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의 경고

“시장 메커니즘 외면한 복지정책, 독일식 장기 침체 불러온다”

  •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전 재무부 장관

    입력2005-10-25 09: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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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가 창간 74주년을 맞아 한국의 새 중추세대라 할 30∼40대를 주대상으로 특별기획을 마련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주장을 앞세우는 데는 뛰어나지만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은 미약한 세대를 위한 기획이다.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 ‘제대로 된 공부’할 기회를 놓친 386세대를 위한 ‘필수 보충교육’인 셈이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한국의 차세대 리더에게 요구되는 역사적 역할은 무엇일까. 미래재단과 고려대 정책대학원이 개설한 미래국가전략 최고위과정에서 매월 한 사람의 탁월한 강연자를 선정,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주인공은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다.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의 경고
    예전에도 실물경기와 체감경기가 다르다는 얘기가 많았으나, 지금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절감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 성장하지 못하고, 가계도 위축돼 주부들이 경제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수출 호황의 이면을 보자. 지난해에 이어 사상 유례 없는 수출 호황이 올해도 지속되고 있지만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효과는 낮다. 반도체, 컴퓨터, 휴대전화, 조선, 자동차의 5대 품목만 수출이 잘된다. 이런 산업은 덩치가 커서 전체 경제 성장률을 높이지만, 그 확산 효과는 작다. 가령 휴대전화 부품의 60∼70%를 아직도 일본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국내 중소기업의 성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대기업 직원과 중소기업 직원이 느끼는 경기의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장 잠재력을 높여야 한다. 정책을 다루는 사람 처지에선 설비투자가 가장 중요하다. 성장 잠재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금 공장을 지어야 나중에 생산할 수 있다. 한때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한국은 1960∼70년대의 과도한 투자로 성장의 발목이 잡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한국이 GDP(국내총생산) 대비 35%가량을 투자할 때였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지난해 한국의 투자는 GDP 대비 9.2%였다. 일본도 15%가 넘는데 말이다. 내년 세계 경제가 크게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예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때, 우리 경제를 살리려면 투자를 살리는 길밖에 없다.

    2040년 한국의 성장 잠재력 1%대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목표는 성장 잠재력을 키워나가는 데 맞춰져야 한다. 성장 잠재력은 생산 요소(자본과 노동력)를 투입하거나,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한국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한국의 노령화가 빨라 2011년 성장잠재력이 3%대로 떨어지고 2040년에는 1%대로 떨어진다고 예측했다. 인구와 노동 시간이 계속 줄어들어서다. 그렇다면 투자라도 계속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풀려면 투자 장애요인을 최소화해야 한다. 안보, 정치, 노사의 안정을 이룩해야 한다. 그래야 투자가 일어난다.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데 중요한 것이 총요소 생산성이다. 자본과 노동력 투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경제현상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기업인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시장친화적인 환경이 조성돼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기업인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합해져 국가 효율성 전체가 높아져야 성장 잠재력이 커진다.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인데, 4만달러인 미국이 5% 성장하는 동안 우리가 3% 성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경제는 ‘복리(複利)의 게임’이다. 1%의 차이가 얼마 안 가서 매우 큰 차이를 만든다. 1962년에 우리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을 때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당시 북한은 200달러였고, 필리핀은 240달러, 태국은 250달러로 우리의 2∼3배에 달했다. 인도, 스리랑카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인데, 인도와 스리랑카는 500∼850달러에 불과하다. 태국은 2400달러, 필리핀은 3000달러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1%라도 더 성장하려고 했던 노력이 지금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정치권, 정부, 기업, 국민이 모두 최소한 6% 성장을 지속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선진국을 따라잡는다. 진정한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이 되려면 혁명적인 생각이 아니라 ‘상식적인, 아주 상식적인 일’을 하면 된다. 해답은 명확하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알면 국가 전략을 세우기가 쉬워진다. 목표를 이루기는 힘들어도 세우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은 태생적으로, 또 지정학적으로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나라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제 여건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요소를 잘 이해하고, 그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런 이해가 밑바탕이 돼야 국가의 목표, 기업의 미래 전략, 그리고 국민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명쾌하게 나온다.

    우선 우리에게 닥친 국제적 변화는 세계화(Globalization)다. 경제적 측면에서 세계화는 지구촌화다. 지구가 하나의 조그마한 마을로 전환되는 이유는 디지털 혁명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으로 물리적인 거리가 별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됐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정답

    세계화의 경제적 함축성은 무엇보다 기업이 국경을 넘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품과 서비스만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 그리고 판매망과 마케팅도 넘나든다. 이 모든 것을 가진 기업이 입지를 마음대로 넓힐 수 있다. 이뿐인가. 일자리 또한 국경의 구분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책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일자리를 확보하고 유치하는 것이 첫째다.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 국가가 국민의 복지 향상을 위해 해야 할 일이다. 칸막이(국경)가 있을 때는 국내에서의 투자가 중요했지만, 지금은 투자가 밖으로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의 기업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

    기업은 돈벌이가 되면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들어와서 투자하고, 돈벌이가 안 되면 금방 나가버린다. 좋은 여건을 만들지 않으면 외국 기업이 들어오지 않는다. 돈벌이가 되는데 정부가 예전처럼 막는다면 WTO(세계무역기구) 체제하에서 국제적인 통상문제가 된다. 이 같은 환경은 국내 기업의 눈으로 보면 고통스럽다. 무한경쟁의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기업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세계화만 잘 이해하면 답이 나온다. 예전에는 국경 안에서 1등을 하면 됐다. 이제는 세계에서 1등을 해야 한다. 집중과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재무구조를 튼튼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이 세계의 투자 대상이므로 기업지배구조 역시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이 살 수 있다. 이렇듯 단순한, 너무나 진부하게 들리는 세계화 현상 하나만 잘 이해하면 기업이 해야 할 일도 알 수 있고, 국가 어젠더도 세울 수 있다. ‘세계화 시대’라는 것이 까다로운 함축성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대응하는 게 국가 어젠더다.

    서울은 중국 심장부에 있다!

    우리가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중국의 재부상이다. 내가 굳이 ‘일어서다(Rise)’가 아니라 ‘재(再)부상(Reemer-gence)’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새로운 중국을 바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청나라 중기부터 마우쩌둥의 공산혁명, 덩샤오핑의 개혁 때까지 140년을 제외하면, 지난 2000년 동안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세계 GDP의 20% 이상을 차지했던 경제대국이다.

    최근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소개한 것을 보면 1820년대 중국 GDP는 세계 전체의 33%를 차지했다. 세계 GDP의 3분의 1을 담당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중국은 적어도 경제규모에서만큼은 저력을 지닌 나라다. 미국이 지금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데 세계 GDP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이렇게 따져보아도 그 무렵 중국은 지금의 미국보다 더 컸다.

    현재 중국의 경제력이 비록 세계 GDP의 4%밖에 안 되지만, 지속적으로 연간 7%만 성장해도 머지않아 세계 GDP의 10∼15%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지금의 성장속도를 상당 기간 유지한다면 중국은 영국, 프랑스를 제치고 독일을 따라잡을 것이다. 2020∼30년에는 일본을, 그 다음에는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

    물론 중국은 지금 공산당 체제, 주변과 중심부의 소득 격차, 국영기업의 심각한 부실 채권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지도층과 국민은 무척 똑똑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적어도 1인당 소득이 4000∼5000달러가 될 때까지는 경제성장의 중요한 뒷받침이 될 것이다. 그후에도 성장욕구가 계속 이어질 것이기에 정치체제가 변화할 가능성도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바로 중국 코밑에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덩치가 커지면 중국은 외교·군사·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 글로벌 파워를 가진 나라가 된다. 중국은 세계화 시대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미국 경제잡지 ‘포춘’이 선정한 세계 400∼500대 기업이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 지난해 중국은 무려 610억달러의 외국인 투자 자금을 유치했다. 투자뿐 아니라 자본·기술·경영 노하우도 유입되고, 일자리도 창출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보다 앞설 것이다. 오히려 기술격차 등 분야별로 보면 현재에도 중국이 우리보다 앞서 있는 분야가 많다.

    나라 전체를 경제특구로

    우리는 거꾸로 이것을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중국 대도시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중국이라는 그 거대한 대륙에서 2시간 안에 갈 수 있는 대도시는 서울밖에 없다. 서울이 중국의 심장부에 있는 셈이다. 이 점을 활용해야 한다. 중국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제공해야 한다. 기업 여건만 좋다면 중국을 겨냥하고, 또한 중국을 통해서 세계를 겨냥해야 한다. 중국에 진출한 세계적인 기업과 손잡을 수 있는 기회도 창출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까. 물론 제조업을 비롯해 서비스, 금융, 기술개발 등 많이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분야는 교육이다. 우리나라는 교육개혁을 잘 해서 교육개방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교육대국이라면 교육개방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람들이 굳이 하버드대에 가서 경제개발 이론을 배울 이유가 없다. 한국은 경제개발 분야에서 앞서 있는 나라다. 교육 분야도 이러한 경험을 살려 세계화에 잘 대응해 나간다면 중국 학생을 끌어올 수 있는 교육의 허브가 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꼭 필요한 분야가 보건·의료 분야다. 지금 중국에는 세계 일류 기업이 들어와 여기에서 각 나라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이 병이 나면 13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자기네 나라로 가거나 싱가포르에 가서 치료받는다. 서울은 중국과 아주 가깝다. 우리가 의료 서비스를 개방해 세계 일류의 메디컬센터가 들어선다면 커다란 의료시장이 생기게 된다.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의 경고

    중국의 발전은 우리에게 기회다. 중국 서부대개발 현장, 해발 6000m의 티베트 산맥에 철도를 놓고 있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중국을 활용하고 공략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세계화와 중국의 부상을 하나의 필연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은 우리에게 도전이지만 동시에 잘 활용한다면 기회가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인천 경제자유구역안’에 대해 반대한다. 인천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경제특구로 만들어야 한다. “외국자본은 나쁘니까 일정 구역으로 제한하고, 우리는 해외 자본의 좋은 점만 얻자”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는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가질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를 모두 개방하는 것이 아직은 전략전술상 힘들고 지역특구화는 그나마 실용적이라는 의견에 대해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지역의 특구는 전국을 특구화하는 것만큼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 또한 알아야 한다. 특정 지역만 특구화하더라도 외국학교법이나 의료법을 만들어야 한다. 노사 문제도 있다. 특구를 만들고 그 안에서는 노사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떠들어 해외 기업이 들어왔다가, 차후 노사 문제가 생기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특구 밖에서 법이 안 지켜지는데 그 안에서 지켜질까. 자칫 세계에 한국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퍼뜨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노사 문제를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특구에서도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기 어렵다.

    가진 건 사람뿐인 나라의 희망

    우리나라는 싫든 좋든 남과 손잡는 일(개방)을 추진해야 한다. 중국이 세계적인 대기업과 손잡고 일하는데, 우리가 그들과 손잡지 않고 우리끼리 잘할 수는 없다. 최근 일부 언론, 사회 일각에서 해외 투자와 외국 자본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데 걱정스럽다. 물론 그들이 불합리한 경쟁을 한다면 문제지만 무조건 적대해서는 안 된다. 개방함으로써 나타나는 부작용은 그 부작용대로 대처해야 한다.

    우리가 지식경제 기반시대(Knowledge Based Economy)로 전환하는 시점에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이것만 생각하면 정말 기쁘다. 단군 이래 우리나라가 이런 유리한 고지에서 국제경쟁에 나선 적이 없다. 농경시대에는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한 나라가 경쟁력이 있었다. 산업화시대는 자본을 많이 축적해 대량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유리했다. 당시 우리는 자본도 없고, 자원도 없고, 가진 것은 사람밖에 없다며 불안해했다.

    그러나 지금의 지식기반사회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시대다.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어떤 사회보다 사람의 부가가치가 높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휴대전화를 이용, 정보에 접근해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쟁력에 차이가 드러난다. 이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 개혁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교육전문가를 뽑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육에 국가의 우선순위를 두는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교육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교육과정부터 교육 시스템 전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제여건을 결정짓고 변화시키는 이 세 가지 요소의 특징이 무엇이며, 함축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국가 어젠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기업이 해야 할 일, 또 국민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다.

    ‘토론’

    이동관 동아일보 논설위원 : 지금까지 제시한 몇 가지 해법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가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런 방안이 어떤 공감대로 결집되고 정책으로 이어지고 정치권의 결단으로 이어져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지 묘안은 없는가.

    사공일 이사장 : 결국은 정치적 리더십으로 풀어야 한다. 일본을 한번 생각해보자. 얼마 전 고이즈미 총리가 ‘개혁이라는 호랑이’ 등에 타고 선거에서 이겼다. 이는 일본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것은 정치적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합의와 조화를 중시하다보니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었고, 두루뭉실한 사람이 선출됐다. 이들은 문제를 풀기보다 피하기만 했다.

    적어도 6% 성장률은 유지해야

    우리는 어땠나. 외부의 힘이 개혁을 강요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금융기관의 부실 문제를 풀기 위해 상당기간 정치적으로 공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 일본의 한 학자가 “우리도 IMF를 불러들이자”고 한 것은 일본도 개혁의 동기를 얻고 싶은 심정에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리더십을 기대하는 곳은 정부, 여당, 그리고 야당이다. 시민단체나 출중한 전문가들도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지만 정책의 효과와 영향력은 약하다. 조직화된 정치적 힘을 이용해야 한다. 정부의 국장이나 차관보, 장관과 같은 인사가 TV에 자주 출현해 1대 1로 질의에 응답해야 한다. 그들은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안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똑똑하다. 특히 왜곡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정확한 정보를 준다면, 그리고 젊은 세대의 이해관계와 관련시켜 여론을 형성한다면 좋을 것이다.

    요즘 워싱턴에 가면 “코리아가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나는 정부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외국인의 이런 찬사를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이들은 한국을 신흥시장 수준으로 보기 때문에 인도네시아나 필리핀보다 잘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정부는 국민에게 현재 우리의 수준을 정직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한국의 성장률 3.4%가 OECD 국가의 평균보다 낫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한국은 적어도 성장률 6%대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 힘들다.

    이런 측면에서 공영방송의 역할이 중요하다. 예컨대 토론 프로그램을 주요 방송시간대에 편성해야 한다. 영국의 BBC가 그렇게 한다. 언젠가 KBS 경영진에게 “심야토론은 좋은 프로그램인데 왜 심야에만 편성하느냐”고 한 적이 있다. 프라임 타임에 방송해야 많은 사람이 볼 것 아닌가.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리더십이 발휘돼야 하고 해결방안은 상식적인 측면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안세환 엠팟 사장 : 외국기업의 유치나 시장의 개방 또는 국내 산업의 보호육성 시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완성해야 하는지 견해를 듣고 싶다.

    사공일 이사장 : 중요하고 흥미로운 질문이다. 우선 국내 산업의 보호육성에 관한 얘기를 하자. 예를 들어 친(親)기업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가적인 어젠더를 만드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하면 일부에서는 이런 질문을 한다.

    “기업하는 처지에서 투자할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이 돈을 쌓아놓고 투자처를 찾지 못할뿐더러, 정부도 어느 방향이 옳은지를 알려줘야 하는데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서 못하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1960년대로 돌아가 생각해보자고 한다. 1960년대 초에 한국이 수출입국을 지향한다고 하자 수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전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누가 Made in Korea를 사겠나?” “무엇을 팔 수 있겠나?”고 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 수출이 연이어 30∼40%씩 늘었다. 기업 환경을 조성해줬더니 상품이 저절로 팔려나갔다. 누구도 한국산 가발이 그렇게 잘 팔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시장이 만들어낸 것이다. 환경만 만들면 우리 기업이 외국기업과 손잡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템이 무궁무진하다.

    앞서 예로 든 의료산업만 하더라도 미국의 조지타운대, 스탠퍼드대 메디컬센터가 한국으로 들어온다면 새롭게 벌일 수 있는 산업이 많아질 것이다. 제조업도 그렇다. 어떤 분야를 육성해야 하는지는 정부가 고민할 거리도 안 되고 고민해서도 안 된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

    일본식 장기 불황, 독일식 장기 침체

    지식경제 기반에서 교육산업은 보호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어차피 교육기관도 개방하고 경쟁해야 한다. 한국의 GDP는 세계 11위인데 우리 대학은 세계 100대 대학에 몇 개나 들어가 있는가. 없다. 결국 경쟁밖에 없다. 경쟁시켜 일류가 되고 거기에서 국가 경쟁력이 나오게 해야 한다. 총요소 생산성도 거기서 나온다. 초·중등학교 교사의 처우를 개선하고 질을 높여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육 재정은 초등교육에 집중하고, 고등교육은 민간자본으로 해야 한다. 제도 전체를 바꿔야 하고, 지름길을 만들어 영재교육이 가능케 해야 한다. 교육 평준화는 결과적으로 서민을 고생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돈 있는 사람은 서민이 갖지 못하는 학원, 가정교사, 외국유학의 기회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처럼 세계 최대의 힘을 바탕으로 세계화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Global Rule Maker’가 아니라 ‘Rule Taker’다. 모든 길이 경쟁밖에 없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저 글로벌 스탠더드만큼만 하면 된다. 그것까지는 할 수 있다. 가령 세계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규제라면 만들어야 하고, 국제무대에 가서도 주장해야 한다. 대신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세계기준이라고 하고,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외면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버티기 힘들다.

    남경필 한나라당 국회의원 :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정부가 어떤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용할지 원칙을 밝혀야 한다. 금융산업의 경우 영미식이 글로벌 스탠더드냐, 독일이나 일본식이 우리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냐 하는 논쟁이 있다. 제조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스위스 방식이 어울린다는 의견도 있다. 농업 개방과 관련해서도 어떤 원칙을 가지고 갈 것이냐 등 분야별로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사람들이 대내외적으로 기준을 공표하고, 거기에 맞게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가 한 일 중에 동북아 중심국이라는 화두는 의미가 있다. 화두만 던졌지 내용이 없고 잘못 추진되고 있어 문제지만. 금융 허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사공일 이사장 : 우리가 동북아 차원의 스탠더드를 만들어서 다른 나라들이 인정하고 따라오게 하는 것은 목표로서는 좋다. 그러려면 결국 실력이 있어야 한다. 국제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나라가 될 때에 가능하다. 동북아의 경우 좁게 보면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인데, 세 나라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스탠더드를 고민하는 것은, 목표로서는 좋지만 실질적으로는 힘들다. 아직 과거 역사문제를 놓고 사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와 같은 문제로 싸움하는 수준이다. 동북아의 스탠더드는 각 국가의 발전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크게 구분하면 앵글로색슨 모델로 갈 것이냐, 대륙 모델로 갈 것이냐인데,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지금 세계화는 미국화라는 측면이 강하다. 미국이 주도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렇다. 유럽에서 미국화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독일 선거가 그 좋은 예다.

    “앵글로색슨 모델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가 걱정해야 할 것은 일본식 장기 불황이 아니고 독일식 장기 침체다. 일본은 왜 10년을 허송세월했는가. 거기엔 정치적 리더십이 없어서 문제를 키워온 측면이 있다. 부동산 거품으로 부실채권이 금융기관에 숨겨졌고, 거품이 꺼지면서 금융기관 전체가 부실해졌다. 금융기관이 부실해지니 대출 여력이 없어지고, 대출 여력이 없어지니 기업이 대출 상환 압력을 받게 되고, 기업은 담보했던 가격이 떨어지니 부도를 냈다.

    다른 한 면은 디플레이션이다. 일본의 소비불황은 우리처럼 가계 빚이 많아서가 아니라 디플레이션 탓이다. 오늘 소비를 안 하면 그만큼 득이 되니까, 소비를 계속 미뤘다. 저축액은 늘어나는데 금융구조가 엉망이니까 그 돈이 전부 미국 펀드로 흘러든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자랑하던 독일은 지금 경제성장률이 1.1∼1.2%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실업자가 500만명이다. 옛날에는 독일 근로자 하면 세계에서 가장 근면하고 일 열심히 하는 근로자로 통했다. 오늘은 독일 근로자가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고 게으르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사회복지에 예산을 과도하게 할애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실업이 직업인 사람도 나타났다.

    또 노동시장이 너무 경직되어 해고가 안 되니까 독일 기업인은 투자도 하지 않고, 고용도 하지 않으며 해외로 나가버린다. 이것이 독일 경제가 침체된 원인이다. 통일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통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독일 경제엔 문제가 있었다. 통일은 추가비용이다.

    문제가 심각하니까 사회당 슈뢰더 정부마저 ‘국가 어젠더 2010’을 만들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표방하고 있다.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풀어주고, 복지제도를 줄이는 것이 골자다. 최근 독일 총리가 된 앙겔라 메르켈은 그보다 더 나아가 아예 시스템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앵글로색슨 구조로 가야 한다”고까지 했다.

    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 배운 코포러티즘(조합주의)은 아이디어로는 좋은 제도다. 근로자를 경영 일선에 참여시키면 일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에는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독일 기업에 미국의 이사회 같은 위원회(Supervisory Boarder)가 있다. 폴크스바겐 같은 회사에는 30명 중 15명이 노조원과 근로자다. 그러면 15명은 경영진인데 주요한 개혁을 진행할 때 진척이 없다. 근로자의 처지에서 봤을 때, 직업안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 위주와 높은 복지 수준 가능

    따라서 미국식으로 과감하게 투자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경쟁에서 진다. 또한 노동시장이 경직되어 있으니 밖에 나가서 투자하게 된다. 이게 바로 독일과 프랑스가 오늘날 경제를 망치게 된 과잉 규제다. 독일에선 구두닦이도 면허를 받아야 한다. 그런 독일이 빠져나오려는 곳으로 우리가 들어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회복지를 높은 수준에서 갑자기 낮은 수준으로 바꾸기는 힘들다. 성장잠재력이 자꾸 떨어지면 나중에 고치려고 해도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일본식 장기 불황보다 독일식 장기 침체를 걱정해야 한다.

    물론 우리의 경우 사회복지 시스템이 워낙 발달하지 못해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속에서 보완하는 것이어야지 이것이 위주가 되면 독일식으로 가는 것이다. 앵글로색슨 모델과 대륙 모델의 차이가 뭐냐. 미국 경제는 지금 5% 성장을 하고, 실업률이 제로에 가깝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는 실업률이 10%가 넘고, 성장률이 저조하다.

    높은 실업률과 높은 사회복지 수준, 낮은 성장(대륙 시스템)을 택할 것인가. 고도성장, 상대적으로 낮은 조세 부담률, 그리고 낮은 실업률(앵글로색슨 시스템)을 택할 것인가. 중간쯤을 택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가장 좋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자를 택할 경우 성장률이 낮고 세금은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조세 부담률은 우리보다 2배 이상 높다. 우리나라가 세금을 더 내서 사회복지 시스템을 강화하고, 그 돈으로 실업자를 구제할 용의가 있는가. 하루아침에 우리의 조세부담률(19%)을 독일 수준(40∼50%)으로 올릴 수 있겠는가. 계속 토론하면서 선택의 범위를 좁혀가야 한다.



    스웨덴과 핀란드 경제는 대기업 위주다. 대기업 위주이면서도 사회복지 수준이 높다. 두 나라의 경우도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를 놓고 토론해야 할 소재다. 대기업쪽으로만 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중소기업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비용은 적게 드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분명히 앵글로색슨 모델이 이겼다.

    금융 허브가 되자, 동북아 중심국이 되자는 것을 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최종 생산물이지 목표는 될 수 없다. 우선 기업하기 좋은 여건부터 만들어야 한다.

    ※ 이 글은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이 9월26일 고려대 미래국가전략 최고위과정에서 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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