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名士’ 스포츠 스타 열전

복서 대통령, 농구스타 국왕, 축구감독 국회의원…

  • 글: 기영로 스포츠 해설가 younglo54@yahoo.co.kr

    입력2005-05-25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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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간다 대통령, 탄자니아 대통령에게 “정상간 권투시합으로 국경분쟁 해결하자”
    • 농구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 세운 캄보디아 국왕
    • 축구감독에 임명된 자이르 체육부 장관
    • 이종격투기 영웅 크로캅은 크로아티아 국회의원
    • 러시아 레슬링 황제는 현역 육군장성
    • 현역 의원으로 아시안게임 역도 은메달 딴 황호동
    ‘名士’ 스포츠 스타 열전

    농구 국가대표 출신인 캄보디아 전 국왕 시아누크(왼쪽)는 재임 중 각료들과의 농구시합에서 혼자 73득점을 기록했다.

    스포츠계에서는 종종 저명인사들의 경기 참여가 화제가 된다. 실제로 해외 유명 스포츠 스타들 가운데는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왕족 등 ‘고귀한’ 신분인 사람이 적지 않다. 이들의 스포츠 활동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들을 살펴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포츠계에서는 아직도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재임 중에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비록 동기는 불순했어도 프로야구, 프로축구, 민속씨름 등 프로 스포츠 창설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 전대통령이 스포츠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스포츠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 축구부 창설 멤버로 주장이자 골키퍼였고, 테니스 실력도 “우리나라 군인 가운데 1인자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을 만큼 뛰어났다.

    그는 재임 중 각종 국제대회에서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맨, 예컨대 축구의 박종환, 프로복싱의 유명우·장정구 등을 수시로 청와대로 불러들여 독대한 뒤 두둑한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받는 사람이 예상한 액수에 ‘0’자가 하나 더 붙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가 주는 촌지의 액수는 컸다.

    그런데 전 전대통령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가령 프로복싱 세계타이틀 매치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다가 경기가 벌어지는 체육관으로 전화를 걸어 코치에게 “얼굴만 노리지 말고 보디를 몇 대 친 뒤 가드가 내려오면 그때 올려치라고 해봐”하고 구체적으로 지시해 복싱인들로부터 ‘전 코치’로 불리기도 했다.



    요즘 우리 국민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왜곡에 대해 너나할것없이 분노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의 정상회담 연기론이 나올 만큼 두 나라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그런데 만약 한일간 국운을 건 한판 승부를 두 정상의 스포츠 대결로 가리자고 제안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1970년대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은 재임시절 흡사 떠벌이 알리처럼 독설을 퍼붓는가 하면 엉뚱한 언동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아민은 이웃 나라인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에게 두 나라의 국경분쟁을 권투시합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당시 우간다와 탄자니아는 국경선을 따라 흐르는 카제라 강을 놓고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민의 제안은 세계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주심을 맡기고 두 나라 정상이 복싱으로 결판을 내자는 것이었다. 아민은 그러면서 “그 방법만이 두 나라 병사들의 귀중한 생명을 보호하는 평화적인 해결방안”이라고 토를 달았다.

    한술 더 떠서 자신은 왕년의 우간다 헤비급 복싱 챔피언인 만큼 경기를 공평하게 하기 위해 자신은 한 손을 묶고 양 다리엔 무거운 짐을 달아맨 채 링에 오르겠다고 제의했다. 이렇듯 엉뚱한 제의는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공보담당관에게 자신의 제의를 정식으로 공표하게 했다. 물론 이 황당한 제의는 탄자니아측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한 탓에 성사되지 않았다.

    캄보디아 전 국왕 시아누크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캄보디아 농구·배구 국가대표를 지냈을 정도로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었다. 한번은 시아누크가 이끄는 정부 각료들이 두 팀으로 나눠 농구시합을 벌였는데, 그 소식이 신문 1면 머릿기사로 장식돼 화제가 됐다.

    경기 결과는 158대 28로 시아누크팀의 승리. 시아누크는 혼자 73득점을 올렸다. 상대팀 소속 각료들은 시아누크가 공을 잡으면 피하기에 급급했고, 시아누크는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유유히 골을 집어넣어 캄보디아 신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접대성 경기가 공식 경기로 인정됐다는 점이다.

    ‘名士’ 스포츠 스타 열전

    크로아티아 국회의원으로 이종격투기 스타인 미르코 크로캅(좌). 현역 의원으로 아시안게임에 출전, 역도에서 은메달을 땄던 황호동(우)

    1974년 서독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의 최종 예선 상대는 호주였다.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졌는데 1, 2차전에서 각각 한 번씩 이겨 3차전에서 결판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3차전은 홍콩에서 벌어졌다. 그 경기에서 호주는 매케이 선수의 결승골 덕분에 한국을 1대 0으로 누르고 본선에 올랐다.

    당시 세계 축구계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의 이른바 ‘토털 사커’였다. 이 대회에 출전한 아프리카의 자이르는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스코틀랜드 등 강팀들과 같은 조에 속해 사실상 2차리그(8강·당시엔 본선 진출국이 16개 국가였다) 진출이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자이르는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대 2로 패했지만 그런 대로 선전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두 번째 경기를 앞두고 자이르 당국은 스코틀랜드전에서 잘 싸운 디비치 감독을 전격 해임했다. 2차전 상대가 유고슬라비아인데, 디비치 감독이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라는 게 해임 이유였다.

    그러자 각국 언론은 일제히 자이르 당국의 처사를 비판하고 나섰다. 서독에 오기 전에 자이르가 유고와 한 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 뒤늦게 유고 출신임을 이유로 감독을 해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이르는 ‘너희들은 짖어라. 우리는 그대로 간다’는 듯이 디비치 감독을 경질해버렸다. 자이르의 군사독재자 모부투 장군만이 할 수 있는 엉뚱한 결정이었다. 모부투는 당시 자이르 팀의 단장으로 서독에 가 있던 체육부장관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체육부장관은 그야말로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이르는 유고에 0대 9로 참패했다. 월드컵에서 0대 9라는 기록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이 푸스카스가 이끄는 헝가리전에서 낸 전적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다. 자이르가 유고에 0대 9로 패한 직후 모부투는 체육부장관을 감독에서 해임했다. 자이르는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수 자일징요가 이끄는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비교적 잘 싸웠지만 0대 3으로 패했다.

    국회의원 겸 축구감독

    우크라이나 축구대표팀의 올레그 블로킨 감독은 현역 국회의원이다. 사회민주당 소속의 블로킨 의원은 국회의원 겸직을 금하는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지난 3월17일 축구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지만, 3월26일 열린 항소심에서 겸직이 가능하다는 판결이 나옴으로써 감독직을 유지하게 됐다. 블로킨 의원은 “법원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결에 감사한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의원 월급은 받아도 축구대표팀 감독 보수는 받지 못한다.

    블로킨 감독은 1975년 ‘올해의 유럽 축구선수’에 뽑혔던 스타 플레이어 출신. 국회의원과 국가대표팀 감독 겸직이 확정된 이후 처음 치러진 2006 독일월드컵 유럽예선 2조 7차전 홈경기(3월31일)에서 덴마크에 1대 0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국회의원 감독으로서의 ‘명예’를 지켰다.

    우크라이나는 덴마크, 터키, 그리스, 카자흐스탄, 그루지아, 알바니아 팀과 한 조를 이루고 있는데, 4월 중순까지 5승2무 승점 17점으로 그리스(14점) 터키(12점)에 앞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아직 월드컵 본선 진출 경험이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국회의원 감독이 사상 최초로 우크라이나를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켜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유럽에 배정된 본선 진출 티켓은 모두 13장. 그 중 11장은 8개조의 각 조 1위 8팀과 2위 가운데 성적이 좋은 3팀에게 돌아간다. 나머지 2장은 2위를 차지했음에도 탈락한 5팀이 플레이오프를 벌여 차지한다. 따라서 현재 2조 1위를 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설사 조 2위로 떨어진다 해도 본선 진출 가능성이 있다. 우크라이나가 속한 2조는 7개국이 팀당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12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현재 7경기씩 치른 상태다.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가 아닌 현역 선수로 활약하는 국회의원도 있다. 종합격투기 K-1과 프라이드(PRIDE) FC에서 정상권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크로아티아의 미르코 크로캅이다.

    미르코 크로캅의 원래 이름은 미르코 필로포비치다. 그는 경찰 출신이다. ‘크로캅’이라는 애칭은 거기서 비롯(‘Croatia’와 ‘Cop’의 머릿글자)된 것이다. 크로아티아 경찰특공대 무술사범을 지낸 미르코 크로캅은 이종격투기에 출전하면서 얻은 폭발적 인기를 배경으로 국회의원에 도전해서 당선됐다.

    미르코 크로캅은 키 188cm, 몸무게 103kg으로 격투기 선수로는 이상적인 체격을 갖고 있다. 주특기는 왼발 하이킥. 이것에 제대로 맞으면 무너지지 않는 선수가 없다. 격투 스타일은 킥복싱에 기반을 둔 입식 타격기지만 최근엔 그라운드 기술까지 익혀 더욱 강해졌다.

    크로캅은 지난해 미국의 미식축구선수 출신으로 K-1의 강자인 보브 샙(신장 2m, 몸무게 160kg)을 KO로 꺾어 최강자 반열에 올라섰다. 이 경기에서 크로캅은 경기 시작 1분 만에 보브 샙의 안면에 강한 주먹을 꽂았는데 그것으로 경기는 끝났다. K-1 무대에서 세계정상을 다투는 월드그랑프리 준우승을 차지한 크로캅은 프라이드 FC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헤비급 빅3’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종합격투기 선수 중 가장 많은 팬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名士’ 스포츠 스타 열전

    러시아 레슬링계의 전설 알렉산더 카렐린은 현역 육군 장성이다. 96애틀랜타올림픽 출전 당시.

    세계 아마추어 레슬링계의 전설로 남아 있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카렐린은 육군 장성이다. 192cm, 130kg의 거대한 체격으로 1987년부터 2000년까지 그레코로망 레슬링의 지존으로 군림해왔다.

    그는 1987년부터 1999년까지 유럽아마추어레슬링 선수권대회와 세계아마추어레슬링대회 그레코로망형 130kg 종목을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대회에서 무실점 우승을 차지했다. 그레코로망형은 상대 선수에게 뒤를 잡히기만 해도 1점을 내주는 경기인데 무려 13년 동안 각종 대회에서 단 1실점도 허용하지 않은 괴력을 발휘한 것. 카렐린은 그 사이 1988년 서울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그리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까지 올림픽 3연패를 이룩했다. 물론 무실점의 완벽한 우승이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2000년 시드니올림픽 결승전에서 미국의 신예 가드너 선수에게 0대 1로 패한 후 은퇴했다. 그동안 그는 준장에서 소장, 그리고 중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카렐린은 최근 종합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고 있는데, 레슬링을 할 때만큼 뛰어난 성적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FBI 요원이 올림픽 출전

    1952년 헬싱키올림픽 남자육상 3000m 장애물 경주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의 호아레스 아쉔펠터는 특이하게도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었다. 당시 올림픽은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이 앞장선 공산주의의 대결장이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선 반공정신이 투철한 FBI 요원이 공산국가인 소련 선수에게 패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찜찜한 일이었다.

    호아레스 아쉔펠터는 원래 1만m 미국대표로 선발됐다. 그런데 다른 나라 선수들과 기록 차가 워낙 커서 메달은커녕 8위권 입상도 어려웠다. 그래서 현지에서 3000m 장애물 경주로 종목을 바꿨다. 아쉔펠터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 훈련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제는 웅덩이를 일곱 차례 건너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핀란드 선수들의 훈련방식. 그들은 한쪽 발을 울타리에 가볍게 딛고 웅덩이를 뛰어넘었다. 반면 다른 나라 선수들은 단번에 넘으려고 시도했는데 자칫 웅덩이에 빠질 위험이 컸다.

    ‘핀란드 방식’을 택한 아쉔펠터는 처음 출전하는 3000m 장애물 경기였지만 워낙 지구력이 좋아서 예선을 무난히 통과했다. 그런데 결승에 올랐더니 소련의 카잔세프 선수가 유력한 금메달 후보라는 게 아닌가.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인 조국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져서는 안 되는 경기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은 아쉔펠터는 소련의 카잔세프를 6초2나 앞지른 8분45초4라는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FBI 요원인 아쉔펠터에게 승리에 대한 엄청난 동기부여를 한 셈이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은 우리나라 국민에겐 양정모 선수가 레슬링 페더급에서 건국 이후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체조에서는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 선수가 세 차례나 만점을 받아 신기원을 이룩한 대회다. 또한 영국의 앤 공주가 선수로 참가해 올림픽 역사상 가장 신분이 높은 선수가 출전한 대회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개회사를 한 사람은 영연방 최고의 주권자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여왕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올림픽 개최를 선언한 후 1시간20분 동안 진행된 개막식을 지켜봤다. 각국의 선수단이 입장할 때 영국선수단 일원으로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낸 앤 공주는 단상의 어머니에게 올림픽 참가 선수로서 경의를 표했다.

    앤 공주는 승마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의 뜨거운 성원과 격려가 무색하게도 최하위권에 그쳤다.

    메달리스트 황호동 의원을 아십니까

    한국의 스포츠맨 가운데 국회의원이 선수로 활약한 경우는 1970년대 신민당 의원이던 황호동(9대·장흥-강진-영암-완도)씨가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것이 유일하다. 당시 전성기를 약간 지난 황 의원은 반골기질이 있어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저 ××, 왜 또 나오는 거야” 하며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그 직후 며칠간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모 기관에 끌려갔다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벌어진 제7회 아시안게임은 동서냉전 체제의 영향으로 굳게 문을 잠갔던 공산진영이 처음으로 아시아 스포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평화와 화합’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대회다.

    대회는 1974년 9월1일부터 16일까지 16일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렸다. 중국, 바레인, 이라크, 쿠웨이트, 라오스, 몽골, 북한 등 7개국이 처음으로 대회에 출전했는데, AGF(아시아경기연맹) 가맹국 중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25개 전 회원국이 참가함으로써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한 대회로 기록됐다.

    한국은 15개 종목에 선수단을 파견, 금 16, 은 26, 동 15개를 획득해 종합 4위를 차지했다. 관심을 모았던 남북한 스포츠 대결에서는 사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한국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한국은 배구, 농구, 탁구 등 구기종목에서 남녀 모두 북한에 완승을 거뒀으며, 레슬링, 복싱, 펜싱에서도 11승5패로 앞섰다.

    당시 현역 국회의원이던 황호동 선수는 역도 슈퍼헤비급(무제한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국회의원이 전국체육대회도 아니고 아시아 정상권 선수들이 다투는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딴 사례는 그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듯하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돋보이는 유명인사는 현역 최다승 감독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토니 라루사 감독이다. 그는 감독들 가운데 유일하게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토니 라루사는 1944년 10월4일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그는 1962년 18세 되던 해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선수로 입단계약을 했다. 그가 입단한 곳은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였다. 포지션은 유격수.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야구를 한다고 해서 학업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프 시즌을 이용해 탬파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탈라하시에서 플로리다주립대 법과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마이너리그 감독생활을 시작하던 1978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것은 1979년 12월. 시즌 중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감독을 맡고 나서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감독으로서 변호사 자격증을 딴 것은 메이저리그 사상 다섯 번째였다.

    그의 ‘선배’ 4명은 LA 다저스 초창기 구단주를 지낸 브랜치 리키와 감독을 역임한 밀러 허긴스, 메이저리그 초창기 선수생활을 했던 휴이 제닝스, 그리고 19세기에 플레이어스 리그 창설을 주도하면서 오늘날 메이저리그의 기틀을 마련한 존 몽고메리 워드다.

    토니 라루사는 197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돈 키신저 감독이 시즌을 3분의 1쯤 남겨둔 상태에서 사임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 토니 라루사가 물려받은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워낙 전력이 처져 남은 시즌에서 반타작에 머물렀고 이듬해도 형편없는 성적으로 하위권에서 맴돌았다.

    라루사가 감독으로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팀을 맡으면서다. 1987년 81승 81패를 기록한 이후 1988~90년에는 3년 연속 리그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메이저리그 최고 감독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통산 4000승을 향해 오늘도 승수를 쌓아가고 있다.

    역대 스포츠맨 가운데 가장 의외의 인물은 철학자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는 제48회 고대올림픽(기원전 520년)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피타고라스 같은 대철학자가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딴 데서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중시하던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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