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숱한 문명의 행렬 거쳐간 서부 개척의 관문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4-11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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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뿌리를 유럽이 아닌 초기 이주자의 정착 과정에서 찾은 ‘터너 명제’. 미국인들은 터너 명제를 통해 정체성과 신문명 개척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다. 서부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던 컴벌랜드 갭에서 개척의 상징 대니얼 분을 만났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이주자를 컴벌랜드 갭으로 인도하는 대니얼 분 (George C. Bingham, 1851~52).

    미국만큼 자국의 정체성 규명에 관심을 기울여온 사회가 또 있을까. 미국 독립을 목전에 두고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 크레브쾨르는 ‘미국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전범적인 예일 뿐이다. 국민 정체성의 문제는 이미 청교도시대부터 미국인을 사로잡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조국을 떠나 낯선 이방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주자들과 그 후손에게 ‘우리는 누구이고,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방향은 어디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정녕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러기에 D. H. 로렌스는 일찍이 미국 고전문학을 논하면서 미국적 혼의 본질이란 문제 앞에서 사랑이니, 민주주의니, 욕정이니 하는 따위는 실로 군말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미국의 정체성에 관해 논의해왔으나, 그중에서도 이른바 ‘터너 명제’만큼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된 것도 드물다.

    미국 주체성 선언한 ‘터너 명제’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미국 역사학 대회에서 위스콘신 출신의 젊은 역사학자 프레드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는 미국의 독특한 사회적 관습의 형성 및 미국적 성격 정립에 미국인들의 프런티어 체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터너 명제로 약칭된 이 주장이 왜 그처럼 큰 주목의 대상이 되었는가. 한마디로 미국 정신의 본질은 미국의 토착적인 체험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체적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터너 이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뿌리가 유럽에 있다고 보고 미국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유럽의 전통과 연관시켜 설명하곤 했다. 가령 미국 예외주의의 근거로 흔히 거론되는 미국 민주주의만 해도 루소와 로크의 계몽주의 정치사상이나 옛 튜턴의 부족적 전통에서 싹텄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지만, 터너는 프런티어에서 민주적 평등 체험-곧,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확인-이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터너는 프런티어를 한마디로 ‘문명과 야만의 교차점’이라고 정의하고, 미국사는 이 프런티어가 이동해가는 역사, 다시 말해 미개지를 정복해가는 문명의 전진사라고 요약했다.



    터너에게 문명의 전진은 단순한 기존 문명의 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옮겨진 문명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해 변모하고 끊임없는 쇄신의 과정을 겪는다. 이른바 미국적 성격이란 야만에 반응하며 문명이 겪어온 이 변용의 드라마가 길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터너는 이렇게 형성된 미국인의 독특한 자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거칠고 강하면서도 예리하고 탐구심이 많은 성격, 재빠르게 편법을 찾는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성향, 예술적 감각은 결여되어 있지만 원대한 목표를 실현할 만큼 굳세면서 또한 구체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힘, 지칠 줄 모르는 활력, 좋은 결과는 물론 나쁜 결과도 낳을 수 있는 개인주의, 자유를 향유함으로써 발양되는 쾌활하고 여유 있는 성격.’

    프런티어의 西進

    그러면 프런티어는 어떻게 전진해갔는가. 초기의 정착민들에게 프런티어는 대서양 연안의 강줄기에서 뱃길을 차단하며 떨어지는 폭포였다. 18세기 초에 이르면 프런티어는 이 폭포선을 넘어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이동한다. 독립혁명 직전인 1763년 런던의 본국 정부가, 사람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로 이주하는 것을 금하는 칙령을 반포한 바 있지만, 독립과 더불어 프런티어는 이내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서 마침내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국립 대니얼 분 삼림원 입구.

    그 첫 장애물은 미시시피 강이었다. 그러나 모험욕에 불탄 개척민들은 19세기 초반에 벌써 프런티어를 미시시피 강 너머로 밀어내고, 미주리 강을 넘어서서 19세기말에 이르면 로키산맥을 관통해 태평양 연안에 이른다. 1890년, 전국 인구조사를 마무리하면서 미국 인구조사 담당관은 인구밀도가 1평방마일당 2명 미만인 지역을 ‘프런티어’로 정의하고, 미국에 더는 프런티어 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터너 명제가 담긴 터너의 에세이 ‘미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의’는 실상 이 선언에 자극 받아 쓴 것이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미국의 학자’와 더불어 흔히 미국의 문화적 독립선언서로 일컬어지는 터너의 이 에세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서부로 급속히 이동해간 프런티어 라인의 통시적 단면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선명하게 보여준 다음 구절이다.

    컴벌랜드 갭(Cumberland Gap)에 서보라. 그러면 문명이 한 줄로 행진해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맨 앞에는 염분이 섞인 물을 찾아가는 들소떼가 있고, 그 뒤에는 인디언, 그 다음에는 모피 상인과 사냥꾼, 또 그 다음에는 목축업자가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이주 농민이 뒤따른다. 그것으로 프런티어는 소멸한다.

    컴벌랜드 갭은 북쪽 캐나다의 퀘벡에서부터 남쪽 앨라배마 주까지 장장 2600km에 이르는 험준한 애팔래치아 산맥의 아래쪽, 켄터키, 테네시, 버지니아 주가 엇물려 있는 접경지대에 뚫린, 서부 켄터키로 나가는 관문의 이름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험준한 연봉이 이어지다 V자형으로 파진 이 산간 회랑을 발견하고, 버펄로떼는 동물적 본능으로 이곳을 통과해 물과 풀을 찾아 켄터키의 초원지대로 내려갔으리라. 인디언들은 버펄로의 뒤를 쫓다 이곳을 발견하고 사냥감이 풍부한 켄터키로 수렵을 나갈 때마다 이 관문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터너가 말한 문명의 행렬은 또한 비운의 행렬이기도 했다. 이 관문을 통과해 서부로 나간 버펄로와 인디언들은 백인 문명의 내습에 밀려 두 번 다시 이곳을 밟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려든 이주자들

    미국 독립 당시 컴벌랜드 갭은 신천지를 찾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하는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서부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다. 일찍이 모피상들과 사냥꾼들은 펜실베이니아 북쪽 앨러게니 산맥을 통과해 오하이오 강을 타고 서부로 나가기도 했으나, 이 지역은 한동안 영국에 가까운 적대적인 인디언들이 장악하고 있어 이용할 수 없었다. 통계자료를 보면 독립 무렵부터 1800년경까지 이 컴벌랜드 갭을 통해 약 30만명의 개척민이 서부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렇게 밀려드는 이주자들로 켄터키는 1787년에 제정된 서북영지법에 따라 1792년 미국의 14번째 주로 연방의 일원이 됐다.

    서부 개척이 본격화되는 1820년대에 이르러 애팔래치아 산맥을 관통하는 다른 트레일이 개척되고, 이리 운하를 비롯한 펜실베이니아 북쪽 수로를 이용해 오하이오 계곡으로 진출하는 길이 열리면서 컴벌랜드 갭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컴벌랜드 갭은 대서양 연안의 신생 독립국이 대륙 국가로 발돋움하는 길을 연 첫 관문으로서 오랫동안 미국 서부 개척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컴벌랜드 갭을 찾아 나선 것은 2002년 11월 초순 무렵이었다. 주간 고속도로 40번을 타고 길을 떠났다. 1956년에 제정된 연방고속도로법에 따라 연방정부 재원으로 건설된 첫 주간 고속도로 중의 하나인 I-40은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에서 캘리포니아의 바스토를 연결하는 대륙횡단 고속도로다. 도로의 양편 숲을 물들인 색색의 단풍이 참으로 현란하다. 여름 날씨가 유난히 더웠던 탓에 절기가 늦어져 단풍이 이제야 한창인 것이다.

    이윽고 노스캐롤라이나의 애슈빌을 지나 애팔래치아 산자락에 들어서니, 만산을 수놓은 오색의 단풍이 장관이다. 어느 방향에서든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끼고 달리는 도로를 탄다면, 가을날 자연이 연출하는 이 장엄하고 눈부신 풍경을 완상할 수 있으리라. 가령 뉴욕 주에서 펜실베이니아를 거쳐 버지니아로 내려오는 주간 고속도로 81번이나, 그 옆으로 약간 비켜서서 셰난도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며 나란히 달리는 스카이라인 드라이브,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루릿지 파크웨이는 한층 더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애팔래치아 산맥 중에서도 가장 높고 험준하다는 그레이트 스모키 산맥을 관통하는 길을 타기로 작정하고 지방도 19번으로 들어섰다가 체로키에서 다시 441번으로 갈아탔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대표적 개척자 대니얼 분의 초상 (Chester Harding, 1820).

    체로키는 인디언 보호 구역이다. 길 양 옆으로 원주민이 만든 칼, 가죽 제품, 카펫, 담요, 장신구 따위를 파는 토산품 가게와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악명 높은 ‘눈물의 트레일’을 따라 오클라호마로 떠나야 했던 체로키족의 후손들이 그 참담한 디아스포라(이산)에서 살아남아 이제 관광 산업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사는 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최근에야 그 일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성과도 살아남은 후손들이 자본주의의 대열에 끼어들어 가냘픈 목소리를 결집시켜 그들의 과거에 대해 말한 덕택이다.

    ‘자연의 나라’ 실감

    체로키를 지나니 길은 산정을 향해 에도는 오르막길이다. 30여 분을 달리니 이윽고 뉴파운드 갭 산정이다. 해발 1538m(5046피트). 주 경계가 산정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으니 한편은 테네시주이고 다른 한편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다. 사면으로 첩첩이 산이 이어져 있고, 명칭 그대로 아스라한 연무가 산자락의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산정이라 하나 이곳이 관문이니만큼 주변의 산들이 오히려 더 높다. 그레이트 스모키 산맥의 높은 지역은 대부분 1500m 이상이고 1800m가 넘는 산봉우리만 16개, 그 가운데 최고봉인 클링맨스 도움은 2024m(6643피트)이다. 북미 대륙의 동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인근의 미첼 봉(6684피트)과 크레이그 봉(6647피트)에 조금 뒤진 세 번째다.

    단풍이 물결치는 고산준령은 정녕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하다. 미국을 ‘자연의 나라’라고 한 토머스 제퍼슨의 표현이 실감난다. 이 신생 공화국의 정치가는 버지니아의 이모저모를 묻는 프랑스 공사관 서기 프랑수아 마보와에게 자연에 관한 한 미국은 유럽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고, 그 증거로 그 무렵 테네시에서 발견된 거대한 매머드의 뼈를 들었다. 그 후예들이 필시 지금도 대륙의 어딘가를 누비고 있을 터이니 미국이 얼마나 광활한 나라인지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숭엄미를 자아내기에 족한 이 외외한 산봉우리들은 버지니아의 한 산정에서 제퍼슨이 느낀 그대로, ‘야성적이고 압도적이면서, 또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즐거움을 선사한다.’

    산정으로 유명한 애팔래치안 트레일이 지나고 있다. 애팔래치안 트레일은 메인주의 카타든 산에서 조지아 주의 스프링어 산까지 장장 3488km(2167마일)에 걸쳐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이어지는 하이킹 전용 트레일이다. 동부 14개 주를 관통하는 애팔래치안 트레일은 1968년 제정된 트레일법에 의해 지정된 미국의 첫 국립 트레일이다.

    뉴파운드 갭을 내려와 녹스빌 방향으로 달리다가 이내 지방도 411번으로 갈아탄 다음, 다시 뉴포트 부근에서 국도 25번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가량 달리니 컴벌랜드 갭 안내 센터가 보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켄터키 주의 미들즈버러이다. 나지막한 산들이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분지여서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안내 센터에 들르니 컴벌랜드 갭의 역사와 이곳을 개척한 대니얼 분(Daniel Boone)을 소개하는 자료가 다수 비치되어 있다. 프런티어를 누빈 개척자의 상징으로서 생전에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인물 대니얼 분은 이곳 컴벌랜드 갭에서 그 전설적인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쪽 벽면에는 켄터키로 이주자를 안내하는 대니얼 분을 주제로 한 빙엄(George C. Bingham)의 낯익은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 속의 대니얼 분은 아내와 딸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이주자 일행을 켄터키로 인도하고 있으나, 어쩐지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전설적인 프런티어맨으로서 대니얼 분은 양 떼를 거느린 목자라기보다는 인디언의 눈을 피해 숲길을 헤쳐 나가는, 페니모어 쿠퍼의 영화 ‘최후의 모히칸족’ 주인공 호크아이와 같은 존재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상상력은 친숙한 호크아이를 통해 대니얼 분을 떠올리고 있으나 실은 그 반대여야 한다. ‘레더스터킹 소설’ 연작의 주인공 내티 범포(Natty Bumppo)를 창조하면서 쿠퍼가 시대의 전형으로 이미 신화화된 대니얼 분을 모델로 삼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숲 속의 콜럼버스’, 대니얼 분

    그러나 지나치게 단순화할 필요는 없다. 그는 모든 억압적인 규율과 문명의 악에서 벗어난 삶의 상징인 동시에 문명의 전령사였고, 완악한 개인주의의 표상이면서 켄터키와 미주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고 여러 공직을 역임한 공동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 다의적 상징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넉넉했다. 대니얼 분이 이 서부의 관문을 처음 찾은 것은 35세 때인 1769년. 분에 앞서서 1750년에 측량사인 토머스 워커가 백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을 답사하고 관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대니얼 분의 일화를 소재로 한 조각품 ‘구조’(Horatio Greenough,1836~53)는 한때 미국 국회의사당 회랑에 있었으나 인종주의적 이미지로 인해 최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대니얼 분은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애팔래치아 산맥의 기슭, 야드킨 강 연안에 정주해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사냥을 즐기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범하되 이미 시대의 전형적인 궤도를 따르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펜실베이니아의 레딩 부근. 그의 부모는 영국 태생의 퀘이커 교도였다. 뉴잉글랜드와 달리 윌리엄 펜이 세운 펜실베이니아는 당시 모든 종파의 사람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곳이었다. 이런 이유로 18세기 초부터 이민자들, 특히 독일계와 스코틀랜드에 살던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펜실베이니아로 대거 몰려들었다.

    인구가 넘치자 땅을 얻지 못한 이민자들은 험한 앨러게니 산맥은 넘어가지 못하고 산기슭을 따라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로 남하한다. 여기서도 땅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컴벌랜드의 관문을 발견하고 대거 서부로 진출한 것이었다. 분 일가 또한 1750년 버지나아의 셰난도 계곡으로 이주해 1년가량 살다가 미개척지인 노스캐롤라이나의 야드킨 강 상류, 오늘날의 분(이 역시 그의 이름을 딴 도시다) 근처로 옮겨온 것이다.

    대니얼 분은 처음에 사냥꾼으로 컴벌랜드 갭을 찾아왔다. 1755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함께 참전했던 친구가 권유했다. 소문대로 사슴과 해리 등 사냥감이 풍부한 것을 보고 분은 인디언이 남긴 트레일을 따라 켄터키를 전전하는 이른바 ‘장기 사냥꾼(long hunter)’ 생활을 2년여간 하다가 이곳에 정주할 결심을 한다. ‘켄터키’는 원래 인디언 말로 초원지대라는 뜻. 이곳을 완충지대로 북쪽의 쇼니 족과 남쪽의 체로키 족이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사냥감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 일가는 가족과 몇몇 이웃을 데리고 켄터키로 오던 중 컴벌랜드 갭 근처에서 인디언의 공격을 받아 장남 제임스를 잃고, 이주를 포기하고 노스캐롤라이나로 되돌아가고 만다. 2년 뒤인 1775년, 분은 땅 투기 회사인 트란실바니아 회사의 길잡이 겸 측량사로 컴벌랜드 갭을 통과해 다시금 켄터키로 들어와 ‘윌더니스 통로’를 개척하고 켄터키 강 남쪽에 정착한다. 얼마 후 트란실바니아 회사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고, 이것이 결국 오늘의 분스버러가 됐다.

    굴곡투성이 인생

    한동안 서부 진출의 변방 중심지 구실을 한 분스버러는 늘 인디언들의 공격 표적이 됐다. 독립혁명 와중인 1776년, 인디언들이 분의 딸 제미나와 다른 두 소녀를 납치해간 사건이 일어났다. 즉시 이들을 추적한 분은 이틀 뒤 이들의 소재를 찾아내 기습 공격으로 딸을 구해냈다. 이를 계기로 인디언 투사로서 분의 명성이 서부에 자자해지기 시작했다.

    1778년 버지니아 민병대의 일원으로 뒤늦게 독립전쟁에 참여한 분은 소금을 구하러 가다가 쇼니 인디언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켄터키에서 처음 사냥꾼 생활을 시작할 때도 인디언의 포로가 되어 모아둔 사슴가죽을 모두 빼앗기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쇼니 족 추장 블랙피시는 분의 사냥 솜씨에 반해 그에게 인디언 이름을 지어주고 양자로 삼아 부족의 일원으로 대접했다.

    이들과 4개월가량 함께 지내다가 쇼니 족이 영국의 후원 아래 분스버러를 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우연히 접한 분은 인디언 마을을 탈출해 분스버러로 달려가 공격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비했다. 100명이 넘는 쇼니 인디언들의 포위 공격을 받았지만 분스버러 주민들은 분의 지휘 아래 결국 인디언들을 물리쳤다. 이주자가 늘어나면서 켄터키 도처에서 인디언과의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면서 켄터키는 ‘피로 얼룩진 땅(The Bloody Ground)’이라는 별칭을 얻기에 이른다.

    1782년 인디언과 벌인 또 다른 싸움에서 분은 다시 아들을 잃는 비운을 겪는다. 그 후 그는 켄터키에서 측량사로, 민병대장으로, 혹은 주의회 의원으로 활약했으나, 땅 사기 사건에 휘말려 가진 땅을 모두 잃고 빚까지 지고 한동안 웨스트버지니아, 버지니아, 오하이오 강 연안을 전전하다가, 스페인 총독의 권유를 받아들여 당시 스페인 땅이던 미주리로 이주했다. 그 자신 문명의 전령사였으나 분은 쿠퍼가 쓴 소설의 주인공 내티 범포처럼 문명의 전진으로 혜택 받은 것은 별로 없었다.

    분은 미주리에 갖고 있던 방대한 땅의 소유권을 1803년 미국의 루이지애나 영지 매입으로 상실한다. 1814년 미 의회는 이미 국제적 전설이 된 분(그는 이미 사토브리앙이나 바이런과 같은 유럽 작가들의 문학적 소재가 되어 있었다)의 개척 업적을 인정해 850에이커에 이르는 미주리 땅을 그에게 돌려줬다. 아들이 사는 켄터키로 돌아와 만년을 보낸 분은 1820년 85세를 일기로 그 변전무쌍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 산문적인 약전(略傳)으로는 ‘숲 속의 콜럼버스(Columbus of the Woods)’가 미국 사회에 끼친 심원한 영향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미국인의 의식에 각인된 대니얼 분은 실존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시대의 이념과 소망으로 채색된, 신화가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그 신화의 근원인 존 필슨(John Filson)의 ‘켄터키의 발견, 정착, 그리고 현황’(The Discovery, Settlement and Present State of Kentucke, 1794)이라는 책의 부록에 실린 ‘대니얼 분 대령의 모험’이라는 자서전을 얼마쯤 읽어봐야 한다.

    가자, 서부로!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교사이자 측량사요 땅 투기꾼이었던 필슨은 이 짧은 자서전을 대니얼 분 자신이 썼다고 선전했지만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냥터에서 ‘걸리버 여행기’를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공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분은 글을 쓸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그것은 필슨 자신이 켄터키 답사 여행시 안내자였던 분의 체험담을 듣고 재구성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최근까지 바람이 울부짖는 황야요, 야만족과 야생 짐승의 서식처였던 이곳 켄터키가 풍요한 삶의 터전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자연의 특별한 혜택을 받은 이 땅은, 이 유례없는 역사적 시기, 곧 끔찍한 전쟁의 와중에서, 또 나라의 정착지로부터 그처럼 먼 변방으로 떠나온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문명의 요람이 되고 있다. 폭력의 손이 무고한 피를 흘리게 만들고, 야만인들의 무시무시한 외침이 울려퍼지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귀에 쟁쟁했던 여기, 이곳에서 이제 우리는 우리 창조주를 찬미하고 숭앙하는 노래를 듣는다. 초라한 인디언의 초막, 야만인들의 보잘것없는 거주지였던 곳에서 우리는 이 지상의 그 어떤 훌륭한 도시의 찬란함과도 견줄 수 있는 도시의 기초가 닦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첫머리를 읽고 서부로 달려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분은 켄터키는 더는 이교도 인디언들이 우글거리는 야만의 땅이 아니라, 목가적인 질서와 풍요를 누리는 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켄터키는 자손만대로 번성할 제국의 터전이요 찬란한 기독교 문명의 요람으로 약속된 땅이다. 그렇기에 ‘바람이 울부짖던 황야’를 지상의 낙원으로 가꾸는 것은 신의 소명이요, 미국인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훗날 팽창주의자들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고 부를 제국주의적 팽창의 이데올로기가 여기에 이미 싹트고 있는 것이다. 서부 개척은 이제 사리사욕을 위한 땅 투기가 아니라 시대의 부름이요 책무로 승화된다. 필슨은 대니얼 분을 역경 속에서도 이 소명을 완벽하게 수행한 시대의 영웅으로 신화화함으로써 “가자 서부로, 젊은이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독립전쟁 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사람들과 정부로부터 급료 명목으로 현금 대신 실체 없는 토지문서를 받은 수많은 참전용사에게 이 부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시의 애국심이 서부 개척의 열기로 바뀌면서 수많은 대니얼 분이 켄터키로 몰려갔다. 그들은 신생 미합중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자유의 여신을 수호정령으로 삼아 서부 곳곳을 누비면서 길을 내고 통나무집을 지었다. 대니얼 분은 이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과 사회적 책무를 일깨워준 길잡이요 모델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대니얼 분이 설사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시대는 필시 대니얼 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대니얼 분 신화의 이면

    1803년 제퍼슨 대통령의 루이지애나 매입은 서부에 대한 관심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필슨의 책은 판을 거듭해 팔렸고, 대니얼 분의 자서전 부분은 별도의 팸플릿으로 제작되어 전국적으로 배포됐다. 분의 무용담은 일반 대중이 즐겨 읽는 잡지에 되풀이해서 실렸고, 그중의 몇몇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삽화로 혹은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 그려져 벽에 걸렸다.

    대니얼 분의 신화화는 그가 사망한 1820년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됐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인디언 이주 정책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부 팽창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텔레비전의 보급과 더불어 시작된 대중 미디어 시대의 몇몇 인기 있는 연예인과 스포츠맨을 제외하고는 미국사에서 대니얼 분만큼 생전에 이미 국민적인 우상으로 신화화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니얼 분 신화에서 그와 인디언의 관계는 특기할 만한 신화소이다. 그는 인디언에게 두 번이나 포로가 됐으나 죽지 않고 신출귀몰한 재주로 빠져나왔다. 그의 딸이 인디언에게 납치당했을 때도 그들의 뒤를 쫓아가 역시 뛰어난 솜씨로 인디언을 제압하고 딸을 구해왔다. 필슨이나 후세의 전기작가들은 특히 분의 용기,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할 임기응변의 재주, 세심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미국적 성격의 전형으로 부각하곤 했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남부의 나이애가라’로 일컬어지는 컴벌랜드 폭포.

    그들은 또한 그가 사냥꾼으로 혹은 인디언과의 잦은 접촉으로 미개지의 악의 유혹에 빠지기 쉬웠음에도 문명인으로서의 자제력과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거친 사냥꾼임에도 분은 종종 자연 속에서 홀로 명상에 잠기는 철학자의 풍모로 그려지곤 했다. 인디언을 상대로 한 분의 무용담은 백인의 생래적 우수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반복해 회자됐다.

    인디언의 용맹과 잔혹함도 분의 기지와 숙고된 행동 앞에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데서 백인 독자들은 인디언을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내몰고, 복속시키고, 무자비하게 살해할 구실과 정당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무렵에 활동한 시인 브락켄리지(Hugh Henry Brackenridge)는 자연의 법에는 장자상속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인디언들이 서부를 선점한 원주민이라 하더라도 어리석고 열등해 옥토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니 백인이 이들을 대신해 풍요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섭리라는 논리다.

    대니얼 분 신화의 절박한 필요성이 여기에 있었다. 서부 개척이 자연의 정복과 황폐화가 아니라 정원의 제국으로 가꾸는 것이고, 그 전제 조건인 인디언의 복속이 폭력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자기 초월의 양태로 보여주는 이야기, 이것이 대니얼 분 전설의 본질이요 근본적 호소력이었다.

    조각상 ‘구조’에 담긴 여망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건물 회랑에는 ‘구조(Rescue)’라는 조각상이 서 있었다. 의회의 발주로 호레이쇼 그리너프(Horatio Greenough)가 1853년에 완성한 이 조각상은 건장한 백인 개척자가 도끼 든 인디언을 위에서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 중앙에, 젖먹이를 안아 보호하고 있는 여인상이 왼편에, 인디언을 향해 짖고 있는 사냥개가 오른편에 자리잡은 형상이다. 이 조각상은 남북전쟁 전 미국의 대중적 상상력에 대니얼 분 신화가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분이 인디언에 납치된 딸 제미나를 구출해낸 에피소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라고 알려진 이 조각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디언과 백인 개척자의 신체 크기의 불균형이다. 백인 개척자는 장대한 거인인 데 비해 인디언은 잔혹한 모습이긴 하나 왜소하기 짝이 없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백인의 선천적 우월성과 이에 입각한 인디언 정복 혹은 지배의 당위성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소산이다. 왜소한 인디언을 압도하면서도 폭력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백인 개척자의 극기적인 태도는 백인 기독교 문명의 윤리의식과 휴머니즘을 암시한다.

    원래의 분 에피소드를 약간 변형해 납치당한 딸 대신 인디언의 폭력적인 손길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어머니를 새긴 것도 같은 의도에서다. 거기에 어른거리는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의 이미지는, 백인의 인디언 정벌은 그것이 표상하는 모든 고귀한 문명적 가치의 수호요 전파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백인 개척자의 모습을 로마군 전사의 형상으로 만듦으로써 조각가는 로마가 주변의 미개한 종족들을 정복하여 위대한 문명 제국을 이뤘듯이 미국은 서부의 인디언을 복속시켜 팍스 아메리카나를 세울 것이라는 시대적 여망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각상은 서부 개척은 정복이 아니라 계몽이며, 종족 살해가 아니라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삶의 고양이라는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시각화한 것이다.

    ‘바흐친的 의미’의 풍경

    미국의 심장부에 세워진 이 조각상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퓨리턴 후손들이 대니얼 분을 사슴가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황야의 거친 사냥꾼이나 사욕을 앞세운 땅투기꾼이 아니라 백인 기독교 문명을 수호하고 전파하는 시대의 영웅으로, 미국적 성격의 원형으로 공인했음을 증언한다.

    안내 센터를 나오니 전면으로 널따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가을바람이 제법 세차다. 시들어가는 누런 잔디밭이 다소 황량한 느낌을 준다. 산정 전망대(Pinnacle Overlook)로 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모니 이내 산길로 접어든다. 그러자 조금 전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대신 실로 현란한 단풍의 향연이 펼쳐진다. 붉은 단풍나무, 노란 너도밤나무, 주황색 참나무 등 형형색색의 나뭇잎이 바람에 맞춰 춤을 춘다. 저 르네상스식 성당의 아치형 회랑을 옮겨놓은 듯 화려한 단풍의 궁륭(穹?·무지개같이 높고 길게 굽은 형상)이 산길을 찾은 나그네를 맞이한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컴벌랜드 갭을 알리는 표지판.

    이렇게 달리기를 10여 분, 이윽고 산정 주차장이다. 에릭 피슬(Eric Fischl)의 ‘가을의 호랑이들’ 속의 불타는 단풍이 거기에 있었다. 색색의 단풍에 둘러싸인 주차장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으로 눈부셨다. 주차장 계단을 올라 트레일을 따라 잠시 걸으니 이내 전망대다. 해발 744m(2440피트). 테네시와 켄터키, 그리고 버지니아의 산하가 아스라이 눈 아래 펼쳐진다. 그것은 한 폭의 멋진 풍경화였다. 깔끔하게 손질된 푸른 초원과 그 사이 굽이치는 강, 그리고 집과 건물이 사통오달로 나 있는 길을 사이에 두고 조화를 이룬 광경은 미국이 정녕 정원의 제국임을 실감케 한다. 나는 토머스 코울(Thomas Cole)이나 애셔 더랜드(Asher Durand)와 같은 허드슨강파 화가들이 그린 풍경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자연이 살아 있는 존재로서 삶의 일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파편화되어 인간사를 위한 배경으로 물러난 양태를 풍경이라 정의하고, 자연에서 풍경으로의 이 같은 변모를 공동체 문화가 와해되고 개인이 출현하는 근대성의 한 표지로 읽은 바 있다. 거기 산 아래 보이는 자연은 바로 바흐친적 의미의 풍경이었다.

    자연은 인간의 손길에 의해 순치되어 삶의 아름다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처럼 독한 농약이 만들어낸 신기루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것은 조화로운 목가적 정경이었다. 그 옛날 대니얼 분이 본 자연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또한 어느 날 해질 무렵 산등성이에 올라 켄터키의 산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찬탄했다.

    “나는 놀라운 기쁨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 아래로 풍요한 들판과 아름다운 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찬탄은 힘들게 길을 뚫어 찾아온 신천지 켄터키가 아카디아라는 사실을 발견한 기쁨의 탄성이다.

    어쨌든 그가 본 켄터키의 자연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와 같이 완벽하게 순치된 자연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자연을 보는 그의 시선은 분명 근대적인 것이었다. 아니, 자연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눈은 언제나 근대인의 그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유럽의 목가주의와 미국의 목가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럽의 목가주의 전통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전원시인들은 인간이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귀의할 안식처로 자연을 상찬했다. 반면 미국에서 자연은 언제나 인간사의 무대로 의의를 갖는다. 자연이 낭만적으로 상찬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순치해야 할 대상임을 잊는 경우는 드물다. 자연은 미국인에게 자아의 포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험하고 정립할 도전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되살아난 컴벌랜드 트레일

    컴벌랜드 갭 국립 사적공원은 2만1000에이커가 약간 넘는 방대한 규모로 컴벌랜드 산 대부분을 포괄한다. 면적만으로는 미국의 국립 사적공원 가운데 가장 넓다고 한다. 백인으로는 처음 컴벌랜드 갭을 밟았던 워커는 당시의 국왕 조지 2세의 동생, 컴벌랜드 공작을 기념해 이 일대의 산을 컴벌랜드 산이라 이름붙이고 산 아래로 흐르는 강도 컴벌랜드 강이라 명명했다. 관문의 이름도 마찬가지 이유로 그렇게 부르게 됐다.

    옛 개척자들이 넘나들던 실제의 컴벌랜드 갭은 이곳 산정 전망대에서 더 아래쪽의 산자락에 팬 홈으로서, 해발 488m(1600피트)이다. 원래는 국도 25번이 컴벌랜드 갭을 통과했러랬다. 연방 정부는 이곳이 역사적 의의가 큰 곳임을 고려해 옛 트레일을 본 모습대로 복원하기로 결정, 컴벌랜드 갭 전후 약 2마일 길이의 국도 25번을 절단하고 대신 인근에 1마일 길이의 터널을 뚫어 길을 우회시키는 공사를 시작해 1996년에 완공했다. 절단한 옛 국도의 아스팔트를 제거하고 생태 환경을 새롭게 조성해 개척자들이 다녔던 옛 트레일로 복원하는 공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튿날 새벽,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인근의 컴벌랜드 폭포를 구경하고 싶어 혼자 호텔을 나섰다. 사위를 잠재우는 어둠을 뚫고 국도 25번을 달렸다. 예전에 컴벌랜드 갭을 넘은 이주자들이 다녔던 트레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국도 25번이 새롭게 보인다. 아닌게아니라 25번 국도는 양옆에 나지막한 산자락을 거느린 분지의 중앙을 달린다. 프레드릭 잭슨 터너가 말한 대로, 버펄로떼와 인디언, 그리고 그 뒤를 쫓아 가죽신을 신은 프런티어의 사냥꾼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듯한 환상이 차창에 어른거린다.

    코오빈을 지난 다음, 지방도 90번으로 갈아타고 30분가량을 달리자 컴벌랜드 폭포 주립공원 간판이 보인다. 이 주립공원은 광대한 대니얼 분 삼림(Daniel Boone National Forest)의 일부다. 짐승의 허리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웅크리고 있던 산자락이 이제 동이 트면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에 싸였던 단색의 산이 울긋불긋한 미모의 자태로 변신하는 모습이 정말 눈부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련된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곧바로 컴벌랜드 강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강폭을 채우며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뿌연 물안개가 솟아오르는 방향을 향해 계속 걸으니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요란하게 들려온다. 이윽고 평탄하게 흐르던 강물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벼랑 아래로 급류를 만들며 떨어진다. 폭 40m, 높이 20m의 폭포가 물보라를 만들며 아래로 떨어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프런티어 맨’, 대니얼 분 신화의 무대 컴벌랜드 갭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이곳 사람들이 ‘남부의 나이애가라’라고 부른다는 컴벌랜드 폭포는 음력 보름을 전후하여 3∼4일간 달빛 속에서 아름다운 달무지개(moonbow)를 띄우는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평소에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라고 하나 이른 아침이어서 그 장엄함을 완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마릴린 먼로와 로버트 미첨이 주연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을 머리에 떠올리며, 단풍 숲을 울리는 강물의 폭주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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