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과외 한 번 받지 않은 서울대 합격생 수기

“혼자 힘으로 공부하려는 고집, 결코 헛되지 않았어요”

  • 이종준 서울대 인문계열 신입생

    입력2007-03-09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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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대학의 합격자 발표가 속속 이어지면 이른바 명문대 합격생들의 공부 비결이 화제가 되곤 한다. “과외 한 번 받지 않았다”는 타이틀은 상투적이긴 해도 누구에게나 가능성을 열어놓기에 반갑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뜸해졌다. 학벌지상주의를 없애려는 분위기 때문이라면 다행이지만 ‘서울대 ○○명 합격’ 현수막이 고교에서 학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면 안타까운 일이다. 학원에서 오랫동안 훈련받은 경쟁자들에 치여 외고 진학에 실패하고, 2007학년도 수시모집에도 낙방한 후 논술과 구술·면접을 거쳐 마침내 서울대에 합격한 이종준(李鍾準) 학생은 서울대 합격 자체보다 과외 한 번 받지 않고 끝까지 스스로 공부해낸 것에 더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과외 한 번 받지 않은 서울대 합격생 수기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관악구 신림동에 살던 내게 서울대는 ‘당연히 갈 수 있고, 당연히 가야만 하는’ 학교였다.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숱하게 바라본 서울대 정문 이미지가 은연중에 뇌리에 새겨져, 초·중·고 시절 내내 서울대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초·중학교를 다닐 때엔 막연히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반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턴 서울대 가기가 ‘장난이 아닌 실전’이라는 생각에 두렵고, 힘들었다는 점이다.

    ‘Dream, and it will be realized.’ 내가 영작해본 문장 중 가장 좋아하는 이 말처럼 2007년 2월1일, 나는 서울대에 합격했다. 예전에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대학 건물에 붙여놓은 합격자 명단을 보며 울고 웃고 했다지만 나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합격여부를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친절하게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까지 왔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떨려서 ‘조회’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나 대신 어머니가 버튼을 클릭하셨는데,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마치 번지점프를 하는 기분-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이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중3 때 외국어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씁쓸한 기억, 수시모집에서 서울대 법대에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아픈 추억. 이 모두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자양분이 됐다. 마침내 서울대 인문대학에서 언론인을 꿈꾸며 ‘상큼한 20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학습자의 태도가 중요하다

    신림초등학교 시절, 나는 글짓기를 좋아했고 또 곧잘 해서 매년 가을에 열리는 학교 작품 전시회 때면 내 글이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곤 했다. 5학년 때는 ‘소년동아일보’ 기자로 선발되어 내가 쓴 기사가 ‘서울 신림교, 1학년 후배교실 언니들이 대신 청소’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게재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때부터 언론인의 꿈을 가졌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6학년 때까지 집에서 학습지 ‘눈높이 수학’ ‘눈높이 영어’로 공부했다. 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해주신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악기를 다루는 데는 손 기술 못지않게 예술적 감수성과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수치화할 순 없지만 피아노를 배운 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지적 성장에 지대한 도움을 줬다고 확신한다.



    학습지는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지도에 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교재가 제공하는 학습의 양이나 질과 상관없이 학습자의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혼자서 백과사전을 들추며 찾아본 내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학습 효과가 컸다.

    ‘초·중·고등학교 중 어느 때로 되돌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 주저하지 않고 중학교 때라고 말한다. 그만큼 내 중학교 생활은 명랑한 원색의 이미지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방송부원으로 활동했고, 3년 내내 학급 임원으로서 친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합창대회에서 반주자와 지휘자로 친구들을 이끌던 추억도 있다. 방과 후 일정이 학원 스케줄로 꽉 짜여 있었다면 이런 추억을 쌓기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평균 91점을 받았다. 매우 기뻐서 어머니께 자랑스럽게 점수를 말씀드렸더니, 어머니의 반응이 의외였다. 겨우 그 점수냐는 것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학교 시험 준비엔 수업만큼 확실한 공부가 없었다. 수학시험은 수업에만 의존해선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학원을 다닌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중에 나와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집들을 사서 풀었다. 혼자 어려운 문제들을 풀다보면 해답을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문제들이 더러 있다. 나는 우선 혼자 힘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했고, 그중 몇 문제는 학교 선생님께 여쭤봤으며 나머지는 모르는 채로 넘어갔다. 여러 문제를 풀다보면 어떤 문제는 굳이 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꼭 문제를 풀어보고 싶다면 주위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주위의 도움이 결코 스스로 하는 공부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엇이든지 나만의 방법으로 재구성하고, 확실히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외고 불합격의 得과 失

    중3 때, 대원외고에 진학하고자 대치동에 있는 유명 학원을 잠깐 다녔다. 갑자기 외고에 가고 싶었던 것은, 외고 출신이 외국 대학에 많이 진학한다는 기사를 접했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접하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기억에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은 철저하게 학생 위주로 운영되는 대학 강좌다. 단 한 명의 학생이 수강신청을 해도 기꺼이 강좌가 개설되고, 교수도 열의를 갖고 강의하는 장면을 보았다. 한국 대학에서는 그런 여건을 갖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외국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학원의 수학과 영어 수업은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오래전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입시에서 성공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고1 수준의 수학을 이미 배웠다는 전제하에 수업이 진행됐고, 영어는 수능보다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나마 영어 수업은 웬만큼 따라갈 수 있었는데, 수학 수업은 거의 따라가지 못했다.

    역시 오랫동안 학원에서 외고 입시 준비를 한 친구들이 주로 합격했다. 나와 가족 모두 꽤 오랫동안 ‘불합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그 충격은 중3 겨울방학을 알차게 보내는 계기가 되었고, 그 알찬 결실은 고등학교에서 확인됐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수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자고 마음먹고 ‘수학의 정석’을 샀다. 설명이 워낙 자세히 나와 있어 생소한 내용도 찬찬히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더 꼼꼼히 살펴보려고 했다. 친구들이 대부분 넘겨버리는 기초적인 문제들도 묵묵히 다 풀었다. 모르는 문제는 책 뒤에 나온 해답을 베껴쓰면서 공부했다. 해답을 보는 것이 좋은 방법 같지는 않지만 10∼15분 동안 고민해도 도저히 풀 방법을 모를 때 해답의 명쾌한 풀이를 보면 우선 속이 후련했다. 한편으로 나는 그렇게 풀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감과 함께 다음에는 나도 이렇게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붙었다.

    공책에 번호를 쓰고 푸는 식으로 해서 하루에 한 과씩 겨울방학이 지나가기 전에 고등학교 1학년이 배울 수학 내용을 모두 예습했다. 하루에 네댓 시간씩 수학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수학 문제풀이 공책은 고등학교 3년 동안 16권이 되었고, 지금 그 공책들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다.

    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평균 98점을 넘었다. 전교 7~8등의 성적이었다. 중학교에서 전교 20등 전후였던 것에 비하면 성적이 아주 좋아진 편이었다. 특별히 과외수업을 받거나 공부법이 바뀐 것도 아닌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겨울방학 때 혼자 꾸준히 공부한 덕분이다. 그때 공부한 내용이 시험에 그대로 나와서가 아니라 공부를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성적을 크게 올릴 수 있었던 데는 같은 반 급우의 영향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우리 반에는 성적이 꽤 좋은 학생이 나를 포함해 3명이었는데, 서로에게 유익한 경쟁을 했다.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받으며 모두의 실력이 향상됐다. 1학년 때 본 4번의 시험에서 반 1등자리는 매번 바뀌었지만, 3명의 전교 등수는 꾸준히 높아졌다.

    고등학교 1학년은 그렇게 잘 흘러갔다.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꿈은 TV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로 구체화했고, 문과를 선택해 2학년으로 올라갔다. 고2 여름방학 때 아리랑TV의 퀴즈 프로그램인 ‘Quiz Champion’에 출연했다. 교내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Dream, and realize’라는 글로 은상을 수상한 후 선생님의 권유로 친구들과 ‘MVPs’라는 팀을 결성해 출연했다. 모든 순서가 영어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1점 차이로 석패했다. 그러나 그저 영어를 좋아하는 내게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친구들은 큰 자극이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영어를 구사하는 일은 그야말로 필수적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더욱 확실하게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2를 마치고 고3으로 올라가면서 이런저런 고민이 생겼다. 학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탐구 과목 중 한국근현대사와 국사를 인터넷 강의로 배웠다. 언어·수리·외국어영역은 내 방법대로 공부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믿었고, 경제와 한국지리도 스스로 공부할 자신이 있었다. 고3이 되기 직전에 본 모의고사 점수는 500점 만점에 420~450점이었다. 언어영역은 80점대 후반에서 90점대 초반을 왔다갔다했고, 수리영역은 시험에 따라 편차가 컸다. 80점대를 받을 때도 있었고 100점을 받을 때도 있었다. 외국어영역에서는 96점 아니면 98점의 점수를 꾸준히 받았다.

    언어영역, 분위기를 느껴라

    과외 한 번 받지 않은 서울대 합격생 수기

    이종준군이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수학 문제풀이 공책. ‘스스로 학습’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고3이 된 뒤 모든 생활이 입시 위주로 짜였다. 고2 때는 여러 가지 새롭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고3이 되고 나서는 그런 ‘활발한 행동’은 자제했다. 3월 초에 첫 모의고사를 치렀는데 주위에서 “이 시험에서 받은 점수가 수능 점수와 거의 동일할 것”이라고 겁을 줬다. 500점 만점에 392점이 나왔다. 황당했다. 서울대는커녕 서울에 있는 대학 가기도 힘든 점수가 나온 것이다. 그때까지 치러본 시험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외고 입시에서 낙방한 이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애써 점수를 외면하고 얼른 공부에 집중했다. 시험 문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자꾸 되새기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마음 상태를 잘 조절하는 것이 수험 생활의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수능 대비에 들어가, 언어영역은 EBS에서 나온 교재로 공부했다. 국어선생님께서 “작품을 대할 때는 분석하려 들지 말고 우선 분위기를 느껴라”고 조언해주셔서 그렇게 하려 애썼다. 지문은 한번에 꼼꼼히 읽으려고 노력했다. 언어영역 문제는 워낙 지문과 발문이 길기 때문에 한번 막히면 제대로 풀기가 어렵다. 정확히 시간을 재보진 않았지만, 집중하면 대략 5분 만에 한 지문을 읽고 그에 딸린 문제들을 풀 수 있을 정도로 꾸준히 훈련했다.

    수리영역은 ‘수학의 정석’ 공책에 풀기를 계속하고, 4, 5월부터 EBS에서 나오는 모든 교재를 같은 방법으로 공책에 풀기 시작했다. 모르는 문제를 특별히 오답 노트에 작성하지는 않았는데, 어차피 여러 번 풀 문제이기 때문에 모르는 문제는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넘어갔다. EBS 교재 외에는 메가스터디에서 나온 ‘수리 영역 1000제’를 풀었다. 가을로 접어들었을 때 초조한 마음에 이것저것 문제집을 여러 권 샀지만 거의 풀지 못했다. 난이도가 들쭉날쭉했으며 수능에 맞지 않은 유형의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그냥 EBS 교재를 푸는 것이 가장 편했다.

    외국어영역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서울대 수시 2학기 모집 특기자 전형에 지원하기 위해 고1 때부터 꾸준히 텝스(TEPS)를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여덟 번의 도전 끝에 서울대가 요구하는 850점 이상의 점수를 얻었고, 자연스럽게 수능 외국어영역을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실력을 갖췄다. 다만 어휘 실력이 부족했는데, 단어 외우는 데 따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단 새로운 텍스트를 접할 때마다 자주 눈에 띄면서도 모르는 단어만큼은 반드시 외우려고 했고, 나머지 모르는 단어들은 문맥에 따라 단순히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만을 파악하고 넘어갔다.

    이렇게 해서도 독해에 큰 지장이 없었던 이유는 항상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습관에 있었다.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보면 자연히 어느 부분에서 끊어 읽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고, 문법적으로 올바르게 문장을 끊어 읽다보면 어느새 대강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매일 꾸준히 공부했다.

    사회탐구, 교과서 읽고 또 읽다

    사회탐구영역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언어·수리·외국어는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응용’해서 푸는 문제들이지만, 사회탐구영역의 문제들은 정해진 지식을 최대한 정확하게 ‘이용’해서 푸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전술했듯 국사와 근현대사는 한 번씩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경제와 한국지리는 3학년 때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따로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수능시험에서 국사와 경제를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늘 교과서에 충실했다. 과목의 특성상 수많은 요약집, 자습서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만 그것들은 처음에 공부를 시작하는 데 도움을 줄 뿐, 실제로 좋은 점수를 받는 데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내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능 제도가 과목을 선택해서 보도록 변경되면서 공부해야 할 범위는 줄어든 반면, 그 깊이는 훨씬 깊어졌다. 따라서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실제로 나는 한국지리를 가장 좋아했는데 수능시험에 전혀 본 적 없는 그림이 제시되어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 그림은 교과서에 글로 서술된 내용을 그림으로 바꿔놓은 것에 불과했다. 문제를 찬찬히 읽다보니 그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아주 쉽게 문제를 풀어냈다.

    교과서 내용을 요약하려고 하면 어떤 내용이 중요한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필기를 하기보다는 교과서를 집중해서 여러 번 읽는 방법을 택했다. 국사교과서는 읽기 시작해 10분 안에 잠이 올 정도로 문체가 딱딱하고 내용이 복잡하다. 그럼에도 몇몇 친구는 교과서를 여러 번 읽고,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 노력은 수능에서의 좋은 성적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고3 내내 아침 7시40분까지 교실에 도착해 점심과 저녁을 모두 학교에서 먹으며 밤10시까지 공부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다행히 4월 모의고사부터는 안정된 점수를 받았다. 3월 모의고사를 제외한 여러 차례의 모의고사에서 440~460점을 받았다. 여름방학 때도 학교에 나가 자율학습을 했다. 수시 1학기 모집 전형이 진행됐고, 합격했다는 친구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부러웠지만 꾹 참았다. 내겐 텝스 점수로 서울대 2학기 수시에 지원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게 잘 안 되면 정시모집을 통해 꼭 좋은 결과를 얻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얼마 후 서울대 법대에 수시 원서를 접수했다. 주위의 권유에 따라, 또 언론의 특성상 법을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으로 과감히 법대에 지원했다. ‘특기자전형’이라는 이름답게 성적 외의 다른 요소들이 많이 고려됐다. 자기소개서와 추천서, 감명 깊게 읽은 책 목록, 과외활동 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나름대로 주관이 뚜렷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등 심혈을 기울인 모든 서류를 서울대에 보내고 나니 왠지 모를 뿌듯함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문제였다. 서울대에 원서를 넣었다는 사실만으로 우쭐해져서 그때까지 꾸준하게 유지해오던 공부의 흐름이 깨어진 것이다. 여러 서류를 준비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빼앗긴 것도 사실이다. 수능 다음날, 1차 합격자 발표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때 지나친 욕심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

    수능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절대적인 점수는 내가 본 모든 모의고사보다 높았지만, 학교 등수로만 봐도 크게 떨어진 성적이었다. 꾸준히 오르던 언어영역 점수가 낮게 나온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1교시라 많이 긴장한 게 주원인인 것 같다. 다행히 수리영역은 만점을 받았고, 외국어영역은 듣기 한 문제를 틀렸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나름대로 만족했다. 사회탐구영역에서는 근현대사 문제를 다 맞췄고, 대체로 어려웠다는 한국지리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경제와 국사를 못 봐 전체적으로 서울대에 가기는 힘든 점수였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이런 성적에 선생님과 부모님도 실망하셨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이 크게 실망했다. 시험장에서 너무 떨었던 것이 아무래도 아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내가 해온 공부가 사실 좀 부족했다는 사실이었다. 과외 한 번 받아보지 않고, 인터넷 강의 두 번 수강한 게 내가 받은 사교육의 전부라는 사실을 남에게 자랑하고,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뿌듯해하며 지내온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결코 억울한 점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온당한 점수가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자긍심이 자책감으로 바뀐 것이다.

    저조한 수능 성적과 서울대 수시 낙방 후 나의 욕심과 자만에 대해 자문하고, 그때까지 믿어왔던 나의 적성, 흥미, 꿈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노래 가사처럼 정말 내가 원하는 가치, 나만이 추구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순수하게 나 스스로 추구하는 것은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꿈, 그리고 서울대에 가고자 하는 꿈이고, 나머지는 모두 나와 부모님, 주위 사람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서울대에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내신 점수가 좋은 편이었지만 수능 점수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매우 불리했다. 이번엔 인문대학에 지원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해 점수가 낮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점수 때문만은 아니다. 인문학은 영어로 Humanities라고 한다. 인간의 생각과 그 발자취를 탐구하는 학문이므로 인간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학문인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학문이다.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나로서는 언론정보학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서울대 인문대학은 인문계열1과 2로 나뉘는데 인문학의 주요 갈래인 문사철(文史哲) 중에 사·철에 해당하는 학과들이 속한 인문계열2에 지원하기로 했다.

    2007년 1월10일 정원의 2배수를 뽑는 1차 합격자가 발표됐다. 합격이었다. 인문계열2의 커트라인으로 추정되는 점수에서 단 0.03점 높은 내가 합격한 것을 알았을 때 ‘논술·면접 잘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외 수업을 받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삼아왔지만 막상 기대보다 낮은 수능 점수를 받고보니 은근히 겁이 났다. 부모님의 강력한 명령(?)으로 논술학원에 다녔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서울대 1차 합격자가 발표됐다. 즉시 학원을 그만뒀다. 학원의 효과에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원 수업은 개념 강의, 해제 강의, 논술 쓰기의 순서로 진행됐다. 개념 강의는 논술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여러 개념에 대한 설명이었다. 여러 철학적 개념을 요약해 설명해주고, 수많은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사상적 견해를 소개했다. 이런 내용은 찬찬히 시간을 두고 오랜 기간 공부해도 부족한 것들이라 짧은 시간에 축약된 내용을 한꺼번에 소화하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시간에 접한 내용을 실제 논술에 전혀 응용하지 못했다.

    해제 강의는 전 시간에 다룬 논제를 분석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논술에는 정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범답안과 모범개요가 제시됐고, 학생들은 그 개요에 따라 논술 쓰기를 연습했다. 물론 어떤 모범답안은 나의 의견과 일치하기도 했지만 어떤 것은 지나치게 상투적이거나 편향적이어서 읽는 것조차 꺼려졌다.

    친절한 논술 도우미, 시사잡지

    논술학원을 다녀 그나마 도움이 된 점이라면 ‘스스로 쓰는 시간’이었다는 것. 직접 써보는 것만이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더는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1차 합격자 발표 후부터 논술시험 때까지 원군 없이 고군분투하기로 결심했다.

    학원에서 강의 들을 시간에 글을 한 편 더 쓰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매일 두 편의 글을 써보았다. 서울대 논술 시험이 치러진 1월16일까지 학원에서 쓴 것을 포함해 총 41편의 글을 썼다. 분량은 2200자에서 2800자 사이였다. 서울대 논술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연습했는데, 한 논제를 다섯 번씩 반복해서 쓰기도 했다. 글은 수학 문제풀이가 달라 같은 논제라도 쓸 때마다 새로운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반복해서 쓸수록 생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깔끔하게 표현됨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배경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 신문과 시사월간지 및 계간지를 많이 읽었다. 신문 기사 문체는 알아보기 쉽고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모방해볼 만했다. 어떤 사건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한 기사를 보면서 논술을 하는 서술자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사설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문이 매우 강한 논조로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별로 이로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문과 잡지를 논술이 임박해서야 읽은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부모님이 구독하였으므로) 접했다. 솔직히 2학년 때까지는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 흥미 위주로 읽었다. 고3이 되어서는 ‘논술’을 염두에 두고 의무 반 재미 반으로 읽었다. 시사월간지나 계간지는 신문에 비해 지면이 넉넉하게 확보되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해 신문보다 자세하고 다각적인 분석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특히 ‘좌담’이나 ‘대담’을 흥미 있게 읽었다. 어떤 논쟁거리를 두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나누는 대화는 심층적일뿐더러 말하는 기법과 대화의 흐름에서도 배울 점이 많아 논술은 물론 면접에도 도움이 됐다.

    한 예로 ‘신동아’ 2006년 11월호에 실린 ‘바람직한 사법개혁을 위한 판·검사 출신 변호사, 법학교수 좌담회’를 들 수 있겠다. 평소 뉴스를 통해 사법개혁 문제를 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어떤 내용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이 글을 읽으면서 실제로 법조계의 어떤 구조에서 사법개혁에 대한 요구가 나오는지 알 수 있었으며, 이 문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토대로 나만의 개인적인 견해를 정립할 수 있었다.

    논술이나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능력이다. 서울대는 2004년에 논술고사를 부활하면서 논술 평가 항목에서 창의력이 가장 우선하는데, 여기서 창의력이란 논의를 심층적으로 전개하는 능력이라고 밝혔다. 어떤 사건이나 개념에 대한 축약된 이해나 피상적인 이해는 자신의 견해를 만드는 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런 심층적인 글을 접하며 나는 나만의 견해를 조직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해 나갈 수 있었다.

    올해 서울대 논술고사 논제는 ‘지식정보화 시대에 우리 사회 각 영역은 어떤 속도로 변화해야 하는가?’였다. 예년에는 행복·경쟁·이성과 같은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논제가 제시됐기에 이 논제를 접했을 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번 논제는 ‘쉽지만 어려운 논제’였다.

    한 시간 반 동안 개요를 짜고, 한 시간 15분 만에 글을 완성했다. 주어진 예화1을 주장의 기초로 삼아, 지식정보화 시대에 우리 사회 각 영역은 각각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속도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기업은 영리 추구라는 보편적인 목표를 갖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의 기업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치밀하게 대응하여 가장 빠르게 변화해야 하며, 가정은 한 사회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기본 단위이므로 가장 느리게 변화해야 하고, 정부는 기업의 변화와 가정의 변화 사이의 괴리와 마찰을 줄여주는 기능을 해야 하므로 중간 속도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느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잘 짜인 한 편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마땅한데, ‘조건을 고분고분 잘 따른 글’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다만 내 주장이 확고한 점은 마음에 들었다.

    자신감으로 막판 역전

    논술시험 다음날 구술·면접고사가 있었다. 나에게는 독서 취향에 관한 문제가 주어졌는데, 워낙 독서 취향이 뚜렷해서 신나게 답안을 메모하고 면접장소로 들어갔다. 꽤 긴장했지만 문제가 친숙해서 다행히 당당한 목소리, 당당한 표정으로 교수님들을 대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문제는 두 제시문의 견해를 비교하라는 것이었는데 내 대답이 부족했는지 교수님들께서 재차 추가 질문을 하셨다. 난 이것저것 말해보았지만 결국에는 교수님이 “시간이 부족하니 넘어가지”라고 말씀하셨다. 솔직히 그때 ‘난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견해를 밝히는 것이라 첫 번째 문제에서의 부족함을 만회하고자 열심히 답변했다. 교수님들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긍정의 웃음과 고갯짓을 이끌어냈다. 워낙 수필을 좋아하고 피천득 윤오영 이태준 김용준 등의 작가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거침없이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대답을 잘했는지 교수님들로부터 여러 질문이 이어졌으며, 베스트셀러와 고전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나눈 후 면접을 마쳤다.

    2월1일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난 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1차 전형에서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던 친구들이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내가 논술과 구술고사에서 꽤 높은 점수를 받아 등위가 뒤집힌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결과에 놀라고 기뻤다.

    수능에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낮은 점수를 받고도 서울대 인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굳은 자신감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또 수시에 낙방하고 수능 점수를 잘 받지 못하고도 얼른 ‘인문학도가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다잡은 것은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부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다. 나 스스로 공부하고자 한 마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더 수월하게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을 나 스스로 깨우칠 때 느낀 희열은 다른 친구들, 후배들에게 권유하고픈 소중한 경험이다.

    학원을 다니고 안 다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과외를 받고 안 받고도 중요하지 않다. 그 모든 계획을 공부하는 당사자가 직접 세우고, 그 계획을 열심히 따르려는 마음가짐이 모든 결과를 좌우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비단 공부의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그 계획을 굳게 실행에 옮기려는 자세는 삶의 매 순간을 알차게 만드는 필수적인 조건일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기를

    2007년, 앞으로 나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내 인생에 어떤 이벤트들이 펼쳐지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앞으로의 나날들이 내가 입시를 치르면서 겪은 시련보다 훨씬 힘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기를, 그래서 많이 배우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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