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호

보수·진보의 정치철학적 분석

‘진보깡통’‘보수꼴통’은 선진 한국의 걸림돌

  • 김용신│정치철학 박사 yongshin@hanmail.net │

    입력2009-04-09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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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바마의 ‘리버럴’을 ‘진보’로 번역하는 건 잘못
    • ‘개혁’은 원래 보수의 어젠다
    • 동시성적 자아(Synchronic Self)가 빚은 찬성과 반대의 난투극
    보수·진보의 정치철학적 분석

    1월5일 민노당 강기갑 대표가 국회 사무총장실에서 탁자 위로 뛰어오르고 있다.

    지난해 여름 촛불시위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국회 폭력사태로 온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용산 철거민 사태 때는 화염병과 물대포가 서로 뒤엉켰다. 그리고 봄이 왔다. 나무들이 가지 끝에 꽃망울을 터뜨렸건만 서울의 거리는 각종 단체의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사사건건 찬성과 반대의 난투극을 벌여야 하는가? 보수와 진보는 무슨 철천지원수이기에 일마다 사생결단을 내려 하는가? 보수 성향이건 진보 성향이건 각 단체의 시위현장에 등장하는 구호만 보아도 그 표현이 어찌나 격한지 소름이 끼친다. 우리는 원래부터 이렇게 싸우기만 하는 민족인가?

    물론 한국인은 한없이 싸우다가도 위기에 처하면 다시 뭉쳐 위대한 힘을 발휘해왔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보여준 단결력은 위대했다. 그리고 태안 기름유출사건 때 온 국민이 해변의 그 수많은 자갈을 일일이 손으로 닦아낸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보수와 진보의 ‘끝장 대결’을 보면서 이 문제만은 한국인의 저력만 믿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수-진보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봐야 한다고 여겼다. 사사건건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싸우는 한 ‘선진 한국’을 향한 우리의 꿈은 이뤄지기 어렵다.

    보수의 기원은 왕권수호 세력



    정치철학의 틀로 보수주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상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국의 버크(Edmond Burke)다. 그는 프랑스혁명(1789~1794) 때 왕권을 타도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군중의 무질서한 행동에 실망하고 이러한 폭력적 행동이 영국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 같다.

    그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이란 저술에서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세상에는 없앨 가치도 있지만 보존하고 지킬 가치도 있음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왕권 타도가 요구되더라도 국가를 경영할 능력이 없는 폭도에 의한 파괴적 행동은 역사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버크의 주장이 일부 세력에게 이론적 무기가 되었음은 당연하다. 이 때부터 왕권수호를 도모하는 세력에게는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는 이름표가 붙었으며, 왕권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세상을 열려는 세력에게는 혁명주의자(Revolutionary) 혹은 급진주의자(Radical)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한마디로 현실을 지키려는 주장은 보수주의로 불리고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생각에는 혁명 혹은 급진주의(Radicalism)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보수의 상대적 개념은 진보가 아닌 급진 혹은 혁명이다.

    이러한 대칭성은 왕권이 타도되고 자유주의 국가가 성립한 뒤에도 유용하게 적용됐다.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 국가가 세워진 뒤에 마르크스(Karl Marx)의 공산혁명론이 대두되자 자연스럽게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세력에게는 보수라는 이름표가 붙었고, 공산주의자에게는 혁명 혹은 급진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나 급진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주의, 주장을 가진 이념이 아닌 단순한 이름표에 그친다는 것이다. 즉 그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현실의 논리를 지키려는 세력에게는 보수라는 꼬리표가 붙고 현실을 바꾸려는 세력(특히 급작스럽게 바꾸려는 세력)에게는 혁명 혹은 급진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혹은 무의식)에는 현실을 따르려는 욕망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욕망이 대립한다. 초자아와 자아이상이라는 두 개의 원초적 욕구로 설명해보자. 초자아란 현실의 원리(Reality Principle)를 따르려는 욕망이며, 자아이상은 기쁨의 원리(Pleasure Principle)를 따르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기쁨의 원리를 따르는 것은 현실에서 도덕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천하려는 욕망을 의미하는데,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현실을 부정하는 논리와 연결성을 갖는다. 자아이상이란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기의 이상만을 추구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인 양대 욕구가 존재하는 한 인간 세상에는 언제나 현실을 지키려는 세력과 현실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이러한 양대 세력 간의 갈등을 통해 변화했다고도 할 수 있다.

    보수·진보의 정치철학적 분석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유주의자 중 ‘리버럴’로 분류된다.

    패스플레이와 러닝플레이

    역사적으로 혁명주의자의 미래 청사진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왕권시대에는 세습적 왕이 중심이 된 군주주의 나라가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유주의적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자유주의 혁명의 슬로건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힘을 얻은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이 하나둘씩 노정되면서 공산혁명주의자들이 ‘계급 없는 사회건설’을 통해 “능력껏 일하고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했는데 이 얼마나 흥분되는 말인가! 반대로 현실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에게 혁명은 공포의 대상이다. 혁명이 일어나면 자기의 모든 기득권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소외되거나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에게 혁명은 처지를 순식간에 바꿀 절호의 기회로 느껴질 수 있다.

    한 사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순이 노출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가 기득권을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변신을 해야만 한다. 적어도 혁명을 통해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는 것보다는, 아쉽지만 불만 세력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에 대항하고자 ‘개혁’이라는 용어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다. 혁명이 아니고 개혁을 통해 불만세력의 마음을 달래야만 기득권이 일시에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학에서는 “혁명의 위협 없이는 개혁도 없다” 는 말이 격언처럼 사용된다. 당연히 여기에서 개혁은 혁명의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같은 논리는 과격한 해석일 수 있다. 개인적 이익만을 강조한 사회변화 논리이기 때문이다. 사회변화를 미식축구경기에서 힌트를 얻어 설명해보자. 미식축구 전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패스플레이(Pass Play)인데 이는 쿼터백(Quarterback)이 긴 패스로 공을 연결하는 전술이다. 성공하면 한번에 먼 거리를 전진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패스한 공을 상대방이 빼앗으면 오히려 위험에 빠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한 전술을 러닝플레이(Running Play)라고 한다. 러닝백(Runningback)이 쿼터백에게서 볼을 전달받아 상대 진영으로 뛰어가는 전략. 러닝백은 상대방의 태클이 심하기 때문에 한번에 먼 거리를 뛰어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패율을 낮추는 데는 이 전략이 유효하다.

    이러한 전술을 사회변화 이론에 적용하면 보수세력의 개혁적 방법은 러닝플레이에, 그리고 급진세력의 혁명적 방법은 패스플레이에 빗댈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은 패스플레이나 러닝플레이가 모두 승리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수세력이나 혁명세력 모두 더욱 좋은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욕구가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결국에는 선악을 떠나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적 입장에서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인지의 문제만이 남는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혁명을 통해 진화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틀로 보면 어떤 혁명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또 다른 혁명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적인 비합리성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혁명은 절대성(Ultimate Expla-nation)이라는 그림자에 함몰돼 한 세력의 침몰과 다른 세력의 부상이라는 악순환만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해 포퍼(Karl Popper)는 혁명을 대신해 ‘점진적 개혁(Piecemeal Social Engineering)’을 부르짖는다. 그 핵심은 간단하다. 인간사회는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혁명의 환상성을 줄이려면 사회 구성원의 불만을 완화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퍼의 주장을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라고 부르며 포퍼가 보수개혁 이론의 근거를 제공했다고 여긴다. 덧붙여 독일의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이 마르크스나 레닌(Lennin)의 공산혁명 이론에 대항해 수정주의(Revisionism)를 주장한 것도 혁명이 아닌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해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는 무엇인가?

    김일성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정치철학적 틀로 보면 진보주의(Progressivism)는 이념을 설명하는 용어로서는 생소하다. 굳이 논하자면 역사관(觀)을 설명하는 용어에 가깝다. 즉 헤겔(Hegel)의 역사관을 말할 때 진보주의라는 용어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는 정반합의 갈등구조를 통해 자유정신(Free Spirit)을 향해 진보한다고 보았다. 헤겔의 변증법을 물질적 면에서 재해석해 공산혁명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역사관도 ‘계급 없는 사회(Classless Society)’를 향한 진보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진보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서양 정치철학에서는 정치이념과 관련해 보수의 상대적 개념으로 혁명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의 상대적 용어로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분명 특이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왜 진보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됐을까? 1956년 조봉암이 창당한 진보당은 이를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왜 조봉암이 정당 이름으로 진보라는 용어를 썼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조봉암이 초기에 사회주의자였음을 상기하면 그 답이 어렴풋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는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나 ‘노동계급의 독재’에 반대하면서 공산당을 비판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한다. 그러면서도 ‘자본계급의 전제’에도 반대하는 의견을 견지했다. 따라서 그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적 가치를 혁명이 아닌 방법으로 실현해보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왜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아마도 마르크스의 역사관이 진보사관이라는 데서 착안한 것 같다. 실제로 당시 사회주의적 가치를 갖고 있지만 김일성의 혁명노선에는 반대하는 사람을 ‘진보세력’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진보라는 용어는 혁명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세력에게 붙여진 한국적 꼬리표였던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좌파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수정주의적 시각을 견지하더라도 반공을 최우선으로 삼은 이승만 정권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른바 진보세력은 그 명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조봉암도 1959년 간첩죄로 사형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에서도 사회주의적 가치엔 친북세력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며 좌파적 의미를 갖고 있는 진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용인하기 어려웠다.

    이후 계속된 군사정권하에서 한국의 정치세력은 군사정권 옹호세력과 군사독재 반대세력으로 나뉘었다. 군사정권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삼았으니 한국 사회에서 좌파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형식적으로 보면 모두 우파일 뿐이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한동안 우파 좌파의 구별은 의미가 없었으며, 군부세력과 그 옹호파에게는 독재세력이라는 이름표가 붙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민주세력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파적 가치 속에서 국가주도적 산업화세력과 산업화보다는 군사독재의 종식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민주세력이 공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군사독재가 종식된 후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부터 은근히 진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군사독재 시절 민주세력 중 일부가 진보라는 이름표를 들고 나왔으며 김대중 정부에 와서는 진보세력이 드디어 정권을 잡았다고 했으며, 뒤를 이어 등장한 노무현 정부는 ‘진보적 정권’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군사정권에 뿌리를 둔 정당과 그 시절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일했거나 경제적으로 성장한 세력에겐 보수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지킨다’와 ‘나아간다’

    보수가 현실을 옹호하려는 세력이라고만 본다면 정권을 잡은 쪽이 보수가 돼야 한다. 이런 논리로만 보면 북한 김정일은 보수의 화신이다. 그런데 보수의 상대적 개념으로 혁명이 인정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는 이상하게도 보수의 전형적인 슬로건이던 개혁이 오히려 보수의 상대적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김대중씨나 노무현씨는 개혁이라는 슬로건을 선점해 상대 정당의 후보를 개혁을 싫어하는 세력으로 몰아세움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자칭 진보세력이 개혁을 슬로건으로 앞세우면서 보수의 상대어로 진보가 사용됐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한동안 정권을 잡지 못했음에도 수구적 의미를 포함한 보수라는 이름표를 뗄 수 없었다. 이들도 물론 개혁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전히 보수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이에 반해 진보는 그 근원이 분명 좌파적 속성에서 나왔음에도 군사독재에 저항한 인사들이 그 중심에 있다는 이유로 일반인에게는 민주주의적으로 인식됐고, 진보라는 사전적 의미 또한 부각돼 진취적인 의미로까지 이해되기도 했다. 한국어사전에서 단어가 주는 의미만을 생각하면 변화를 요구하는 21세기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보수는 ‘지킨다’는 뉘앙스 때문에 불리한 점이 많고, 진보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뉘앙스를 가짐으로써 긍정적 의미가 적지 않다. 젊은층이 진보를 선호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위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모두 혁명이 아닌 개혁적 성향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개혁의 지향점은 모두 자유주의적 선진한국의 건설에 있다. 다만 둘 사이에는 선진한국 건설을 위한 방법론에서 약간의 차별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차별성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추구 문제와 연결돼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내에서 주장되는 가치의 핵심을 논함으로써 그 차이의 본질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치는 바로 자유와 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익 등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가치들은 서로 양립하기가 어렵다.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훼손되고,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 공익이 훼손된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가치충돌 때문에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갈등이 발생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현재 자유주의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가치를 조율하는 방법으로 혁명이 아닌 개혁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21세기 자유주의에 있어서도 칸트(Kant)와 헤겔(Hegel)의 주장이 갈등하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나름대로 정착한 미국에서도 평등과 자유 혹은 개인과 공익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같은 자유주의 내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주장은 ‘개인의 권리에 기초한 자유주의 (Right-Based Liberalism)’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강조하는 사람을 ‘리버타리안(Libertarian)’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요즘 주로 미국의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평등을 강조한 자유주의는 ‘평등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ism, or Egalitarianism)’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를 지지하는 사람을 우리말로는 다 같은 자유주의자지만 ‘리버타리안’과 구별되는 ‘리버럴’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유주의자 중에서 ‘리버타리안’은 개인의 구속 없는 자유에 방점을 찍고 ‘리버럴’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기회의 균등에 방점을 찍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공동체의 공익을 강조하는 주장을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고도 하는데 이를 지지하는 사람은 ‘공동체주의자(Communitarian)’라고 한다. 이 모든 주장은 혁명이 아닌 자유주의 내에서 개혁의 초점을 어디에 뒀느냐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에 기초를 둔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기에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가 침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도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주장에 그 이론적 기초를 뒀다고 할 수 있다.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규제를 부정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경제활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등이나 공익을 강조하는 주장은 분배에 더욱 관심을 가지며 공익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일련의 제한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평등과 공익을 강조하는 주장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과거의 이념적 갈등구조로 되돌아본다면 개인과 자유를 강조하는 주장은 이념적으로 우파(Right)적 속성을 가졌으며, 평등과 공익을 강조하는 주장은 일면 좌파(Left)적 의미가 가미됐다고 볼 수도 있다.

    보수·진보의 정치철학적 분석

    3월2일 국회에 먼저 진입한 민주당 당직자들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려는 동료 당직자의 손을 잡아 끌어올리고 있다. 당직자들은 화재 진압용 소화기를 뿌리며 진입을 저지하는 경찰에 대항했다.

    보수와 진보의 교집합

    이런 점에서 과거의 이념적 잣대로만 보면 한국의 보수는 분명히 우파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진보는 좌파적 속성을 갖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는 시장경제 활성화를 통한 성장을 강조해왔으며, 진보는 분배나 복지 문제를 강조해왔다.

    그런데 이 문제도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의 보수가 분배를 무시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한국의 진보가 분배만을 강조한다고 잘라 말할 수도 없다. 보수라고 지칭되는 현 이명박 정부가 시도하는 연봉 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분명 좌파적 정책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3·1절 경축사에서 ‘희생과 화합’을 강조했고 ‘변화와 개혁’을 주장했다. 희생과 화합은 공익 우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 공동체주의자의 주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세계화를 들여다보는 시각도 흥미롭다. 한국의 보수는 자유시장경제에 동의하므로 자유무역협정(FTA)에 적극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보수의 ‘지키다’ 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지키는 것이 보수의 일반적 의미라고 한다면 한국의 보수는 개방에 적어도 적극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는 진보보다는 개방을 강조하는 편이다. 또한 진보정권이라고 불린 노무현 정부에서 미국과 FTA를 체결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주도한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당은 지금에 와서 FTA를 썩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계화에 대한 관점을 두고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것도 애매하다.

    대북정책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나름대로 존재하는 듯하다. 즉 진보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반면 보수는 일방적 대북지원을 반대하고 경제원조에 상응하는 대가를 북측에 요구하는 상호주의를 강조한다.

    2월28일 KBS 심야토론의 주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였다. 이날 토론에는 보수와 진보 성향의 학자가 각각 두 명씩 참여했다. 이른바 햇볕정책 지지자들은 지금의 남북관계가 지나치게 경색됐다고 전제하고 최고의 전략은 싸움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기에 남한이 일부러 나서서 북한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이 한반도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상호주의 지지자들은 평화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북의 도발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고 주장하면서 남북 간의 대화 단절은 현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다음날 3·1절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기존의 남북합의 사항을 존중할 것이며 ‘조건 없는 대화의 문’을 언제나 열어놓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은 햇볕정책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이 대목에서 보수와 진보는 그 차이가 명쾌하지 않다.

    덧붙여 대미(對美) 관계에서도 보수와 진보는 일련의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보수는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진보는 자주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보수세력이 모두 햇볕정책과 자주성을 극구 반대하고 한국의 진보세력이 무조건 상호주의와 한미동맹을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다. 통일을 드러내놓고 반대하거나 한미군사동맹을 내놓고 반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소수일지라도 모든 것을 미국에 의지하려는 사대주의자와 미군철수를 원하는 친북좌파가 있다면 그들이 문제인 것이다.

    합리적 진보는 또 뭔가?

    요컨대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 중에서 민주노동당만이 좌파적 정책의 일관성을 갖고 있을 뿐 다른 정당들에서는 분명한 정책적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현대 정당의 속성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국민의 이해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처지로 분명하게 나누어졌다. 그러나 복지정책의 활성화, 국민소득의 향상 및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 등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격차를 줄이고 다양한 가치를 창출했다. 국민의 이해관계가 다양하게 얽힘으로써 정당들도 표를 얻기 위해 정책을 다양하게 나열할 수밖에 없다. 현대 정당이 정책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포괄성을 띠는 이유다. 이는 선진국에서도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러한 애매성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애매한 용어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합리적 보수’와 ‘건전한(혹은 책임 있는) 진보’ 혹은 ‘중도보수’와 ‘중도진보’ 같은 용어다. 사실 이러한 용어는 언어 유희다. 보수에 ‘합리’라는 수식어는 왜 붙이며 진보에 ‘건전’ 혹은 ‘책임’ 이라는 말은 왜 붙이는가? 보수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으면 합리라는 말이 앞에 붙었고, 진보가 얼마나 책임 없고 건전하지 못하면 그런 수식어가 붙었을까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중도보수와 중도진보의 차이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양쪽 끝에서 가운데로 오면 만나는 것 아닌가? 이 이상한 단어들은 21세기엔 이념적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혼란에 하나 첨가할 게 있다면 요즘 ‘미국진보센터(American Progress Center)’를 보는 눈이다. 오바마(Barack Obama)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에게 정책적 도움을 준 미국진보센터가 갑자기 한국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한국의 일부 진보세력은 마치 미국진보센터의 정책적 도움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미국진보센터가 의미하는 진보(Progress)의 의미는 단순한 연구소의 명칭에 불과하다.

    알론조 햄비(Alonzo Hamby) 라는 학자가 ‘진보주의와 신민주주의 (Progres-sivism and the New Dem-ocracy edited by Sidney M. Milkis and Jorome M. Mileur in 1999)’라는 책에 발표한 논문‘변화와 재탄생의 세기(A Century of Change and Rebirth)’에 따르면 현재 별로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며,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같은 정치적 신념은 아니라고 전제하고 진보주의를 굳이 설명한다면 변화의 시대에 잘 적응해가자는 정책적 관점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사회에서도 진보주의(Progressivism)가 자유주의(Liberalism)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은 공히 진보적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공화당)를 진보적 대통령으로 지목한다. 물론 지금의 미국진보센터가 자유주의 중에서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보다는 평등적 요소를 더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진보센터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리버럴’이라고 부른다.

    보수·진보의 정치철학적 분석

    2월27일 국회에서 폭행을 당해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한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

    미국진보센터의 정책이 한국의 진보적 주장과 흡사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언론에서도 영어 단어를 그대로 번역해 보도하니 일반은 미국진보센터의 진보가 한국의 진보와 같은 것으로 인식해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적 진보주의자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미국의 ‘리버럴(Liberal)’을 신보수주의와 각을 이룬다는 이유로 진보로 번역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는 큰 잘못이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번역이 대표적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적 보수와 진보는 분명한 차별성을 찾기가 어려우며 스펙트럼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딱 잘라서 그 속성을 정리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보수와 진보의 이름표로 나뉘어 싸운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바이지만 정책적 차별이 애매한 집단 간의 싸움은 감정적 갈등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감성이 충만한 한국인에게 모든 갈등은 감정싸움으로 치닫기 쉬우며 결국은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변모한다.

    虛像이 키운 투쟁

    국회 폭력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도가 갈수록 더하다. 지난 1월에는 국회의 기물이 파손되고 망치와 전기톱도 등장하지 않았던가!

    토론을 보면 목소리 큰 사람이 최고다. 남의 말을 가로채면서 상대방에겐 짧게 말하라고 한다. 그리고 무조건 상대방 논리를 무시하고 논리가 빈약하면 인신공격적 비판으로 일관한다. 코너에 몰리면 “당신 당도 옛날에 그랬지 않았는가?” 라는 식이다. 그런 현장에서 예의 지키고 중도적으로 발언하면 못난이가 되기 일쑤다. 그러니 모두가 열을 올려 자기주장만 한다. 그래야 자기편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이러한 흑백 논리는 우리 국민의 무의식에 쌓인 대세주의와도 연결된다.

    우리 민족은 그간 수많은 사회혼란을 겪어왔다. 그리고 혼란 때마다 어느 곳에 기대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런데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이러한 애매성은 자아를 괴롭힌다. 당당히 나의 의견을 주장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식은 상대방에게는 분명한 견해를 요구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희석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우리 사회에서는 중립적으로 발언하면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매도된다. 어떻게든 큰소리 쳐야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얻고, 어느 한편에 자신을 소속시켜야 한다. 군소정당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한편으로 자기 주장만이 진리라는 환상을 가지면 그 진리를 실현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진한다. 더 웃기는 사실은 그 반대를 위한 반대의 논리가 자기 의견의 변화에 따라 오락가락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어느 지역 개발에 참여하면 개발만이 지역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그런데 자기 집 주변에 어떤 공장을 짓는다고 하면 환경훼손을 내세워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경기도에 살 때는 수도권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지방으로 이사 가면 지방을 살려야 한다고 역설하는 식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아의 포괄성 때문이다. 한국인의 자아 속에는 여러 가치가 공존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화합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공존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유리한 대로 그 가치들을 내세운다. 이러한 자아를 나는 ‘동시성적 자아(Synchronic Self)’라고 설명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적 진보는 유럽의 수정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좌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는 그간 장시간에 걸친 군부독재 시대를 거침으로써 독재적 이미지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감성의 투쟁 속에서 한국의 진보는 ‘친북좌파’로 매도되기 쉬우며, 한국의 보수는 ‘수구반동’이라는 딱지가 붙기 쉽다. 그러하니 보수와 진보 모두 일종의 콤플렉스에 놓여 있는 꼴이다.

    친북좌파 vs 수구반동

    이러한 콤플렉스는 한국적 보수와 진보의 차별성을 더욱 희미하게 한다. 예를 들어 분배나 햇볕정책을 강조하면 친북좌파로 매도되기 쉽다. 그러니 한국의 진보는 시장경제의 속성인 성장과 한미공조를 빠뜨리지 않고 강조한다. 반면 보수는 성장만을 강조하면 부자를 위한 대변자로 낙인찍힐 수 있으므로 분배도 꼭 함께 이야기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그 구별이 또 한번 애매해진다. 이처럼 특별한 구별도 없는데 원수처럼 싸움만 하니 ‘보수꼴통’이니 ‘진보깡통’이니 하는 비하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차라리 보수와 진보를 우파와 좌파로 나눠 부른다면 그 의미가 지금보다 명백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분단이라는 또 하나의 콤플렉스가 있다. 즉 우리 같은 분단국가에서는 이념적으로 좌파와 우파의 구별이 어렵다는 것이다. 보수 쪽에는 이러한 구별이 유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그 건국이념이 자유주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쪽에는 이 같은 설정이 매우 불리하다. 내가 보기에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기보다는 독재체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북한이 사회주의적 이념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주장하는 한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적 좌파의 이념은 존재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진보라는 명칭이 보수의 상대어가 아니면서도 상대어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보수꼴통 vs 진보깡통

    그렇다면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병리 현상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나는 요즘 조금은 색다른 논리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보수와 진보라는 양극적 틀을 버리고 모든 주의, 주장을 그대로 부르자는 것이다. 경제성장을 강조하면 ‘성장주의자’로, 분배를 강조하면 ‘분배주의자’로, 햇볕정책을 지지하면 ‘햇볕정책지지자’로, 상호주의를 강조하면 ‘상호주의자’로 그리고 세계화를 찬성하면 ‘세계화주의자’로, 반대하면 ‘반세계화주의자’로 부르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부분에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붙이면 된다.

    모든 가치가 딱 두 쪽으로 갈라지면 그 둘 간의 갈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러 주장으로 잘게 쪼개면 그들 간 갈등의 강도는 약해지게 마련이다. 성장주의자이면서 햇볕정책 지지자도 있을 테고 상호주의자이면서 분배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갈등적 존재이며 그것은 대체로 양대 가치의 갈등으로 그 범위가 함축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자유와 평등’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가치들이 다양하게 나누어질 때 우리 마음에서는 그 가치들 간의 충돌로 인한 갈등의 정도가 약해진다. 다행스럽게도 21세기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다. 따라서 우리도 그 가치를 잘게 쪼개면 지금과 같은 보수와 진보의 피나는 투쟁이 사라지지 않겠는가?

    보수·진보의 정치철학적 분석
    김용신

    미국 조지워싱턴대 석사(비교정치)

    미국 메릴랜드대 박사(정치철학)

    저서 : ‘성리학자 기대승이 프로이트를 만나다’ ‘예술의 정신분석학적 해석’ ‘The Ego Ideal, Ideology, and Hallucination’


    이제는 언론도 모든 사태를 보수와 진보로 나눠 칼로 무 썰 듯 설명하지 말고 각자의 의견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이름표를 붙여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각계 지도자도 이제는 더 이상 시대착오적인, 논리에 맞지도 않는, 그리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우리 국민에게도 한마디 올리고 싶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퇴행적 요소를 스스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선진 한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보수와 진보의 터무니없는 퇴행적 갈등은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내부의 적이다.

    (본 원고의 일부 내용은 필자의 저서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의 핵심을 보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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