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LP 음악다방, 디스코 기차 여행 즐기며 ‘백 투 더 청춘’

7080 추억산업 전성시대

  • 박은경│신동아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1-02-22 09: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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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40~50대는 우리 사회와 기업의 중추였다.
    • 하지만 1970~80년대에 청춘을 보내고, 이제는 중년이 된 7080세대들은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은퇴를 걱정해야 한다.
    •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아직 남은 긴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막막할 때,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이 추억산업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LP 음악다방, 디스코 기차 여행 즐기며 ‘백 투 더 청춘’
    개인 사업을 하는 이선표(48)씨는 서울 중구 광희동 음악카페 ‘LP時代 음악의 숲(이하 음악의 숲)’ 단골이다. 7년 전 동대문운동장 부근을 지나다 우연히 눈에 띈 간판에 끌려 들어간 게 인연이 됐다. “오랜만에 보는 ‘LP’라는 단어가 반가워 혼자 들어갔다가 5시간을 앉아 있었다”는 그는 “같은 음악이라도 MP3로 듣는 것과 LP로 듣는 건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모바일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 게 편리하긴 하지만 그 속엔 LP가 주는 행복감이 없어요. LP로 1960~70년대 팝송을 듣고 있자니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죠. 2~3분에 불과한 음악 한 곡을 들으면서 내 지난 시절 10년, 20년이 농축돼 흘러가는 걸 느꼈어요.”

    서울 중구 광희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방미숙(52)씨도 이 카페를 즐겨찾는다. 그는 “여기 오면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때는 소풍 갈 때 ‘야전(야외전축)’이라고, 휴대용 턴테이블을 갖고 다녔어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로 디스코 열풍이 불 때여서 야전 틀어놓고 엄청나게 춤을 췄죠. 요새는 그때 음악을 들을 장소도, 그때처럼 춤 출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은데 이런 공간이 생겨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맥주 한잔 마시면서 올드 팝을 듣고, 내키면 춤도 출 수 있으니 마음이 훈훈해지죠.”

    빽빽이 꽂힌 LP, 사연 읽어주는 DJ



    7080세대의 복고 문화가 최근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부터 미사리에 통기타 가수들의 라이브 카페촌이 형성되면서 중년층이 꾸준히 방문했다. 이들을 겨냥해 2004년 첫선을 보인 KBS TV ‘7080콘서트’는 매회 수천 명의 중년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무대가 더욱 확장되는 추세다. 통기타 가수의 라이브 무대와 함께 1960~80년대 인기를 끌었던 DJ가 있는 음악다방은 몇 년 사이 강남, 신촌, 명동, 일산 등 서울과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 문을 열고 있다. 이곳에서는 수십 년 전 음악다방 분위기를 고스란히 재현한 전시회나 이벤트도 열린다.

    ‘음악의 숲’ 실내에 들어서자 벽면 가득 빽빽이 꽂힌 LP와 턴테이블이 놓인 뮤직박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시절 음악다방 같은 풍경이다. 1960~80년대 음악다방은 마땅히 갈 곳도 누릴 문화도 없던 청춘들의 푸근한 휴식처이자 단골 데이트 장소였다. 당시 DJ는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틀어주곤 했다. 계절과 날씨 분위기에 따라 사연을 읽는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2011년 음악다방에 앉은 그 시절 청춘들은 지금도 DJ를 향해 갖가지 사연을 쏟아놓는다.

    “통금이 있을 때 통금위반으로 경찰서에 자주 붙잡혀 갔습니다. 그때마다 가곡 ‘보리밭’을 불러 종로경찰서에서 제 별명이 보리밭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추억을 떠올리며 보리밭 신청합니다.”

    “79년에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하던 음악다방.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 그때 느낌을 느낍니다. 도나 썸머의 I feel love 들려주세요.”

    “리처드 기어가 주연한 영화 ‘사관과 신사’에 반해 제가 사관학교를 나왔거든요. 주제곡 신청합니다.”

    마지막 사연의 주인공은 차석태(45)씨다. 이선표씨를 따라 4년 전 처음 ‘음악의 숲’에 발을 들인 후 한 달에 적어도 두세 번은 찾는다는 차씨는 “개인 사업을 하다보니 불쾌하고 기분 나쁜 상황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옛날 음악을 들으며 맥주 한 잔 마시면 마음이 다 풀린다”고 했다. 이날도 울적한 기분에 들렀다는 그는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 OST 중에서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을 신청했다.

    추억의 먹을거리, 놀거리

    DJ를 겸하는 ‘음악의 숲’ 사장 김재원(58)씨는 중1 때부터 취미로 LP를 사 모으기 시작한 음악애호가다. 가게 벽면을 가득 채운 8000여 장의 LP 한 장 한 장에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의류 도매상. “아내와 함께 동대문시장에서 옷을 디자인해 도매로 팔았다”는 김씨는 10년 전 비어 있던 옷 창고에 그동안 모은 LP를 모두 옮기고 소파를 들여 자그마한 아지트를 만들었다. 일이 끝나는 새벽이면 김씨 부부와 시장 동료들이 그곳에 모여 함께 흘러간 노래를 들으며 추억을 회상했다. 아지트가 음악다방으로 변신한 건 ‘우리만 즐기기 아깝다’는 주위의 성화 때문. 손님이 늘면서 김씨 부부는 2년 전부터 옷 사업을 접고 다방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LP 음악다방, 디스코 기차 여행 즐기며 ‘백 투 더 청춘’

    음악 DJ가 추억의 LP판으로 음악을 들려주는 서울 중구 광희동 ‘LP時代 음악의 숲’은 늘 7080세대 손님들로 북적인다.

    “다 잊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노래가 하나씩은 있잖아요. 그런 곡을 틀어주면 눈물 흘리는 손님이 있어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흥에 겨워 테이블 사이에서 춤을 추는 분도 많고요. 다 비슷한 또래니까 다방 안에 있을 때는 나이를 잊는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추억에 젖어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즐겁고 보람을 느껴요.”

    충무로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는 김경일(59)씨도 “연배가 비슷한 거래처 사람들을 데려오면 열이면 열 ‘아직도 이런 곳이 있느냐’며 반가워하고 감격스러워한다”고 했다. 대학로나 홍대 거리가 형성되기 전 ‘젊음의 거리’였던 명동에는 통기타 라이브 카페가 많다. 옛 중앙극장 주변의 음악다방 ‘무아’‘필(Feel)’ 등에서는 매일 밤 공연이 펼쳐진다. 손님의 대부분은 먼 곳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중년층 직장인이다.

    이들의 열기는 ‘전축’과 LP 음반에 대한 수요로 이어지고 있다. 턴테이블을 수입·판매하는 아이파크백화점 오디오 전문매장 이택근 대리는 “구매 고객은 대부분 40~50대”라며 “예전부터 LP로 음악을 듣던 분들이 턴테이블을 교체하기 위해 오거나 LP 음반만 가지고 있다가 턴테이블을 새로 구매하러 오신다. 재작년부터 턴테이블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 시절 음악뿐 아니라 먹을거리와 놀거리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이윤정(43)씨는 지난해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들렀다가 어린 시절 즐겨 먹던 군것질거리가 판매대 하나를 차지한 채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알록달록 납작하고 편평한 쫀드기를 팔더라고요. 어릴 때 연탄불에 살짝 구우면 얼마나 고소하고 바삭했는지, 잊고 있던 쫀드기를 발견하자마자 어릴 적 추억이 한꺼번에 살아나 신이 났어요. 남편한테 줬더니 ‘어디서 이런 걸 구했냐’며 신기해하더군요.”

    대학시절 MT와 무전여행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열차여행도 중년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열차 여행을 기획·판매하는 코레일관광개발은 11시간 남짓 걸리는 ‘환상선 눈꽃열차’를 운행하면서 승객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여러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다. 그중 중년층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프로그램은 DJ 음악방송과 디스코타임이다. 직원 이지연씨는 “특히 디스코타임 때 중년 승객의 참여율이 높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남녀 승객들이 나이도 잊은 채 신나게 디스코를 추며 흥겨워한다”고 전했다.

    7080세대가 복고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30대까지는 경제 활동과 자기 개발 등 현실 문제에 전력을 기울이느라 다른 데 눈 돌릴 여유가 없다. 그러나 40세가 넘으면 웬만큼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되는 반면 은퇴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추억에 젖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도 중년들은 복고에 빠져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집단적으로 복고 문화를 향유하는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황 교수는 그 이유를 한국인 특유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찾았다.

    40대 사춘기

    “선진국 사람들은 청소년 시기를 거치면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20세가 지나면 독립적으로 살아갑니다. 반면 한국인은 40대가 되어서야 자기 존재와 정체성을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30대까지는 주어진 일과 소속집단에 매몰돼 사느라 미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거지요. 그러다 40대가 된 어느 날 문득 지금 다니는 직장이 평생직장이 아니란 걸 절감하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한순간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때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20대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황 교수는 최근 중년 남성들이 아이돌에 열광하며 ‘삼촌팬’을 자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통해 본인이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시절을 느낌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그는 “자신이 20대 시절 즐겨 듣던 ‘흘러간 노래’를 들으며 청춘을 회상하는 것과 아이돌의 노래를 통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했다.

    LP 음악다방, 디스코 기차 여행 즐기며 ‘백 투 더 청춘’

    1970년대 서울 거리 풍경을 재현한 성북동 북정마을 축제 현장

    아날로그 문화에 향수를 느끼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 시대를 향유하고자 하는 7080세대가 많아지면서 이들을 겨냥해 ‘추억’을 테마로 각종 행사와 이벤트를 마련하는 지자체와 기관이 늘고 있다. 서울 성북구는 지난해 10월 국민대와 함께 ‘성곽마을의 행복한 별빛 멜로디’라는 제목을 단 축제를 기획했다. 1960~70년대 서울 풍경과 훈훈한 인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성북동 북정마을에서 그 시절 동네 풍경을 재현한 행사를 연 것. 참가자들이 오래된 이발소를 체험해볼 수 있게 하고 다방구와 자치기, 팽이치기 등 추억의 동네 놀이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선보였다. 거리에서 달고나와 쫀드기 등 군것질거리를 팔고, 그 시대 영화포스터로 내부를 장식한 추억의 음악다방에서는 날달걀을 띄운 쌍화차를 내놓았다.

    울산의 울주문예회관은 지난해 3월 ‘추억의 음악다방 전(展)’을 열어 대성공을 거뒀다. 오만석(47) 기획실장은 “우리 나이가 되면 술자리말고는 갈 곳도 놀 곳도 없어 참 불쌍하다”며 “문예회관 활성화 차원에서 일회성 행사를 준비하면서 내 또래를 위한 자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음악다방 전시를 기획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호응을 받았고, 덕분에 12월 앙코르전을 또 했다”고 말했다.

    행사기간 중 다방을 찾았던 김주일씨는 관람후기에 “옛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추억 속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무척 그립습니다”라는 관람후기를 남겼다. 이용구씨는 “마누라 성화에 못 이겨 비 맞아가며 경주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마누라가 이쁘네요”라는 소감을 밝혔다. 오 실장은 “연장영업을 해달라거나 다시 다방전을 열어달라는 요구가 너무 많아서 매년 고정 레퍼토리로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고향의 정겨움과 아날로그 추억을 찾아 전국의 5일장을 순례하는 중년층이 있는가 하면, 오래전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 손때 묻은 생활용품을 모아둔 박물관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전남 장흥읍 기양리 ‘정남진 토요시장’을 다녀온 한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에 “시장을 벗어나기 전 ‘추억의 예술품 전시관’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구슬과 딱지, 중학교 교복과 모자, 가방…. 우리 때는 쓰리세븐 가방이 최고였는데. 어릴 적엔 구슬과 딱지를 누가 많이 소유하느냐에 따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는데 그 많던 딱지는 어디로 갔는지…”라는 감상을 남겼다.

    대중문화 즐긴 첫 세대

    경남 진해 웅동 소사마을에 위치한 ‘김씨박물관’도 추억여행자들이 꾸준히 찾는 곳이다. 돌담길을 따라 ‘부산라듸오’‘예술사진관’‘김씨공작소’‘태양카라멜’이라는 허름한 간판을 올린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 풍경은 1970년대를 연상시킨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을 박물관으로 꾸며놓은 이곳에 가면 추억 어린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다.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William Sadler)는 저서 ‘핫 에이지(Hot Age), 마흔 이후 30년’(사이출판사)에서 “마흔 이후 30년은 젊음과 원숙함이 통합된,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추구하고 더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핫 에이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심야 시간대 TV 예능프로그램을 보면 ‘핫 에이지’의 파워가 실감난다. 조형기, 임예진, 선우용녀 등 중년 연예인들이 푸근한 입담을 자랑하는 MBC 예능 프로그램 ‘세바퀴’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고, 역시 MBC의 ‘유재석·김원희의 놀러와’가 설 특집으로 마련한 ‘세시봉 친구들’ 편은 중년층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1월 초 첫 방송을 시작한 토크쇼 ‘추억이 빛나는 밤에’는 제목부터 7080세대를 겨냥해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1970~80년대를 “대학생을 포함한 20대가 한국 대중문화의 핵심을 차지하던 시기”라고 평가한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청춘 시절 대중문화를 흠뻑 흡수했다. 그들이 청춘을 꿈꾸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만큼, 그 시대를 향유하는 추억산업 열풍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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