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우경화 일본’의 쌍검, 고이즈미·마에하라

‘비정의 정치’·‘존엄한 일본’이 협연하는 ‘개헌 전주곡’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입력2005-10-25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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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11일 일본 중의원선거. ‘고이즈미 쿠데타’로 불릴 만큼 압도적인 집권 자민당의 승리였다. 그 여파로 새 야당대표가 된 43세의 청년 정치인 마에하라 세이지 또한 만만찮은 ‘매파’다. 구 정치인들과는 달리 별다른 파벌도 없이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홀로 성장한 두 사람은, 주변국에 대한 도발적인 외교자세와 ‘개헌과 무장’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일본의 자존심’을 말하며 기염을 토한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우경화 일본’의 쌍검,   고이즈미·마에하라
    “국회의원이되었으니 요정에도 가보고 싶다” “국회의원의 세비(歲費)가 2500만엔이라고 하던데 BMW를 사야겠다” “고속전철 신칸센 탑승도 공짜라고 한다. 그것도 특석으로.”

    마치 로또복권이 당첨되듯 국회의원을 따낸 이 사람, 스기무라 다이죠. 올해 스물여섯 일본 청년의 소갈머리 없는 발언이 열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의원직을 ‘주운’ 과정부터가 재미있다. 자민당은 총선을 앞두고 인터넷으로 후보를 공모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아예 공천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당내 반대파(이른바 개혁저항세력)를 축출해 후보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새 인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는 고육책이었다. 거기 스기무라도 지원서를 냈다.

    대학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겨우 외국계 증권회사에 자리잡은 터였다. 그는 운좋게도 지역의 비례대표 후보가 되었다. 번호는 35번. 보통 때 라면 도저히 당선될 수 없는 하위순번이다. 그런데 자민당 태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생각지 못한 당선을 거머쥔 것이다.

    스기무라는 자신의 당선이 “인류역사상 가난한 평사원의 최특급 신분상승”이라고 으스댔다.



    9·11 일본 중의원선거의 한 단면이다. 자민당 싹쓸이는 이런 졸부(卒富) 아닌 ‘졸귀(卒貴)’의원을 낳았다.

    “국내정치를 위한 국제정치”

    이번 선거 결과 집권 자민당은 단독으로 모든 상임위원회의 과반과 위원장을 차지, 중의원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전체 480의석 가운데 절대안정의석(269석)을 크게 웃도는 296석 확보. 특히 31석을 얻은 연립여당 공명당과 합치면 자민-공명 여당은 개헌발의선인 3분의 2(320석)를 넘는 327석을 획득, 개헌 추진에 큰 원동력이 될 전망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선거전략을 ‘우정민영화 찬성이냐 반대냐’ ‘개혁 대 반개혁’의 단일구호로 몰고 간 것이 적중한 결과였다. 그의 ‘솔직한 외곬’ ‘한국, 중국에 과감히 맞서 야스쿠니에 가는 내셔널리스트’ ‘개혁을 위해 저항세력(파벌)과 싸우는 정치인답지 않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먹혀든 결과였다.

    이로써 고이즈미 총리는 내년 4월5일로 6년 임기를 채우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1806일을 넘어 사토 에이사쿠,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에 이어 전후 세 번째 장수 총리가 된다. 위대한 정객(政客)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선거결과는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더욱 거세질 것임을 보여준다. 일본의 대외자세 또한 ‘미국 중시(重視),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경시(輕視)’ 노선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외교평론가인 ‘아사히신문’의 칼럼니스트 후나바시 요이치씨는, ‘고이즈미 태풍’은 “중국이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가 국민의 반중(反中) 감정에 편승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그의 분석을 들어보자.

    “이번 총선은 사실상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신임 투표였다. 고이즈미가 일본 국민의 마음을 산 한 원인은 그가 중국에 강경한 자세를 취한 데 있다. 이를 감안할 때 그의 이번 총선압승은 일본과 중국 관계에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지 않다. 이번 선거에서 외교정책이 쟁점이 되지는 않았으나, 나는 중국요소가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이슈였다고 생각한다.”

    후나바시씨는 이번 선거와 한국의 관계를 적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향후 고이즈미 외교의 ‘탈아입미(脫亞入美·아시아를 버리고 미국을 택하기)’경향이 더욱 강화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의 보수 우경화나 아시아(한국 혹은 중국)와의 대립에 대해 미리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일본의 선전포고로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한 문제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일본군에 의한 침략전쟁이자 아시아를 살상의 참화로 몰아넣은 범죄’라고 본다. 그러나 일본인은 “일본의 민간인(군인 제외)이 군부지도자의 잘못으로 희생된 전쟁”으로 기억한다. 일본 대중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웃 나라들의 처지에서 보면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섬나라 일본의 폐쇄적인 시야에서는 ‘일본인 피해자론’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아시아와 일본의 인식차이가 격렬하게 충돌한 것이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네 번에 걸친 야스쿠니 참배로 한국과 중국을 자극했다.

    고이즈미 자신은 ‘일본의 전통과 문화에 따른 정당한 참배’라고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을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쏟아진다.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것은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음모라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전쟁을 다시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변명해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단연 압도적이다.

    그러면 일본의 대다수 미디어는 “한국의 반발은 내정간섭이다. 반일(反日) 매스컴의 자극 때문이다”라고 보도하고 나선다. 곧바로 국민정서에 기대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단 ‘일본인 피해자론’을 거드는 한편, “한국과 중국이 21세기의 기세싸움을 유도하고 있다. 일본이 밀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야 신문이 팔린다.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도 그러한 보수 우경화 물결에 올라타야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는 이렇듯 악순환의 쳇바퀴를 돌고 있다.

    요컨대, 이번의 자민당 압승이라는 선거결과는 한일관계에도 영향을 끼쳐 바람직하고 유연한 외교 환경이 아니라 더욱 ‘뻑뻑하고 불편한 관계’로 유도할 개연성이 크다는 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도쿄대 아시아정치 전문가 후지와라 기이치 교수의 이에 대한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향후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 다소 길지만 구구절절 한일관계의 미래를 손에 잡힐 듯 보여주는 탁견 같아 여기에 소개해 본다.

    “자민당이 역사적 승리를 거둔 총선거를 지켜보면서 생각난 것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시절인 1986년 총선이다. 두 총리는 닮은 점이 많다. 모두 ‘작은 정부’ 노선을 추진했다. 나카소네는 국유철도의 민영화를, 고이즈미는 도로공단에 이어 우정사업의 민영화를 추진 중이다. 두 사람은 미일관계를 굳게 지키는 것을 외교정책의 제1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외교가 자신 있는 분야였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기본적으로 국내정치에 강하다.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 미일관계 안정이란 일본을 위해 미국을 이용하는 것을 뜻했으며 미국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한국 동남아연합(ASEAN)과의 관계도 중시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시작했으나 중국이 반발하자 참배를 그만뒀다.

    고이즈미 총리는 다르다. 그가 총리가 된 후 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는 거의 공백상태가 되었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심각한 긴장이 계속되고 있으며 동남아연합과의 친근감도 현저히 약해졌다.

    사실 고이즈미 외교는 국내정치에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안정된 국제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아시아 여러 국가의 국제관계가 크게 바뀌려는 이때, 아시아 최대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지도자는 국내정치만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오늘날 일본정치의 불행이 있다.”

    우정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이를 이유로 중의원을 해산한 고이즈미 총리의 도박은 여러 갈래의 파문을 몰고 왔다. 당내 저항파벌을 깨끗이 쓸어냈을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빈한하고 열세인 야당 즉 민주·사회·공산당을 더욱 옥죄고 의석을 빼앗아갔다. 고이즈미 태풍으로 제1야당 민주당도 궤멸하고 오카다 가쓰야 대표도 물러났다.

    민주당의 새 대표는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라는 43세 정치인이 맡았다. 태풍이 휩쓸고 간 다음의 후폭풍이다. 민주당의 위기의식이 이런 파격적인 진로선택으로 이어졌다. ‘방위족’ ‘안보족’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는 이 청년 정치가가 우경(右傾) 매파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야당 대표로 밀어 올려진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민당의 방위청 장관을 지낸 이시바 시게루 의원과 여야를 초월해 안보문제 연구모임을 함께했던 인물로, 이른바 일본의 ‘자생적 우파’로 분류될 만한 존재다. 이 모임은 주로 자위대와 미국측 군사정보를 듣고 중국 견제나 북한 관련 대책을 토론하는 자리라고 한다.

    마에하라 대표는 제1야당 대표로는 최초로 적극적인 개헌론자다. 개헌이라 함은 전쟁포기를 선언한 일본헌법 제9조를 바꾼다는 의미다. 고이즈미 총리가 2001년 개헌을 공언한 최초의 총리였다면, 2005년 개헌을 공언하는 야당대표의 탄생은 일본의 또 다른 본질적인 변화요, 보수 우경화 바람을 상징한다.

    고이즈미와 마에하라. 두 사람의 성장과정과 성향, 알려지지 않은 프로필을 들여다봄으로써 향후 일본 정치 및 대외정책을 헤아려 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비교적 한국에 소개되지 않아 낯선 마에하라부터 소개한다.

    ‘개헌과 무장’을 외치는 젊은 야심가 마에하라 세이지

    마에하라는 1962년 4월30일생이다. 그가 민주당 대표가 되어 총리실을 예방했을 때, 고이즈미의 첫마디가 인상적이다.

    “나보다 딱 스무 살 아래구나!”

    마에하라의 아버지는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을 나와 가정재판소에 일반직 직원으로 재직 하다 나중에는 간이재판소에서 재판도 했다. 마에하라는 학창시절에 수학과 물리에 자질을 보였다.

    첫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하던 중 서점에서 우연히 ‘국제정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유명한 고사카 마사타카 교토대 국제정치학 교수였다. 역사에 조예가 깊어 이를 바탕으로 현실주의적 접근론을 펴는 논객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일본에서 ‘현실주의’라는 것은 요컨대 친미(親美)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마에하라는 그 인연으로 교토대에 진학, 고사카의 국제정치론을 배우고 외교안보에 눈뜬다. 대학을 마치고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에 들어간다. 정경숙은 마쓰시타전기의 오너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본떠 개인 재산 70억엔과 그룹 산하기업의 찬조금 50억엔을 들여 설립한 인재양성기관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일본 정치의 생산성이 낮아 국가경쟁력에 저해요인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25년 정도 걸려 450명을 키우고 그중에 3분의 1이 정치에 참여하면 일본과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구상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제2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꿈꾸었다고 한다.

    3년의 교육기간에 학비 전액 무료. 경쟁률은 30대 1이 넘는다. 동지애를 키우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한다는 명분으로 처음 1년은 무조건 기숙사 생활이다. 학생에게는 월 20만엔, 연 100만~150만엔의 활동자금이 제공된다. 연수가 끝난다고 학위나 취직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마쓰시타 정경숙 장학생

    이곳의 교육은 특이하다. 일본 전통의 정신을 수양하도록 다도(茶道), 서도, 검도, 좌선을 시킨다. 논어, 맹자도 강좌에 들어있다. 영어회화 토론 및 논리적 사고, 논술발표나 토론 커뮤니케이션도 훈련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친 마쓰시타 정경숙 졸업생 29명이 2002년 총선거에 당선됐고, 이번 9·11총선에서 30명이 당선됐다. 이곳 졸업생은 유권자들에게 ‘청렴한 정책전문가’라는 이미지로 비쳐 선거전에서 유리하다고 한다. 1980년 첫 졸업생을 낸 이래 208명을 배출했는데 42%가 정치분야에 몸담고 있다.

    마에하라는 정경숙을 나와 교토부(京都府)의회 의원을 거쳐 1993년 처음으로 중의원선거에 당선됐다. 일본신당, 사키가케(先驅)그룹을 거쳐 민주당 결성 때 합류했다. 민주당의 간사장 대리를 지냈고 차기 그림자 내각(집권시를 상정한 가상내각)의 방위청 장관으로 이름이 올라있었다.

    마에하라 세이지는 ‘존엄스런 일본’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난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된 사무라이가 되어 ‘존엄한 일본’을 실현하고 싶다”고 외친다. 그가 가장 동경하는 인물로 꼽는 사람은 메이지 시대의 혁명가적 사무라이로 33세에 죽은 사카모토 료마다. 료마는 막부정권을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의 기틀을 잡은 풍운아. 마에하라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사카모토 료마는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번(藩·에도시대 지방정부) 체제를 부수고, 천황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 사쓰마와 초슈 양 지역을 연합케 하는 삿초연합 등 당시로는 기발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방책을 세우고 실현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당시는 존황양이(尊皇攘夷)를 내건 수구파가 주류를 이룬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개국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해양국가로서 해군력, 해상수송에 일본의 사활이 걸렸다고 보고 해원대(海援隊)를 만든 선견지명과 실천력이 눈부신 인물이다.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료마의 발상에는 계급사회를 부정한 자유평등의 이념이 있고, 의회제 민주주의도 배어 있다. 동지를 얻고 협력자를 구축하는 것이 정치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것도 료마다.”

    마에하라는 료마 예찬에 이어 기발한 발상을 내놓는다. 내각에 총리 직속의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만들어 우수한 인재 100명을 배치하자는 것이다.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다운 발상이지만, 그는 자신이 집권한다면 이것부터 하겠다고 벼른다.

    “일본의 최대 문제는 국가전략의 부재다. 그것을 만들어낼 조직이 내각 안에 없다. 국가적 과제가 각 부처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출생률 저하, 식량 및 에너지 자급 실패, 학력 저하 같은 문제로 일본은 국제경쟁에서 뒤처지고 말 것이다. 이대로라면 국제사회에 공헌은 커녕 지역 안전보장도 그야말로 임시방편일 뿐이다. 전략 없는 외교란 바로 국가의사(意思)의 결여 아닌가?”

    100인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존엄스러운 일본’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다.

    마에하라는 일본인 이외의 존경하는 인물로 중국의 덩샤오핑을 꼽는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치열한 권력투쟁, 노선투쟁을 벌이다 두 번이나 실각한다. 그런데도 불사조처럼 딛고 일어선다. 어려움 앞에 무너지지 않고, 꿈을 버리지 않았다. 끝까지 기어서라도 버티고 결국에는 일어서는 근성에서 배울 것이 있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는 천명(天命)이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부여한 사명, 정치가로서 시대를 바꾸라는 천명을 지니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 덩샤오핑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 덩은 공산주의 사회의 원리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끝내 이데올로기를 실질적으로 배척하는 길을 걸었다.”

    그의 덩샤오핑 예찬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일본 청년정객의 목소리치곤 섬뜩한 대목도 있다.

    “덩샤오핑은 경제적 풍요로움 한 가지만을 추구했다. 정치적 자유는 뒤로 돌렸다. 톈안먼(天安門) 사건 때는 100만명이 희생되더라도 단호히 탄압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는 10억 인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민주화 기운이 무르익을 때가 아니라고 믿은 것이다. 나는 그가 국가 리더로서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존엄한 일본’의 꿈

    마에하라가 되뇌는 ‘존엄한 일본’이란 무엇인가. 그 각론을 들어보자.

    “내가 꿈꾸는 국가상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존엄한 국가’다. 무엇이 존엄한 국가인가. 우선 외교 안보분야에서 일본은 미국 등 주변국과 연대하며 아시아태평양지역 안정에 공헌해야 한다. 우리 신세대가 나서서 과거 전쟁의 유산을 청산하고 확실하게 일본의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당당하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질문에 당당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일본은 개개인이 긍지와 책임을 느끼는 그런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비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외교안보에서 이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모든 나라가 추구하는 국가건설의 비전이자, 국민 개개인이 조국에 대해 긍지를 갖게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일본의 취약한 자위권(自衛權)에 관한 갈증, 선제공격을 할 수 없는 구조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는다.

    “일본에는 자위권이 있지만 혼자서는 국가를 지키기 어려운 구조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우선 자위권을 뒷받침할 법률이 없다. 해외 테러조직의 거점을 공격할 능력도 없다. 일본이 테러공격을 받았을 경우에는 동맹국인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든지 유엔의 도움을 받는 길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9·11 테러를 당한 미국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테러가 났을 때 국가는 맨 먼저 테러범을 지목하게 되는데, 오늘날 일본은 범인을 지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미국에는 중앙정보국(CIA)이나 연방수사국(FBI)이 있지만 일본에는 수사범위가 국내사건으로 제한된 경찰조직뿐이다. 해외 정보수집은 일차적으로 외무성의 임무다. 일본은 미국을 향해 ‘테러범을 찾아낼 수 없으니 정보를 주세요’라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된다.”

    테러기지에 대한 선제공격의 의욕이 엿보인다. 북한을 겨냥한 칼날이 숨겨져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아프간의 탈레반이 테러범이라고 확인되면 다음 절차는 당연히 전투기와 함대, 호위함을 파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전투기나 함대는 방패 노릇만 할 뿐 공격수 역할은 미국이 한다. 일본은 적(敵)이 직접 쳐들어왔을 때에야 방어할 수 있을 뿐이지, 미사일 공격을 받아도 상대 기지에 대한 반격은 미국 몫이다. 범인이 해외 특정지역에 있다는 것을 알아도 일본의 자위대는 그 기지를 공격하거나 범인을 붙잡으러 갈 수 없다.”

    친미-개헌-무장 노선

    이러한 마에하라의 ‘존엄한 일본’ 주장은 결국 개헌론으로 귀결한다.

    “타국에 일본의 안보를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문제다. 군사대국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부족한 부분은 동맹국에 의존하는 것이 옳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헌법은 바뀌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헌법의 내용이다. 평화주의를 제창한 헌법 9조는 더 알기 쉽게 개정해야 한다. 일본은 (군대 보유로) 자위권은 갖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상대를 위협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는 부분을 담아 평화주의 이념을 관철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극렬 친미주의도 신념에 가깝다.

    “미일동맹은 중요하다.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면 일본이 어떤 위기(테러)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나 같다. 적어도 일본이 지금까지 거둔 고도성장은 미국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공로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을 수 있고, 국제사회의 리더, 적어도 아시아태평양의 리더를 지향할 수 없다.”

    일본 제1야당 당수의 발언에 외교관과 지식인들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그의 친미-개헌-무장 노선은 고이즈미 정권과 어우러져 어떤 대외정책으로 연결될 것인지 일본 내 식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일본 내 중국 전문가들이 20여 명 모인 자리에서 마에하라 의원의 기조 발언과 질의응답을 들었다. 참석자 가운데는 중국대사를 지낸 이도 세 명 있었는데, 다들 마에하라의 매파적 발상에 혀를 내두르던 것을 기억한다.

    비정함과 카리스마의 승부사 고이즈미 준이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42년 1월8일생이다. 그의 괴짜다움은 인생역정의 도처에서 엿볼 수 있다.

    우선 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는 도쿄 서남쪽 전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항구도시 요코스카의 부두노동자 출신이다. 그는 대단한 완력을 가진 사나이여서 나중에 항만노조의 리더로 성장해 정치에 뜻을 두게 된다. 수완이 대단했던지 1889년부터 몇 년간은 ‘도쿄-요코하마 매일신문’의 기자를 한 경력도 있다. 지금도 요코스카에는 항만의 전설적 주먹으로 고이즈미 마타지로파와 다쓰미(辰己)파 양대세력이 전해져 오는데, 전자가 바로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노동자 시절(혹은 ‘주먹계’ 시절)에 등에 새긴 커다란 문신을 훗날 의회에서 자랑했다가 ‘문신 장관’이라는 못한 별명도 얻었다. 아무튼 1908년 첫 의원 당선 이후 내리 12번을 선거에서 이기는 괴력을 과시했다. 그사이 요코스카 시장과 체신장관을 지낸다. 1945년 패전과 더불어 미군이 진주하자 극렬우익으로 분류되어 공직에서 추방당한다.

    마타지로는 아들이 없어서 데릴사위를 얻는다. 고이즈미 총리의 아버지 준야(純也)는 원래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이다. 마타지로의 외동딸과 결혼해 장인의 성(姓)을 받고 양자가 된다. 일본에는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준야는 마타지로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중의원이 되고, 1960년대 이케다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아들 준이치로는 게이오대 경제학과를 나와 영국 런던대에 유학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에는 뜻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1969년 아버지 준야가 병으로 급사한다. 런던에서 급히 돌아온 아들 준이치로에게 유서 한 장이 펼쳐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군, 필승.’

    그게 전부였다. 준이치로는 유언에 따라 보궐선거에 나갔으나 차점으로 낙선, 좌절을 맛본다.

    그러나 준이치로는 아버지 준야의 계보로 총리를 역임한 정치 거물 후쿠다 다케오 의원의 비서가 되어 정치를 배운다. 그렇게 3년여 훈련을 마치고 다시 1972년 요코스카 가나가와켄 제2구에서 첫 당선의 기쁨을 누린다. 그가 27세 때의 일이다. 그는 이후 10회 연속 당선기록을 세운다.

    “나는 독신이다, 연애가 왜 나쁜가”

    ‘우경화 일본’의 쌍검,   고이즈미·마에하라

    고이즈미 총리의 누나 고이즈미 노부코 씨. 언론 노출을 피해온 탓에 40년 전인 1965년 찍은 이 사진만이 유일하게 공개돼 있다

    그는 40세 때인 1982년, 세 아들을 낳은 아내와 헤어졌다. 아내는 1978년 아오야마대 학생 신분으로 열네 살 연상인 36세의 고이즈미 의원과 결혼했다. ‘정치가의 아내’ 대신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이혼 후 고이즈미는 요코스카의 집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큰아들은 영화배우 고이즈미 고타로. 그런대로 이름이 있는 편이다.

    셋째아들은 어머니가 데려가 요코스카에서 멀지 않은 가마쿠라에 따로 산다. 셋째아들이 2004년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총리관저에 면담을 신청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혈연은 맞아도 부자는 아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한 ‘냉혈한’이다. 주간지에 그 스토리가 보도되기도 했다.

    이혼의 배경에는 시누이들과의 갈등이 있었다는 설이 파다하다. 모계(母系) 기질이 센 이 집안에는 지금도 총리의 독신 누나인 노부코(信子)가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강인한 카리스마로 소문난 그녀는 아버지 준야와 동생 준이치로의 비서로서 부자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해왔다. 실세 누나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지만 인터뷰는 일절 사절이어서 ‘얼굴 없는 실세’로만 알려져 있다.

    고이즈미의 여동생 세야(正也)도 이혼하고 독신으로 친정에서 살며 가사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고이즈미의 사자머리 헤어스타일은 요코스카의 집 근처 이발소에서 본인이 “베토벤처럼 파마 머리를 해달라”고 주문해 나온 것이라고 한다. 베토벤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하자면, 그는 중학시절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클래식 음반을 2000장 넘게 보유한 마니아다. 의원회관 그의 방에서는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클래식 연주회에 비서도 없이 혼자 드나들어서 연락두절로 종종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의 이혼경력은 선거유세 때 공격의 표적이 됐다. 그는 “만일 도시 선거구가 아니고 농촌이었다면 낙선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실토한 적이 있다. 선거 내내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 ‘인간실격자 아니냐?’는 공세에 시달렸다는 후일담이다.

    혼자 사는 고이즈미에게 어떤 기자가 여성관계를 묻자. “나는 독신이다. 그래, 연애가 무엇이 나쁘냐?”고 말했다. 기자를 머쓱하게 할 만한 단호한 대답이다.

    고이즈미의 어록을 더듬어 보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정, 그리고 현재의 일본정치를 아는 데 필수적이다. 그가 1972년 12월 중의원선거에 처음 당선되어 한 말이다.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산 덕분이다. 두 분의 후광을 곱배기로 받아 당선됐다.”

    일본에서 정치무대에 나서려면 ‘3방’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간판(看板)’ ‘지반(地盤)’ ‘가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간판은 집안내력이나 학벌, 정당이다. 지반은 지역기반, 가방은 돈지갑을 뜻한다. 일본 발음으로는 ‘간방 지방 가방’이라서 3방이다.

    세습의원은 이 ‘3방의 금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나는 옥동자와 같다. 누구의 손자니 아들이니 하면 다 알아주므로 지명도 문제가 해결된다. 윗대에서 지역을 관리하던 후원회 조직은 모조리 물려받는다. 후원회의 돈줄도 고스란히 상속 받으므로 돈 걱정도 없다.

    일본의회에는 이러한 세습의원이 3분의 1을 넘는다. 신문에서는 “정치는 전통예능과 달라 세습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목청을 높이지만, 현실에서 ‘세습 도련님’들의 정치생명은 터미네이터보다 질기다. 그들의 득표력은 무서울 정도다.

    1989년 후생성 장관이 되어 부하 관리들에게 한 말을 보자.

    “복지담당 부서이니, 나이 드신 분들도 잘 알아듣도록 아름다운 일본어를 쓰세요!”

    영어 표기가 지나치게 많은 서류에 분노해서 한 말이지만, 노인들로부터는 “세심하게 노인까지 생각해주는 고마운 장관”으로 통했다. 후생장관 시절 부하들은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 고이즈미 장관에 질렸다고 한다. 그가 경질되자 안도했다는 간부도 있다.

    1989년 4월 리쿠르트 의혹 사건 때는 거물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대놓고 힐난한다.

    “나카소네는 정신이 좀 이상한 것 아닌가? 자민당이 증인심문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나가겠다고 해야 정상적인 정치가라고 생각한다.”

    이 발언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정의감에 불타는 돈키호테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992년 12월에는 우정성 장관에 취임해 기자회견에서 폭탄발언을 터뜨린다.

    “일본 경제의 발전은 민간이 노력해서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우정사업은 관업(官業)이 민업(民業)을 압박하고 있다. 마찰이 있는 부처지만, 부처의 이익보다 국가 이익이 우선이다.”

    고이즈미 정치의 간판, 생애를 건 테마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정치 대변혁의 시발점이 된다.

    1996년 8월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를 찾아가 쏘아붙인다.

    “진짜 칼을 뽑아서 행정개혁을 추진해주시오. 당신은 연습용 죽도(竹刀)나 흔들고 있소이다.”

    하시모토는 게이오대의 검도부 출신. 고이즈미와 함께 명문 게이오 130여 년 역사를 통틀어 단 두 명 배출한 수상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철저히 적으로 지냈다. 하시모토는 자민당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최대 파벌(원래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계보) 영수였다. 고이즈미는 그런 하시모토를 적으로 설정해 자민당 총재(곧 일본 총리) 선거에 나가서 지는 악연을 맺었다. 결국에는 고이즈미가 총리로 재직하던 2004년 하시모토가 선거자금 문제로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고이즈미는 2005년 하시모토파를 완전히 토벌해 9·11 총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대통령 같은 ‘개혁총리’로 기염을 토했다.

    “‘괴짜’는 변화를 꾀하는 사람”

    1996년 12월, 고이즈미는 후생성 관련 법인의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곤욕을 치렀다. 당시의 발언.

    “후보자는 유권자를 고르지 못한다. 헌금을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과연 고이즈미다운 변명이다. 군색하게 변명하거나 둘러대지 않고, 담담하게 정치자금을 주고받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 동정을 샀다.

    “새 부처의 이름치곤 너무 가볍다. 복지노동성이 맞지, 노동복지성이 뭔가. 노동복지성이라면 각의에 사인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 목을 쳐라!”

    1998년 1월에는 ‘노동’을 앞세운 이름보다 ‘복지’를 앞세우는 부처 명칭이 낫다고 고집을 피우면서, 차라리 물러나겠다는 단호함을 보인다. 이런 그의 독특한 화법이 일본 사람들에게 깊은 이미지를 새겨주었다. ‘괴짜’, 일본말로 헨진(變人)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이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하는데, 정계에서는 나더러 괴짜라고들 한다. 진짜 괴짜는 의사당(나가타쵸)이다.”

    “나는 헨진이라고 불리지만, 그 말이야말로 변화를 꾀하는 개혁하는 사람의 약칭이다.”

    2001년 자민당 총재선거 전후에 내뱉은 말들이다.

    총리가 된 2001년 5월, 참으로 고이즈미다운 결단이 펼쳐진다. 이때 구마모토 지방법원에서 ‘국가의 한센인(나병환자) 격리정책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 길이만 해도 400쪽이 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에 대해 “한센병 환자들이 그동안 받아온 고통을 생각해 감히 항소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원고인 환자들은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고 감격해 했다. 이 결단은 일본인에게 새로운 총리상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때의 일은 고이즈미가 1987년 다케시타 내각에 처음으로 입각해 맡은 직함이 후생장관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89년 우노 내각 때도 후생장관을 맡아 그에게는 ‘후생통(通)’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또 하나의 얼굴은 예산문제에 정통한 ‘재정통’의 이미지다. 오쿠라쇼(大藏省) 정무차관, 자민당 재정부회장, 중의원 오쿠라(大藏)담당 위원장 같은 재경관련 요직을 거쳤다. 그런 전문가의 얼굴을 지니면서도 자리와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제 욕심을 채운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특이한 괴짜였다.

    목숨을 거는 리얼리티

    고이즈미의 별명은 ‘한 마리 외로운 늑대’다. 파벌의 도움 없이 커왔고, 그래서인지 파벌을 혐오하는 성향이 강하다. 파벌을 싫어하는 대신 젊은 시절부터 ‘일본정신(大和魂)’을 중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왔다. “미군 함정을 향해 몸을 내던진 특공대의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거나,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을 읽으며 일본 위인들의 인생과 정치를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그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고집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총리를 지낸 정치인 가운데서는 기시 노부스케나 요시다 시게루 같은 이들을 존경한다. 모두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한 인물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같은 우파 정치인도 좋아하는 편이다. 나카소네도 “고이즈미는 나와 DNA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다.

    “나는 전후(戰後) 정치의 총결산을 주장해왔다. 2001년 고이즈미가 자민당 총재(즉 일본 총리) 경쟁에 나섰을 때 드디어 총결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지지했다. 그가 내세운 공약 대부분은 나와 생각이 같은 것이다. 헌법개정, ‘집단적 자위권’(무력행사), 교육개혁 등. 고이즈미는 지켜볼수록 외교안보를 잘하고 있다.”

    그러자 사회당의 입심 좋은 여걸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은 고이즈미가 클래식광(狂)인 점을 빗대어 “고이즈미는 오페라를 듣는 나카소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듯 우호적인 관계임에도, 고이즈미는 당내 개혁을 이유로 고령자인 나카소네와 미야자와 기이치 두 총리 출신 원로를 자민당 비례대표 의석에서 강제 퇴출시키는 차갑고 잔혹한 일면을 보인다. 당의 개혁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카소네의 목에 가차없이 방울을 단 것이다. 나카소네는 “종신 비례의원을 시켜주기로 약속한 당이 이처럼 비례(非禮)를 범할 수 있느냐”고 저항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고이즈미는 온정주의가 만연한 일본 정치에서 별종이라는 악평을 듣지만, 유권자한테는 어딘지 남다른 정치인으로 어필했다.

    그는 비정(非情)의 정치로 ‘이(理)’를 실현해 유권자를 사로잡는 ‘현대판 사무라이’ 역을 해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번 총선에서도 당내 저항세력 의원들에게 공천을 주지 않고, 대신 각계각층의 지명도 있는 인사들을 끌어들였다. 방송인, 요리연구가, 벤처 사업가, 대학교수 등을 자객으로 보내 저항세력 의원들을 찔러 죽이도록 했다. 자객들은 선전했고 적을 소탕하며 당선됐다.

    고이즈미의 이렇듯 지독한 냉혈성과 잔혹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답은 ‘자기애(自己愛)에서 나온다’이다.

    고이즈미는 “내 장례식에 아무도 안 와도 좋다!”고 외치는 유일한 세습 정치인이다. 보통의 2세, 3세 ‘도련님 의원’들은 당선횟수를 쌓고 예산이나 직책을 탐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금전이나 권세를 탐한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오직 자기 자신이 믿는 것, 납득하는 것, 스스로 연기하고 싶은 것에만 집착한다. 고인이 된 할아버지 마타지로, 아버지 준야가 넘겨준 정치적 사명을 관철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라는 듯, 그에게는 “숙명에 산다”는 병적일 정도로 무서운 확신이 있다.

    게이오대 교수이자 평론가인 후쿠다 가즈야씨는 “고이즈미는 (사무라이)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정치를 한다. 국민을 위한 연기가 아니라 ‘고이즈미 전(傳)’을 위한 연기여서 문제이긴 하지만. 그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정치연기를 하고 있고, 일본인은 거기에 빠졌다. 내용은 없어도 드라마 자체는 흥미로우니까 말이다”라고 분석한다. 고이즈미의 카리스마는 그렇듯 ‘목숨을 거는 리얼리티’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의 또 다른 별명은 ‘일언거사(一言居士)’다.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정곡을 찌른다. 상식의 허(虛)를 찌르고 여론의 의표를 찌른다. 이 재능은 총리가 된 후에 참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원 프레이즈 폴리틱스(One Phrase Politics·한 구절 정치)’라고 불리는 그의 화술은 TV시대의 정치, 15초에 승부가 나는 환경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고이즈미는 솔직하고 군더더기를 말하지 않는다. 다른 정객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대중의 뇌리에 깊게 심어준 것이다.

    개헌파 수상과 개헌파 야당대표

    9·11 총선 이후, 일본은 새로운 인간형의 여야 지도자에 의해 정치 실험기에 접어들었다. 고이즈미와 마에하라라는 파벌 없는 시대의 새로운 리더는 일본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고이즈미 총리는 국내정치에서는 비정을 무릅쓰는 이(理)의 정치를 앞세워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다. ‘고이즈미 쿠데타’라고도 불리는 이번 선거의 결과가 그 실례다. 자민당의 이권 조직인 파벌을 해체하고, 표밭인 우정사업을 부수어 민영화한다는 대의명분에 힘입어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이(理)가 뒷전으로 밀린다. 그 반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고이즈미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각별한 우정을 과시한다. 야당은 이를 두고 ‘대미(對美)추종 외교’라고 비판한다. 반면 한국과 중국, 아시아를 향해서는 ‘일본 전통의 인정과 의리’를 앞세워 야스쿠니 참배가 불가피하다고 강변한다. 대립과 외교도발을 그만두지 않을 태세다. 이치에 반한다. 그런데 일본인은 그러한 고이즈미의 외교자세를 지지한다.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야당 당수 마에하라도 미국 중시의 개헌파요, 자위대의 군대화를 주장해온 우경 ‘안보족’ 의원들의 선두주자다. 물론 개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멀고 험하다. 일본 내 전문가들도 적어도 5년 안에 개헌이 실현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개헌파 수상과 개헌파 야당대표가 일본의 재무장을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척시킬 것임은 분명하다. 야스쿠니와 개헌에 맞물린 일본의 아시아 외교는 대충돌을 일으킬 우려조차 있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충돌, 이는 벌써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까이에 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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