무일까.

    소득조정이란 신고소득이 낮은 가입자의 실제소득을 파악한 뒤 연금보험료 부과기준이 되는 표준소득월액의 등급(1∼45등급)을 그에 맞춰 상향조정하는 업무다. 또 납부예외자란 연금보험에 가입은 되지만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는 가입자를 말한다. 추후 소득이 발생할 때 보험료를 납부하면 되며, 군입대자나 학생, 재소·감호자, 행방불명자, 실직자 등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납부예외율 축소는 납부예외자들 가운데 납부예외 사유가 해소된 이들에게 소득신고를 독려해서 보험료를 납부토록 함으로써 납부예외자 비율을 줄여나가는 업무다.

    연금공단은 지난해부터 납부예외율 축소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해왔다. 2003년 6월말 현재 전국의 국민연금 가입자는 1689만7000여 명. 사업장(직장)가입자는 649만7000여 명, 지역가입자는 1015만7000여 명이다. 납부예외자는 전체 지역가입자 중 42%인 431만9000여 명이나 된다.

    연금공단이 소득조정과 납부예외율 축소에 목을 매는 까닭은 소득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업장가입자와 그렇지 않은 지역가입자 간 신고소득 편차가 커 그동안 줄곧 형평성 문제가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연금보험료가 소득에서 원천징수되는 ‘유리지갑’인 사업장가입자들과 달리 보험료를 직접 납부해야 하는 지역가입자들에겐 소득조정과 납부예외율 축소가 매우 민감한 사안임을 뜻한다.

    송차장의 동료직원 S씨는 “대도시에 소재한 1급지 지사들의 경우 지난 3월부터 소득조정을 해왔지만, 2급지인 남원지사에선 6월부터 시작했다. 반면 납부예외율 축소는 꾸준히 해왔다”며 “송차장이 이들 업무의 제도적 맹점에 대해 회의를 느껴온 건 사실이며, 이는 경찰조사에서도 진술한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직원 1인당 소득조정업무 2177건

    문제는 이들 업무의 양이 과중해 담당직원들의 업무부하가 극심하다는 점. 연금공단 노조에 따르면 공단측이 올해 3월 개시한 소득조정 1단계 사업의 목표 소득조정대상(가입자의 ‘신고소득’이 연금공단이 자체 기준으로 삼는 ‘신고기준소득’의 60% 미만인 경우) 건수는 무려 106만7000건이다. 반면 전국 80개 연금공단 지사에 근무중인 자격업무 담당자는 490명. 직원 1명당 건수가 평균 2177건에 이른다. 또 8월로 예정된 2단계 사업의 소득조정대상(가입자의 신고소득이 신고기준소득의 80% 미만인 경우) 건수는 232만2000건(추정)으로, 직원 1인당 4738건에 달한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2003년도 1단계 납부예외율 축소사업의 대상 건수도 86만4000건으로 직원 1인당 1763건이나 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송차장이 유서에서 밝힌 자신의 6∼7월 소득조정 건수 3000여 건은 직원 1인당 평균 건수를 훨씬 웃돈 셈이다. 그는 또 8월부터는 5000여 건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유서에 썼다. 유족에 따르면 송차장은 종종 일거리를 집으로까지 들고와 하곤 했다.

    이같은 업무량 폭증 때문에 연금공단은 이른바 ‘국민연금 직장체험 희망자’를 모집, 운영한다. 하지만 명칭만 그럴 듯할 뿐 실상은 앞서 언급한 소득조정과 납부예외율 축소업무 등에 투입하기 위해 뽑는 임시계약직 신분이다. 이는 연금공단이 자체 인력에 비해 업무량이 과다하다는 점을 자인하는 방증이다.

    과도한 업무량도 문제지만, 연금공단 직원들의 소득조정업무 행태를 보면 그야말로 요지경이다. 소득조정시 방문 또는 전화를 통해 가입자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대담하는 절차를 거치는 게 원칙. 하지만 업무가 폭주하고 소득조정 실적은 올려야 하니 책상머리에 앉아 ‘직권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대담 등 절차를 생략하고 직원이 가입자의 신고기준소득을 임의로 상향조정한 뒤 이에 따른 연금보험료 조정결과를 안내문으로 통보해버리는 것. 그런 후 가입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상향조정된 보험료를 징수한다.

    국민연금관리공단 직원 자살로 본 공단 난맥상

    연금공단 노조는 송차장 자살에 대한 철저한 책임규명과 단기평가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한 자격업무 담당직원의 토로.

    “가입자와의 대담을 위해 출장이라도 나가면 하루에 처리가능한 소득조정 건수는 10여 건이 고작이다. 그러나 임의조정하면 하루에 수십 건도 처리할 수 있다. 업무량이 쌓여 있어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담당직원이 소득조정을 하겠다는 안내문만 전체 지역가입자에게 일방적으로 띄운 뒤 장기간 납부예외자였거나 신고소득이 유별나게 낮은 가입자들의 신고기준소득을 임의로 올리는 파행이 잦다. 당연히 가입자는 자신의 연금보험료가 상향조정된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무자들이 소신 있는 일처리를 할래야 할 수 없는 ‘원초적 한계’가 과중한 업무량 속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현 이사장 취임 후 단기평가 전격 도입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런 딜레마의 원인을 전적으로 담당직원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데 있다. 원칙 없는 업무처리를 부추기는 본질적 요인은 정작 따로 있다. 소위 ‘월별평가’로 불리는 단기평가가 그것이다. 연금공단은 그동안 정부투자기관, 정부출연기관, 공기업 등이 통상적으로 시행하는 것과 같이 사업실적을 연간 단위로 평가해왔으나 지난해 6월 현 장석준 이사장 취임 후 공단 경영진은 지난해 말부터 단기평가를 본격 실시했다.

    간략히 말하면, 단기평가는 연금공단 전직원의 업무유형 가운데 계량화가 무의미한 10% 가량을 뺀 나머지 90%의 업무에 대한 평가지표를 만들어 매월 그 실적을 따진 뒤 이를 근거로 전국 80개 지사의 순위를 매기는 평가방식이다. 장이사장은 경제기획원 사무관, 재정경제원 예산실 심의관,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등을 지낸 경제관료 출신. 그가 이끄는 연금공단 경영진이 실적평가를 통해 경영효율을 높이려는 취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금공단 노조는 이미 지난해 12월 ‘엄청난 업무량에 치여 사는 공단 직원의 고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치사의 지경까지 몰아갈 것이 분명하다’며 단기평가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음’을 울렸었다. 하지만 결국 단기평가제가 강행되면서 작금의 문제점들이 파생됐다는 게 직원들의 지배적 견해다. 직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연금공단 노사는 지난 6월20일 임단협에서 일단 올해는 임단협 이후부터 분기별 평가를 하고, 내년에도 분기별 평가를 실시하되 구체적인 시행방안은 노사합의에 따르기로 합의한 상태다.

    2001년과 지난해 연속해서 월별평가를 실시했던 유일한 정부산하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의 경우 지난해에 업무상 스트레스와 과로로 수십 명의 여성 직원이 유산하고 직원 건강검진 결과 각종 업무상 질병이 전년도보다 급증하자 노조가 파업을 강행, 지난해 11월 결국 월별평가를 철회한 바 있다.

    주먹구구식 ‘지역가입자 신고기준소득’

    연금공단의 업무 부실과 관련해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공단측이 소득조정시 적용토록 직원들에게 권장하고 있는 신고기준소득이 아직 법령화되지 않은 데 있다. 연금보험료 부과기준이 되는 신고기준소득을 높이면 자연히 납부해야 할 보험료 액수도 커진다. 공단은 소득조정 실적을 높이라고 직원들을 독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소득조정시에 임의조정 등 직권처리를 하지 말고 가입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 경제상황에서 선뜻 소득조정에 동의할 지역가입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더욱이 연금공단은 신고기준소득을 법령화할 법적 근거가 있음에도 이를 법령화하지 않고 ‘참고자료’로만 활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경우 건강보험료 부과기준을 관련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에 명문화했다. 지난 3월8일과 10일 열린 연금공단의 ‘지역가입자 소득관리사업 추진계획 관련 본부팀장 및 지사장 의견수렴 회의’ 결과를 기록한 문서를 보면, 대다수 가입자들이 법적 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므로 신고기준소득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법령에 명문화할 필요성이 있다는 자체 지적사항이 기록돼 있다. 연금공단 스스로 신고기준소득의 법령화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연금공단 본부(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가입자관리 자격2팀 관계자는 “신고기준소득은 공단 내 연구센터가 국세청 사업소득자료 및 사업장 입지조건 등을 감안한 기준소득에다 가입자 개인의 사업소득 규모, 재산 및 자동차 보유수준을 반영하여 통계모형을 이용해 추론해낸 금액이며, 이 금액을 기준으로 각 지사별로 사업실행단계에서 문제점을 보완해나가라는 취지”라며 “업무량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원칙’대로 일처리를 하면 일부러 실적을 안 살펴도 정상적인 실적이 나온다. 직원들이 말하는 고충은 핑계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과연 그럴까.

    ‘신동아’가 입수한 연금공단 내부문서인 ‘지역가입자 소득관리사업 추진계획(안)’을 보자. 지난 3월 작성된 이 문서엔 전 지역가입자를 대상으로 연 1회 정기 소득조정사업을 추진하되 연간 사업량을 감안하여 사업대상 선정 및 안내·독려시기 등은 전적으로 각 지사가 자율적으로 판단하라고 돼 있다. 또 ‘새로운 소득추정방안’에 의해 산정된 신고기준소득을 활용해 신고소득과 신고기준소득 간 편차 등을 고려할 때 소득조정을 해야 할 개연성이 높은 가입자부터 소득조정을 유도하되 무리한 사업추진으로 인한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해 담당직원의 직권처리를 삼갈 것을 명시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지역여건, 가입자의 성향 및 제반 환경이 지사별로 상이하므로 지사별 특성에 맞게 추진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하라고도 명시했다. 즉 연금공단은 소득조정계획 단계에서부터 ‘자율’과 ‘효율성 극대’를 양립시키는 모순을 보인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담당직원과 각 지사가 알아서 소득조정을 하되 실적은 최대한 올려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송차장이 유서에서 ‘정말 소득조정이 필요한 일이라면 법과 제도로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올려놓고 항의하면 깎아주고 큰소리치면 없던 걸로 해주고… 지금은 이것이 현실 아닌가’라고 쓴 내용과 동일한 사례들이 빈발한다. 신고기준소득이 법령화돼 있지 않다 보니 신고기준소득이 상향조정된 가입자가 자신의 실제소득과 큰 차이가 있다며 강력히 반발하면 다시 하향조정해주는 앞뒤 안 맞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것이다.

    연금공단과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오르는 가입자들의 민원도 부지기수다. 올들어 청와대 인터넷 신문고(www.sinmoongo.go.kr) 공개민원 코너에 접수된 국민연금 관련민원만도 252건에 달한다(8월11일 현재, 비공개민원 제외). 사정이 이러니 가입자가 담당직원의 일방적인 소득조정에 대해 항의하면 담당직원이 관련민원 발생을 우려해 ‘알아서’ 신고기준소득을 ‘원위치’해주는 사례 또한 적지 않다.

    납부예외자의 신고기준소득을 일률적으로 86만4000원으로 산정해놓은 것도 모호한 기준이라는 게 직원들의 이구동성이다. 저소득층과 실직자가 다수를 이루는 납부예외자의 특성상 이들이 몇 개월 동안만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구했다가 그만두곤 하는 게 통례인 데도 특정 신고기준소득을 정해놓고 마구잡이로 적용해버리니 현실과 큰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

    “외국의 경우 연금보험 가입자의 소득 파악을 위한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지만 우리는 제대로 안 돼 있다. 국세청이 확보한 과세자료는 전체 지역가입자의 27%에 그쳐 나머지 73%의 소득이 파악되지 않는다. 이런 과세제도의 결함에 따른 가입자들의 소득 하향·허위신고를 바로잡겠다는 공단의 취지는 좋다. 그러나 73%에 해당하는 가입자의 재산과 자동차 등 일부 지표만 감안해 추정해낸 비합리적인 신고기준소득이 과연 현실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 담당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편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연금공단 노조 이계문(42) 정책실장의 말이다.

    무리한 실적경쟁으로 對국민 마찰 폭증

    이처럼 지역가입자 신고기준소득 자체에 허점이 적지 않은 데도 연금공단측은 단기평가를 통해 실적이 좋은 지사에 포상금을 지급하는 등 실적경쟁을 부추겼다. 지사장들은 “선진(先進) 지사가 되자”거나 “중간순위만이라도 하자”며 실적 제고(提高)를 독려하고 실적이 낮은 직원에겐 은근한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단기평가에서 순위가 처진 지사장이 부장(2급)을 닦달하면 부장은 간부회의 석상에서 차장(3급)에게 실적을 따지고 차장은 다시 대리(4급)와 주임(5급)을 다그치는 식이다. 일부 지사장은 실적이 낮은 지사에 발령받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이렇게 단기평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과도한 실적경쟁이 벌어지고, 송차장이 유서에서 밝힌 것처럼 직원들은 소득조정업무를 ‘울며 겨자 먹기’로 밀어붙이게 된다. 즉 소득조정시 공단이 권장하는 신고기준소득을 가입자에 대한 실사(實査)도 하지 않은 채 전산에 직권으로 입력하는 것이다. 이같은 현행 연금업무 운영의 모순은 가뜩이나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이 ‘궁민(窮民)연금’이 돼버렸다는 여론의 몰매가 쏟아지는 현 상황에서 연금공단 직원들을 가입자들과의 끝없는 갈등상황으로 무방비 상태로 내몬다.

    “공단 직원이면 누구나 국민을 위한 업무를 수행한다는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데 실상은 정반대다. 매일같이 가입자들의 불신에 찬 눈초리를 피하려다 보면 자괴심만 더해간다. 사무실만 나서면 연금공단에 다닌다는 사실을 감추는 직원이 대다수다.” 지난 2월 체납 가입자로부터 욕설과 폭언은 물론 손가락까지 물려 한 달간 치료를 받아야 했던 연금공단 관악동작지사 징수담당 최재호(36) 주임은 “일선 창구에서 끊임없이 가입자들과 부딪쳐야 하는 담당직원들에겐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그야말로 ‘총알받이’다. 카드대금을 압류한 날이면 소주잔을 기울여보지만 다음날 스트레스는 또 어제만큼 쌓인다. 오죽하면 연금공단 인근 술집들은 망하지 않는다는 자조적 농담마저 생겼겠냐”며 고충을 털어놨다.

    납부예외율 축소나 소득조정시에도 가입자들과의 마찰이 생기지만, 특히 심각한 마찰이 벌어지는 것은 체납 보험료 징수를 위해 가입자의 재산을 압류했을 때다. 연금공단은 장기체납에 대해 국민연금법과 국세징수법에 따라 체납 가입자의 재산을 강제징수한다. 강제징수대상은 예금계좌, 카드결제대금, 자동차, 부동산 등이지만 공단측은 징수효과가 가장 높다는 이유로 카드대금 압류를 최우선시한다. 따라서 압류당한 가입자들과의 물리적 마찰도 곧잘 발생한다. 이런 마찰은 국민연금제도를 도시지역 주민에게까지 확대적용함으로써 전국민 연금시대를 연 1999년 4월 이후 종종 있어 왔지만, 올들어 실적경쟁이 심화된 뒤 크게 늘어났다는 게 공단 직원들의 귀띔이다.

    시너 뿌리고, 도끼 휘두르고…

    다음은 전국의 연금공단 각 지사들이 지난해와 올해 공단 본부에 보고한 민원인과의 심각한 마찰 사례 120여 개 중 일부(괄호 안은 조치사항)로, ‘신동아’가 몇몇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것들이다.

    ○○/○○지사-연금보험료 전액 체납자에 대해 카드대금을 압류하자 체납자가 지사를 방문하여 폭력적 언사로 난동을 부린 뒤 다음날 자신의 사업장(식당)을 방문한 담당직원을 보고 칼을 들고 쫓아나옴(이후 지사 직원 3명이 찾아가 체납자와 술자리를 하며 설득해 체납 보험료 납부토록 조치)

    △△/△△지사-체납자가 재산 압류에 대한 불만으로 시너 2통을 들고 와 지사 사무실 바닥에 뿌리고 불을 지르려 함(경찰관 출동 후 체납 보험료 납부)

    쭕쭕지사-민원인에 대해 장애심사 비대상이라고 안내해주자 지사 담당직원을 회유, 협박하고 사무실 집기를 부수다 다른 팀장의 멱살을 잡고 “같이 떨어져 죽자”며 5층인 사무실의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함

    ○○지사-신용카드 매출대금 압류에 불만을 품은 체납자가 담당직원을 미행, 집 주소와 차량번호를 알아둔 후 전화해서 “난 빚이 많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너의 신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부터 죽이겠다”는 등 수차례 협박전화를 함(수차례의 설득으로 체납자가 잘못을 사과)

    △△지사-담당직원이 보험료 체납사업장을 방문, 공단이 압류한 차량에 대한 매각 충당방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자 체납자가 도살장용 칼로 위협함

    -또 다른 체납자는 차량 압류 통지서가 발송되자 지사에 찾아와 압류를 해지하라며 신문지로 포장해 숨기고 있던 낫을 꺼내들고 난동을 부림(체납자를 자제시킨 후 설득하여 해결)

    쭕쭕지사-예금채권이 압류된 데 대한 불만으로 체납자가 휘발유가 든 2ℓ들이 병 4개와 손도끼 1개를 등산용 배낭에 숨기고 지사에 들어와 휘발유를 뿌리고 이를 제지하는 직원의 가슴을 손도끼 윗부분으로 밀어낸 뒤 의자에 걸어둔 직원의 상의를 도끼로 내려찍음

    -카드매출 채권 압류에 불만을 품은 체납자가 폭력배로 보이는 남자 1명과 지사를 찾아와 담당직원을 죽인다고 협박한 뒤 직원의 멱살을 잡는 동시에 허리를 꺾어 뉘임(경찰 3명이 출동해 경고조치한 후 훈방)

    ◎◎지사-재산압류를 항의하는 체납자가 전화를 통해 “가스총, 공기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 밤길 조심하라. 조직을 동원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겠다”고 담당직원을 협박함

    ◇◇지사-체납자가 인터넷 민원을 통해 ‘경고’ ‘마지막 경고’라는 제목으로 ‘감정을 건드리지 마라, 불조심해라,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 부산에선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가 노력하자’는 등의 협박성 글을 올림

    이쯤 되면 단순한 욕설이나 폭언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정도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징수담당직원들은 ‘심하게 항의하는’ 체납가입자들에겐 어쩔 수 없이 압류를 풀어주기도 한다.

    연금공단 노조 조승상(47) 위원장은 “신고기준소득의 법령화, 단기평가 폐지, 무차별적 실적주의를 개선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송차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며 “송차장의 자살에 대한 철저한 책임규명과 관련책임자 처벌, 실적평가 폐지를 공단 경영진에 계속 촉구할 것”이라 말했다.

    송차장 자살과 관련, 연금공단측은 “좀더 면밀히 조사해봐야 하므로 지금은 뭐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가 성실하게 일했던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에까지 이른 것 아니겠느냐”면서도 “업무 스트레스가 원인의 한 가지였을 것이란 점엔 수긍한다”고 밝혔다. 연금공단의 부실과 관련해 기자는 장이사장과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공단측은 이를 거절했다.

    기자는 이번 사건의 경위를 한층 심도 있게 알아보려 8월9일 송차장 부인의 휴대전화로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부인 대신 전화를 받은 송차장의 큰처남은 “누님(송차장 부인)이 탈진해서 어제(8월8일) 입원해 만남은 물론 통화조차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송차장의 사체를 처음 발견했던 동료직원 K씨 역시 “할 말이 없다”며 입을 굳게 닫았다. 송차장의 상급자였던 남원지사장 J씨도 “답변해드릴 수 없다. 죄송하다”는 말만 내뱉곤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는 사건 발생 사흘 만인 8월7일 공단 본부로 발령이 나 8월9일 현재 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다.

    송차장의 자살과 관련해 연금공단 내부의 부실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자살 직전 작성한 유서 외에도 또 하나의 문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아직 전혀 공개된 바 없지만, A4용지 한 쪽 분량의 이 문서는 송차장의 PC 내 글 프로그램의 ‘최근 작업문서’ 메뉴에 남아 있던 것이다. 이는 국민연금제도의 업무개선을 바라는 일종의 건의문. ‘신동아’가 입수한 이 건의문은 ‘국민연금제도 취지에 부합하는 가입자 관리’라는 제목하에 사업장가입자 자격을 취득한 날이 지역가입자의 자격상실일이 된다고 규정한 국민연금법 제11조 1항 1호 및 동조 2항 1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름의 개선방안과 기대효과를 분석한 내용으로 돼 있다. 이 건의문으로, 송차장이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알리려 한 국민연금제도의 부당성에 관한 메시지는 훨씬 명약관화(明若觀火)해지는 셈이다. 건의문은 자살한 송차장의 입장에선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됐다.

    송차장의 사체가 발견될 당시 그의 PC에서 흘러나온 경음악 중엔 사이먼&가펑클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콘도르는 날아가고)’도 있었다. 어느 소설가는 한 마리의 콘도르가 척박한 삶을 마감하고 나면, 인디오들이 그 뼈를 예리하게 다듬어 ‘산포니아’라 불리는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고 했던가. 그래서 ‘엘 콘도르 파사’엔 노랫말이 없다고. 송차장은 안데스 연봉(連峰) 너머로 사라지는 콘도르처럼 자신의 메마른 삶을 접음으로써 스스로 ‘산포니아’가 되고자 한 걸까. 그의 시신은 8월6일 화장됐다.

    다시 한번 찬찬히 그의 죽음을 되새겨보자. 송차장의 자살을 오로지 그 자신만의 개인적 불행으로 돌려야 한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