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대선자금 태풍의 눈’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싸늘한 검무(劍舞)·‘리쌍 부르쓰’, 그 극단의 조화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3-11-25 18: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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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깨끗치 않고 어찌 남한테 칼을 들이대랴”
    • 고3 생활기록부엔 ‘온순·착실·학업정진·노력’
    • “안대희 사전에 청탁이란 없다”
    • 회계감리 비리 수사와 김태정 총장의 질책
    • 검사장 승진 두 번 탈락, 후배들이 사표 제출 말려
    • “노대통령이 나를 좋아하지 않겠지”
    • 포커 베팅은 ‘All or Nothing’
    • 인터넷 뮤직사이트에서 노래 다운받는 신세대 아빠
    • “차관급 봉급을 적다고 하지 말라”
    • 먹는 데 돈 아끼지 않는 ‘에너자이저’
    • 술 취해 기분 좋으면 모차르트 웃음
    • 일에는 새가슴, 생활에선 대범
    ‘대선자금 태풍의 눈’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내가 서울지검장 할 때다. 당시 안대희는 특수1부장이었다. 언젠가 내가 누구 부탁을 받고 ‘좀 봐줄 수 없냐’고 얘기하자, 안대희는 ‘안 된다’고 한 마디로 잘랐다. ‘그 사람을 봐주면 그 사건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도 다 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대희는 그런 사람이다. 정말 믿고 일을 맡길 만한 후배였다.”

    판도라의 상자

    문민정부 때 대검 중수부장과 서울지검장을 지낸 안강민 변호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안대희(48) 대검 중수부장의 면모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안중수부장이 현 정부 들어 대검 중수부장을 맡으면서 갑자기 유명해진 것으로 보이겠지만 검찰에서 그의 이름은 일찍이 특수수사의 대가 반열에 올라 있었다. 드물게 초임 시절부터 특수통의 길을 걸으며 굵직굵직한 수사와 곧은 성격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

    대검 중수부는 요즘 일복에 빠져 있다. 그것은 안대희라는 부지런하고 강직한 검사를 부장으로 맞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다. 과거 검찰이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할 때는 대검 중수부장이 정권 핵심부의 의중을 거스르거나 여권의 비리를 수사한다거나 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무모한 일을 지금 안중수부장이 하고 있다. 나라종금 로비의혹 사건을 재수사하며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동지’라며 애정을 나타냈던 안희정씨에 대해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측근이자 대선공신인 염동연씨를 구속함으로써 청와대를 곤혹스럽게 하더니 현대 비자금 수사를 벌여 범여권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어 SK 비자금을 ‘마구’ 파헤쳐 대통령의 집사인 최도술 총무비서관의 비리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이는 노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을 촉발했고 그 여파로 이제 안중수부장은 검찰 사상 처음으로 정권 출범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대선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운아(?)가 됐다.



    신화 속에서는 이 상자를 여는 것이 불행의 상징이다.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 좋아하는 그의 성격으로 봐선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 수사에 신명을 바치고 있을 게 틀림없다. 최근 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앞만 보고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수부장이 세운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바로 야당 대표로부터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최고 실세”라는 평을 들은 것이다. 최대표의 이 발언은 비아냥거림보다는 호평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검 중수부가 아직 야당의 대선자금을 건드리지 않았을 때 나온 얘기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그의 반응이 재미있다.

    “무릇 실세라는 것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되는 것을 안 되게 하는 사람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실세가 아니다. 이제 권력은 없고 의무만 남았다.”

    “현존하는 최고의 특수통”

    공적자금 비리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안중수부장에 대해 “현존하는 최고의 특수통 검사”라며 “수사검사들의 희망이자 가장 추앙받는 검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검사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다. 검사 그 자체다. 수사할 때 원칙에 예외를 두지 않는다. 주변 정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인적인 고려는 하지 않는다. 검사장이 됐어도 수사를 직접 기획하고 주임검사와 다름없이 일에 매달린다. 초임 때부터 특수부에 배속돼 왕성하게 수사했고 특수통 검사들이 갈 만한 자리는 다 거친 거의 유일한 검사다. 보직관리 차원에서 특수부 근무를 했던 이른바 ‘관리 특수’와는 차원이 다른 순수한 특수통이다.”

    친분이야 어떻든 후배검사로부터 이 정도 찬사를 받는다면 나름대로 성공한 ‘검사 인생’이 아닐까. 이 검사에 따르면 안중수부장은 잔정이 없는 듯싶고 단호하고 직설적이다. 앞서 안강민 변호사도 말했지만 예의상이라도 속에 없는 소리는 못하는 성격이다. 이렇게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일만 하는 재미없는 인간으로 비쳐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려면 안중수부장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들(특히 가족들)은 그가 따뜻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집에서 인터넷 뮤직 사이트에 자신만의 카페를 만들어 맘에 드는 노래를 다운 받고 아이들과 함께 춤추며 최신 힙합곡을 따라 부른다는 얘기만 우선 해두자.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런 얘기들은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 그가 검사가 되기 전의 시절로 돌아가보자. 안중수부장은 1955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2남2녀 중 장남. 수산대를 졸업한 그의 아버지는 수산업 계통에 종사한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안중수부장은 부산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부모와 떨어져 큰이모(어머니의 언니) 집에서 다녔다.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집이 서울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안대희는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인지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했다고 한다. 걱정이 된 부모는 2학년 때 그를 서울에 있는 숭문중학교로 전학시켰다. 다시 부모와 한집에 살게 된 안대희는 열심히 공부했고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고에 진학해 부모를 기쁘게 했다.

    경기고 69회인 그는 1970년 경기고에 입학해 1973년 졸업했다. 69회의 경우 전체 입학생의 3분의 2는 무시험으로 올라온 경기중 출신들이었고 나머지는 안중수부장처럼 시험 봐서 들어온 학생들이었다. 한 학년에 12개 반이 있었는데 그중 8개 반이 경기중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보다 두 기수 아래인 71회는 모든 학생이 시험 봐서 입학했고 73회부터는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추첨으로 입학생이 결정됐다.

    69회 졸업앨범을 보면 안중수부장의 고교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단정하고 차분하고 불량기라고는 없어 뵈는, 영락없는 모범생 이미지다. 두터운 안경과 오똑한 콧날, 그리고 도도록한 입술은 한 고집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반 단체사진을 보면 키가 평균보다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나이는 학교를 일찍 들어간 까닭에 동기생들보다 한 살 적었다.

    그가 속한 3학년3반은 60명이었는데, 성적은 10등 안에 드는 상위권이었다. 생활기록부에는 대체로 좋은 평만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학년 때는 ‘꾸준히 노력해 성적이 우수’, 2학년 때는 ‘성적 우수, 내성적, 노력형’이라고 적혀 있다. 3학년 때 담임교사였던 박진희씨는 ‘온순·착실하며, 학업 정진, 노력’이라고 평했다. 1학년 때는 독서반, 2·3학년 때는 웅변반에서 활동했다. 학교 관계자는 몇 차례나 “(기록에 따르면) 아주 모범생이었다”고 강조했다.

    졸업 안 한 채 연수원으로

    69회 졸업생 중 현직 검사는 안중수부장을 비롯해 3명이다. 판사는 8명 배출됐는데 지금은 대부분 변호사로 개업했고 노영보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와 홍기종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두 사람만 남아있다.

    변호사는 판사 출신을 포함해 약 30명에 이른다. 변호사 동기생 중 돋보이는 사람으로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에 근무하는 허익준, 박준 변호사를 꼽을 수 있다. 졸업하던 해 각각 예비고사 전국수석과 서울대 법대 수석을 차지했던 두 사람은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후 곧바로 ‘김&장’에 입사, 화제를 낳았다. 조세형, 신창원 변론으로 유명한 엄상익 변호사도 동기생이다.

    재계 인사로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동생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 두산그룹 박용만 사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의 동생인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 등이 대표적 인사다. 정·관계로 진출한 사람은 의외로 적어 탤런트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정한용씨, 신현확 전 총리의 아들인 신철식 기획예산처 국장이 꼽히는 정도다.

    의료업계에 종사하는 한 동기생은 안중수부장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이렇게 풀어놓았다.

    “경기중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친한 친구가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매사에 몰두하고 집중하는 성격으로 체격은 작지만 대범하고 당찬 구석이 있었고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동창회에는 자주 나오지도 않지만 어쩌다 나와도 잠깐 얼굴만 비치고 돌아가는 편이다.”

    법조인 동기생 중 한 명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안중수부장이 좀 엉뚱한 데가 있었다. 사주관상을 공부했다며 친구들에게 ‘너는 합격한다’ ‘너는 떨어진다’ 하고 대입시험 합격운을 말해주던 것이 기억난다. 모범생으로 사교성도 있었다.”

    평균치보다 높은 정의감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안중수부장이 사시에 최종 합격한 것은 1975년 대학 3학년 때였다. 입학하자마자 사시 공부에 몰두해 1학년 말에 1차, 2학년 말에 2차에 합격했다. 사시 17회 합격자 중 최연소였다. 그는 학교 공부를 계속하지 않고 곧바로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그 탓에 대학 중퇴자가 됐다. 군법무관 시절 복학을 시도했으나 수업 불참으로 학점 취득이 어려워 졸업장을 받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교수들이 “여기가 학원이냐”며 학점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안중수부장의 성격에 대해 물어보면 대개는 ‘강직’ ‘원칙주의자’ ‘정의감’ 같은 단어들을 말한다. 사시 동기인 검찰 간부는 “강직하고 원칙에 충실해 청탁이라는 것이 아예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역시 사시 동기인 모 검사장은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한마디만 했다.

    ‘대선자금 태풍의 눈’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정치권에 맞서고 있는 송광수 검찰총장과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과거 법조를 출입하며 그와 친분을 쌓은 모 일간지의 간부는 “강직한 탓에 기자들이 민원을 부탁하기가 꺼려지는 검사”라며 “골프를 쳐도 자기 것은 자기가 낼 정도로 냉정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와 가까운 재경지청 고위간부는 “초임 때부터 결벽증 비슷하게 정의감에 대한 기준이 평균치보다 높았다”고 말했다. 한때 그를 부장으로 모셨던 법무부 간부는 “정의에 대한 신념을 그에게서 배웠다”며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고교 동기생인 한 검찰 간부는 “강직하고 청탁 같은 것은 일절 거절하는 원칙주의자로 사람도 가려서 만나는 등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평했다. 그는 또 “실력이나 청렴도에 비춰 대검 중수부장으로 적격”이라고 치켜세웠다.

    변호사인 또 다른 고교 동기생에 따르면 안중수부장은 군법무관 시절 성실하고 치밀한 업무처리로 지휘관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안중수부장을 “겸손한 원칙주의자”로 규정지었다.

    “검사보다는 판사나 교수의 이미지다. 사시에 일찍 합격했기 때문에 교만에 빠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재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몇 달 전 동창회 모임에 나왔을 때도 조금 늦게 와서 두리번거리다 한쪽 구석에 가 앉는 버릇은 여전했다.”

    이 변호사는 “안중수부장은 그다지 사교적이지는 않다. 친구들도 만나는 친구들만 계속 만난다”며 “언젠가 내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잘 안 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해 안중수부장의 고교후배인 검찰 간부는 “교우관계가 한정된 건 맞다”면서 “하지만 그런 성격이 오히려 특수수사에는 적격이다. 검사가 너무 많은 사람을 아는 것은 직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1977년 육군법무관으로 입대한 안중수부장은 1980년 전역, 초임을 서울지검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그 의미가 약해졌지만 과거 ‘서울지검 초임’은 성적이 우수한 사법연수원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었다. 그는 동기생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연수원을 졸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기 중 최연소 합격

    검찰에서는 사시 기수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서열이 검사 생활 내내 따라다닌다. 위에 언급한 안중수부장의 후배 검찰 간부는 임관연도는 같지만 사시 기수로는 후배다. 그는 “안선배는 사시에 너무 일찍 합격한 데다 졸업도 하지 않고 연수원으로 곧장 가는 바람에 손해본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나이나 학번으로는 선배지만 사시 기수는 후배인 검사들과 다소 불편한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안중수부장의 후배(사시)이자 선배(대학)인 대검의 한 간부도 “한 부서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관계가 편하진 않았다. 터놓고 얘기해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순탄하게 요직을 두루 밟던 그가 국민의 정부에서 두 차례나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했다가 지난해 여름 뒤늦게 승진한 것을 두고 “안대희는 이제야 나이에 맞게 승진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안중수부장의 첫 근무지는 서울지검 형사1부였다. 당시 형사1부장은 이한동 의원. 이부장은 초임인 안검사가 경찰 송치사건을 대충 넘기지 않고 더 수사해 경찰관을 구속하는 걸 보고 “무서운 녀석”이라고 평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안검사는 이듬해인 1981년 쟁쟁한 실력자들만 모인다는 특수1부에 배속됐다. 훗날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김석휘(고시 사법과 8회) 당시 서울지검장이 직접 발탁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초년병인 안검사는 특수1부에 가자마자 대형사고를 터뜨렸다. 유명한 저질연탄 사건이 그것이다. 처음엔 안검사 혼자 맡아 했는데, 사건이 점차 커지면서 특수1부 검사 전원이 투입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특수1부장은 임상현(고시 사법과 16회) 변호사였고 뒷날 국민의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최경원(사시 8회) 변호사와 안검사의 사시 한 기수 선배인 박주선(사시 16회) 의원이 각각 수석과 차석이었다.

    수사팀은 국내 대형 연탄업체들이 석탄에 저질 무급탄(속칭 버럭)을 섞어 판매함으로써 100억원대의 부당이익을 올린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연탄은 서민들의 생활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이 수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전두환 대통령이 김석휘 서울지검장에게 격려전화를 걸 정도였다. 이 일로 동력자원부 석탄국장 등 관련 공무원들과 업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됐다.

    여론의 지지를 받았던 이 수사는 그러나 “국내 연탄업계를 다 망하게 한다”는 경제논리에 밀려 끝이 좋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동력자원부 장관이 전대통령에게 읍소한 결과라는 설도 있고, 전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 당시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의 로비가 작용한 결과라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이 수사를 지휘한 검찰 간부들은 “경제를 망치는 수사를 했다”는 이유로 화를 입었다. 임상현 특수1부장은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서울고검으로 좌천되는 불운을 겪었다. 김유휴 서울지검 3차장검사는 부산지검 차장검사로 밀려났다. 김석휘 서울지검장은 서울고검장으로 옮겨갔다. 좌천성 영전이었다. 허형구(고시 사법과 2회) 검찰총장은 취임 1년도 안 돼 옷을 벗어야 했다. 1981년 12월의 일이었다. 임상현 변호사의 증언.

    “연탄사건 수사는 안대희 검사가 기획한 것이다. 처음엔 사건이 될까 싶어 망설였다. 모든 연탄회사들의 연탄 품질을 조사해야 하는 등 증거확보 작업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검사가 증거자료를 다 수집해와 ‘사건 됩니다’ 하고 밀어붙여 수사를 시작했다. 검사들 모두 일주일 이상씩 밤샘을 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수사했다. 나중에 경제논리로 수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문책인사를 당했는데 지금도 납득이 안 간다. 이 수사가 끝난 후 연탄 질이 좋아진 데다 연탄업계도 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분노

    수사팀은 그후 ‘연탄팀’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임변호사는 당시 안중수부장의 수사 스타일에 대해 “탱크처럼 밀고 가더라”고 회고했다.

    “수사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는데 의욕이 너무 강하고 원리원칙주의자라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좀 걱정됐다. (검사장) 승진이 늦어진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 상황에서 안검사가 중수부장으로 최적임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심재륜 다음으로 안대희다.”

    저질연탄 사건 당시 안검사는 ‘주범’임에도 평검사라는 점이 고려돼 인사조치 대상에서는 제외됐었다. 선배들에 대한 문책 인사를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던 안검사는 1982년 프랑스 국립사법관학교로 연수를 떠났다. 안검사가 와인을 즐기는 것은 이때 접한 프랑스 문화의 영향이다.

    2년 후 연수에서 돌아온 안검사는 춘천지검 영월지청으로 갔다가 1985년 법무부 법무심의관실로 발령 났다. 거기서 뒷날 ‘국민의 중수부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당대의 특수통 심재륜(사시 7회) 검사를 만났다.

    대검 감찰1과장을 거친 심검사가 안검사의 직속상관인 법무심의관으로 부임한 것은 1987년. 당시 법무심의관실에는 안검사 외에도 조승식(사시 19회), 이훈규(사시 20회) 등 실력 있는 검사가 많았다.

    ‘조폭수사의 전설’로 불리는 조검사는 국내 최대 조폭이었던 김태촌씨를 비롯해 수많은 주먹계 거물을 구속했다. 현재 대검 강력부장이다. 또 한보비리 수사 때 김현철씨 비리를 밝혀내고 이익치 현대증권회장의 주가조작사건을 수사하는 등 특수통으로 이름을 날린 이훈규 검사는 현재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으로 검찰 개혁작업의 실무 사령탑을 맡고 있다.

    심검사는 1년 후 서울지검 특수1부장으로 영전하면서 저질연탄 사건 때부터 눈여겨봤던 안검사를 ‘스카우트’ 했다. 당시 특수1부엔 역시 법무심의관실을 거친 문영호(사시 18회, 현 대검 기획조정부장) 검사와 현 민주당 의원인 함승희(사시 22회) 검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심부장의 전임인 안강민 부장 시절부터 특수1부에 근무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안검사가 수석이었는데 나이는 가장 어렸다는 점이다.

    그해 문검사는 일본 연수를 떠났다. 1989년엔 이훈규 검사가 합류했고 함검사는 미국 연방검찰청(USAO), 연방수사국(FBI) 파견근무를 나갔다. 1990년 귀국한 함검사는 ‘심재륜 사단’에 재합류했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과 민생특수부장을 겸하다 초대 강력부장으로 부임한 심검사는 조승식 검사를 수석으로, 함검사를 차석으로 뒀다. 심재륜 변호사의 회고.

    “안대희는 사생활이 엄격하고 사건 처리에 빈틈이 없었다. 고집도 셌다. 폭이 좁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직하게 수사했으며 피의자들한테 엄정했다. 일찍 사시에 합격된 탓인지 엘리트 의식이 강해 동료나 선후배의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서울지검 근무 후 대구지검 영덕지청장, 대검 과학수사지도과장을 거친 안대희 검사는 1993년 인천지검 특수부장을 맡으면서 다시 수사 일선으로 돌아왔다. 인천지검에선 바다모래 불법채취 사건을 수사해 주목을 받았다. 이어 부산지검 특수부장을 지낸 후 특수통 검사들의 필수코스와도 같은 대검 중수부 과장과 서울지검 특수부 부장을 맡았다. 1994∼96년엔 대검 중수부 2·1과장, 1996∼98년엔 서울지검 특수3·2·1부장을 차례로 거쳤다. 이 시절이 검사 안대희의 전성기였다.

    ‘대선자금 태풍의 눈’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경기고 69회 졸업앨범에 실려 있는 3학년3반 단체사진.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안대희.

    특수통으로 꼽히는 전·현직 검사들 중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이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안중수부장의 사시 1년 선배인 박주선(16회) 민주당 의원, 1년 후배인 문영호(18회) 대검 기획조정부장, 박상길(19회)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앞서 언급한 이훈규(20회)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등으로 박주선 의원을 빼고는 모두 현 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 특수통 계보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은 거의 기수 순서대로 대검 중수부 과장과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물려주고 이어받았다. 나이는 역시 안중수부장이 가장 어리다. 특히 박상길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은 경기고 1년 선배이기도 하다.

    안강민 변호사는 안중수부장이 대검 중수부 1과장 때 대검 중수부장으로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일 때는 서울지검장으로서 두 차례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안변호사는 “안대희는 대인관계에서 호불호가 뚜렷했고 성격이 강하다 보니 적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DJ 정부 때 (검사장) 승진이 두 차례나 안 돼 걱정을 많이 했다. 부산 출신에 경기고를 나온 점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 본다. 특수수사를 많이 하면 적이 많이 생긴다. 강직하고 고집이 셌지만 윗사람한테는 잘했고 지휘부와 다툴 정도는 아니었다.”

    안중수부장은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지낼 때 몇 건의 대형 기획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먼저 1996년 특수3부장 때 수사한 서울시 버스회사 비리 사건. 버스노선 배정에 비리가 있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서울시 관련 공무원과 시의원 등에 대해 감청 등 내사를 벌이던 중 총리실 암행감사반이 서울시 버스노선 담당계장의 뇌물수수현장을 적발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특수3부 검사들이 모두 투입돼 업계 순위 30위까지의 버스회사들의 장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서울시 교통관리과의 계장, 과장, 기획관, 관리관 등 관련 공무원들과 버스회사 업주들이 버스노선 배정과 관련한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구속된 서울시 고위간부 중엔 당시 이수성 총리의 서울대 법대 동기가 있었다. 그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이총리를 통해 구명로비를 시도하려 했으나 안부장의 단호한 태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버스회사 업주들이 선임한 검찰 고위간부 출신 거물급 변호사들의 로비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안부장의 뜻을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수사팀 일원이었던 대검의 한 간부는 “안부장이 수사 외풍과 역풍을 다 막아줘 수사에 전혀 차질이 없었고 수사 종결 후에도 별다른 후유증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수사팀 검사들은 며칠씩 집에 못 들어갈 때가 많아 부인들이 속옷을 들고 청사에 찾아오기도 했다는 것.

    피의자의 투신자살 소동

    이 수사와 관련해 안중수부장의 일 처리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수사 초기 뇌물수수 사실을 털어놓은 관련 공무원이 투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담당 검사가 잠깐 방심한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마침 그 검사실에는 수사관들도 자리를 비워 여직원 한 명만 있었다. 그 공무원이 검사실 창문으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 검사가 그의 발을 잡았다. 창문에서 끄집어내려진 그는 커트 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피를 냈다. 두 사람이 붙들고 뒹구는 바람에 검사실 바닥은 피범벅이 됐고 곧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방 검사들과 수사관들에 의해 수습됐다.

    사건을 보고받은 안부장은 정면돌파하기로 결심했다. 피의자의 자해소동은 검찰의 과실 여부에 상관없이 수사에 악재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안부장은 문제의 공무원을 성모병원 응급실로 보낸 후 곧바로 기자실로 가 사건을 소상히 설명하고 기자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위 대검 간부는 “안부장의 냉철한 대응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그때 안부장이 그 일을 숨기려 했거나 흥분해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했다면 큰 곤경에 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부장은 거리낄 게 없었기에 당당하게 처리했고 그 결과 사태가 커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1997년 특수2부장 시절엔 대형 입시학원의 탈세와 학습지 출판사들의 교재 선정 비리 및 고액과외 실태를 파헤쳤다. 당시 언론에 요란하게 보도됐던 이 수사는 안중수부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결과 학원들은 소득 신고시 수강생 수를 줄이거나 수강료를 정해진 액수보다 몇 배 더 받고는 이를 축소하는 수법으로 세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학습지 출판사들이 자사의 학습지가 교육방송 교재로 채택되도록 방송 고위관계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건넨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이 수사에 참여했던 법무부의 한 간부는 안중수부장의 수사지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기획력이 뛰어나고 예지력이 있었다. 또 난마처럼 얽힌 사건의 핵심을 한번에 짚어내는 능력을 갖췄다. 한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결단력과 추진력이 대단했다. 구속대상을 확정한 뒤엔 위에서 반대해도 형평성을 내세워 물러서지 않았다. 또 검사들이 수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외풍을 차단해줘 일하기가 편했다. 가장 큰 장점은 일이 좀 잘못돼도 검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된 대검 간부는 “꼼꼼하고 두뇌가 명석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씩 던지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검사들이 잊고 있거나 미처 챙기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한편 입시학원 비리 수사는 탈세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종로학원 원장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음으로써 무리한 수사가 아니었느냐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위 대검 간부는 “견해 차이”라며 “문제가 된 종로학원 계열사를 검찰은 탈세를 위한 페이퍼 컴퍼니로 판단했는데 항소심 재판부가 이를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술을 어느 정도 하는 안중수부장은 수사가 끝나면 술자리를 마련해 검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곤 했다. 술자리에서 그의 모습은 어떨까.

    “술자리든 밥자리든 스폰서가 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개는 평범한 밥집에서 소주를 마시거나 양주를 미리 준비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신다. 폭탄주 주량은 7∼8잔 정도. 2차는 가지 않는다. 한번도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취했다 싶으면 집에 가버리기 때문이다. 여러 선배들을 상관으로 모셔봤지만 안중수부장처럼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과거 그를 부장으로 모셨던 대검 간부의 귀띔이다. 평소 과묵한 안중수부장은 술이 들어가면 다소 말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와 가까운 또 다른 검찰 간부는 “단순히 놀고 즐기는 술자리가 아니라 검사들의 쌓인 불만을 해소하고 결의를 다지는 술자리였다”고 말했다.

    안중수부장의 고교 후배인 한 검찰 간부는 “안중수부장은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무뚝뚝함을 갖고 있긴 하지만 상당히 감성적이고 인정도 꽤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안중수부장은 보스 기질이 있어 자신이 아끼는 검사들을 잘 챙기는 편이라고 한다. 괜찮은 후배라 생각되면 인사 관련 부서에 좋은 보직을 부탁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절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대형수사가 설계감리 비리 수사다. 안중수부장의 향후 진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수사는 서울지검 특수2부에서 시작돼 특수1부에서 마무리됐다. 안중수부장이 서울지검 특수2부장에서 특수1부장으로 옮겨가면서 사건도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덩달아 이 사건 수사검사들도 특수1부로 옮겨갔다. 안중수부장과 한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검찰 간부는 이 일을 염두에 둔 듯 “엘리트 의식에 따른 우월감과 특유의 경쟁의식으로 자기 것은 절대 남에게 안 주는 등 수사 욕심이 많고 의욕이 지나쳐 손해볼 때도 있었다”고 평했다. 물론 “매사 적극적이고 수사를 잘했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이 수사의 단서는 설계감리회사들이 담합해 수주한다는 첩보였다. 안부장은 저인망식 수사를 펼쳤는데 이것이 뒤에 과잉수사 시비를 낳았다. 100개 설계감리회사들의 관련 장부를 압수해 그 중에서 문제가 있는 30여 개 회사를 집중 조사했다. 설계감리회사들의 담합 비리가 밝혀지면서 관련 공무원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수사팀은 수사 영역을 서울에 국한하지 않고 비리에 관련된 자라면 전국 어디서나 잡아들였다.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위기감을 느낀 공무원들이 검찰 조사를 피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사무실을 비우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때부터 검찰이 무차별 수사를 한다느니 강압수사를 한다느니 하는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조사과정에 가혹행위를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일부 언론은 이를 기사화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수사내용을 잘 아는 대검 간부는 “안부장이 늘 강조한 얘기가 있다. ‘수사는 정도를 걸어야 하고 조사과정에 가혹행위가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혹행위는 수사 전체를 망치기 때문’이라고 했다”며 당시 나돌았던 소문을 수사팀에 대한 음해로 규정지었다.

    얼마 후 이 수사는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의 지시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 당시 서울지검을 출입했던 모 일간지 기자는 “안대희 부장의 수사 스타일을 두고 논란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설계감리회사 리스트를 놓고 1위부터 100위까지의 회사 장부를 다 압수해 샅샅이 털었다. 업체들의 항변이 터져나왔고 이것이 김태정 총장 귀에 들어갔다. 김총장이 안부장을 불러 ‘민생을 생각해야지 수사만 하면 다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일부 기자들도 먼지털이식 수사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안부장은 ‘표적수사로는 발본색원이 안 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일로 김총장의 눈 밖에 난 것이 DJ 정부 때 한직으로 돌게 된 원인이었다.”

    안중수부장과 가까운 검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 기자의 말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안중수부장 밑에서 일하며 “특수수사의 지평을 넓혔다”는 검찰의 한 간부에 따르면 당시 안중수부장은 주임검사였던 문규상(사시 26회) 현 대검 범죄정보1담당관과 함께 김태정 검찰총장한테 불려가 “무슨 수사를 그렇게 하냐” “왜 경제를 생각 안하고 수사하냐”며 질책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의 고교 후배인 검찰 간부는 “DJ 정부 검찰 수뇌부로부터 좋은 점수를 못 받았다.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의 고교 동기인 검찰 간부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1998년 3월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 안대희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보직 7개월 만에 대구지검 1차장으로 발령 났다. 이어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서울고검 형사부장 등 화려한 경력에 걸맞지 않은 한직을 전전했다. 그 사이 검사장 승진인사가 두 차례 있었는데 연거푸 물을 먹었다. 몇몇 후배가 그를 추월해 검사장에 올랐다.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안중수부장은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녔다. 부인 김수연(39)씨에게 “변호사 개업도 나쁠 것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가까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는 “이제 그만둬야 하나”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곤 했다.

    그의 사직을 가로막은 것은 그를 존경하고 그가 아끼는 후배들의 간곡한 만류였다. 그는 부인에게 “내 인생이지만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 같다”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 시기 그는 사람 만나길 피하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인 김씨는 “항상 잘돼 왔기에 앞으로도 잘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를 위로했다.

    지난해 8월 그는 한직인 부산고검 차장이 되면서 검사장 승진 대열에 합류했다. 그와 초임 시절부터 가까웠던 재경지청의 고위간부는 “여러 번 사직을 생각했던 터라 무척 감격했다”고 당시 안중수부장의 심경을 전했다.

    이 간부는 “본인이 무척 맡고 싶었던 자리인 만큼 끝까지 잘해낼 것으로 믿는다”고 안중수부장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는 또 “조금이라도 오해를 받기 싫어하는 성격이므로 수사 형평성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고교 동기인 모 변호사에 따르면 안중수부장은 얼마 전 가까운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대통령이 싫어할지 모르겠다. 어느 임용권자가 좋아하겠냐. 그렇지만 원칙대로 하려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며 SK비자금 수사와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심적 고충을 내비쳤다고 한다.

    수사도 운이 따라야 한다고, 안중수부장은 지금 역대 어느 정권에서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수사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와 성격이나 기질이 비슷한 송광수 검찰총장이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주고 있고 인사권을 쥔 강금실 법무장관도 여권의 의중을 전달하고 간섭하던 예전 장관과는 달리 검찰 수사의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평소 주변에 “내가 깨끗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한테 칼을 들이대냐”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왔다는 평을 듣는 그가 전대미문의 대선자금 수사를 맡아 어떤 검무(劍舞)를 펼쳐 보일지 국민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와 절친한 검찰 간부가 들려주는 얘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포커를 쳐보면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느껴진다. 배팅할 때는 눈치를 보거나 몸을 사리지 않는다. ‘올 오어 나싱’이라고나 할까. 블러핑 할 때도 과감하다.”

    [가장(家長) 안대희]

    안대희 중수부장에게서 엄숙하고 냉정하고 점잖은 이미지를 느낀 사람이라면, 그가 가정에서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서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에너자이저.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의 아내와 아이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으로, 말 그대로 몹시 활동적이라는 뜻이다. 골프 테니스 헬스 등산 영화 음악 등 그의 활동 영역은 무한대에 가깝다. 일요일 아침이면 ‘귀찮아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산으로 공원으로 달려간다. 드라이브도 즐기는데 11월 둘째 주엔 경기도 장흥에 놀러 갔다 왔다.

    1남1녀를 두어 아들은 중2,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공놀이를 함께 하는 등 틈날 때마다 아이들과 어울리고 대화도 많이 하는 편이다. 업무 때문에 평일은 바쁘지만 주말은 온전히 가족과 함께 보낸다. 1990년대 중반 대검 중수부 과장 시절 한 달에 무려 네 차례나 가족과 함께 서울대공원에 놀러간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는 아이들과 인터넷 뮤직 사이트도 공유하고 있다. 글머리에 잠깐 소개했듯 그곳에 자신만의 음악 카페를 만들어 좋아하는 노래를 다운 받곤 한다. 최근 인터넷 음악제공업체인 벅스 뮤직이 법정소송에 휘말리면서 듣는 곡이 제한돼 속상해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는 랩이 많은 신세대 노래를 겁내지 않는다. 요즘엔 2인조 남성 힙합그룹인 ‘리쌍’의 2집 앨범에 있는 ‘리쌍 부르쓰’를 아이들과 함께 부르고 있다. 잘 부르는 편은 아니지만 열심히 ‘씩씩하게’ 부른다.

    록 음악을 좋아해 아이들과 ‘김장훈 콘서트’에 가서 한바탕 놀고 온 적도 있다. 홍익대 부근 바나 카페에도 자주 놀러나가 술도 마시고 음악도 즐긴다. 한번은 유명 음악평론가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노래를 잔뜩 신청했더니 주인이 “어쩌면 그토록 장르 존이 넓으냐”며 놀라워했다. 그의 아내는 지금도 이 ‘장르 존’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안중수부장에게 먹는 것은 일종의 신념과 같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스파게티도 좋아하고 프랑스 요리와 와인도 즐기는 등 거의 미식가 수준이다. 아이들이나 아내 생일, 결혼기념일 등 특별한 날에는 웬만하면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긴다.

    활동적이다 보니 자주 출출해한다. 아침 일찍부터 배고프다고 아내를 보채는 일이 많다. 또 체구에 비해 먹는 양도 많다. 먹는 것 외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다. 먹는 데는 팍팍 쓰면서 가구나 옷 사는 데 돈 들어가는 것은 매우 아까워한다. 그래서인지 쇼핑에 따라나서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아내와 함께 술도 자주 마시는 편인데 음악이 없는 곳에서는 앉아 있지도 않는다. 술을 먹으면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고 소매도 걷어붙이는 등 호기로운 모습을 보인다. 기분 좋으면 영화속 모차르트처럼 크게 웃어 주위를 놀라게도 한다.

    가족들과 시간 보내기를 그토록 즐기지만 설겆이나 다림질 등 집안일은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가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게다가 기계치다. 보일러가 고장나도 아내에게 미루고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한다. 청소도 안 도와준다. 청결 관념도 희박하다. 그런데도 그의 아내는 불평하지 않는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남편의 자상함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다. 길을 걸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잘 안 보려 한다. 오죽하면 아내가 “동전 줍냐”고 놀릴까. 새가슴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 스스로는 참새가슴이라고 부른다. 매사에 시어머니처럼 꼼꼼히 챙긴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대범한 편이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검사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거부한다. 비행기 탈 때도 일반인과 똑같이 탑승절차를 지킨다. 콘도나 골프 예약도 마찬가지다. 관용차는 출퇴근용으로만 사용하고 판공비는 절대 집에 가져오지 않는다.

    그의 아내는 처음에 웬만한 일은 남편 ‘빽’으로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편은 주변 사람들의 민원이나 청탁을 아주 싫어했다. 심지어 집안사람이 부탁해도 냉정하게 거절했다.

    선물을 받으면, 대개는 돌려주지만 난처한 경우엔 반드시 상대방에게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한다. 그렇다고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언젠가 어떤 할머니가 아들 사건 처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담배를 사들고 온 적이 있는데, 그것을 거절한 후 “너무 냉정하게 대한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가 사는 집은 서울 홍은동에 있는 아파트다. 1989년 4월 입주했는데 일부 언론에 알려진 바와 달리 53평형이다. 이토록 큰 아파트를 구입한 것은 신혼 초 그의 부모와 두 동생이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5∼6년 같이 살다 지금은 동생들이 모두 결혼해 분가했고 부모는 그의 또 다른 여동생이 의사로 있는 부산에 내려가 살고 있다. 이 아파트는 강북 지역에서도 아주 싼 편에 속해 시가가 2억5000만원 정도다.

    그는 지금껏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한 적이 없다. 아예 관심도 없다. 주변에서 누가 돈 버는 정보를 얘기해줘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 집안의 유일한 재테크는 은행에 돈 넣어두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나중에 남편이 변호사로 개업해도 돈은 못 벌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다. 가끔 돈 버는 데 대한 관심을 나타내면 남편은 “차관급 월급인데 적다고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재벌이 될 수는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래서 공무원이 아닌 남편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는 집에 오면 회사(검찰)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의 아내는 요즘 잠자리에서 남편이 잠꼬대처럼 “힘들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듣고는 이번 수사가 만만치 않다고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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