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강석주의 눈으로 본 평양의 ‘천안함 파워게임’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당신이라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소?”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07-02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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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안함 사건에 얽힌 북한의 대외·대남전략 목표는 무엇인가. 후계체제 구축 등 평양에서 진행되는 권력체계의 변동은 이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최근의 이른바 ‘장성택 관리체제’의 급부상은 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관측과 추정으로 점철된 퍼즐 맞추기나 다름없는 이 질문에 답하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는 북한의 대외정책을 사실상 총괄하고 있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의 시선이다.
    • 권력의 부침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되 스스로 권력을 다툴 수 없는 전문관료의 눈으로 본 2010년 평양의 현재와 미래.
    국가정보원과 통일부 인물정보에 따르면 1939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한 강석주는 평양외국어대학 영어과와 평양국제관계대학 불어과를 졸업한 뒤 노동당 국제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국제부 과장이 된 그는 4년 뒤 정무원 외교부 부부장에 기용됐고, 다시 2년 뒤에는 47세의 젊은 나이에 외교부 제1부부장에 올랐다. 이후 흔들림 없이 한자리를 지키고 있으며(1998년 외교부가 외무성으로 변경된 후 공식직함은 외무성 제1부상) 8기 이후 현재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겸직하고 있다.

    외교관으로서 그의 경력은 승승장구 그 자체다. 다양한 인사가 외무상을 거쳐 가는 동안에도 실질적인 외무성의 수장은 강석주였다. 특히 1990년대 초반 1차 북핵 위기 당시 대미협상의 최전선에서 제네바합의와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이끌어내는 등 화려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마디로 북한에서 전문관료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과 경력을 일궈온 셈이다.

    주요국 외교관들은 “외무성의 누구와 얘기해도 최종적으로는 강 부상과 대화하는 것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외무성 안에 지역별로 업무를 분장한 부상들이 있지만주요내용은 모두 그에게 보고되고 최종결정 역시 그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한 전직 미 국무부 관료는 “선이 굵은 듯 보이지만 뚜렷한 자기 생각을 품고 있는 간단치 않은 사람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외정책 수행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캐릭터는 강한 추진력과 동물적인 판단능력으로 요약된다. 그가 외무성을 맡은 이래 북한 특유의 극단적인 ‘벼랑 끝 전술’이 한결같이 이어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 휘몰아치는 절대권력의 틈바구니에서도 자신의 공간을 유지하는 쉽지 않은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해온 셈이다.

    전문가들의 분석과 당국자들의 배경설명을 기반으로, 최근 수 개월간 평양에서 진행된 상황과 천안함 사건 등 극단적인 행동의 이유를 강석주 부상의 시각에서 팩션(faction) 형식으로 구성했다. 팩션이란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은 개연성 높은 가상내용으로 다루는 기법을 말한다. 등장인물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모두 사실과 정보에 근거하고 특히 해설부분에서 제시된 자료와 분석은 모두 실제의 것이지만, 시나리오 부분에서 이들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다룬 사건과 대화는 가상이다.



    장면1 모든 일은 밤에 벌어진다

    “날세,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서두르지 않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흔들렸다. 거실에 틀어놓은 남한 TV 화면에 뜬 ‘해군 초계함 침몰, 북한 소행 추정’이라는 자막이 돌주먹처럼 그의 머리를 쾅쾅 울리고 있었다. 목구멍에 짜릿하게 남아 있던 위스키의 독한 기운은 어느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떠오르는 질문은 간단했다. 우리라면 과연 누가 저지른 일일까. 위원장은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 시점에 도대체 왜? 위원장의 뜻이라면 혹은 아니라면, 그에 따라 그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찰나의 판단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어렵사리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단번에 날릴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임을 그는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수화기 건너편, 국방위원장 서기실(비서실)에 파견된 외무성 출신 담당서기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 생각들이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모르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저지른 거라면….서기실에서도 공식적으로 보고받은 건 없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담당서기의 말투가 미묘하게 떨린다. 뭔가 다른 뉘앙스가 있다.

    “…얼마 전부터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분’이 정찰총국과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다는…. 최근에 김영철이 오극렬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는 알고 계시잖습니까.”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그분’과의 옛 인연을 등에 업고 자기 사람을 심으려 한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그렇지만 김영철이 오극렬도 모르게 이런 일을 꾸몄다면 그건 하극상이다. 감히 말이나 되느냐 말이다. 더욱이 위원장도 모르게? ‘그분’이 뒤에 있다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생각해보면 명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르익던 6자회담과 남북 정상회담 논의가 남측의 뻗대는 자세 때문에 단번에 날아갔다. ‘공화국의 체면이 상했다’고 흥분할 만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일을 벌이는 건 위원장 스타일이 아니다. 화폐개혁이며 외자유치며 한창 벌여놓은 일이 많은 이 시점에는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지만, 위원장의 건강과 판단력이 이전 같지 않음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느껴지는 위원장의 조바심은 분명 결이 다르지 않았던가.

    강석주의 눈으로 본 평양의 ‘천안함 파워게임’

    김정일 국방위원장(가운데)이 조선인민군 제586부대(정찰총국) 지휘부를 시찰하고 있다. 김영철 총국장(앞줄 왼쪽)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앞줄 오른쪽)이 수행하고 있다. 인민군 창건일인 4월25일 공개된 사진이다.

    “‘그분’이 벌인 일이라면, 위원장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랬다. 알 방법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부분이었다. 지금 위원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이 넓은 평양 바닥에 거의 없다는 사실. 어둠 속에 손을 뻗어 길을 찾아 헤매는 기분. 쉽게 해결되지 않을 혼란이었다.

    관자놀이를 쑤셔대던 편두통이 온 머리로 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가만히 손을 들어 이마를 연신 눌러댔다.

    전문관료로서는 정점에 올랐지만 강 부상을 권력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김정일 위원장이나 다른 권력핵심 인사들과의 혈연관계도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힘의 향방을 다툴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 북한 정치구조의 특성상 오히려 그러한 권력투쟁의 부침에 따라 딛고 선 자리가 흔들릴 수 있는 위치다.

    그럼에도 이렇듯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김 위원장의 대외전략 판단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고 이를 정책화해왔기 때문이었다. 주변국 모두가 북한을 압박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게 그의 장기였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 전문가들조차 해결하지 못한 의문은 ‘이 시점에서 북한이 얻을 수 있는 외교적 이득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유화책이든 강경책이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돼온 그간 북한의 대외전략 구사 패턴으로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는 것. 천안함 사건이 평양 내부에서 사전에 치밀하게 조율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전직 정보당국 고위관계자는 “강석주 라인 특유의 치밀함을 감안하면 이번과 같은 군사행동 계획을 사전에 알았다면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상당수 전문가와 당국자들이 천안함 사건을 후계체제 구축이라는 최근의 ‘특수상황’과 연결 지어 해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6월5일 ‘동아일보’는 “정부는 천안함 어뢰 공격이 김정은을 추종하는 군부 내 신진 엘리트와 원로 간부들 간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잠정 판단을 내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 2000년대 초 김일성종합군사대학에서 김정은을 가르친 적이 있다는 김영철 정찰총국장 등이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대표되는 군부 원로그룹과 갈등을 빚다가 충성심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기획했다는 시각이다.

    상당수 탈북관료와 정보당국자들이 “김영철은 오극렬에게 맞서려야 맞설 수가 없는 수준의 인물”이라며 이러한 구도의 개연성을 낮게 평가하지만, 후계체제 구축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감안하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권력이동 과정에서 후계자나 그 주변인물들이 선대의 핵심 권력자들을 ‘쳐내는’ 사례는 정치사에서 무수히 발견되기 때문.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북한의 의도와 내부정치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장면 2 ‘위신에 관한 문제’

    “나한테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르면 어떡하자는 말입니까!”

    화가 나야 했다. 최소한 화가 났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들이다. 지금 자신이 내지르는 분노가 앞으로의 상황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제스처라는 것을 모를 이들이 아니다. 교교히 버티고 있는 저 침묵 속의 여유로움이 말해주는 바였다. 비록 상무조라는 껍데기를 쓰긴 하지만, 그의 역할은 그저 군복 입은 자들의 앞뒤 가리지 않는 행보를 뒷수습하는 것에 불과한 지가 벌써 수년째였다.

    “그럼 이제 와서 뭘 어쩌라는 말이오? 정중히 사과라도 할까요?”

    김영철의 이마 위에 새겨진 주름살이 꿈틀거렸다. 순간 그는 진짜 분노가 아랫배로부터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웃음을 얼마나 더 참아낼 수 있을까.

    “강 부상도 잘 아시다시피, 강하게 맞받아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소. 공격을 가해오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각오를 해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이란 말입니다. 이건 위원장의 위신에 관한 문젭니다.”

    ‘위원장의 위신에 관한 문제.’ 모든 논의를 완벽하게 봉쇄하는 마법 같은 단어였다. 공화국의 전략 어디에도 그보다 우월한 가치란 있을 수 없다. 토를 다는 것이 곧 반역이 되는 이 말을 꺼낸 것은 분명 자신감의 발로였다. 후계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위원장 본인의 승낙을 받고 저지른 일임을 은근히 내비치는 자신감이었다.

    “상황이 안 좋을 때 판을 뒤엎는 카드를 뽑아내는 게 강 부상의 장기 아니오? 머리를 쓰시오, 머리를. 우리 같은 군인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소?”

    이런 판국에 도대체 무슨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김영철은 지금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는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화를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지금 그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특히 위원장의 뜻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과연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승낙했을까. 내가, 외무성이, 공화국이 무엇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상상할 수도 없이 불경스러운 한 문장이 다시금 그의 머리를 스쳤다.

    ‘과연 지금 위원장은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중요한 외교현안이나 여러 부서가 관련된 사안이 발생할 때 북한은 각 기관의 핵심 구성원이 참여하는 ‘상무조’를 조직해 이에 대응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강 부상의 주도하에 인민무력부, 원자력총국 등 20여 명이 참여했던 ‘핵 상무조’다. 일종의 태스크포스인 셈이다.

    천안함 공격의 기획에 외교당국이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이후의 대응에는 외무성이 참여하는 상무조가 조직됐을 가능성이 높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 등에 어떻게 대처할지 논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 이 같은 기관 간 논의과정에서는 각자의 이해관계와 성향에 따라 논쟁도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차 북핵 위기 무렵 북한 지도부의 움직임을 다룬 북한의 역사소설 ‘력사의 대하’는 한 군부 인사가 소설 속에서 강석주 부상 역할을 하는 인물에게 “우린 외교관들의 처사에 불만이 없지 않다. 그렇게 옴질옴질하니까 놈들(미국)이 팀스피리트를 재개하는 것”이라며 언성을 높이는 대목이 나온다. ‘외교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책자에서조차 이 같은 논쟁이 등장하는 것은 기관 사이의 견해 차이가 공공연한 수준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그러나 강 부상이 장기간에 걸쳐 외교문제를 책임질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시기 이어진 ‘선군정치’ 와중에 한껏 높아진 군부의 정책 영향력이나 강경노선에 일정부분 조응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어떠한 경우에도 김 위원장의 위신에 손상이 가거나 자존심을 다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수세 국면에서 오히려 더 강경한 태도를 내세우는‘벼랑 끝 전술’의 뿌리는 기실 ‘지도자의 위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정책결정 논리에 근거하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의 평양 방문 당시 나온 이른바 ‘HEU(고농축우라늄) 의혹 인정’ 파문이다. 북한이 HEU 개발계획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굳힌 미국 측은 회담장에서 이를 추궁하지만 북한 측 대표였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강력히 부인한다. 그러나 밤새도록 이어진 상무조의 검토를 거친 뒤 이튿날 강석주 부상은 “그보다 더한 것도 갖게 돼 있다”며 허를 찔러 미국 측 대표단을 당혹케 한다. 이렇게 시작된 2차 북핵 위기를 통해 북한이 얻어낸 성과는 상당했고,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북한은 핵 보유를 완성해 실험까지 단행하는 데 성공했다. 벼랑 끝 전술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천안함과 관련해 최근 북한이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다. 북한 당국 전체의 치밀한 사전조율에 따라 벌어진 게 아니라 해도 국제여론의 비판적인 분위기상 대응과정에서는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간의 대응패턴에 부합하기 때문.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강 부상이나 외교당국 정책기획자들에게 강경 일변도 외의 ‘다른 길’에 대한 갈증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장면 3 막다른 길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당신이 대사라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소?”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천안함과 관련해 분명한 증거가 나오면 식량지원을 포함해 모든 논의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한 유럽국가 남북한 겸임대사에게 던진 일갈이었다. 가뜩이나 붉은 대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말 그대로 새빨개졌다.

    따지고 보면, 그건 그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

    이럴 때마다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2000년 가을의 기억이었다. 임기 말을 향해 가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문제를 협의하던 무렵. 대선을 앞두고 성과에 목말라하던 백악관으로부터 더 큰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그는 막판까지 베팅 조건을 키웠지만, 끝내 북미 정상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혹시 그때 반 발짝만 물러났다면, 그때를 계기로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자본을 유치해 경제특구를 만들었다면, 인민들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벗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관료다. 관료는 영혼이 없다. 권력이 지시하면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관료의 일이다.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와 인민의 평가를 생각하는 일은 내 몫이 아닌 것이다.

    외무성 집무실의 어두운 창가에 서서 김일성 광장을 내려다보는 동안, 어느새 담배꽁초가 재떨이에 수북이 쌓였다. 담배 좀 끊으라는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 무렵,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의 노키아 휴대전화가 웅하며 진동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리제강이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벤츠가 뭉개져 꺼내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큰 사고랍니다.”

    속삭이듯 나직한 당직과장의 목소리.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단순한 사고일 리 없었다. 리용철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던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권력 핵심의 주요 인사들, 한때 ‘고영희의 사람들’로 불리며 후계를 만드는 일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던 이들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로서는 손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권력의 진동이 평양을 휩쓸고 있었다. 힘이 누구에게로 가느냐에 따라 자신과 같은 일개 관료는 단번에 피투성이가 되어 창광거리에 뒹굴거나 머나먼 유배지에서 남은 생을 보낼 수도 있다.

    칼날 위를 걸어오는 동안 한 번도 망명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공화국이 아니라 서방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상상해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길일 수 없다. 황장엽 전 비서를 암살하기 위해 정찰총국이 보냈다는 이들이 서울에서 붙잡혔다는 소식, 그는 그 안에 담긴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수신자는 황 비서가 아니었다. 평양에 남은 모든 이였다. ‘넘어가고 싶으냐? 평생을 쫓기며 살게 해주마’라는 경고였다.

    후계 문제와 관련해 최근 제기된 주목할 만한 견해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김정은 후계 이상징후설’이다. 북한 지도부가 후계문제를 언급하는 이들을 엄벌하겠다는 지침을 내리는 등 사실상 관련 논의가 중단된 상태라는 것. 6월7일 ‘동아일보’는 김정은 주변의 젊은 엘리트 그룹과 김 위원장의 측근이 주축인 원로 엘리트 그룹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이에 따른 부작용 때문에 김 위원장이 교통정리를 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정부 당국자의 발언을 전했다.

    화폐개혁 문제와 관련해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나 6월2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온 리제강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4월2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된 리용철 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모두 이러한 권력투쟁의 와중에 희생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한 탈북관료는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를 섣불리 우상화했던 정하철 당 선전선동담당 비서가 2000년대 초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논의를 금지시킴에 따라 숙청당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정보당국에서 흘러나오는 김정은 후계론은 여전히 견고하다. 그간의 평가를 뒤집을 만한 정보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 후계체제나 김정은에 관한 이야기가 평양의 중간 간부진에까지 공공연히 전파됐다는 것 역시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분명한 것은 북한 내부에서 떠돌았던 후계 관련 소문 자체가 관료계층 사이에 심리적 동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 엘리트 사이의 갈등설이나 핵심인사들의 사망소식이 동요를 가중시킬 개연성도 충분하다. 특히 해외 체류를 통해 외부사회와 접촉해본 이들이 친분이 두터운 타국 인사들에게 불안감이나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후계논의 자체가 권력유지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이를 제거하는 일은 정권 차원에서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될 수 있다. 김정은 후계에 앞장섰던 일부 인사가 그 같은 새로운 흐름에 저항하다 권력투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것 아니냐는 추론이 나오는 배경이다.

    강석주의 눈으로 본 평양의 ‘천안함 파워게임’

    6월7일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 김정일 위원장이 앞줄 가운데 앉았고, 뒷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새로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다.

    장면 4 누가 힘을 가졌는가

    “상무조 페이퍼를 보았습니다만, 본래의 강 부상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른 것 같더군요.”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던진 한마디에서 은근함이 묻어났다. 작은 신호에 담긴 큰 파도가 묵직하게 그의 가슴을 때렸다.

    30대 혈기 방장하던 나이, 당 국제부에서 승진을 경쟁하던 시절부터 김양건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외무성으로 넘어와 세상을 뒤흔드는 동안 김양건은 결정권도 영향력도 없는 국제부를 지켰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모두가 공인하는 장성택 행정부장의 사람. 그의 말은 더 이상 그의 말이 아닌 것이다.

    “뭐랄까요, 좀 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할까요. 아, 물론 공식적인 것은 아니고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라…. 말은 경쾌했지만, 결국은 다른 페이퍼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군부가 쥐고 흔드는 상무조를 벗어나 직접, 은밀히 작성해 보내라는 뜻이었다. ‘우리 편’임을 입증하라는 노골적인 요구였다.

    한가롭게 굴 여유가 없었다. 권력이 진동할 때는 흐름을 먼저 읽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누가 힘을 가졌는가. 누가 위원장의 귀를 차지했는가. 강경노선으로 일관해온 선군의 시대를 이제는 끝내겠다는 뜻인가. 이 모든 상황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위원장 본인인가 아니면 그를 참칭하는 누군가인가. 김양건은 과연 장 부장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역시 이 피 튀기는 싸움의 일원으로서 나를 소모품으로 삼으려는 건가.

    일생의 도박이었다. 군부도 장성택도 ‘위원장의 뜻’을 암시하고 있었다. 군부가 주도한 상무조의 결론을 뒤집는 비공식 보고서를 썼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그건 그대로 죽는 길이다. 그러나 이게 정말 위원장의 뜻이라면, 이를 무시한 뒤에도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집무실 문을 걸어 잠근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서툰 솜씨로 한 자 한 자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자신과 장성택, 위원장 외에는 누구도 봐서는 안 되는 보고서였다. 비서가 아니라 아내라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추후 상황 변화 시 카드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금번 사건의 책임자로 비칠 수 있는 군부 주요인물 1~2인에 대해 공개면직 검토 요망.’

    그가 쳐내려간 마지막 문장이었다.

    평양 권력핵심 인사들의 신상변화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할 또 하나의 케이스가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의 경우다. 5월14일 ‘조선중앙통신’은 그가 “국방위원회 결정에 따라 국방위 위원과 인민무력부 1부부장의 직무에서 해임됐다”고 보도했다. 해당기사는 해임 이유를 올해 80세인 그의 연령 문제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그보다 나이가 많은 군 수뇌부 인사들이 여전히 직책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더욱이 이러한 해임을 공식매체를 통해 밝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11년간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군부 실세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처분이다.

    일부 전문가는 해군사령관 출신으로 해상무기체계에 조예가 깊은 김 전 부부장이 김정은에게 천안함 공격계획을 자문해준 장본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직책상 직접 실행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의 전문성을 잘 알고 있는 김정은의 요청에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개연성은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의 갑작스러운 해임은 천안함 문제에서 일종의 퇴로를 만들어 두기 위한 정지작업일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시도와 관련해 김일성 주석은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職)시켰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비공식 사과가 7·4남북공동성명의 전제조건 기능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 김일철의 해임 역시 추후 물밑에서 남북관계 정상화를 논의할 때에 대비해 미리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공개적인 시그널’일 수 있다는 관측의 배경이다.

    장면 5 흔들리는 눈동자

    벼락과도 같은 박수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주석단을 향하는 위원장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모두가 자신의 건강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음을 의식하는 걸음걸이였다. 그는 항상 이 과도한 세리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곳곳이 치장된 만수대 의사당의 인테리어도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3주 전 최고인민회의가 다시 소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후계를 향해 꽂혔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분’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치국 위원 혹은 최고사령관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론은 전혀 달랐다. 주석단에 오른 장성택, 그리고 그의 사람들의 화려한 부상이었다.

    전면에 자리 잡은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새삼 느른한 만족감을 느꼈다. 아직 내 커리어는 끝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부터 진짜 시작일 수도 있다. 한가운데 앉은 위원장의 존재는 그간 벌어졌던 모든 일이 추인 받았음을 의미했다. 어지럽게 떠돌던 후계의 그림자는 당분간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은 장성택이 관리해갈 새로운 질서의 명실상부한 일원이다.

    벨벳 천이 폭신한 의사당 좌석 깊숙이 한껏 기대앉은 그의 머릿속으로 앞으로 워싱턴 혹은 서울과 어떤 게임을 펼쳐나가야 할지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위원장과 함께 밤새 머리를 맞대 전략을 논의하던 찬란한 기억이 온몸을 휘감았다. 위원장도 그도 젊었던,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듯싶었던 시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문득, 주석단 뒷줄에 앉아있는 장 부장, 아니 이제는 장 부위원장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그 눈빛에 얽힌 의미심장한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절정의 순간, 그러나 생각이 많은 자의 눈빛.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이겼음을 선포하는 자리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오늘은 승리했으되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는 칼끝 같은 불안감으로 가득한 저 눈빛.

    다시 벼락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문득 정신을 차린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두 손바닥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마치 이 박수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화국의 미래가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지하다시피 6월7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2기 3차 회의 결정사항의 핵심은 단연 장성택 당 행정부장의 급부상이다. 국방위 위원에 임명된 지 1년 만에 부위원장으로 승진한 그는 이제 명실 공히 권력을 관리하는 핵심역할을 굳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최영림 내각총리나 박명철 체육상 등 중용된 인물 상당수가 장성택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라는 점도 ‘장성택 관리체제’가 시작됐다는 분석의 근거였다. 이는 장성택과 군부 지도자들이 권력을 균점하는 것에 가까웠던 2009년 2월의 인사와는 사뭇 뉘앙스가 다르다. 특히 리제강 리용철 등 경쟁관계로 비쳤던 인물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직후에 이뤄진 인사라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번 최고인민회의를 앞두고 정보당국과 전문가들 사이에 ‘후계체제를 공식화하는 조치가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이다. 4월9일 2차 회의를 개최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여는 것은 매우 중대한 안건이 있다는 시그널로 읽혔기 때문. 김정은의 당 정치국 중앙위원회 진출이나 군 관련 주요직위 부여 등이 회자됐지만,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오히려 ‘김 위원장이 신뢰할 만한 인사들’의 전면 등장은 빠른 후계 구축에 이상이 생겨 그 후폭풍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긴 것 같다는 관측에 무게를 싣는다. 세대교체와는 거리가 먼 이번 인사가 최소한 후계 구축을 일정 정도 지연시키리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간 대외·대남정책에서 강경노선을 견지해온 군부의 부분적인 역할 축소는 앞으로 북한의 외교 전략이 상대적으로 유연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최소한 후계구축으로 인한 혼돈이 추가적인 군사도발로 연결될 개연성만큼은 줄었다고 할 수 있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6월8일 발표한 글을 통해 “그간 군부가 강경노선을, 장성택과 가까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유화노선을 담당해왔음을 감안하면, 장성택의 비중이 커지는 만큼 유화적 측면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향후 6자회담이나 남북관계와 관련해 수면 아래에서 다양한 채널이 가동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그러나 ‘위임 받은 힘’은 아주 미묘한 충격으로도 깨질 수 있다는 게 권력학의 기본공식이다. 당장 장성택 부위원장만 해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2004년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축출,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경험을 갖고 있다. 군부의 최고실력자로 꼽히는 오극렬과 김영춘도 비록 예우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건재한 상태다. 한마디로 김정일 위원장의 판단 변화에 따라 이번에 설정된 구도가 언제 흔들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장성택 관리체제가 절대권력의 유지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하는 순간, 혹은 더 이상 장성택을 신뢰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려지는 순간, 북한의 대외·대남정책 역시 다시 크게 선회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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