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한국 스포츠 스타들의 국제무대 해프닝

수영경기 중 익사 위기, 화장실에 갇힌 탁구여왕, 아시아 여자육상 2관왕은 남자…

  • 글: 기영로 스포츠 해설가 younglo54@yahoo.co.kr

    입력2005-03-24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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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멕시코 올림픽 수영경기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남상남,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역주행’한 황영조, 잉글랜드 프로축구에서 대기심을 코칭스태프로 잘못 알고 엉뚱한 골 세리머니를 펼친 설기현 등 스포츠 스타들의 온갖 해프닝.
    한국 스포츠 스타들의 국제무대 해프닝

    여자탁구 간판스타이던 정현숙은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 선수권대회에서 경기 직전 화장실에 갇히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할 뻔했다. 사진은 1977년 버밍검 세계탁구 선수권대회에 이에리사와 조를 이뤄 출전했을 당시의 정현숙(뒤쪽).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올림픽 체조 사상 최초로 10점 만점을 받으며 3개의 금메달을 딴 루마니아의 코마네치는 늘 인형을 끼고 다녔다. 14세 철부지 소녀라 올림픽이라는 큰 경기에 대한 부담이 없어 긴장하지 않았기에 좋은 성적을 얻었을 수도 있다.

    많은 선수가 큰 대회에서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긴장 때문이다. 긴장은 선수에게 가장 큰 적이다. 선수가 긴장하면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 뿐더러 어이없는 실수까지 저지르게 된다. 국가대표 선수들끼리 승부를 겨루는 국제무대에서도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예기치 않은 해프닝이 벌어지곤 한다. 한국 선수들도 예외가 아니다.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의 장성호 선수는 이병규(LG 트윈스)와 함께 국내 프로야구 선수 중 가장 정교한 왼손 타자로 꼽힌다. 장성호는 199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뛰어든 뒤 2년 간 2할대 타율에 머물다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통산 타율도 3할1푼을 넘나든다. 그런 장성호도 올림픽 무대에서는 웃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다.

    시드니 올림픽 한국 대 이탈리아 야구 2차전이 벌어진 2000년 9월17일로 돌아가보자. 2회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7번 타자 장성호는 타석에 들어서기 위해 배팅 게이지에서 연습 스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긴장한 나머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연습 스윙을 마친 장성호는 천천히 걸어서 타석에 들어섰다. 장성호가 막 타격 자세를 취하려는 순간 주심이 돌연 타임을 불렀다.

    주심 : 이봐요 미스터 장, 지금 뭐 하는 거요?장성호 : 아니 내가 뭘요?주심 : 당신 배트를 보세요.장성호: 내 배트가 어쨌다고… 어, 이게 뭐지?



    장성호는 긴장한 탓에 연습 스윙을 할 때 배트에 끼워둔 쇠 링을 빼지 않고 타석에 들어선 것이다. 링 무게는 200g. 보통 배트의 무게가 900g이니까 장성호는 무려 1㎏ 100g짜리 배트로 타격을 할 뻔한 것이다. 뒤늦게 이를 안 한국과 이탈리아 벤치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결국 장성호는 그 타석에서 보기 좋게 삼진아웃을 당했다.

    최근 한국의 스키는 급성장하고 있다. 비록 올림픽이 아니라 유니버시아드 대회이긴 해도 스키점프에서 금메달도 땄고, 강민혁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 알파인 종목에서 사상 처음 20위권(25위)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30∼40년 전만 해도 선수들 가운데에는 슬로프를 내려오다가 큰 부상을 당하거나 내려오다가 죽을까봐(?) 기권한 사례도 있었다.

    1968년 그레노블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어재식 선수는 알파인 종목 가운데 활강, 회전, 대회전에 출전 신청을 했다. 그런데 거리가 짧은 회전과 대회전 경험은 있었지만 코스 길이가 3km가 넘는 활강 경험은 전혀 없었다. 당시 국내에는 리프트가 없었기 때문에 700∼800m 코스를 한번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에 2∼3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당시 경기 상황을 어재식씨에게 직접 들어보았다.

    -활강을 하려고 출발대에 올라갔다가 ‘죽을 것 같아’ 기권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슬로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그래서 겁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스타트는 했다.”

    -그러면 얼마나 내려왔나.

    “3km가 넘는 코스에서 겨우 100m나 내려왔을까.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100m쯤 더 내려오다가 넘어졌다.”

    -만약 더 내려왔다면?

    “그야말로 중상을 입었거나 까무러쳤을 것이다.”

    이후 한국 스키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1980년 레이크플레시드 동계 올림픽 때는 어재식씨가 코치로 홍인기 선수를 이끌고 출전했다. 홍 선수는 해발 832m 높이의 3009m짜리 활강코스에서 완주해 47명 가운데 40위를 차지했다. 이 경기에서 홍 선수는 가파른 슬로프를 내려오다가 폴을 한 개 놓치는 바람에 나머지 한 개만 가지고 완주했는데, 그 광경이 마침 ABA TV에 생생하게 방영되어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한 스키장 주인이 홍 선수를 초청하기도 했다.

    한국 스포츠 스타들의 국제무대 해프닝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수영경기에서 익사할 뻔했던 남상남.

    1981년 스페인 하카에서 벌어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한국 아이스하키는 그야말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강아지’였다. 금메달을 딴 캐나다에 31대 0의 참패를 당한 것이다. 아이스하키는 얼음 위에서 하는 운동이라 선수와 팀의 기량에 따라 실력 차이가 매우 크게 나는 종목이다. 만약 캐나다가 한국을 시종일관 몰아쳤다면 70점 이상의 득점도 가능했다는 게 당시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은 1피리어드 20분 만에 이미 16골을 내줬다. 남은 2, 3피리어드에서는 캐나다 선수들에 비해 실력이 ‘한 수’가 아니라 세 수쯤 떨어지는 한국 선수들이 더 빨리 지칠 것이기 때문에 점수 차는 더 벌어질 게 뻔했다. 그런데 세계 최강의 캐나다 선수들은 2피리어드에 나선 이후 골 욕심보다는 다음 경기에 대비해 몸을 푸는 듯 골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 선수들은 경기가 빨리 끝나기만을 고대했다.

    한국 스포츠가 국제대회에서 현격한 실력 차이로 망신을 당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축구에서 스웨덴에 12대 0으로 졌고, 아시아선수권대회 야구에서는 일본에 20점차 이상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이나 점수로 볼 때 아이스하키에서의 31대 0 패배는 한국의 국제대회 참가 사상 가장 비참한 경기였다.

    “빨리 끌어내, 빠져 죽는단 말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수영 남자 자유형 100m에서 적도 기니 출신의 에릭 무삼바니는 해수욕장에서나 입는 헐렁한 트렁크 차림으로 ‘개헤엄’을 쳐 화제가 됐다. 그는 예선 1위로 골인한 피터 호헨반트(네덜란드)보다 무려 1분04초08이나 뒤진 1분52초72를 기록했지만,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완주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일약 스타가 됐다.

    그러나 한국에는 무삼바니보다 더 놀랄 만한 선수가 있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한 남상남 선수는 당시 한국 여자수영의 간판스타였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과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가 등장하기 전 한국 신기록을 밥 먹듯이 갈아치우던 남상남은 최고의 선수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남상남이 멕시코 올림픽에서 메달까지는 몰라도 한국신기록을 세우면서 웬만큼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남상남 선수는 생전 처음 보는 실내수영장에다 미국, 호주, 유럽 여자선수들의 남자 같은 체격을 보고 잔뜩 주눅이 들었다. 여자 접영 200m 예선, 8레인 중간에 선 남상남 선수의 얼굴은 멀리서 보아도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출발신호와 함께 남상남을 비롯한 8명의 선수가 일제히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남상남 선수는 레이스가 진행됨에 따라 눈에 띄게 처지더니 50m 턴을 하자마자 물속으로 갑자기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아나와서는 붕 떠오른 채 수영 동작을 멈춰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스럽게 남 선수를 바라보던 한국선수단 주치의 성낙응 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이 과장!(대한체육회 과장으로 추정) 상남이 끌어내!”

    하지만 이 과장은 경기중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빨리 상남이 끌어내란 말이야. 물에 빠져 죽는다고!”

    한국을 대표하는 올림픽 수영선수가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를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쯤 되자 경기 진행요원들도 이 과장과 합세해 물속에서 남 선수를 구해냈다. 축 늘어진 남상남은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성 박사는 재빨리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꺼내 남 선수의 코에 대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멕시코 국민과 전세계 수영인들은 이 뜻밖의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간의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난 후 남상남 선수가 긴 숨을 내쉬면서 소생했다. 국제경기 첫 출전에 따른 부담과 우승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시합 도중 기절하게 만든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남자 수영선수가 긴장한 나머지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실격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청중학교 3학년이던 박태환 선수. 1989년생으로 376명의 한국 선수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당시 한국선수단 최고령은 여자 사격 서키트 종목에 출전한 43세의 김연희 선수. 겨우 열네 살인 박태환과는 엄마와 아들뻘이었다.

    박태환은 비록 나이는 어려도 키 1m79cm, 몸무게 63kg, 발 사이즈 290mm로 수영 선수로는 비교적 좋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자유형 400m 한 종목에만 출전신청을 했다.

    8월14일 야외 수영장인 아테네 아쿠아틱센터. 박태환은 자신의 유일한 출전 종목인 남자 자유형 400m 예선 레이스를 벌이기 위해 출발선에 섰다. 그런데 누가 봐도 박태환의 얼굴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판의 ‘출발 준비’ 구령을 출발 신호로 잘못 알고 먼저 물에 뛰어 들었다. 수영은 육상과는 달리 ‘원 스타트 룰’을 적용한다. 즉 한번 부정 출발하면 곧바로 실격당한다. 결국 박태환은 올림픽 무대에서 실력을 겨뤄보지도 못한 채 탈락하고 말았다.

    박태환은 선수대기실로 돌아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흘리며 자책했다. 초성초등학교 재학중 천식 때문에 수영을 시작했다는 박태환. 국제무대 출전 경험이 전무했던 그에게 올림픽은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박태환은 이후 일취월장해서 지난해 12월 대전에서 벌어진 경영월드컵 400m와 1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지난 1월28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국제수영연맹(FINA) 쇼트코스 1500m에서는 14분43초13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따는 등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해 4년 전 아테네에서 저지른 실수를 메달 획득으로 만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대기심 껴안고 골 세리머니

    한국 스포츠 스타들의 국제무대 해프닝

    지난 1월 잉글랜드 프로축구경기에서 대기심을 껴안고 춤추는 엉뚱한 골 세리머니로 화제를 낳은 설기현.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이후 한국 축구선수들의 유럽 진출이 활발해졌다. 그 전에도 차범근, 황선홍(이상 독일), 허정무(네덜란드), 서정원(프랑스), 안정환(이탈리아) 등이 진출하긴 했지만 월드컵 이후처럼 무더기로 나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선수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다. 현재 프리미어리그에 가장 근접한 선수는 프리미어리그 바로 아래인 잉글랜드 챔피언십리그 울버 햄프턴 팀에서 뛰고 있는 설기현이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 네 팀에서 설기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한다. 그러니 조만간 한국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선수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설기현은 엉뚱한 골 세리머니로 잉글랜드 프로축구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난 1월23일 벌어진 잉글랜드 챔피언십리그 울버 햄프턴과 FC 밀월의 경기. 울버 햄프턴의 원정경기였다. 설기현은 경기 후반 인저리 타임 3분경 문전에서 동료 크래드독의 헤딩이 빗나가면서 떨어진 볼을 감아 차 23m짜리 결승 중거리 슛을 성공시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골을 터뜨린 설기현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대기심을 껴안고 골 세리머니를 한 것이다. 당시 대기심의 위치는 울버 햄프턴 코칭 스태프 바로 옆이었다. 게다가 대기심의 윗옷 색깔이 울버 햄프턴 유니폼과 비슷한 회색이어서 결승골을 넣고 들뜬 설기현은 그를 코칭 스태프로 착각한 것이다. 대기심은 설기현에게 “그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빨리 경기를 하라”고 떠밀었다. 하지만 흥분한 설기현은 계속 그를 껴안고 ‘난리 블루스’를 췄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울버 햄프턴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은 설기현의 이 같은 돌출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울버 햄프턴의 글랜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지역 신문 ‘버밍엄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 기사를 보자.

    -당시 설기현 선수의 기행(奇行)을 몰랐나.

    “전혀 몰랐다.”

    -그 순간 뭘 했나.

    “설기현이 인저리 타임에 골을 터뜨렸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면 언제 알았나.

    “숙소에 돌아와서 비디오를 보고 알았다.”

    -누구와 함께 비디오를 봤나.

    “우리 팀 선수단 전원이 봤는데, 설기현이 골을 터뜨린 뒤 대기심을 껴안고 좋아하는 장면을 보고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설기현도 웃었나.

    “아니, 설기현만 빼고….”

    황영조의 ‘역주행’

    지난해 아테네 올림픽 마지막 날 벌어진 남자 마라톤 경기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초반부터 선두를 달리던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선수가 35km 지점에서 갑자기 뛰어든 아일랜드 출신의 종말론 추종자의 방해로 페이스가 흔들려 결국 3위로 처진 것이다.

    한국 선수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주최측의 준비 소홀로 피해를 본 적이 있다. 황영조 선수는 뛰어난 재질을 갖고 있음에도 마라톤 인생을 짧게 마감했다. 하지만 중요한 대회에서 세 차례나 우승을 차지해 한국 마라톤의 새 역사를 썼다. 모두 마라톤 단일대회가 아닌 종합스포츠 제전 마라톤 부문에서다. 1991년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다.

    한국 스포츠 스타들의 국제무대 해프닝

    아시아 여자육상에서 최고의 기록을 세웠던 정봉순은 뒷날 남자로 밝혀졌다.

    그중에서도 1991년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우승은 매우 극적이었다. 이 대회의 마라톤 경기 출발점은 매우 부산했다. 유니버시아드대회 선수뿐만 아니라 일반 동호인 선수들도 함께 뛰었기 때문이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유니버시아드를 경기력 중심의 국제대회라기보다는 대학생들의 축제 정도로 간주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선수들과 함께 출발점에서 뛸 수 있게 한 것. 골인 지점도 똑같은 메인 스타디움이었다. 다만 유니버시아드 대회 출전선수는 메인 스타디움에 들어오면 오른쪽에 있는 육상트랙으로 달리고, 일반인들은 운동장 왼쪽으로 골인하도록 구분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왼쪽과 오른쪽을 구별하는 유일한 표지는 가느다란 줄 하나였다. 선두로 들어오던 황영조가 착각할 만도 했다. 제대로 된 인도자도 없이 혼자서 달린 황영조는 메인 스타디움에 들어서면서 당황한 나머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뒤늦게 황영조가 다른 쪽으로 달리고 있는 걸 안 조직위원회 관계자가 황영조를 붙잡아 방향을 틀었지만 황영조는 이미 70m 이상을 달린 상태였다. 다행히 2위가 워낙 떨어져 있던 터라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황영조는 셰필드의 무더위 속에 2시간12분40초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때까지 자신의 최고기록이던 2시간12분35초에 5초 뒤진 기록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70m를 달렸다가 되돌아왔으니 140m를 쓸데없이 달린 셈이다. 엉뚱한 실수만 없었다면 황영조는 그 대회에서 금메달 획득은 물론 자신의 최고기록을 경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포 위에 덮을 게 있어야죠”

    1983년 오사카 국제마라톤 대회에는 당시 한국의 여자 마라톤 3인방 최경자·이경미·이문주 선수가 출전했다. 이 가운데 이문주와 최경자는 해외원정 경험이 있었지만 이경미는 처음이었다.

    세 선수는 신항큐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중 이경미는 혼자 313호실을 배정받았다. 깨끗한 싱글룸이었다. 침대에는 하얀 시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하늘색 모포가 덮여 있었다. 때는 3월, 마라톤하기에는 좋지만 밤에는 비교적 쌀쌀한 날씨였다.

    모포 위에 반듯이 누운 이 경미는 ‘이제 곧 이불을 가져오겠지…’ 하고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는데 여독 때문인지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아침 7시. 10시간이나 모포 위에서 잔 것이다.

    이경미는 식사하러 식당으로 내려가다가 코치를 만났다.

    “뭐 이런 호텔이 다 있어요?”

    “왜?”

    “밤새 추워서 혼났어요.”

    “왜 시트가 얇아서?”

    “아니, 모포 위에 덮을 게 있어야죠. 이불 말이에요.”

    “야, 모포를 젖히고 시트 안으로 들어가야지, 호텔에 이불이 어디 있어.”

    컨디션이 정상일 리 없는 이경미의 마라톤 경기결과는 알아볼 필요도 없다.

    한국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금메달만큼 값진 은메달도 적지 않았다. 한국 올림픽 사상 최고의 은메달 중 하나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복싱 헤비급에 출전한 백현만이 따낸 것이다. 백현만은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한 펀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체격이 작은 아시아 선수가 체격이 월등히 좋은 미국, 유럽 선수를 상대로 헤비급에서 메달을 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눈이 좋고 스피드가 뛰어난 백현만은 2차전에서 유고의 마브로빅 첼리코에게 화려한 아웃복싱을 구사해 5대 0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8강전에서 만난 동독의 하이테크 마이크는 키가 2m나 되는 장신이었지만 테크닉이 떨어지는 선수였다.

    백현만은 경기 시작 1분 만에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짧은 훅으로 첫 다운을 빼앗았고, 일어선 마이크에게 바짝 다가가 왼쪽 훅을 터뜨려 두 번째 다운을 빼앗았다. 백현만은 1라운드가 끝나기 직전 아마추어 복싱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어퍼컷을 작렬시켜 세 번째 다운을 빼앗은 끝에 RSC승을 이끌어냈다. 동메달을 확보한 백현만은 준결승전에서 폴란드의 골로타 안츠레체이를 맞아 2라운드에서 오른쪽 훅으로 눈을 크게 찢어 역시 RSC승을 거두고 결승전에 올랐다.

    그러나 결승에서 만난 미국의 레이 머서는 백현만이 그때까지 만난 상대와는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레이 머서는 나중에 프로로 전향해 WBA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고 최근엔 이종격투기대회인 K-1에 진출했다. 2004 K-1 나고야 대회에서 일본의 간판스타 무사시와 맞붙어 1라운드에 하이킥을 맞고 다운을 당하는 등 고전 끝에 3라운드 판정패를 당한 바 있다. 올해 42세의 레이 머서는 지난해 7월 K-1 서울대회에서는 2003년과 2004년 K-1그랑프리에서 연거푸 우승한 네델란드의 레미 본야스키에 도전해 패하기도 했다.

    아무튼 백현만은 ‘복싱 왕국’ 미국의 헤비급 대표인 레이 머서의 상대가 안 됐다. 백현만은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몇 차례 공격을 해보았다. 하지만 레이 머서에게 짧은 훅을 얻어맞고 다운당한 후로는 계속 도망다니다가 결국 2분16초 만에 KO패 당했다. 그런데 백현만이 링에서 내려오면서 당시 김성은 코치(현 대한복싱연맹 회장)에게 한 말이 걸작이다.

    “어휴! 쟤 주먹은 돌이야, 돌….”

    프로복서 이창길은 아마추어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프로로 전향한 전형적인 스트레이트 선수. 프로 데뷔전에서 김옥석 선수에게 6회 판정승을 거둬 무사히 첫 고비를 넘겼고, 불과 4전 만에 파이팅 김을 물리치고 주니어 웰터급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1971년 5월에는 일본의 라이온 후루야마를 물리치고 주니어 웰터급 동양 챔피언에 올랐다. 그때까지 전적은 9전 전승에 5KO승.

    1971년 12월4일에는 이창길·김현(페더급), 유재두(미들급) 3명의 선수가 각각 일본의 거츠 이시마스, 시미즈 구와시, 더틀 오카베를 맞아 싸운 동양타이틀 방어전에서 모두 승리해 장충체육관을 찾은 관중을 열광케 했다. 특히 이창길에게 판정패한 이시마스는 나중에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에 올라 이창길의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창길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 WBA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안토니오 세르반테스에게 도전하게 됐다. 그러나 세르반테스는 역대 최강의 주니어 웰터급 선수인 데다 경기는 그의 홈링에서 벌어졌다. 이창길은 6회에 KO패를 당했는데, 뒷날 “6라운드에 쓰러진 후 일어날 정신은 있었지만 도끼 같은 그의 주먹에 더 얻어맞을까봐 일어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정현숙의 ‘화장실 엑소더스’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한국 스포츠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뜻 깊은 대회다. 그런데 당시 금메달의 주역 정현숙은 금메달의 영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기억을 갖고 있다. 바로 화장실 사건이다.

    정현숙은 경기를 앞두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습관이 있다. 사라예보 대회는 각조 예선을 통과한 4팀이 결승 리그를 벌여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결승 리그에 오른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헝가리, 일본, 중국 네 나라. 한국의 첫 상대는 헝가리였다.

    경기 시작 전 정현숙은 버릇대로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만 화장실 문이 잠긴 채 고장이 나버렸다.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1번 주자로 출전해야 할 정현숙이 화장실에 갇히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정현숙은 5분여 동안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아무도 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대회를 개최한 유고는 공산국가였다. 선수와 관중의 접촉을 막기 위해 당국은 관중이 2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에 따라 선수와 대회 관계자들만 오가는 1층은 매우 한산했다. 정현숙씨는 그때 ‘국가대표로 출전해 경기를 앞두고 화장실에 갔다가 못 나와 실격패를 당했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아무튼 정현숙은 급한 김에 문고리를 타고 화장실 문을 기어올라 ‘탈출’에 성공했지만 문고리에 허벅지를 긁히는 부상을 당했다. 정현숙이 절룩거리며 경기장에 들어서자 팀 동료인 이에리사와 박미라는 깜짝 놀랐다. 화장실에 갔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경기가 지연된 것도 석연찮은데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다리를 절고 있으니….

    그러나 정현숙은 애써 아프지 않은 척했다. 정현숙과 맞붙을 헝가리의 1번 타자가 바로 아시아 선수 킬러 마고스였기에 더욱 부상 사실을 숨겨야 했다. 수비 전형으로 유럽 선수에게 유난히 강했던 정현숙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도 마고스를 2대 0으로 제압했다. 결국 한국은 헝가리에 3대 0, 중국에 3대 1,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3대 1로 이겨 3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마라톤을 제외한 육상종목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 선수는 누구일까. 아시안게임을 2연패한 이진택(높이뛰기), 장재근(200m), 이진일(800m), 그리고 백옥자(투포환), 아니면 86서울아시안게임에서 3관왕(800m, 1500m, 3000m)을 차지한 임춘애…. 하지만 기록으로 볼 때는 단연 정봉순 선수다.

    정봉순은 1979년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제3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400m와 800m를 석권했다. 당시 정봉순이 2관왕을 차지하면서 세운 400m 54초53과 800m 2분06초01은 올림픽에서도 입상이 가능한 출중한 기록이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아시아권에서는 여전히 우승이 가능한 기록이다.

    그러나 정봉순의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2관왕과 그가 세운 모든 기록은 훗날 대한육상경기연맹에 의해 삭제됐다. 약물이라도 복용한 것일까.

    아니다. 대한육상경기연맹 이규섭 사무국장은 “정봉순 선수는 후에 여자가 아님이 밝혀졌다. 그래서 그가 세운 모든 기록을 없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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