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파워우먼과 명품 브랜드, 그 은밀한 교감

‘아르마니 입은 좌파’ ‘프라다 입은 악마’…

  • 김현진 패션 칼럼니스트 parisstyle@naver.com

    입력2007-01-08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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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명도 높은 몇몇 패션 브랜드의 이미지는 그것을 입고 걸친 여성의 정체성(Identity)으로 전이된다. 그뿐인가. 때로는 개인의 숨겨진 본성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떤 커뮤니케이션 수단보다 강렬한 ‘명품 패션 코드’의 독해법.
    파워우먼과 명품 브랜드, 그 은밀한 교감

    프랑스 사회당의 루아얄 의원(왼쪽)과 낸시 펠로시 미국 신임 하원의장.

    명품 패션 브랜드 가운데 요즘 대중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름은 아르마니와 프라다일 것이다.

    먼저 아르마니는 지난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첫 여성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낸시 펠로시(66) 민주당 의원이 즐겨 입어 새삼스럽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공약을 내건 민주당 출신 의원이 명품 패션 브랜드의 대명사 격인 아르마니를 걸친 데 대해 공화당측은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라는 말로 조롱했다.

    하지만 공화당의 의도와는 달리 이러한 공격이 오히려 펠로시를 패션 아이콘으로 부각되게 했고, 미국에서는 그가 입은 것과 똑같은 정장을 찾는 여성이 늘어났다. 구글, 야후 같은 포털 사이트에도 “어디에 가면 펠로시가 입었던 아르마니 정장을 구할 수 있냐”는 질문이 이어졌으며, 고급 백화점과 부티크들은 매장 정보를 담은 광고까지 내걸었다.

    펠로시의 아르마니 정장 중에서도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그가 민주당의 중간선거 승리선언을 할 때 입은 청회색 바지 정장이다. 밝은 파스텔톤이지만 회색이 살짝 섞여 안정감이 느껴지는 이 정장은 얼굴 생김이나 성장 배경이 다분히 부르주아적인 그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한편 프라다는 2006년 하반기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소설과 동명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덕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가 됐다. 젊은 미국 작가 로렌 와이즈버거가 쓴 원작소설은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다룬, 이른바 ‘칙 릿(Chick Lit)’ 장르의 대표 소설로 자리매김했다. 와이즈버거는 패션잡지 ‘보그’의 미국판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비서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 책을 썼다. 안나 윈투어는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들조차 그가 도착하지 않으면 패션쇼를 시작하지 않을 정도의 패션계 거물이다.



    패션은 무언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특히 럭셔리 패션 브랜드와 권력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파워(power)’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여러 브랜드 중에서도 권력 또는 권력자에 의해 선택된 패션 브랜드들은 의도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그 메시지가 좀더 피부에 와 닿는 경우는 권력을 가진 이가 여성일 때다. ‘우먼파워’와 럭셔리 패션에는 어떤 함수 관계가 존재하는 걸까.

    커리어우먼의 ‘갑옷’ 아르마니

    북미지역의 커리어우먼에게 아르마니 정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럭셔리 마케팅 컨설턴트인 캐나다인 니콜 코모(42)씨는 “북미의 전문직 여성들이 아르마니의 수트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옷이 여성적이면서도 진지(serious)하고 파워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여성이 아르마니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고 있다면 이는 자신이 패션 감각과 돈, 또 파워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내세우는 무언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워싱턴 정계 인사들의 옷차림을 집중적으로 분석해온 패션 비평가 로빈 기브한씨는 ‘워싱턴포스트’에 펠로시의 패션에 대해 썼다. 그는 특히 선거 승리 후 기자 회견장에서 입은 청회색 바지 정장을 두고 “카메라 앞에서 매우 감각적이며 시크(chic)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더 나아가 펠로시가 아르마니를 선택함으로써 ‘아르마니 효과’를 누렸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르마니의 여성용 수트는 특히 커리어우먼들에게 그 지위와 존엄성을 지켜주는 ‘갑옷(professional armor)’ 구실을 한다는 것.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매력적인 여성 정치인의 옷차림을 분석하는 데 앞서 아르마니라는 브랜드가 가진 상징적 의미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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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지오 아르마니 브랜드 아이덴티티<br>* 장 노엘 카페레의 ‘아이덴티티 프리즘’에 조르지오 아르마니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적용한 모형.

    유럽의 경제사회연구원(RISC)이 최근 미국, 유럽, 일본의 성인 1만8500명을 대상으로 “당신이 갖기를 꿈꾸는 럭셔리 브랜드가 뭐냐”고 물었다. 조사 결과 미국과 유럽에서 압도적인 다수가 아르마니를 꼽았다. 미국에서는 시계 브랜드 롤렉스, 보석 브랜드 티파니에 이어 3위에 올랐고, 유럽에서는 샤넬, 디오르, 입셍로랑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아르마니가 이미지의 메신저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내는 것은 그만큼 인지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펠로시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브랜드의 정장을 입었더라면 그 스타일이 아무리 멋있었다 한들 이처럼 널리 회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르마니 수트가 왜 전문직 여성의 자존심을 지키는 ‘갑옷’이 됐는지 알아보려면 디자이너 아르마니와 여성 기성복의 역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아르마니는 20세기 여성 기성복에 큰 영향을 끼친 디자이너를 꼽을 때 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1934년생인 그는 197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남성복 라벨을 만든 지 1년 만에 여성복 라인을 만들면서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는 남성복 정장의 기능적, 해부학적 균형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에 더 잘 맞고 여성이 활동하기 좋은 디자인의 정장을 고안했다.

    아르마니의 여성복 정장이 인기를 끈 것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여성의 사회 진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활발하게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과 더불어 남성복을 여성의 비즈니스 수트에 접목한 이 시도가 여성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은 것이다. 당시 여성 정장은 ‘파워 수트’로 불렸다.

    아르마니의 여성복 정장에서는 남성 특유의 자신감과 함께 약간의 거만함이 묻어난다. 이 옷을 입은 여성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 남성만큼의 카리스마를 자랑하거나, 자랑할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준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여성의 갑옷 노릇을 하는 것이다.

    고상함 속에 숨은 관능

    필자는 2005년 밀라노의 아르마니 본사를 방문해 경영진으로부터 브랜드와 경영 전반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르마니 브랜드 가치의 절반 이상은 디자이너 자신의 카리스마에서 기인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마니를 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디자이너 아르마니의 카리스마와 그 카리스마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이라는 이미지를 산다는 것이다. 밀라노의 아르마니 카페에서 마주친 조르지오 아르마니에게선 백발이 성성한 단구(短軀)의 노인임에도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이런 이미지 자체가 브랜드 가치와 직결된다는 것이 많은 패션 전문가의 분석이다.

    각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할 때 여러 비즈니스 스쿨이 사용하는 모델은 프랑스의 마케팅 분야 석학인 장 노엘 카페레가 고안한 ‘아이덴티티 프리즘’이다. 아이덴티티 프리즘은 육각형을 이루는 여섯 개의 선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 선분은 ‘외면적 특성(physical)’ ‘개성(personality)’ ‘문화(culture)’ ‘사용자 이미지(reflection)’ ‘자아 이미지(self image)’ ‘관계(relationship)’를 뜻한다(다음쪽 표 참조).

    특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이덴티티 프리즘은 비즈니스 스쿨에서 자주 케이스 스터디용으로 활용될 만큼 독특하다. 아르마니 여성복의 사용자 이미지(‘이 브랜드의 옷을 입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어떤가’에 대한 답변)는 세련됨(sophistication)과 고상함(sober)으로, 자아 이미지(‘내가 이 브랜드를 입었을 때 어떤 이미지가 표출되는가’에 대한 답변)는 ‘높은 사회적 지위’ ‘성공한 여성’으로 각각 분석돼 일관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브랜드의 개성을 규명해보면 지적이고 잘 다듬어진 이미지(sophisticated)와 함께 관능성(sensuality)’을 발견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장이나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성에게서 성적 매력을 발견하는 남성들의 심리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아르마니 여성복의 이 같은 이중적 이미지는 이 옷을 즐겨 입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아르마니를 좋아하는 여배우로는 조디 포스터, 미셸 파이퍼와 함께 이들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마돈나, 비욘세 등이 꼽힌다. 영국 패션 브랜드 버버리의 전설적인 여성 CEO 로즈 마리 브라보 또한 아르마니 수트를 즐겨 입었다. 그는 “아르마니 수트는 여성들로 하여금 강해 보이면서도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도록 해준다. 수트는 약점을 커버해주고 우아함을 극대화한다”고 했다.

    파워우먼과 명품 브랜드, 그 은밀한 교감
    파워우먼과 명품 브랜드, 그 은밀한 교감

    입셍로랑 광고(위) 속 남녀는 섹스파트너로 손색이 없다. 프라다 광고(아래)에 보이는 남녀는 이에 비하면 다소 건조해 보인다. 마치 남매 같다고 할까.



    아르마니 자신도 브랜드의 이러한 강점을 파악하고 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오트 쿠튀르 드레스 라인인 ‘아르마니 프리베’를 내놓으면서 브랜드가 가진 유전자 가운데 우아한 관능미를 극대화해 뽑아낸 디자인을 선보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의 외면적 특성 중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브랜드가 중간색(neutral color)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펠로시가 입어 화제가 된 옷은 살구색, 청회색 등으로 파스텔톤처럼 가볍지도, 검은색이나 감색처럼 무겁지도 않은 중간색이다. 중간색은 펠로시가 정치적으로는 낙태나 동성 결혼에 찬성하는 등 극좌파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투쟁적이거나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보이지 않게 하는 ‘무게중심’ 기능도 했다.

    이런 특징들을 아우를 때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역시 성공한 여성의 패션 아이콘이라 할 만하다. 펠로시는 다섯 자녀를 다 키워낸 40대 중반까지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다 뒤늦게 정계에 뛰어들었고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가 부르주아 레이디에서 여성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여성미와 젊음으로 은근히 어필하는 데 있어 아르마니는 갑옷 이상의 역할을 했다. 투자은행가이자 부동산 재벌인 그의 남편 폴 펠로시는 한 인터뷰에서 “백화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를 대신해 내가 아르마니 정장을 직접 골라 선사했다”고 말했다. 부부 금실을 자랑하는 것도 이미지 전략 중 하나였을까.

    왜 ‘프라다’인가?

    세계적 인기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메릴 스트립, 앤 헤서웨이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화려하게 개봉됐다. 소설을 일부 각색한 영화는 원작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듯하다. 특히 영상세대의 젊은 여성들은 백 스테이지의 패션모델들처럼 초 단위로 명품 옷을 갈아입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즐길 수 있어 영화에 더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영화를 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 많은 명품 브랜드 중에 왜 하필 프라다가 제목으로 뽑혔냐는 것이다. 실제로 프라다가 ‘악마’ 편집장 미란다와 밀접하게 접합되는 대목은 그가 영화에 첫 등장할 때 손에 든 베이지색 로고 가방 뿐이다. 그가 영화에서 입은 옷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은 자선 파티 장면의 검은 드레스, 그리고 이것과 조화를 이룬 볼레로 재킷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발렌티노가 만든 것이다. 메릴 스트립의 팬이라는 발렌티노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밖에 미란다의 옷과 패션 아이템 중에는 도나카렌, 캘빈클라인, 에르메스도 있다.

    그런데도 프라다가 제목으로 낙찰된 것은 일단 대중적 인지도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프라다는 루이비통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짝퉁’이 많은 명품 브랜드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특히 미국의 일반인(패션 비전문가) 사이에는 루이비통보다 프라다의 지명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다.

    소설이나 영화나 소수의 패션 피플이 아닌 대중을 타깃으로 하다보니 브랜드의 인지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이 영화의 의상감독을 맡은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 패트리샤 필즈의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난다. 필즈는 드라마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새라 제시카 파커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면서 그를 단숨에 최고의 트렌드 세터로 떠오르게 한 주인공이다.

    그에게 일부 패션 미디어가 왜 최근 트렌드 리더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마크 제이콥스나 마르니, 클로에 등을 제쳐두고 샤넬이나 프라다, 발렌티노와 같은 ‘올드 브랜드’에서 협찬을 받았는지 물었다. 필즈의 답변은 명쾌했다.

    파워우먼과 명품 브랜드, 그 은밀한 교감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는 영화를 보는 대중을 상대로 만들어진다. 나의 임무는 패션업계의 현실을 사실 그대로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패션업계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이름만으로도 판타지를 심어주는 프라다나 샤넬 등이 필요했다.”

    제목에 프라다가 쓰인 것은 이 브랜드가 가진 고유의 이미지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프라다는 많은 여성에게 절제감과 더불어 지적이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준다. 이탈리아 브랜드인 프라다는 1913년 마리오 프라다가 가죽 액세서리 전문으로 만든 브랜드를 1989년 그의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가 패션 브랜드로 일궈 나가면서 국제적인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세련된 미니멀리즘’

    프라다 디자인의 특징을 ‘세련된 미니멀리즘’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많다. 1990년대 말 한국 대학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나일론 소재 프라다 가방은 프라다의 이런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아이템이다. 한편 프라다의 의상 라인은 가방 등 액세서리 라인과 달리 브랜드 로고 자체도 잘 드러나지 않는데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밝은 회색 카디건, 깔끔한 흰색 셔츠, 심플한 검은색 수트 등 옷 안쪽의 라벨을 뒤져보기 전에는 브랜드를 알아채지 못할 기본 아이템이 전체 라인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명품 소비 입문 단계에 있는 소비자라면 브랜드가 잘 드러나지도 않을 바에야 ‘자라’ ‘망고’ 같은 중저가 브랜드나 일반 브랜드들에서 판매하는 비슷한 아이템을 구입해도 될 텐데 왜 굳이 ‘프라다표 흰색 셔츠’를 입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다의 소비자 중에는 재단 라인의 각도, 소재 등 1%의 차이마저 잡아내는 예민하고 자아가 뚜렷한 사람이 많다.

    프랑스의 경영 그랑제콜 에섹(ESSEC)의 럭셔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MBA과정을 수학한 독일, 미국, 캐나다, 프랑스 출신 동료들과 함께 프라다의 아이덴티티 프리즘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패션, 금융, 광고업계 등에서 다양한 경력을 가진 그들은 공통적으로 “프라다를 즐겨 입는 여성들은 예술가, 작가, 요리사 등 창의적인 직업에 실제 종사하고 있거나 이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파리의 프리랜서 패션 저널리스트 클로에 브루넬(38)씨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패션도 흰 종이처럼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예가 많다”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의성과 예술성을 함께 추구하는 패션 잡지 편집장 미란다가 프라다를 입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프라다가 미란다와 적절히 어울리는 것은 이 캐릭터가 가진 무성(無性)적 이미지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메릴 스트립이라는 걸출한 여배우가 가진 본래의 매력 때문에 원작에서는 강하게 느껴지는 무성적 이미지가 다소 가려진다. 그러나 미란다는 정서적 맥락에서의 여성성을 스스로 거세한 채 패션으로 외면의 여성성을 지켜 나가는 냉혈한 캐릭터이다.

    ESSEC 럭셔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MBA과정의 시몬 니엑 학장은 패션 마케팅을 논할 때 반드시 섹스와의 함수관계를 강조한다. 실제로 많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섹스와 그 부수 장치들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각 브랜드가 섹시함과 연결지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는 광고 모델의 포즈와 노출 여부, 태도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성복과 남성복 라인을 모두 판매하는 브랜드의 경우 여성복과 남성복 라인 모델들의 성적 역할을 추정해보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패션과 섹스의 함수관계

    니엑 학장에 따르면 프라다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남매에 가깝다. 마치 한 어머니가 옷을 입혀준 듯 비슷한 코디네이션에 깔끔한 이미지가 특징이다. 섹시함과는 거리가 먼 이들의 이미지는 성적으로 건조한 느낌을 주는 소설 속 미란다와도 닮아 있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일 이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악마는 입셍로랑을 입는다’ 혹은 ‘악마는 디오르를 입는다’라면 어땠을까. 실제로 미란다는, 혹은 안나 윈투어는 이 두 브랜드의 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두 브랜드로 그의 ‘까칠한’ 성격을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광고 속의 입셍로랑 우먼은 쾌락적이며, 성적 호르몬을 마음껏 발산한다. 디오르의 여성 역시 사랑을 탐닉하나 입셍로랑 우먼에 비해 좀더 수동적인 이미지로 비쳐진다. 한편 광고 속 남성들 역시 강한 성적 에너지를 내뿜으며 여성을 관찰하거나 자신의 몸에 자아 도취해 있다. 특히 입셍로랑의 남성과 여성은 훌륭한 섹스 파트너로도 손색이 없다.

    샤넬이라면 어땠을까. 브랜드 지명도 면에서 ‘악마’는 샤넬을 입었을 수도 있다. 샤넬의 여성은 독립적이고 남성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파워를 지녔다. 여성들이 활동하기 편하도록 옷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디자인한 코코 샤넬 여사의 패션 철학처럼 샤넬의 여성은 활동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샤넬에서도 컬렉션 구색에 맞추기 위해 시즌마다 몇 점의 남성복이 본사 매장에 진열된다. 하지만 상업적인 판매 목적이라기보다는 고객의 반응을 보기 위한 ‘테스터(tester)’ 목적이다. 샤넬의 남성복은 워낙 강한 여성복 이미지 때문에 소비자에게 어필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러한 뒷배경까지 알고 나면 샤넬이 미란다와 궁합이 잘 맞을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디자인이다. 최근 샤넬의 컬렉션을 보면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매우 여성적이고 소녀적인 디자인이 많은데, 이는 이미 중년을 넘긴 차가운 성격의 미란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미란다에게 각종 수난을 당하는 젊은 비서 앤드레아가 샤넬을 즐겨 입는다. 물론 원작자가 실제로 이것까지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정치인 얘기로 돌아가보자. 미국에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가 있다면 대서양 건너 프랑스에는 ‘폴 카(Paule Ka)를 입은 좌파’가 있다. 주인공은 프랑스 사회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세골렌 루아얄(52) 의원. 최근 프랑스 일요신문 ‘주르날 드 디망슈’가 사회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루아얄 의원을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가 여성이어서”라고 한 응답자가 37%로 가장 많았다.

    루아얄 본인도 이러한 민심을 잘 읽고 있는 듯하다. 그는 공식 행사에서 목 부분이 새틴 소재로 된 검정색 드레스에 빨간색 재킷, 흰색 재킷에 속살이 살짝살짝 비치는 시폰 소재 치마, 여러 줄로 이뤄진 화려한 목걸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갈색 가죽 부츠 등 트렌디하고 세련된 아이템들로 여성성을 한껏 발휘한다. ‘엘르’ ‘마담 피가로’ 등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그를 두고 “패션의 나라 프랑스를 대표할 만하다”고 덮어놓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일부 언론은 다소 작은 키(157cm)를 커버하기 위해 굽이 가늘고 높은 ‘스틸레토 힐’을 즐겨 신는 그를 두고 ‘스틸레토를 신은 사회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정치계의 패션 리더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가 대중 앞에서 입은 옷 중 상당수는 프랑스의 고급 패션 브랜드 폴 카다. 폴 카는 프랑스 북부 릴 출신의 디자이너 세르지 카주팽저가 1987년에 만든 브랜드. 그는 브랜드 홈페이지에서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풍의 우아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이다”라고 했다.

    루아얄이 폴 카를 즐겨 입는 데 대한 브랜드측의 반응은 어떨까. 폴 카측은 “사실 우리 옷의 주요 타깃은 보다 젊고 자유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여성 정치인이 즐겨 입는다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답했다. 루아얄 덕분에 브랜드 인지도가 크게 높아진 점에 대해서는 싫지 않은 눈치다.

    프랑스에는 ‘폴 카’ 입은 좌파

    인터넷 블로그를 보면 좌파를 대표하는 사회당 출신의 국회의원이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옷을 입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의견을 내놓는 누리꾼들도 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루아얄의 행보는 골수 사회주의자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함을 알 수 있다. 루아얄은 주 35시간 근로제가 오히려 프랑스의 노동법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하고, 문제 학생들을 군대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우파 성향의 정책들을 쏟아내면서 전통적인 사회당 노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 그가 폴 카를 입는 것은 옷차림을 통해 “나는 우파와 절충점을 찾는 합리적 좌파”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그의 세련된 옷차림은 확실히 이목을 끈다. 한 정치 칼럼니스트는 이를 두고 “파워를 가진 여성은 귀족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 사회당원들조차 이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인이자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는 ‘파워 우먼’으로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센 존, 오스카 드 라 렌타 등을 즐겨 입었고, 지금도 그가 공식 행사에 입고 나오는 패션은 많은 이의 이목을 끈다.

    물론 힘을 가졌더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공적인 활동보다는 무슨 옷을 입는지가 더 많이 거론되는 것에 대해 성차별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많다.

    파워우먼과 명품 브랜드, 그 은밀한 교감
    김현진

    1977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

    프랑스 ESSEC 럭셔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MBA


    하지만 이들의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파워 우먼’들의 옷차림에 눈을 반짝이게 되는 것은, 여성복은 남성복에 비해 변주가 쉬워서 옷차림을 보면 그의 성격과 개성을 곧바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명품 브랜드들은 오랜 세월 굳어진 브랜드의 성격과 메시지가 확실해 그 브랜드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그 브랜드가 지향하는 가치와 통하는 점이 많을 것이라 여기게 한다. 아르마니를 선택하는 성공한 이미지의 여성과 폴 카를 선택하는 모던한 신여성은 실제 성격이나 취향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치인이든, 세계 패션계를 주름잡는 잡지 편집장이든 그들이 입은 명품 브랜드와 그들 스스로는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며 더욱 강력한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파워’라는 공통점을 가진 ‘힘있는 여성’과 럭셔리 패션은 무언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상부상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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