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노동판의 지략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전투적 좌파적 노동운동은 ‘올드 패션’, 일자리부터 만들고 보자”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6-08-09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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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자설명회 가면 어용? 국민의 평가는 다를 것
    • 민주노동당, 민주노총은 반쪽짜리 노동자 조직
    • 양대 노총 통합 가능성에 회의적…제3, 4의 노총 만들어질 수도
    • IMF와 ‘맞짱’ 뜬 금융노조가 은행 살렸다
    • 김대환 장관 “공부 좀 해라”에 “인격 수양부터 해라” 맞대응
    • 기업별 노조, 제 밥그릇만 챙기는 조직으로 전락
    • 한국노총 지역조직,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지지 전무
    • 2004년 여야에서 정치입문 제의, ‘거수기 정치’ 매력 없어 거절
    노동판의 지략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체구는 작달막하지만 걸음걸이에 활력이 있고 악수를 할 때 내민 손이 컸다. 짧은 곱슬머리에 눈은 작은 편이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다. 이용득(李龍得·53) 한국노총 위원장의 외모에서 금융산업 총파업을 지휘해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한 투쟁가의 이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는 “투쟁판에 서면 누구나 투사로 보이지요. 제 성질이 좀 ‘지랄’ 같긴 해요”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노총 빌딩 7층에는 위원장, 부위원장을 비롯한 임원 사무실이 들어 있다. 이 빌딩에서 필자처럼 넥타이를 맨 사람은 외부 손님이다. 직원들은 대개 한국노총 마크가 새겨진 청색 조끼를 입고 있다.

    뉴욕에서 열린 국가투자환경설명회(IR)에 다녀온 이 위원장을 만나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인터뷰가 20분가량 늦게 시작됐다. ‘신동아’ 인터뷰 뒤에는 외국 기업대표들과의 면담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그 다음에는 경제지 인터뷰가 기다렸다.

    이 위원장 책상 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준 전태일상(賞) 상패가 놓여 있다. 저항의 삶을 살았다는 노예, ‘곧은 목지’의 팔뚝 조상(彫像)이 상패에 붙어 있다. 전태일기념사업회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곧은 목지’ 이야기가 나온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노동조합이 기증한 백두산 천지 사진이 이 방의 유일한 장식품이다. 벽에는 대학로에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와 김태환 열사 1주기 추모 기간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김씨는 한국노총 충주지부장으로 파업 중이던 레미콘 회사 노조의 투쟁을 지원하다가 레미콘 차량에 깔려 숨졌다.



    이 위원장이 “여기 담배 떨어졌어”라고 하자 비서실 직원이 ‘에세’ 두 갑을 놓고 갔다. 하루 서너 갑을 피운다고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재떨이에 꽁초가 8개비 쌓였다. 오랜만에 간접흡연을 실컷 했다.

    “전투적 조합주의만 보지 말라”

    ▶월가(街)에서 열린 IR은 성황을 이뤘는지 궁금하군요. 거기서 이 위원장이 ‘노사 문제 때문에 한국 투자를 걱정하고 있다면 이제 그 걱정을 모두 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만약 한국에 투자했다가 노사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한국노총이 중재에 나서겠다’고 말했더군요. 해외 투자자들이 이 위원장의 발언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의 전투적 노동조합 때문에 다른 나라로 간다는 국내외 언론 보도가 많았지 않습니까. 실제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투자가들에게 물어보니까 ‘노조 대표가 IR에 직접 나설 정도로 한국의 노사관계가 변했느냐’ 하며 놀라더래요.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투자설명회에는 잠재적 투자자가 250명 정도 왔어요. 라운드테이블에는 기존 투자자 10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한테 노골적으로 ‘추가 투자를 하려는데, 모든 조건을 비교해보면 1순위가 한국이지만 노사관계 때문에 중국과 대만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이 투자한 한국 회사가 노조 때문에 문제가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그렇지 않다’고 해요. 그런데도 미국 본사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노동판의 지략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내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한국의 노동운동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그중 일부가 전투적 조합주의로 흐르고 있지요. 그런데 그쪽의 강성 투쟁만 자꾸 언론에 보도돼 한국의 노동계가 밀리턴트(militant·투쟁적)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설명을 듣더니 기존 투자자가 ‘본사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국에 재투자하는 것을 검토해보겠다’고 했어요. 기존 투자자나 잠재적 투자자들이 뉴스 화면에서 투쟁 장면만 계속 접하다 보니까 한국의 노사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말이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할 것 같아요.

    “노사관계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입니다. 대화와 타협을 완전 거부하는 태도지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이러한 운동 기조가 형성됐습니다.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목표가 정치 민주화였습니다. 투쟁 전선의 최전방에 학생과 노동자들이 배치되어 있었죠. 전투적 조합주의는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습니다. 싸움 건수를 일부러 만드는 겁니다. 합법적인 투쟁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타협해 해결할 수 있는 사안도 억지로 싸움으로 몰아갔어요. 그 시절엔 동서 냉전구조에서 좌파적 운동이 ‘패션’이었죠.

    지금은 정치 민주화가 이뤄지고 동서 냉전 구도가 깨졌어요. 이젠 사용자와 협력하는 노조가 대부분입니다. 노동계는 이미 내부 변화가 상당히 진행됐습니다.”

    민주노동당의 한계

    ▶민주노동당 박용진 대변인이 이 위원장의 IR 활동에 대해 “노총위원장인지 경총(경영자총협회)위원장인지 알 수 없다. 사용자와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들의 생각을 대신 말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기득권층이나 사용자들이 한국 축구가 월드컵 8강, 4강에 올라가길 바라면 노조는 이에 반대해야 합니까. 기득권층이나 사용자 또는 국민이 국익을 위해 원하는 것이라면 사안에 따라 노동자도 같이 갈 수 있는 거죠. 유연성을 가져야지요. 무조건 기득권층과 거꾸로 나가면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밖에 더 되겠습니까.

    오늘 진보 성향의 인터넷 신문이 ‘정부도 투기자본과 투자자본을 가리지 않는데, 한국노총 위원장이 그걸 어떻게 가려서 건전한 투자자본을 유치하겠다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비난했더군요. 말이 안 되는 것은 그쪽이지요. 정부에서 투기자본, 투자자본을 가리면 큰일납니다. 그 순간 바로 외국 자본의 신뢰를 잃지요.

    그러나 우리는 투자자본과 투기자본을 구분해 대처해도 됩니다. 예를 들면 볼보, GM, 필립스, 시티은행은 투자자본입니다. 주주와 사업분야가 명확합니다. 그러나 론스타, 뉴브리지, 칼라일은 명동 사채업자와 다를 게 없습니다. 대주주와 사업분야가 불명확합니다. 정부에서는 반대할 수 없지만 한국노총은 투기자본에 반대합니다. 투기자본은 주식 가치를 올려 단기이익을 극대화하지요. 알짜배기만 팔아먹고 튑니다. 기업에도 도움 안 되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투기자본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투자자본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합니다. 동일 업종을 비교해보면 외국 회사가 국내 기업보다 대체로 급여가 높습니다. 기술 이전도 합니다.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정부, 재계, 노동계가 할 일이 각기 다릅니다. 노사관계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신뢰도가 훨씬 높습니다. 정부나 재계가 한국 노사관계에 문제 없다고 해봐야 누가 곧이듣습니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어찌 정부와 사용자만의 몫입니까.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죠. 저의 IR 활동에 대해 노총위원장인지, 경총위원장인지 구분이 안 된다고 말한 민주노동당에 정말 문제가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은 민주노동당은 물론이고 여당, 야당이 초월해 나서야 할 일입니다. 누가 옳은지 국민에게 물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자본주의 경제에는 노사정(勞使政) 3주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노사관계에 대한 외국자본의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아줘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도 어렵죠. 850만명을 어떻게 한번에 해결합니까. 양대 노총은 일단 차별 철폐만 주장했습니다. 앞으로 협상을 통해 접근해봐야지요. 김대환 전 장관이 만든 정부 법안은 너무 엉터리였습니다. 협상을 하면서 정부 법안은 누더기가 됐어요. 양 노총 전문가가 분석한 바로는 정부 법안에 11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7가지 부문은 협상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한꺼번에 다 해결하자는 거죠. 한국노총은 그 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노사정이 비정규직 실태조사위원회를 만들어 계속 문제점을 찾아내 2, 3차 보완을 해 나가자는 쪽이지요.”

    용득이와 용팔이



    이 위원장의 임기는 2008년 2월. 연임 제한은 없다.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선린인터넷고 문학교사로 복귀했더군요. 이 위원장도 임기 마치면 은행으로 돌아갑니까.

    “그렇죠. 그런데 저도 정년이 얼마 안 남았어요. 한 5년 남았습니다.”

    ▶금융계 정년이 짧지 않습니까. 경영자들 중에는 노조가 임금 피크제를 받아들이면 정년이 연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던데요.

    “우리은행이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사업장 특성에 따라 노사간에 자율적으로 할 문제죠.”

    한국노총에서 그는 ‘용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은행노조 위원장을 하면서 노조를 강하게 끌고 가는 그에게 간부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용득과 용팔, 돌림자도 같다. 장세동 안기부장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신민당 전당대회를 아수라장 각목대회로 몰아넣은 ‘용팔이’와 용모, 체격이 비슷해 보인다.

    ▶혹시 실제 용팔이를 압니까.

    “저는 그 사람 몰라요.”

    ▶삶에 크게 영향을 준 책을 꼽는다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은 감옥 안에서거든요. 학교 다닐 때는 공들여 책을 읽지 못했어요. 감옥 안에서 읽은 책 중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저)과 ‘체 게바라 평전’이 기억에 남아요.”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끌어 이 위원장을 더는 붙잡아놓을 수가 없었다. 옆방에서 기다리는 손님이 많았다.

    필자가 “바쁜 시간 내줘 고맙습니다. 혹시 묻지 않아서 못했거나, 이미 말한 것 중에서 보완할 부분이 있으면…”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 주세요”라고 말했다.

    은행원 출신이어선지 경제에 대한 이해가 깊고 말이 논리적이다. 옛날에는 ‘말 잘하면 변호사’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말 잘하면 노조위원장이다. 우리 법원에선 문서재판을 하기 때문에 변호사가 미국 법정에서처럼 웅변을 늘어놓을 기회가 별로 없다. 그러나 노조위원장은 노조원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다중(多衆)을 설득하자면 언변이 필수 도구이다. 파업 중인 기업의 노동조합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대기업 노조위원장들의 사자후(獅子吼)를 들어볼 수 있다. 노조위원장 중에는 분위기를 띄우는 선동적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 많다. 이 위원장이 투쟁판에 서면 어떨지 모르지만 인터뷰에서 하는 이야기만 놓고 보면 대중연설보다는 대담이나 좌담에 어울리는 말솜씨다.

    ▶노조위원장들이 다 연설을 잘합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자꾸 하다 보면 늘어요.”

    ▶뉴욕에서 IR이 열리던 무렵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만났습니다. 손 회장은 민주노총도 함께 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더군요. 경총위원장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안 간 건지….

    “남의 조직에 대해 제가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내부의 구조적 상황이 있겠죠. 그쪽 일각에서 저를 친(親)사용자, 친정부 혹은 어용 인물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사안에 따라 대립할 땐 대립하고 투쟁할 땐 투쟁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 대학로에서 3만명이 참석해 집회를 엽니다. 기업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을 법률로 막아놓은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모든 나라가 노사 자율에 맡기지요. 악법(惡法) 폐지 투쟁을 하는 겁니다.

    저는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언론에서 저와 민주노총의 행보를 자꾸 비교해 다뤘던 거지요. 자기들 시각으로 한국노총의 행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자체가 참, 한마디로 몰지각하지요. 조직 이기주의죠. 소위 노동자 정당이라고 하는데, 어느 한쪽만 대변하는 반쪽짜리 노동자 정당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IMF와 전면전 치르다

    그가 늘 유화적인 태도로 노동계를 끌어온 것은 아니다. 그는 최근 10년 새 한국 사회를 뒤흔든 두 건의 파업을 진두지휘했다. 1996년 노동법 개악(改惡) 저지 총파업은 김영삼 정부를 굴복시켰다. 2000년 국민·주택은행 통합저지 총파업을 벌여 김대중 정부의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주춤거리게 했다. 그 바람에 두 차례 옥살이를 했다. 그는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가 2001년 12월24일 성탄절 특사(特赦)로 출감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석방축하 집회와 뒤풀이로 밤을 새웠다.

    ▶김대중 정부에서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쳐져 우리은행이 됐죠. 국민은행은 주택은행을 합병했고,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먹었습니다. 당시 은행 통합에 반대해 총파업한 것이 옳았다고 생각하는지요. 아니면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시장을 통한 은행 합병을 막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시장을 통한 합병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스스로 통합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죠.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소매은행끼리의 합병은 시너지 효과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이 ‘왜 한국은 금융시장 구조조정을 않느냐. 강제합병이라도 하라’고 강압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가 IMF와 전면전을 치른 겁니다. 당시 IMF와 싸울 수 있는 조직은 금융노조밖에 없었습니다. 정부는 싸울 수 없었죠. IMF가 3개월마다 1번씩 분기별로 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했거든요. IMF는 갈수록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당시 제일은행을 뉴브리지에 풋백 옵션(인수 후 발생하는 부실을 정부가 떠맡는 조건)으로 퍼주기 매각했습니다. 칼라일에 한미은행을 매각했습니다. 투기자본에 은행을 매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선진금융 기법이 전혀 전수되지 않고 투기자본 배만 불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투쟁했습니다. 정부와 IMF가 분기별 협의 장소를 비밀에 부쳤죠. 그것을 알아내 협상 장소를 급습, IMF와 관료들을 상대로 투쟁했습니다. 금융노조라도 그렇게 싸운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싸우지 않았다면 IMF가 훨씬 더 무리한 요구를 했을 겁니다.

    IMF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렇게 극렬한 저항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안 했으면 전 금융기관이 다 투기자본한테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당시에도 언론에 그런 점을 호소했는데 제대로 안 써줬어요. IMF가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 정부가 ‘금융노조 저항이 너무 세서 이 부분은 어렵다’고 하는 식으로 대응해 정부의 협상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노동판의 지략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당시 금융노조가 구조조정에 반대해 벌인 총파업은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당시 IMF와 정부측 사람들로서는 이 위원장의 이야기 중에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을 것이다. 은행 인수합병에 따른 감원 태풍이 불어오는데 금융노조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는지도 모른다.

    ‘잠시’ 하겠다고 시작한 노동운동

    인터뷰 도중 휴대전화가 걸려와도 번호만 확인하고 받지 않던 이 위원장이 갑자기 전화를 받았다. 통화 중간에 상대가 부총리임을 알 수 있었다.

    “김진표 교육 부총리예요. 옛날에 제가 금융노조 위원장을 했잖아요. 그래서 재경부 장관 출신들과는 다 가깝죠. 하도 많이 싸워서, 싸우다 정이 든 거죠.”

    은행원 생활 초기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대학 운동권 출신도 아니었다. 상고를 나와 바로 은행에 들어와 주경야독을 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성균관대 경영학과 야간부에 나갔다.

    당시 상업은행은 대졸자가 고졸자보다 4호봉 높았다. 일반 직장의 5, 6호봉 차이보다는 작은 편이었다. 은행에 상고 출신 직원이 많다 보니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런데 대졸자들이 장악한 노조 집행부가 5호봉 차이로 확대하려고 했다. 그는 성대 4학년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곧 대졸자가 되지만 입행 당시 학력으로 호봉이 확정되면 고쳐지지 않았다. 주변의 상고 출신 행원들이 그를 앞장세워 대졸자 중심의 노조 집행부와 맞서게 했다.

    26세 때인 1979년 사이클로 서울~부산 국도 600km를 하루에 200km씩 달려 3일 만에 부산에 닿았다. 서울~부산 사이클 기행문을 은행 사내보에 실었다. 은행원들 사이에 널리 읽혀 지명도를 높인 계기가 됐다. 야간대학에 열심히 다니고 성실하게 근무해 인기도 높은 편이었다.

    “제가 상고 출신 행원들의 투쟁에서 총대를 메고 나서자 노조 집행부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먼 곳으로 쫓아버릴 구상을 했던 것 같아요. 노조 집행부가 인사부에 압력을 넣어 본점에 근무하던 저를 강동구 암사동 지점으로 발령냈지요. 집은 강북구 수유리이고, 학교는 명륜동, 일터는 암사동이라 도저히 직장과 학업을 병행할 수 없었어요.

    노조 선거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1983년 노조 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저는 그때 노조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죠. 본점으로 다시 전보돼 학교와 가정생활을 무리 없이 꾸릴 수 있었더라면 노조 안 했을 겁니다.”

    본점으로 전보될 때까지 잠시만 노조 부위원장을 하겠다고 시작한 노동운동이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다. 노조를 하면서 어용 노조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착해서’ 싸울 줄 모르는 은행원들을 이끌고 많은 것을 따냈다. 역대 상업은행 노조위원장 중에서 제일 강한 위원장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상업은행에서 여성 육아휴직제도라는 것을 최초로 만들었다. 국내에 없는 제도를 단독으로 만들 수 있는 직장 분위기가 아니었으나 그가 강하게 밀어붙여 상업은행이 국내 기업 최초로 여성 육아휴직제를 도입했다. 그게 전 은행으로 퍼졌고 나중에 법제화됐다. 출산율을 높이는 데 일찌감치 기여한 셈이다.

    금융노조 위원장 때는 주5일 근무제를 전 산업 최초로 만들었다. 주5일 근무제가 법제화되는 데 촉매제 노릇을 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용자나 정부와 싸움을 참 많이 했지만, 적대적으로 대립한 적은 없습니다. 늘 협상을 우선순위에 놓았죠. 정부 주도의 노동 정책에서 민간 주도로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노사 발전재단을 만들기로 하고 경총과 협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선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쉽지 않죠. 강한 투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었고 항상 책임 있는 자세를 견지했다고 자부합니다. 합리적 운동 기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합리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만 투쟁을 선택했습니다.”

    실형을 선고받고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에서 해고됐다가 신규 채용되는 형식을 밟아 지금은 우리은행 소속으로 있다.

    주유소 직원, 금융노조 위원장 되다

    2001년 성탄절 석방으로 출소한 직후인 2002년 1월 금융노조 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그는 해고자였기 때문에 조합원 자격이 없어 출마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은 해고자에게도 조합원 자격을 줬으나 한국노총 산하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조합원들과 함께 싸우다가 해고당했는데, 조합원 자격이 없다고 금융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를 못하게 하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선거일은 가까워오는데 후보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조합원 자격을 얻어 금융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금융기관에 몸담은 고교 선후배를 찾아다니면서 취업 부탁을 했다. 그러나 새마을금고에서도 외면했다. 관치(官治) 금융이 여전한 판에 정권하고 싸우다 해고당한 사람을 채용했다 괘씸죄에 걸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낙심해 길을 걷던 그의 눈에 갑자기 ‘현대 오일뱅크’ 간판이 들어왔다. 퍼뜩 아, 저것도 ‘뱅크(bank)’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오일뱅크 연신내주유소 사장이 아는 사람이었다. 주유소의 법인 명칭은 ㈜길흥유화. 직원은 7명. 그는 연신내 오일뱅크에 취직한 뒤 억지를 부렸다. 그는 상대 후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도 뱅크다. 나는 주유기 호스 들고 기름 넣는 아르바이트맨이 아니고 금융 컨설턴트로 취직했다. ㈜길흥유화는 앞으로 금융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금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다.”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는 현대오일뱅크 연신내주유소 노조를 얼른 만들어 금융산업노조에 가입, 노조위원장 후보 등록을 했다. 그는 금융노조 위원장을 한 번 했기 때문에 당시가 두 번째 출마였다. 주유소 직원이 금융노조 위원장에 당선된 것은 노동운동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GM과 포드자동차는 24개 공장을 폐쇄하고 6만명을 감원하는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미 자동차노조(UAW) 론 게틀핑거 위원장은 지난달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GM과 포드를 비난하지 않고 근로자들이 혁신적인 해결책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더군요. 구조조정을 수용해 미국자동차노조가 회생하지 않으면 결국 일본의 도요타나 한국의 현대한테 다 먹힌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실용 노선이지요. 옛날 같으면 총파업을 벌이며 강력히 저항했을 텐데….

    “우리도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죠. 게틀핑거 위원장도 투쟁이냐, 구조조정 수용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구조조정 수용을 선택한 겁니다. 우리도 구조조정을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현실 여건을 살펴봐야죠. 미국은 어쨌든 재취업이 상당히 쉽지 않습니까. 유럽 국가에선 실업을 하면 실업 수당을 받고 재훈련 과정이 충분합니다. 우리는 해고되는 순간에 생존권을 박탈당한단 말이에요. 한국은 아직 사회보장제도가 외국과 같이 확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구조조정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도 회사가 문을 닫느냐, 아니면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상황에 몰리면 구조조정을 받아들일 겁니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지면 노동운동도 유연해질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주도로 현대차 기아차, GM대우가 산별(産別) 노조로 전환하는 투표를 마쳤습니다. 산별 노조를 산업 전 부문으로 확대하겠다고 합니다. 사업장마다 근로조건이 다르죠. 다(多)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다고 봅니다. 민주노총은 정부 정책과 국회 입법에 대응하자면 기업별 노조로는 안 되니까 산별 노조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하던데요. 한국노총의 방침은 어떻습니까.

    산별 노조, 장점도 많다

    “산별 노조 전환은 한국노총의 운동 방향이기도 합니다. 제가 금융노조 위원장 할 적에 산별 노조로 전환했습니다. 노동조합의 협상력이 강해지려면 산별 노조가 유리하죠. 장단점이 있습니다. 유럽은 전 산업의 노동조건이 엇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업별 노조가 없죠. 일본, 미국, 한국은 기업별 노조 체제입니다. 우리가 산별 노조로 가더라도 기업별 노조는 지부 형태로 남습니다. 결국은 지부간 임금 격차를 다 맞출 수가 없죠. 유럽과 같은 그런 산별 노조는 아니고 유사(類似) 산별일 뿐입니다. 낮은 단계의 산별 노조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기업별 노조 형태에서는 완전히 자기 사업장 중심의 집단이기주의로 흐르지 않습니까. 산별 노조로 전환하면 자사 이기주위가 조금 희석될 수도 있죠. 이미 산별 노조로 전환한 보건의료노조, 금융산업노조를 보면 그렇게 우려할 일만은 아니죠.

    긍정적인 부분이 꽤 있을 겁니다. 원청 기업은 하청 업체들의 납품 단가를 매년 낮춰 이익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어떤 업체나 다 그렇죠. 원청 업체와 하청 업체의 임금 격차가 두 배, 세 배씩 됩니다. 양극화가 더 심화돼요. 산별 차원에서 이런 현상을 일정 부분 억제할 수 있죠.

    노동판의 지략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유럽 국가에서는 한국처럼 일상적인 노동투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큰 투쟁이 있죠. 한국은 기업별 노조가 되다 보니 1년 내내 어딘가에서는 투쟁이 일어나지요. 옆에서 동조파업을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1년 내내 투쟁하는 것처럼 비칩니다.”

    ▶기업 쪽에서는 산별 노조로 가면 이중 협상으로 코스트가 높아지고 노동운동이 정치투쟁으로 변질돼 과격해질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그런 우려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데요. 장점도 꽤 많습니다. 단점도 있고요.”

    ▶과거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합쳐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데요. 내년 1월1일부터는 복수 노조도 허용되지 않습니까. 이 시점에서 상급단체가 합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합쳐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통합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내부 문제 때문에 쉽지 않아요. 복수노조 시대가 오면 3노총, 4노총도 만들어질 수 있거든요. 민주노총 안에도 분파가 다양합니다. 한국노총 안에도 다양한 세력이 있고요.”

    ▶민주노동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습니다. 울산에서조차 구청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죠. 민주노동당의 상승세가 꺾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어요.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패배 원인을 뭐라고 보는지요.

    “한국노총 울산지역본부는 늘 민주노동당을 지지했습니다. 우리가 독자 정당(녹색사민당)을 가지고 있던 2004년을 빼놓고는. 그런데 울산지역본부가 이번에는 민주노동당과 결별했고 오히려 한나라당 지지선언을 했어요. 민주노총 출신이 구청장이 되면서 근로자종합복지센터에 한국노총을 못 들어오게 한 겁니다. 민주노동당 소속 지방의원들이 한국노총에 대해 4년 동안 아주 비협조적으로 하다 보니까 중앙조직에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하라고 지침을 내려도 지역단위에서 전부 같이 안 하겠다고 합니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조합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상당히 편협하게 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한국노총 지역조직 중에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 조직이 하나도 없었어요.”

    국민 사랑 못 받는 노동운동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주는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했던데요.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전태일 열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상당 부분 왜곡돼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투쟁가라기보다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바보회, 삼동회를 만들어 항상 자기 것을 남에게 나눠주고 어린 여공들에게는 버스 차비를 줬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만 그들의 처참한 삶을 보고 근로기준법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근로기준법대로 요구하고 협상을 하는 겁니다. 근로기준법 조항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던 시대였거든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면서 부르짖은 구호는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두 가지였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자를 사랑하고 열심히 공부해 법을 준수하려고 하는데 사회적 여건이 안 되니까 자기를 희생한 거죠. 그런데 분신만 강조되고 있어요. 노동현장에서 흔히 ‘전태일 열사 정신을 이어받아 투쟁한다’고 하는데 전태일 열사는 법 준수를 통해 이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제게 상을 주는 문제를 놓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회 내부에서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용 노총인 한국노총에 어떻게 전태일상을 줄 수 있느냐’는 의견이 있었대요. 지금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한국노총, 민주노총 다 같이 참여해 공동 사업을 하고 있는데 전태일 열사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남순 전 한국노총 위원장은 한국노총 빌딩 시공업체인 벽산건설의 하도급업체로부터 2억2000여만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국노총 일부 간부들도 리베이트를 받아 택시회사를 인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민주노총 산하 기아차 노조는 ‘채용 장사’를 했다. 이러한 비리는 노동 운동가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크게 손상을 입혔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동조합 하는 사람은 다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는 인식은 잘못됐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엘리트들이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는 데가 노총입니다. 그리고 노총을 통해 연대하는 정당으로 진출합니다. 정부로 들어가 관료 생활도 하죠. 노동조합 간부들이 그 사회의 최고 엘리트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조합 간부들은 자가용도 타면 안 되고, 막걸리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우리의 산업화시대가 아주 짧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사용자 빼놓으면 전부 노동자 아닌가요.

    양 노총에서 작년에 노동조합 간부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났죠. 깨끗해야 할 운동조직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정부패가 생겨 ‘노동귀족’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든 부패가 있게 마련이죠.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자정(自淨)해야겠지요.”

    전체 임금근로자 중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의 비율을 노조조직률이라고 한다. 1995년 13.8%이던 노조조직률이 현재는 10%대로 추락했다. 노조 가입자 감소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따라 임금을 받는 연봉계약제 시대가 오면서 젊은 세대는 집단적인 결속을 통해 평균임금을 올리는 노동운동에서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

    “산업구조가 바뀌고 있죠. IT 벤처를 중심으로 소규모 사업장이 많아지고 있고요. 노조조직률 감소는 세계적 추세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조직률이 지나치게 낮습니다. 아마 가장 낮을 겁니다. 지금 10.4%입니다. 1977년 25.7%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19.8%로 떨어졌다가 한때 올라갔는데 이제 곧 한 자릿수로 추락할 겁니다. 조합원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젊은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노동운동이 국민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업별 노조가 집단이기주의로 흐르면서 자기들 밥그릇만 챙기는 조직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외자 유치활동도 필요합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기본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날 싸움질하는 인상을 불식해야 합니다.

    서구의 노동조합은 100~200년에 걸쳐 사회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노총에서 실업급여를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정부가 다 하지 않습니까. 노사발전재단을 만들어 교육을 하고 재취업을 도와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부가 양쪽으로부터 다 불신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야 노사관계가 좋아질 리 없죠. 정부가 그렇게 모호하고 불가능한 중립을 표방하지 말고 노동부는 노동자 편을 들고, 산자부는 사용자 편에 서서 행동하면 노사가 스스로 알아서 잘할 텐데 말입니다.

    ‘소년 노동자’에서 노동운동가로

    이용득 위원장은 경북 안동이 고향이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서울에 올라와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가난한 농가의 10남매 중 셋째였다. 고향 안동군 임동면은 지금 임하댐 물속에 들어가 있다. 집에서 짓는 농사가 고작 두어 마지기여서 10남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형과 누나가 자리잡은 서울로 올라왔다. 형과 누나는 일찌감치 무작정 상경해 공장 생활을 했다. 형은 성북구 정릉동 산꼭대기 편직공장에 다녔다. 공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가내공장이었다. 그도 형을 따라 거기서 일했다. 1년쯤 공장에 다니다 공부가 하고 싶어 장충동 동북중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중학교 졸업하고 1년가량 쉬다 경성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 학기 만에 독일어 점수가 나빠 장학생에서 탈락했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다.

    정릉천 블록공장에 취직했다. 가마니로 지붕을 덮은 공장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성당에 다녔다. 그가 블록공장에 들어가면서 성당 학생회에 나오지 않자 우베다 수녀가 정릉천 블록공장으로 찾아왔다. 우베다 수녀가 “상고를 졸업하면 대학을 가지 않고서도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수녀로부터 ‘실업계’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는 중학교 때 틈틈이 신문배달도 하고 여름방학이면 ‘아이스케키’ 장사도 했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도 은행에 들어가면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왔다. 그는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다 더위에 지치면 은행에 들어가 쉬었다. 은행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수녀의 격려로 덕수상고에 진학했다.

    노동판의 지략가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인터뷰 중인 이용득 위원장(오른쪽).

    공장과 학교를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나이를 먹어 덕수상고 3학년 때 군입대 신체검사를 받았다. 상업은행이 유일하게 신입사원 채용에 나이 제한이 없었다. 그는 상업은행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두 달 만에 입대했다. 은행원들이 대개 후방 행정병으로 빠질 때였는데 은행 근무 경험이 없어 최전방 철책선 근무를 했다. 제대한 지 2년 만인 1979년 성균관대 야간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경영학과 야간부에는 은행원이 많았다.

    “그때 야간대학이 성균관대, 건국대, 시립대, 국제대, 명지대 5개밖에 없었습니다. 은행에서 야간 대학생들의 편의를 봐주지 않았습니다. 참 어렵게 공부했죠. 학교 시험이 있는데 야근해야 할 때도 있었죠. 제가 노조를 할 때 단체협상을 통해 야간대학생들의 편의를 봐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영등포구 신길동 32평형 아파트에 산다. 시가는 2억5000만원 정도. 아들은 입대했고 딸은 고등학생이다.

    ▶대단히 미안한 질문이지만 독자는 노동운동가들이 어느 정도 살까, 재산은 얼마나 모았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겁니다.

    “저는 은행원이기 때문에 다른 운동가들보다는 좀 잘살고 있죠.”

    ▶공직자 재산 공개하듯 이 자리에서….

    “그 정도만…허허.”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술자리가 잦다. 그는 체력이 강해 술 실력도 세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 처음에 양주로 시작해 나중에 폭탄주를 돌렸는데 11잔을 마신 적이 있다. 다음날 끄떡없이 정상 근무했다.

    필자가 “이제 50대 중반에 다가서고 있으니 술을 좀 줄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요즘엔 술이 좀 약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라고 했다. 화제를 다시 노동운동 쪽으로 돌렸다.

    “인격 수양부터 하시오!”

    ▶내년 1월부터 복수 노조가 시작되지 않습니까. 노사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오리라고 생각되는데요.

    “작년에 노정(勞政)관계가 아주 안 좋아 노동부 장관 퇴진운동을 8개월이나 했습니다. 저는 투쟁할 적에는 강고하게 합니다. 노동조합이 투쟁을 완전히 포기하면 누가 조합원들의 권익을 보장해주겠습니까. 투쟁을 포기하면 이미 노동조합이 아니죠. 그러나 투쟁을 위한 투쟁이라든가, 상시(常時) 투쟁은 하지 않습니다.

    복수 노조 시대에는 투쟁과 협상, 대립과 협조를 병행하지 않고 편협한 운동노선으로 가는 조직은 경쟁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봐요. 내년부터는 아마 3노총, 4노총도 만들어지고 분화과정이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 퇴진 투쟁을 그렇게 오래 벌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도 김 장관이 합리적이라는 평을 듣지 않았습니까. 장관 물러난 뒤에 그 분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한국노총이 더 정치적”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사람 사이의 신뢰가 중요하거든요. 그 분이 법과 원칙을 거론했습니다. 그런데 법과 원칙이 고무줄 잣대입니다. 김 장관은 복수 노조를 허용해야 한다고 할 때는 국제노동기구(ILO) 권고사항을 들먹입니다. ILO가 전임자 임금지급도 노사 자율에 맡기라고 권고한 것은 쏙 뺍니다.

    김 장관이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과는 대구 계성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그런데 동창끼리도 안 맞아요. 감정 처리를 잘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합니다. 대화 자리에서 남이 얘기할 때는 경청해야지요. 심한 경우에는 홱 돌아앉습니다. 그렇게 편협해서 되겠습니까.

    김 장관과 함께 조찬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플로어에서 제게 ‘정치를 하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난 정치에는 전혀 매력을 못 느낀다’고 했죠. 그리고 ‘엉뚱한 생각’이라는 단서를 달고 ‘노동정책을 담당하는 자리 한번 맡아보라고 하면 노동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고 했죠. 김 장관이 그 자리에서 ‘이 위원장이 노동부 장관을 언급한 모양인데, 노동부 장관이 그렇게 공부도 안 하고 아무나 하는 자린 줄 압니까’ 하면서 서너 번이나 ‘공부 좀 하시오’라고 하더군요. 참 어이없었죠. 엉뚱한 생각이라는 전제를 달고 얘기했는데도 김 장관이 그렇게 감정 처리를 못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은 공부하기 이전에 인격 수양부터 하라’고 맞받았죠. 자기 동창하고도 안 맞으니 나하고야 더더욱 맞겠습니까. 그래서 이 위원장과 내가 함께 퇴진운동을 벌인 거죠.”

    노동운동을 오래 해서인지 인물평이 직설적이다. 어디까지나 이 위원장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 전 장관의 반론을 받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싸움을 붙이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런 사건은 두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

    김 전 장관은 아마 이 위원장이 “장관 똑바로 하라”며 공중 앞에서 망신 주는 것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장관 퇴진 운동과정에서 양쪽의 감정이 크게 상한 것 같다.

    소신 못 펴는 정치 할 바에야…

    ▶노조 지도자들 중에서 박인상 전 한국노총위원장은 1997년 대선 때 DJ를 지지하고 얼마 안 있다가 전국구 의원이 됐습니다. 배일도 전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은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했죠. 노조 지도자들의 정계 진출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본인의 철학에 달렸죠. 저는 사실 2004년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양쪽으로부터 다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치에 매력을 못 느껴요. 거기 가봤자 자기 소신으로 뭘 못하고 거수기가 돼야 하잖아요. 목소리를 제대로 못내는 상황에서 정치에 매력을 못 느낍니다.”

    ▶아까 언론이 노동운동에 대해 좋게 보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언론 보도의 어떤 점이 불만스럽습니까. 언론도 매체에 따라 색깔이 다릅니다만.

    “네, 언론의 색깔이 다르죠. 노동조합 안에도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은 만날 투쟁과 부정부패 같은 것만 다루지 않습니까. 긍정적인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우이웃돕기 하는 것도 언론이 다뤄줬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사회 공동체를 위해 긍정적으로 활동하도록 언론이 격려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언론에 서운한 감정을 갖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언론의 생명이 비판이니까….

    “언론은 광고주들을 의식하겠죠. 노동조합은 광고주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죠. 그러니까 언론이 사용자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거죠.”

    필자는 이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역공에 대해 “그런 점도 전혀 없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한 것처럼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도 생기고 국가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방어논리를 폈다.

    이 위원장은 한국노총 대표 34명과 함께 7월18~21일 평양을 방문한다. 남쪽의 두 노총과 북쪽의 직업총동맹이 정기적으로 교류한다.

    ▶민주노총이 북한에 납치된 김영남씨의 ‘창작 표류기’에 대해서도 해괴한 논평을 내놓았더군요. 민주노총은 북한 인민들의 굶주림, 독재, 인권유린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하거나 감싸고 돕니다. 민주노총이 혹시 북한을 비판한 적이 있으면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민주노총의 친북좌파 이데올로기를 미심쩍게 생각하는 국민이 많아요.

    “민주노총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쪽에 좌파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죠. 스스로도 좌파라고 인정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거든요. 그래서 민주노총을 다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이 물론 북한 비판은 안 합니다. 한국노총도 북쪽 관련 부분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죠. 민주노총에도 침묵하는 세력이 다수이고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은 소수입니다. 그런데 좌파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거죠.”

    ▶최고경영자포럼에서 노동운동이 투쟁 일변도로 치닫는 첫 번째 원인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지키기 위해 투쟁 중심으로 흐르는 경향’을 지적했던데요. 어떤 이데올로기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겁니까.

    “좌파도 포함되는 거고요. 그 다음에 전투적 조합주의도 있죠.”

    “노동부는 노동자 편 들어라”

    ▶현재 노사정의 대화 채널은 잘 가동되고 있습니까.

    “중앙 단위에선 노사 대화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노총 경총 토론회를 두 번 개최해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대화 틀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놓기 위해 상시적 노사발전 재단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노사 중심이거든요. 제가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를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네덜란드에서 한 번, 한국에 와서 한 번 만났죠. 그 분한테 조언을 얻은 겁니다. 노총 위원장을 10년, 총리를 10년 한 분입니다. 그 양반은 양쪽 처지에서 정확히 판단할 수 있죠.

    정부는 노사에 대한 지원과 서비스를 하다 보니까 중층적 구조가 됩니다. 정부에 노동조합 편을 드는 부처도 있고, 사용자 편을 드는 부처도 있습니다. 고용부, 사회부 같은 부처는 철저하게 노동조합 편이고 산업부 경제부 쪽은 전부 사용자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다 주도했기 때문에 항상 중립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중립이라고 믿는 쪽이 없단 말입니다. 사용자들은 DJ 정권 때부터 친(親)노조 정권이라는 불만을 갖고 있고, 노무현 정권은 완전한 친노조로 보는 거지요. 노조 쪽은 노조 쪽대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이네’ ‘매번 정권은 친사용자 쪽이네’ 라고 생각하지요.

    정부가 양쪽으로부터 다 불신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야 노사관계가 좋아질 리 없죠. 정부가 그렇게 모호하고 불가능한 중립을 표방하지 말고 노동부는 노동자 편을 들고, 산자부는 사용자 편에 서서 행동하면 노사가 스스로 알아서 잘할 텐데 말입니다.”

    ▶노동조합 이미지에 관련된 질문입니다만 보수적인 사람들 중에는 노조 간부들이 임단협 때 두르는 붉은 머리띠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많아요.

    “GM대우의 노사관계가 지금은 상당히 좋죠. 옛날 대우자동차와는 다르죠. 그런데 닉 라일리 사장이 투명경영을 하며 노조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임단협 때 붉은 머리띠 매고, 붉은 투쟁 조끼 입고, 노조 사무실 버리고 밖에 나와 텐트를 치고 시작을 하더랍니다. 라일리 사장은 ‘한국의 노동조합이 투쟁적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구나’ 하고 긴장했답니다. 그런데 협상이 아주 잘 끝났어요. 라일리 사장이 임단협 끝나고 나서 ‘협상도 시작하기 전에 왜 머리띠 매고 먼지 풀풀 나는 운동장으로 나갔냐’고 묻더랍니다. 노조위원장이 대답하기를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매년 그래왔다’고 했대요. 좋든 나쁘든 노동조합 문화로 정착돼버린 겁니다. 이걸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마치 투쟁을 포기하는 사람 같아서요. 다 전투적 조합주의 시절에 정착된 거죠.”

    ▶비정규직 문제에 관해 몇 시간이고 강의도 할 수 있겠지만 시간 관계상 간략하게 요점만 들려주겠습니까. 사용자측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규직 임금을 낮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규직의 고임금과 노동경직성이 비정규직 문제의 출발점이라는 거지요. 민주노총이 스스로 ‘철밥통’을 깨지 않으면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직 관련 법안 통과를 반대하는 것은 이중적 태도라는 거지요.

    “정규직 급여를 깎아서 비정규직에게 줘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고요. 비정규직 증가의 주된 이유는 임금이 싸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체 노동자가 비정규직화했을 때 사회가 안정되겠습니까? 오히려 사회 불안 요소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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