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북핵 벼랑 끝 전술은 ‘3대 세습’ 준비작업?

“평양은 권력승계 고비마다 한반도 긴장 고조시켰다”

  • 정리: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5-23 17:5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김정일 위원장이 은밀히 권력승계를 준비하던 30여 년 전, 북한은 푸에블로호 사건과 1·21 청와대 습격사건 등의 도발을 감행했다. 권력승계가 마무리되던 10여 년 전에는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졌다.
    • 이와 관련해 4월말 한 세미나에서 제기된 주목할 만한 견해를 소개한다. 2002년 이후의 2차 북핵 위기와 계속되는 초강경 노선 역시 3대 권력승계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 핵 능력 과시를 통해 후계자의 지도력을 굳건히 하려는 시도라면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은 더욱 커지는데….
    북핵 벼랑 끝 전술은 ‘3대 세습’ 준비작업?
    핵문제와 3대 권력승계. 2002년 이후 북한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이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다. 두 사안 모두 북한체제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대형 이슈인 데다,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한 평양 최고수뇌부에서 매우 은밀히 결정되고 진행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 북한의 대외정치와 대내정치를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폭발력 있는 이슈이기도 하다.

    특히 북한이 2002년 이후 2월10일 핵 보유 선언으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쏟아져 나온 바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통해 ‘몸값’을 올려 미국과 협상하면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와 함께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파키스탄처럼 핵 보유국의 지위를 굳건히 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월29일 서울 삼청동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린 ‘33차 통일전략포럼’에서 주목할 만한 견해가 제기됐다. 이날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연세대 김용호 교수(국제정치학)가 “북한의 3세대 권력승계와 최근의 북핵 문제는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 이러한 견해는 그간의 분석이 국제관계, 혹은 억제이론 같은 군사적 시각에서 나온 것임에 견주어, 북한 내부사정을 통해 접근한 것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김 교수는 그동안 북한이 극단적인 대외강경 노선을 걸으며 긴장을 고조시키던 시점은 모두 권력승계와 관련해 중대한 변화가 있던 때라고 분석했다. 1960년대 말 발생한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1·21 청와대 습격사건은 김정일 위원장으로 2세대 권력승계가 처음 준비되던 시기에 발생했으며, 1990년대 초의 1차 북핵 위기는 그의 권력승계가 마무리되던 시점에 불거졌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새로 등장하는 지도자의 지도력을 확보하고 체제를 결집시켜 비토 세력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이 같은 강경 분위기를 조성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2002년 가을 시작된 2차 북핵 위기와 이후 계속되는 초강경 노선 또한 김정일 이후 3대 권력승계 문제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주목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접근해보면, 북한이 결국 핵실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는 이른바 ‘협상용 카드’론과는 사뭇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초강경 노선이 3대 권력승계와 연계되어 있다면, 핵 능력의 과시가 군부에 후계자의 지도력을 입증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핵실험 감행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이날 세미나에서 공개 배포한 발제문과 30여 분간 진행된 모두발언 내용 가운데 관련 부분을 소개한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본래의 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쉽게 풀어 정리했음을 밝혀둔다.

    북한의 권력승계와 핵 문제의 분석

    북한의 권력승계 문제를 논의하면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이를 흔히 생각하듯 권력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실질적으로 넘어가는 인수인계 같은 ‘현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권력승계는 하나의 ‘과정’이다. 대기업이 총수가 건재함에도 2세에게 주식을 증여하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이들 기업이 승계 ‘과정’에 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에게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30년 가까이 진행된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 중에 김일성 사후의 과정은 4년에 불과하다. 김정일이 중앙정치 무대에서 사실상의 후계자로서 공식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은 1974년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면서지만, 북한을 연구하는 전문가라면 누구나 사실상 1972년, 멀리는 1960년대 후반부터 물밑에서 권력승계 준비작업이 진행되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북한에 대한 개론서는 대부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김정일이 당 선전선동부와 조직지도부 부장이라는 두 자리의 핵심 포스트를 차지하면서 북한정치를 움직이는 당을 장악한 것이 1972년이다. 1972년은 1912년생인 김일성이 환갑을 맞는 해였다. 그런가 하면 그해 중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 린뱌오(林彪)가 옛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북한의 부자간 권력승계는 네 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는 김정일이 32세의 나이로 정치국 격이던 당 정치위원회 제5기 중앙위원회 8차회의에서 위원으로 선출된 1974년에 마무리됐다. 이때 김일성의 나이는 62세였다. 두 번째 단계는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당 정치국 서열 4위, 당 비서국 서열 2위,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로 호명된 1980년대에 마무리됐다. 사실상 후계자로서 지위를 공식화한 시기다.

    세 번째 단계는 그가 김일성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면서 마무리됐다. 1991년 이미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에 오른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추대는 군에 대한 장악이 마무리됐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진행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1998년 북한이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장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제도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997년에 이미 당 총비서에 취임한 김정일로서는 헌법개정을 통해 김일성이 갖고 있던 마지막 한 자리에 오를 필요가 없게 됐으며, 외교 의전상의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수행토록 했다.

    1960년대 후반 권력승계의 초기작업 시기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청와대에 대한 게릴라식 습격 등 북한의 도발행위가 극에 달한 기간이다. 이러한 행위는 김일성의 묵인 아래 이뤄졌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나 1969년 1월14일 당 4기 4차 인민군위원회에서 발표된 김일성의 연설문에 따르면, 1969년 김일성은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던 김창봉과 대남공작의 총책임자 허봉학 등을 군내(軍內) 간부정책에 대한 실수를 명목으로 숙청했다. 이들의 군사모험주의로 미국과의 대결양상이라는 위기국면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1967년과 1969년 사이에 김일성은 수차례 숙청을 단행했다. 1967년 5월4일부터 8일까지 계속된 당 4기 중앙위원회 15차회의에서는 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이자 당비서이던 박금철과 부수상 고혁, 당비서 김도만과 당 과학교육비서 허석손이 숙청대상이 됐다. 반혁명적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 이유였으나, 전문가들은 그들이 부자간 권력승계에 필수적 요소인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 도전했기 때문이 아닌가 관측한다.

    권력승계과정에서 위기국면은 1993년에도 발생했다.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추대된 것이 4월이고,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것이 3월이다. ‘내외통신’ 종합판 47호에 따르면 북한의 NPT 탈퇴선언 직후 강원도 도당책이자 인민위원장이던 임형구는 군중대회연설에서 김정일이 “매우 엄중한 정세의 요구를 깊이 통찰하고 주체조선의 최고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할 데 대한 정부성명을 발표하도록 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해주었다”고 발언했다. NPT 탈퇴가 김정일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추대 한 달 전에 의도적으로 위기국면을 초래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권력이 김정일로 승계되고 있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2005년의 북한도 비공개리에 제2의 권력승계 과정을 진행 중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1942년생인 김정일의 현재 나이는 63세다.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20년 이상 지켜오면서 숙부(김영주) 및 계모(김성애)와의 권력투쟁을 겪어봤기에 후계과정은 자신의 권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진행돼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권력 엘리트의 재편 움직임

    김성애는 북한의 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그를 위해 베푼 선상연회에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63년 김일성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첫 번째 권력승계 과정에서 현재 스웨덴대사로 나가 있는 자신의 아들 김평일을 후계자로 지원했다고 전한다.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과 비교되기도 하는 그는 한때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기록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김일성의 사랑을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귀순자들은 전한다.

    반면 2000년 북한의 장성으로는 최초로 백악관을 방문한 조명록은 김정일과 김성애의 권력투쟁에서 김정일을 도와 그의 후계자 지위를 지켜준 인물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국제담당비서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선택하기 전까지 김영주가 김정일과 심각한 권력투쟁을 벌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정일이 당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던 바로 그 회의에서 김영주는 공개비판을 받고 좌천당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북핵 벼랑 끝 전술은 ‘3대 세습’ 준비작업?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성애 전 여맹위원장(왼쪽)과, 동생인 김영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오른쪽).

    최근 언론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김정일의 아들 ○○○이 후계자’라는 식의 보도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권력승계와 연계된 숙청작업이 진행 중이란 관측도 권력 엘리트의 재편 움직임과 맞물려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한때 남한 언론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매제 장성택의 실각설 역시 후계구도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정일 체제가 붕괴되면 장성택이 후계자로 유력한 인물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큰형이 평양의 방위를 맡는 3군단장이고, 작은형 또한 군단장급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언론보도에 따르면 본인 역시 조직지도부 1부부장의 요직을 맡아 ‘사실상 북한의 제2인자 역할’을 하던 인물이어서 향후 움직임이 주목된다.

    2003년 8월3일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11기 대의원선거 결과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때 선출된 687명의 의원 중 절반에 해당하는 343명이 교체됐는데, 이 가운데 55세 이하가 52.3%, 초급대학 졸업학력을 가진 의원이 약 98%여서 역대 가장 젊고 가장 학력이 높은 최고인민회의가 됐다. 이미 1998년 7월의 10기 대의원선거에서 64%가 교체되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큰 폭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북핵 해법, 평양 내부상황 고려해야

    내각 역시 31명 중 8명이 교체됐는데 70대인 홍성남 총리와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이 퇴진하고 64세의 박봉주 화학공업상이 총리로 발탁됐으며, 50대 후반의 최용수 인민보안상이 국방위원회에 진출해 빨치산 세대인 리을설 원수와 백학림 차수 등의 빈자리를 메웠다.

    북한의 권력승계는 향후 남북관계는 물론 통일과정에도 예측하지 못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당장 2월10일 핵무기 보유선언과 권력승계 과정이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북한이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를 통해 미국과 국가 차원의 양자간 협상관계를 처음 맺은 사실이나, 1993~94년의 1차 북핵 위기 당시 NPT 탈퇴를 통해 미국과의 협상에 물꼬가 틔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최근 북한의 벼랑 끝 전술 역시 부시 행정부와 관계 개선을 노린 포석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최근의 움직임이 내부 권력승계 과정과의 연결선상에서 내부 구성원의 단합을 목적으로 한 국내 정치적 포석이라면, 혹은 국제사회에 대한 무력과시를 통해 성가를 올리려는 시도라면, 평양이 단순히 몸값 올리기에 머물지 않고 핵실험을 강행할 개연성도 존재한다. 2월10일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을 단순히 협상카드용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핵무기를 최대의 안전장치로 간주하는 북한 군부에 핵무기 보유선언에 이은 핵 능력의 과시만큼 새로운 후계자의 지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북한 핵 문제를 풀어나감에 있어 평양의 내부 정치상황이라는 변수를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