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그들은 왜 아비를 부정했나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입력2004-06-02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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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적 격변기에 젊은 세대는 공공연한 세대 투쟁으로 권력을 갖고자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뜬 젊은이들은 신세대의 기수를 자처하고 나서 선배와 아버지 세대를 심하게 물어뜯고 그들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명해졌다. ‘기성세대 물러가라’는 구호가 거리에 등장한 것도 지금의 60~70대가 혈기방장한 청년이었던 1960년 4·19 때였다.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4·19시위대가 경무대로 가던 중 잠시 대열을 정비하고 있다. 3·15부정선거는 4·19를 촉발하고 결국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

    총선 기간 중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내뱉은 ‘노인 폄훼 발언’은 뇌관을 건드렸다. 이 발언이 없었다면 열린우리당은 탄핵정국에 힘입어 몇 석을 더 얻었을 것이다. 또 이 발언은 그가 정치권에 남아 있는 한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힐 수도 있다. 정 의장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60~70대는 ‘탄핵정국’ 이전부터 노무현 정권에 대한 의구심이 깊었다. 그들(중 많은 이)에게는 노무현 정권 출범 자체가 소외와 패배를 의미했다. 돌이켜보면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의 대결구도의 핵심은 세대였다. 속된 말로 ‘빤스 벗고 나서서’ 싸우는 제로섬 게임인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 2002년 대선처럼 세대가 전면적으로 대립한 경우는 드물었다(서울대 송호근 교수의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삼성경제연구소, 2003)는 이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회창의 패배가 확정된 뒤 노무현 승리의 주역인 20~30대는 환호작약한 반면, 기성세대는 며칠 동안 TV를 꺼놓았을 정도로 큰 상실감에 빠졌다고 한다. 그들은 공포심과 함께 소외를 느꼈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부 수구세력의 심리 또한 이와 비슷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게임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런 심리적 기제를 보수층이 광범하게 공유했기 때문에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자충수 ‘탄핵’이 가능했다. 탄핵이 어이없는 무리수였음은 너무도 빨리 증명됐는데, 그 후폭풍으로 기성세대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불신·불만을 일순 다 잊어버렸다. 그래서 총선에서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는 순간, 정동영 의장의 발언이 터져나왔다. 노년층과 보수층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미움과 세대적 소외감이 다시 깨어난 것이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되짚지 않더라도 그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왜냐? 지나치게 솔직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편적 감정을 그야말로 ‘콕’ 찍어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솔직함은 절대로 악덕이다. 정치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60~70대는 그저 고루하고 반동적이며 잔소리나 해대는 무능한 ‘뒷방 영감’이니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것이 과연 열린우리당 지지자만의 생각이겠는가.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젊은이가 품었던 생각이다. 현재의 60~70대들도 젊어서는 한번쯤 해보았을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면 젊은 세대로서의 패기와 비판의식이 결여됐거나 조로증 환자일 것이다.

    그런데 반대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것이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인륜을 모르는 철없는 것들이 저런 식의 발언을 하는 법이다. 그것은 인권유린이다.

    젊은것들은 ‘좀 뒤에서 가만히 있으쇼’란 그 말을 마음속에 두고 있다가 노인네의 잔소리와 간섭이 자심해지고 뭔가 결정적인 상황이다 싶을 때, 결정적으로 쏘아붙인다. 그러니까 이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비이성적인 수단인 것이다. 그러니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정동영이라는 정치인은 그렇게 자질이 부족하거나 자제심이 없나? 아니면 가학적 성품의 소유자이거나 진짜 이번 기회에 노인네들과 한판 붙어보고 싶었던 것인가.

    그 말을 받아서 “그래, 네놈들 두고 보자!”고 외치며 정 의장의 멱살을 잡고 다른 당을 찍어버린 60~70대들의 심리는 또 무엇인가. TV를 보니 이 발언이 있은 뒤 일부 60~70대들은 “이번에 어느 당에 투표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자학적 내지는 가학적인 언사로 답했다.

    “이번엔 투표권도 없는데, 뭘.”

    “투표하면 안 잡혀가나 몰라.”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뭔가 거리끼는 것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동영 의장의 발언에 그저 마음껏 분노하여 지지 정당을 바꿨다면,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자식이나 다른 젊은이들로부터 겪은 노인으로서의 소외감을 전가한 것이거나, 자기도 젊은 시절에 품어봤던 그런 불경한 생각에 대한 죄책감을 정 의장에게 전가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정동영 의장과 똑같은 수준인 것이다.

    다음 두 글은 어떤 세대의 특징을 지적한 글이다. 어떤 세대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민주적 기분과 의식 및 서구적 공리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개인, 연애, 타산과 자유로운 감정 표시가 이 세대의 것이다. 부패와 권모술수의 사회를 물려준 구세대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의(義)의 세대이다.

    …격정과 충동성에 실리에 밝은 타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 비해 사고력이 약하다. 일그러진 냉전의식에서 자유로우며 원초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개인주의적이다, 부패한 구세대를 전혀 믿지 않는다, 타산적이고 충동적이다, 사고력이 약하며 냉전의식에서 자유롭다. 이것이야말로 60~70대가 볼 때 ‘대한민국을 망친다’는 노무현 지지세대의 사고방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아니다. 바로 오늘날의 60대들에 대한 평가다. 위 글은 각각 ‘사상계’ 편집위원이던 안병욱씨가 1960년 6월호, 그리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임방현씨가 ‘사상계’ 1963년 4월호에 쓴 것의 일부분이다. 그러니까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냉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오늘날의 60대는 40년인 그들의 전 20대 시절에 지금과는 완전히 상반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60대가 누구인가? 바로 4·19혁명을 주도하거나 5·16을 통해 권력의 핵심부로 떠오른 세대로서 이른바 ‘산업화세대’다. 사회학자 홍덕률(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사회의 세대를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대’ ‘정보화세대’로 나눈다. 50대 이상의 장·노년층이 산업화세대, 386을 포함한 1953년 이후부터 1969년까지의 출생자들이 민주화세대, 이후 출생자들이 정보화세대에 속한다(홍덕률 ‘한국사회의 세대 연구’, 역사비평 2003 가을 참조).

    산업화세대는 1953년 이전 출생자들로서 1960~70년대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이다. 홍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은 유년기에 한국전쟁과 식민지를 경험했다. 극심한 빈곤 때문에 물질주의와 성장주의를 가치관으로 갖게 됐으며, 반공·반북·친미·냉전의식과 국가주의·권위주의·집단주의적 가치관도 지니고 있다.

    젊은 세대가 볼 때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의식과 가치관은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심각히 위협받은 것도 아니다. 경제는 꾸준히 성장해왔고 독재는 종식되었다. 인권은 신장되었고 자유와 평등도 확대되어왔다. 남북관계도 느리지만 개선되어왔다. 그런데 왜 냉전적이지 않다던 그들이 냉전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으며 ‘의(義)의 세대’이며 충동적이라던 그들이 그토록 신중하게 되었을까?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고 해야 할까. 또는 세대의식은 돌고 도는 것일까. 세대론의 역설은 어디까지나 ‘현재’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60대들은 낡은 세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도 이전에는 분명 젊은 세대였고, 아버지·선배들과 세대투쟁을 벌였다. 지금 젊은 세대도 10년이 몇 번 흐르면 분명히 ‘뒷방 영감’ 신세가 된다. 세대론은 계속 새로 씌어진다. 하지만 늘 늙은 세대는 보수적이고 젊은 세대는 진보적이라고 씌어진다.

    앵그리 영맨

    세대차이와 세대갈등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어느 시대에나 신세대는 구세대와의 갈등을 통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왔다. 사회적 격동이 크면 클수록 세대교체 속도가 빠르고 세대갈등도 심각하다.

    사회적 격동이 클수록 세대간 이해의 폭은 좁아진다. 젊은 세대는 사회적 격변기에 공공연한 세대 투쟁을 벌여서 권력을 갖고자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뜬 젊은이들은 신세대의 기수를 자처하고 나서 선배와 아버지 세대를 심하게 물어뜯고 그들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명해졌다.

    기억할 만한 것은 오늘날 청산 대상처럼 된 현재의 60~70대가 한국 역사상 가장 심각하게 세대투쟁을 벌인 세대라는 점이다. 4·19혁명 때는 아예 ‘기성세대 물러가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60~70대들의 젊은 날을 한번 살펴보자.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이 종결되자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지향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전후세대다. 전후세대는 ‘아프레게르(apres-guerre, 전후파)’라는 프랑스어 별칭으로 불렸는데 그 등장은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프랑스가 원산지인 아프레게르는 영국에서는 앵그리 영맨(Angry Young Man)이었고, 미국에서는 어른들에게 ‘이유 없는 반항’을 일삼다가 ‘빨리 살고 빨리 죽는’ 비트족(beat generation)이었다. 제임스 딘과 지금도 많이 읽히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비트족의 정서를 드러낸 상징들이었다.

    1920년대 초중반에서 1930년대 초 출생자들인 한국의 아프레게르는 청소년 때 해방기의 혼란을 목격했고 전쟁에도 참여한 세대다. 취직할 데가 없어 다방과 당구장에서 죽치던 ‘제대군인’들이 그 중요 부위이며 전쟁이 만들어낸 양공주와 바걸들, 그리고 그들의 언니인 ‘자유부인’들도 한국적 아프레게르의 일부다.

    전쟁은 모든 것의 가치를 제로로부터 다시 사고하게 만들었으며, 미국식 가치관과 문화를 가난하고 혼란스런 한반도 남쪽에 덧씌웠다. 전후 1세대에 해당하는 참전세대는 극심한 사회혼란과 체제변화를 감당해야 했고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임방현, ‘새 세대는 건강한가?-세대교체와 체질개선에 부쳐’, 사상계 1963년 4월호 및 송건호 ‘세대론-4·19, 5·16에 나타난 세대의 단층과 그것의 비교분석’, 사상계 114호, 1963. 1).」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1961년 5·16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세대’이자 ‘도피의 세대’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잉여인간’ ‘인간 오발탄’ ‘병신’으로 불렀다. 각각 손창섭의 ‘잉여인간’(1958), 이범선의 ‘오발탄’(1959),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1966)의 소설 제목이다. 이 소설들에서 전쟁을 겪은 주인공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에서 헤어날 줄을 모른다.

    전쟁 후의 모순이 누적되다가 4·19혁명이 일어났을 즈음에 전후 1세대는 30대가 됐다. 1960년대 초, 즉 4·19와 5·16이 있던 당대의 감각으로 볼 때 당시의 30대와 20대는 서로 다른 세대로 인식됐다. 1960년대 초에 씌어진 모든 세대론에서 이들은 구분되어 있다. 20대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반면, 30대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임방현은 30대가 “엄청난 현실 앞에서 생활방편과 처세의 필요에 따라 움츠리거나 전 세대의 풍조에 물들었고 4·19의 폭풍 앞에서 초조한 방관자와 무력한 동조자의 자세를 취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4·19세대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도 없고 훈련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이던 송건호는 좀더 강하게 30대를 비판했다. 30대는 유소년기에 엄청난 혼란과 분열을 목격했기 때문에 피해의식이 강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공포에 가득 찬 전쟁 분위기 속에서 일신의 안전을 위해 도피해보자는 것이 일반적인 처세술이 되었고 생활태도가 되었다. 민주주의고 민족주의고 공산주의고 도시 ‘主義’가 붙은 것은 덮어놓고 기피하는 경향이 생기고 가치판단 의식이 마비되었다”고 쓴다.

    송건호의 글에는 해석상 묘한 대목이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반공에 투철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1920~30년대 출생자들이 실제로 젊은 시절 반공에 앞장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사생결단을 낸 한국전쟁에서 이들은 오히려 몸을 사렸다(죽음의 공포 앞에서 인간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정상이다). 송건호는 “5·16 이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들에게 징소집 기피현상이 있었다는 것도 위와 같은 ‘보신(保身)’심리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쓰고 있다.

    이 평가에 따르면 그들의 ‘투철한’ 반공주의는 실제로는 ‘반공’을 못한 데서 오는 심리적 보상기제이거나 후일 필요에 의해 개발된 기득권 방어논리일 가능성이 높다. 또 ‘반공’이 폭력적인 지배논리가 되면 ‘반공’하지 못하고 ‘비겁’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가 빠진 함정을 생각해보자. 남로당 군조직 간부 출신 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빨갱이’ 비난에 시달렸다. 그 뒤 박정희는 ‘빨갱이’에 대해 가장 철저한 적대자가 된다. 전후세대에게 있어 반공이란 합리적 이념으로 선택된 것이라기보다 빨갱이와 빨갱이 적대자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겪은 두려움에 대한 조건반사반응이 누적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세대혁명으로서 4·19

    이 세대들 가운데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며 스타이자 문화적 아이콘이 된 사람은 비평가 이어령(1932년생)이다. 1956년 ‘우상의 파괴’라는 평문을 발표하며 일약 유명인사가 된 그는 분단 이후 한국 문단의 어른 노릇을 하던 김동리·조연현 등을 철저하게 비판하며 새롭고 ‘저항’적인 문학정신의 기치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우상’으로 이어령의 비판을 받아야 했던 김동리와 조연현의 나이도 기억할 만하다. 그들도 40대 초,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해방과 전쟁 사이에 조선 문단을 이끌던 대가급 문인들이 대다수 납북·월북한 뒤 저절로 ‘어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결국 젊은이가 젊은이에게 ‘우상’이라 비판받은 셈이다. 이처럼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대투쟁이 벌어졌을 때에야 중·노년층은 어떠했겠는가. 살아있는 시체 취급을 받지 않았겠는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업적이 많고 세대적 동질감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는 4·19세대는 전후 2세대로, 1959년에서 1963년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격동을 겪으면서 하나의 세대를 형성했다. 4·19혁명은 대학생과 20대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반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재미있는 점은 4·19 이전에 기성세대의 눈에는 대학생들이 전후파적인 ‘3F’, 즉 나태·나약·불신(Faulheit·Feiheit·Falschheit)에 빠져 불건전하고 무능하게만 보였다는 것이다(고영복 ‘4월혁명의 의식구조’, 4월혁명론 90쪽). 특히 당시의 40대들은 자기들이 20대 학생시절에는 야심만만하고 민족의 현실에 비분(悲憤)하는 청년다운 기풍이 흘렀는데, 지금 청년에게는 그러한 기풍을 찾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런 그들이 혁명으로 떨쳐 일어나 ‘기성세대 타도’를 외치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1971년 40대 기수론을 펼친 이철승, 김대중, 김영삼(왼쪽부터).

    이것이 바로 기성세대가 늘 빠지는 함정이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성과물들 속에 신세대가 안주해 그 풍요나 혜택을 누리면서 ‘배가 불러서’ 또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아무 생각이 없거나’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유 없는 반항’만을 일삼는다고 생각한다. “네가 부족한 게 뭐가 있냐? 우리가 어릴 때는 안 그랬다.”

    그러나 외견상 게으르고 나약해 뵈는 신세대는 자신들만의 고민과 분노를 갖고 있다. 겉으로는 흐느적흐느적, 빌빌거리는 것 같지만 그들은 기성세대보다는 훨씬 엄격한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때가 덜 묻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범이 되지는 못하면서 자신들을 나무라는 속칭 ‘꼰대’들의 오류와 부패를 냉정한 자세로 관찰하고 있다.

    그러다가 언젠가 기회가 온다. 어엇, 하는 순간. 후배들은 쌓아두었던 고민을 분노로 표출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기성세대의 뒤통수를 때리려 할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는 태도를 갖지 않으면, 어느 순간 그들이 앞으로 쓰윽 나서며 당신을 ‘썩은 기성세대’라 부르고 물러날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그때 ‘저것이 키워준 은공도 모르고…’ 하는 배신을 느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1960년 고교생들이 앞장을 섰던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4월이 되자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 번졌다. 일반시민과 대학교수들은 4월19일, 혹은 4월25일에야 결합했다. 그렇게 해서 이승만 체제는 무너졌다.

    4월혁명을 주도한 것도, 혁명 이후의 개혁운동을 주창한 것도 온전히 20대였다. 다른 정치세력은 혁명운동을 지도하거나 거기에 나타난 민의를 수렴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 의해 지도되지 않았고 뚜렷한 구심점을 형성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4·19혁명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한계였다.

    당시 고려대 총장이던 유진오는 ‘폭풍을 뚫은 학생제군에게’(사상계, 1960. 6)라는 글에서 4·19혁명을 “선배나 기성인의 가르침이나 사주 없이 이룩한 청년들의 행동”이라 규정했다. 덧붙여 유진오는 4·19를 통해 혁명을 주도한 20대가 “선배나 기성인에 대한 절연과 대립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사상계’ 편집위원이던 철학자 안병욱도 기성세대를 ‘이(利)의 세대’, 혁명을 주도한 신세대를 ‘의(義)의 세대’라 규정하고 해방 후의 무질서와 혼돈, 6·25전쟁 속에서 자라나 구세대의 유교적 사고방식과 체면 따위를 전혀 모르는 신세대가 구세대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세대와 절연’ ‘대립’ ‘전혀 불신’ 같은 말들은 지금 씹어보면 참으로 아픈 단어와 구절들 아닌가. 그러니 지금의 60대들이 일으킨 4·19야말로 세대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과정에서 신세대는 자신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갖지 못했고, 민주당이 그야말로 길 가다 지갑 주운 격으로 정권을 잡게 되어 혁명은 유산(流産)됐다. 그리고 곧 5·16이었다. 이 또한 군부의 신세대, 듣기 예쁜 말로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을 당시 박정희는 44세, 장도영은 39세로, 노무현 대통령보다 훨씬 적은 나이였다. 폭압기구 중앙정보부를 만든 김종필과 김재춘이 각각 35세와 34세, 김형욱은 36세, 박종규는 31세, 차지철은 겨우 27세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조직한 내각에도 40대 7명, 30대 6명에 50대는 단 1명뿐이었다. 장면 정권의 내각 장관들보다 갑자기 20세 가량 젊어진 것이다.

    입만 열면 세대교체

    노무현 정권 초기에 보수언론은 안희정·이광재 등을 지칭하며 ‘노무현 정권은 83학번’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김종필도 노무현 대통령을 가리켜 ‘경륜이 부족하다’고 했다. 참으로 올챙이 적 생각 못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83학번은 지난해 대략 마흔 살이고 노무현 대통령의 ‘경륜’은 정권을 잡을 당시의 박정희나 김종필보다 훨씬 화려했다. 김대중·김영삼전 대통령이 1971년에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각각 대통령 후보와 신민당 총재가 되었을 때는 40대 중반이었다. 김종필은 39세에 공화당 의장이 됐다. 모두 정동영 의장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그때 3김은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그렇게 컸겠는가. 이들이 앞으로 썩 나서자 선배들은 갑자기 ‘사쿠라’가 되거나 부정부패세력으로 매도당했다. 특히 5·16 주도세력은 쿠데타 이후 ‘기성정치인=구악(舊惡)’이라는 관점에서 정치인 한 명 한 명을 심사대상으로 삼았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어디서 ‘정치활동규제법’을 배웠겠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 것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가 세대투쟁의 지표이자 상징이 된 것처럼, 박정희도 세대교체의 기수를 자처하며 4·19에서 표출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5·16 속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2월18일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정(民政) 불참 선언을 했다가 불과 10일 만에 말을 뒤집어 군정연장론을 내놓았다. 번복의 명분인즉, 국민의 열망인 정치권의 체질개선과 세대교체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입만 열면 ‘세대교체’를 운운하는 박정희가 무척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1963년 3월8일자 ‘만물상’은 “인격적으로 원숙해질 무렵에 이른 사람에게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기본권의 침해이다. 오해 없기 위해 만물상자의 연령을 밝히면 이제 겨우 40고개를 넘긴 애송이다”라 썼다(조갑제씨 홈페이지 참조).

    ‘산업화세대’는 바로 내 아버지와 스승의 세대다. 홍덕률 교수는 4·19세대와 6·3세대를 산업화세대의 하위집단으로 놓고 ‘산업화세대 내의 민주화세대’인 이들이 박정희 정권 속으로 포섭되거나 해체되어 극히 일부만 민주화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결국 ‘산업화세대’는 전반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냉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나친 일반화이며 현재의 세대 대립을 기준으로 하여 단순화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4·19세대의 역사적 공로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 학생운동과 평화적 통일운동의 전통을 처음 세운 세대였고, 4·19정신은 이후 전개된 모든 민주화운동의 뿌리이자 방향타였다.

    특히 전후의 피폐한 시기를 벗어나서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전통은 모두 4·19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최초’로 만들고 행하여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긍정적인 문화적 가치는 허다하다. 그들은 최초의 순한글 세대였으며 민족주의를 학문에 접목하여 ‘국학’을 궤도에 올려놓은 세대였다. 또한 서구의 이론을 수용하고 여러 학문 분야의 제도를 실제로 일군 것도 그들이다.

    그들은 대가이자 스승으로서 아직도 존경받고 있다. 문학과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생각나는 대로 떠올려보면, 김윤식 최인훈 안병직(1936년생), 정진홍 김진균 신용하(1937년생), 한영우 백낙청 김병익(1938년생), 김주영 조동일(1939년생), 김치수(1940년생), 현기영 임헌영 김승옥 김지하(1941년생), 김현 박태순 조세희(1942년생)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정치나 다른 분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 동네에서 누가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는가? 아버지와 스승 세대가 시대착오적인 ‘수구·냉전·극우’의 대명사가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그들 세대가 더 잘 늙어 존경받는 원로가 되거나 ‘현명한 노인’이 되도록 ‘협조’해야 한다. 대신 그들도 이제 북한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든지,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든지 하는 ‘자랑’은 제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서 경제성장을 해냈다’는 것이 기성세대의 공통적 정서이자 젊은 세대를 훈계할 수 있는 자부심의 근거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세대의 오해다. 기성세대가 조금이라도 그런 심사를 드러내는 순간 젊은 세대는 튕겨나가는 화살처럼 반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60대가 전쟁경험을 들어 북한체제의 잔혹한 성격을 부각시키려 할 때 30~40대가 회의를 품는 것처럼 말이다.(송호근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삼성경제연구소 85쪽)」

    젊은 세대는 그런 자랑거리들의 이면에 더 주목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오늘날 처한 현실이 그런 자랑을 설득력 없게 만든다. 이런 게 섭섭하다 해서 극우단체 집회에나 참석한다면, 존경은커녕 손가락질 받기에 딱 좋다.

    10년 단위로 잘린 한국적 세대

    한국사회의 에이지즘(Ageism, 나이차별주의)은 분명 남다르고 극성맞은 데가 있다. 우리만큼 나이에 민감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한국인은 싸우다 말고, 또는 싸우기 전에 “너 몇 살이나 X먹었어?”를 확인한다. 이런 문제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는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수평적 인간관계보다 수직적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사회에 살기 때문에 나이(기수, 학번 등)에 민감하다. 또한 나이에 민감하기 때문에 더 세밀한 세대 구분 감각을 확정짓는다.

    ‘동기(同期)주의’도 작용한다. 같은 나이, 같은 학번, 같은 기수란 사실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수직적 관계로 맺어지는 선후배들에 대해 같은 경험을 보유하게끔 한다. 한국사회의 집단주의와 연고주의가 세대감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왔음이 분명하다. 동갑, 동기, 동향, 동문 없이 혼자 살아가고 사업을 해나가야 하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개인이 제 발로 서기 어렵고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한국적 세대감각의 배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한국인의 세대감각은 매우 정치적이면서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적이기도 하다. 세대마다 코드와 노래가 따로 있고, 읽은 책도 다르다. 일상적 문화 실천의 차이가 구분의 감각을 만든다. 무슨 노래를 듣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책을 읽는지가 중요하다. 선배들의 술자리나 후배들의 모임에 참석했을때, 나누는 대화와 부르고 듣는 노래가 다른 데서 이질감과 작은 충격을 느낀다. 그 누적이 구별의 감각을 만든다.

    10년 단위로 잘라서 세대를 나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은 매우 역사가 깊고 자연스럽다. 근대 이후, 불행하게도 거의 10년 단위로 역사적 변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에 나라가 망했고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발발했고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60년에는 4·19, 그 이듬해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되고 1980년에 5·17쿠데타와 광주학살이 자행되었다. 1991년에는 노태우 정권 퇴진시위가 크게 일면서 ‘분신정국’이 이어졌고 냉전시대의 한 축인 소련이 망했다.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5·16쿠데타 주역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 초법적 권력을 행사했다. 사진은 당시 최고위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길재호, 그 옆이 김형욱, 가운데 넥타이 맨 사람이 김종필이다.

    이렇듯 10년 단위가 세대구분의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단위임에 분명한데, 한국사회의 변동 폭과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념과 정서의 공감대는 수년 사이에 달라진다. 4·19세대와 6·3세대 사이의 거리는 불과 4년인데도 구분해야 하고, 민청학련세대와 긴급조치 세대도 서로 다른 세대로 나뉜다.

    4·19세대 이후 가장 영향력이 크고 세대의 공통감각도 크다는 386세대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회 진출’ 단계를 넘어 우리 사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386세대의 본령은 80~84학번이다. 이들은 1987년 이후 80년대 말 학번을 자기들과 같은 세대라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19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대학사회와 대학문화는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었을 때 거기 정말 같이 있었느냐’는 것이야말로 세대 구분의 결정적인 기준이다.

    대학을 나온 한국인에게는 ‘학번’이 세대 구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군사정권과 대결해야 했던 대학사회도 학번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구조의 사회(였)다. 선후배를 그렇게 따지는 문화란 기실 반(反)대학적인 것이다. 한편 대학의 학번과 경험을 기준으로 하는 세대 구분은 불편함에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대학은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본분’에 맞지 않는 엄청난 사회적·정치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세대 형성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이 세대 형성에 중요한 것은 단지 한국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어떤 생애주기의 역사적·문화적 경험이 세대의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딜타이나 만하임 같은 학자도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연령대, 즉 17~25세의 경험이 세대감각 형성에 결정적이라 대답했기 때문이다. 즉 대학과 고등학교 시절 경험,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이에 더해 군대에서의 경험이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학·고교·군대는 가장 왕성한 정신과 몸을 지녔을 때 (강제로) 소속돼야 하는 공동체라는 특징도 있다.

    공동체에 묶여 있는 젊은이들이 존재할 때 세대 감각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세대투쟁과 갈등의 역사는 곧 근대의 역사가 된다. 20세기가 열리면서 세대투쟁은 시작되고 한번 시작되자 그것은 쉼 없이 이어져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새로운 문화의 주창자란 곧 선배와 아비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세우고자 했던 과격한 신세대들이었다.

    근대문학을 일구고 20세기 초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광수는 특히 과격했다. 그는 아예 자기 세대가 고아이자 하늘에서 떨어진 신종족이라 자처했다. 1910년에 발표한 ‘금일 아한청년(我韓靑年)과 정육(情育)’(대한흥학보 1910. 2)에서 이광수는 조선의 청년은 “부로(父老)의 세대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불행한 처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 500년을 이어온 아비·할아비의 세대는 간단히 ‘앎’도 ‘함’(실천)도 없는 인물’들로 폄하된다. 가르쳐줄 아비도 스승도 없으니 청년들은 ‘피교육자가 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돼야 하며, ‘학생이 되는 동시에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아래는 유명한 ‘자녀중심론’의 일절이다.

    「“우리는 선조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으로 금일 금시에 천상(天上)으로서 오토(吾土)에 강림한 신종족으로 자처하여야 한다.” (‘자녀중심론’, 청춘 15호, 1918. 9)」

    이러한 과격한 생각은 조선 자체를 구세대와 기존질서로부터 전면 부정·완전 개조하고자 했기에 나온 것이다. 이광수 세대가 ‘적’으로 삼고자 했던 조선사회의 가치란 유교적 가부장제·대가족주의·족벌주의·조상중심주의였다. 이는 모두 가부장과 연장자 중심의 가치관으로 새로운 세대나 자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근대 부르주아 가족주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0년대가 되면 이광수와 그 세대들은 뒤이어 나타난 후배 세대들에 의해 완전히 부정당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한 청년운동세대들은 “조선사회의 최근 역사에 이르러는 말할 수 없는 원한과 비통”에 이르게 된 모든 책임을 “새삼스럽게 선배에게 돌리게 되었다”(‘논설-격변우격변하는 최근의 조선인심’, 개벽 제37호, 1923. 7). 이광수가 앞의 글을 쓴 때로부터 불과 5년 후의 일이다. 사회주의로 무장한 당대의 청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봉건주의와 이광수 세대가 주창한 자본주의적 실력양성론을 단번에 부정하고 나왔다.

    한국의 세대투쟁과 세대감각

    1919년 28세의 이광수. 스스로 ‘신종족’이라 칭했던 그였지만 얼마 못가 후배들로부터 비판받는 입장이 됐다.

    이처럼 ‘낡은 것’과 전통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식이야말로 세대를 건너 전달되는 새로운 시대의 유일한 전통이자 역사철학이었다. 조선사회가 처한 곤궁한 상황과 이에 대한 깊은 자괴심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변화의 빠른 속도만큼 세대교체에는 엄청난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20세기 전체에 걸쳐 한국의 근대화 자체를 규정하는 특징이다.

    세대를 특징짓는 시대정신은 변화의 과정이 점점 빨라질 것이라는 가속의 느낌과, 미래가 오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일 것이라는 기대 사이에 있다. 현대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는 정신이다. 현대는 혁명, 진보, 해방, 발전, 위기 등과 같은 개념의 총합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은 과거의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새로운 것 스스로에게서 기준을 찾으려 한다. 규준은 현대 자신일 뿐 과거가 규준이기 어렵다. 하베르마스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시간감각이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윗세대를 존경하기 어렵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간감각은 불행한 것이 아닐까. 젊은이는 불안해하면서도 자빠질 듯 빨리 앞으로만 내달리고, 늙은이는 그 달림을 보며 낭패감에 젖는다. 그래서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을 때,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를 ‘낀 세대’라 생각한다. 가혹한 속도감 앞에서 모든 세대는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불행한 세대라 생각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들뿐 아니라 19세기에 태어나 지난 세기를 살다 간 사람들이 벌써 그런 생각을 했다. 1897년생인 소설가 염상섭은 1931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 자기 세대의 불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부모만 해도 비틀어졌으나마 꽃 속에서 나고 꽃 속에서 길러졌다. 그러나 우리는 꽃 없이 났다. 무화과(無花果)다. 우리 자식도 꽃 없이 났다. 그러나 자식의 일생도 우리의 생애같이 보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꽃 속에서 기르고 싶다.”」

    그러나 1860년대나 18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과연 자기들이 꽃 속에서 자라났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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